“……여양!”

기시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또 들린다.

“……여양! 여양아!”

이번에는 그립지도 반갑지도 않은, 그저 얼굴 앞을 맴도는 날파리처럼 귀찮고 성가신 소리였다.

“여양……!”
“아, 그만 좀 불러! 안 죽었으니깐!”

고개를 번쩍 들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자연히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쏠린다.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얼굴이 물파스를 바른 듯 화끈거려 다시 책상으로 떨구었다. 하지만 지란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안 그러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여양, 자니?”
“나 좀 내버려둘래?”
“그렇게는 못하지.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를 어떻게 가만히 놔둬.”

지란은 여전히 이빨을 드러내며 히히 웃고 있었다. 한 손에는 매점에서 산 과자봉지. 과연 점심시간의 번잡한 매점을 뚫는 솜씨만은 인정할 만 했다. 사실 영화궁은 현금거래를 안 하니까 계산이 무척 빨라 기다리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여양아, 나 소문 다 듣고 왔거든? 너랑 북도정이랑 또 충돌했다며?”

지란이 여왕님, 아니 이젠 여양으로 불리고 있는 여양의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점심시간의 짧은 잠조차 허락되지 않는단 말인가. 자고로 오후의 짧은 잠은 소화와 피로회복에 특효약이라 하지 않았는가.

“근데 또라니 무슨 또?”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불만을 제기하자 지란은 연극적인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뭘 그래. 벌써 소문 쫙 깔렸다니까! 입학하자마자 여왕 자리를 노리는 무서운 신입생 두 사람. 하나는 이 학교를 만드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한 태북그룹의 3세 북도정! 나머지 한 사람은 혜성처럼 날아와 나이프 사건을 해결하고 여왕이 되겠노라 출사표를 던진 풍운아, 그 이름도 여왕님! 아아, 두 사람의 장절한 싸움은 오늘도 복도에서 끊이지 않는구나!”
“지란아, 지랄 그만 하고 좀 가줄래? 싸운 게 아니라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을 뿐이고……”

이름으로 놀리는 게 싫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평소엔 부르지 않는 ‘지랄’이란 별명을 입에 담는 걸 보니 상당히 화가 났거나 수면 방해가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물론 후자의 이유가 컸지만 여양과는 달리 자신의 별명을 창피하거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지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다. 오히려 그만큼 친밀해졌다는 증거이므로 반가우면 반갑지 기분 상할 일은 없었다.

“너도 알지? 도정이 친위대 애들. 걔들이 벌써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어. 너는 이제 여양으로 유명해져서 다들 여양이라고 부르고 있어. 너 같은 애를 여왕님이라고 불러준다니 말도 안 된다 이거지.”

그건 이미 여양 자신도 알고 있었다. 오늘 오전 쉬는 시간, 음악 수업을 위해 이동을 하던 북도정과 화장실을 가던 여양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북도정의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 특히 같은 반이라서 시도 때도 없이 쫓아다니는 소위 친위대 애들이 어미를 따르는 오리 새끼들처럼 늘어서 있었다.

처음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귀찮게 시비를 걸거나 해서 서로 감정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약간 벽 쪽으로 돌리고 걸음을 빨리 해서 지나가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가만히 두지 않았다. 북도정은 걸음은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든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눈동자만 이동하여 그의 얼굴을 쏘아보고는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하신…… 이름이 뭐더라?”

다분히 깔보는, 사람 성질 긁는 말이었다. 어투부터 내용까지 전부. 당연히 두 다리가 그대로 멈췄고 상대의 얼굴을 시력검사표처럼 쏘아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도발이 먹혔다는 생각에 북도정은 더욱 강하게 선공을 퍼부었다.

“이름이 뭐지? 넌 아니? 너도 몰라? 그래, 맞아 성이 여 씨였지? 여 씨? 여가? 여 뭐시기?”

넌 아냐면서 뒤에 있는 애들 쪽으로 얼굴을 기울이며 물어보는 등 천연덕스러운 행동이 마치 예행연습이라도 한 듯 했다. 그도 아니면 연극 특기생으로 들어왔다든지. 그래놓고 자기들끼리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웃어대었다. 사람 하나 세워놓고 바보 만드는 꼴이 한심해보여서 한 마디 쏘아붙였다.

“너 보니까 무슨 그라디우스 같다.”
“응? 글래디에이터?”

북도정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재벌 3세 아가씨가 알 리가 없겠지만, 여양은 80년대 고전 오락을 좋아하는 오빠의 영향으로 옛날 게임을 비교적 많이 해본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뒤에 옵션들을 줄줄이 달고 날아가는 빅 바이퍼의 활약을 그린 슈팅 게임 그라디우스. 똘마니들을 이끌고 다니는 북도정의 모습에서 그걸 연상한 것이었다.

“모르면 다른 비유를 들어줄게, 도정아. 꼭 새끼 오리들이랑 마실 가는 엄마 오리 같다, 도정아?”
“오리? 도정이?”

도정의 표정이 금방 일그러졌다. 상대를 슬슬 약 올리는 것은 그렇게 즐기더니, 막상 자신이 그 대상이 되자 조금도 참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너 말이야, 이름만 믿고 언감생심 이 학교의 여왕 자리를 노리는 모양인데, 여왕이 아무나 되는 자리인 줄 알아? 택도 없는 소리지. 우리 언니들, 태북그룹의 후계자들도 얻지 못했던 자리라고. 그러니까 내가 꼭 되고 말 거야. 1학년 때 여왕에 즉위하여 3년간 이 학교를 지배하는 최초의 케이스가 될 거라고. 근데 너 같은 게……. 너 뮤지컬 특기생이라며?”

어느새 조사한 걸까. 아마도 새끼 오리들이 여기저기 묻고 다녔겠지. 오리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학생으로 와서 공짜로 들어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시지. 괜히 나 가는 길에 걸리적 거리게 만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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