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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여긴 너희들밖에 없는 거니? 아버지란 분은 어디에 계시고?"

아버지에 대한 말이 입밖에 나오자 불룩이는 화가 났다. 네가 아버지에 대해 뭘 안다고.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있을 때는 모든 게 좋았다. 짚으로 깐 아늑한 잠자리, 물을 모아놓은 샘, 그런데 지금은……. 심술이 나자 일부러 거친 목소리로 퉁명스레 답했다.

"아버진 죽었어! 아버지가 많이 아파서 누워 있었는데 어느날 그랬어. 이제 자긴 잠들면 다시는 안 일어난다고. 그게 죽는 거래. 정말 아버지는 안 일어났어. 몸에서 냄새가 나고 날벌레들이 달라붙을 때까지도 안 일어났단 말야!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미리 시킨 대로 땅에다 묻고 돌을 쌓아줬어. 저기 보이는 저거야."

그가 가리킨 손 끝에 작은 돌무덤이 있었다. 소녀는 물끄러미 돌무덤을 바라보더니 지팡이를 뽑아들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누가 시킨 것처럼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소녀는 말없이 작고 조악한 돌무덤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을 뿐. 불룩이와 아이들은 소녀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그저 무덤을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싫증을 잘 내는 어린아이들이 날벌레를 잡으려고 손을 휘젓거나 끼리끼리 장난질을 치고 있을 무렵 소녀가 입을 열었다.

"사오 년 정도 전에, 한 사내가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단다. 원래의 배의 일부분이었을 널판지 위에 매달려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절망의 항해를 이어가고 있었지."

소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는 큰 배의 선원이었다. 배가 예기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 풍랑 속에서 뒤집어지기 전까지 그의 인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간신히 널판지를 붙잡고 목숨을 건졌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망망대해에 자신 혼자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같은 난파선의 생존자를 만났다. 배가 가라앉을 때 아이들을 먼저 태워 피신시켰던 작은 쪽배였다.
그 배 안에는 어린아이들 십여 명과 성인으로는 여인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사내는 배에 올라 물과 음식을 얻어먹고 겨우 기운을 차렸으나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육지는 보일 기미가 없고 아이들은 너무 많은데 음식은 조금밖에 남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후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둘이서만 가자고. 육지에 오르면 결혼해서 함께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여인은 자신이 이미 결혼한 몸이며 이 아이들은 자기 자식이나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화가 단단히 난 사내는 다음날 먹을 것을 적게 준다며 다투다가 반은 실수로 또 반은 일부러 여인을 바다에 빠트린다. 허우적대는 여인을 뒤로 하고 힘껏 노를 젓던 그의 앞에 드디어 육지가 보였다. 이제 아이들도 다 내던지고 혼자서 물과 음식을 취하면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였다.
그런데 해류의 영향이었는지 배는 빠른 속도로 육지로 향했고 사내와 아이들은 드디어 뭍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고 가파른 바위산에 가로막힌 조그만 개펄에 불과했다. 물과 음식도 떨어진지 오래, 지금 다시 떠나도 언제 육지에 다다를 수 있을런지. 사내는 절망에 빠져 식음을 잊고 그저 슬피 울며 찾아올 죽음만 기다렸는데, 어느새 그를 믿고 따르던 아이들이 저마다 조개니 민달팽이니 하는 걸 잡아다 주면서 사내를 보살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는 깨달은 바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언젠가 육지로 돌아갈 때가지 이곳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렇게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아이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이곳에서 변함 없이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 긴 이야기가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걸 끝맺을 무렵에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지금 처음 만난 소녀가 어떻게 아버지와 자기들이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를 알았냐는 의문이었다. 쉭쉭이와 다른 아이들이 불룩이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주자 하는 수 없다는 듯 불룩이가 대표로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설마, 그거 우리 이야기? 우리가 여기로 와서 살게 된 이야기를 말하는 거야? 난 희미하게 기억이 나. 조그만 배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 그때 우릴 돌봐주던 사람이 있었어. 내 얼굴을 쓰다듬어주던 차갑고 보드라운 손이 기억 나."
"나도 기억 나! 날 안고 노래 불러줬어!"
"나도! 나도!"

조금 덩치가 큰 아이들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서로 지지 않으려고 소리쳤다. 아버지를 처음 만났고, 자기들을 돌봐준 그 누군가를 만났던 그 작은 배에서의 일들을.

"근데 말이야, 넌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불룩이의 질문은 아이들의 환호성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가까이에서 하늘우물이 그 하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기쁨의 환호성과 함께 우물 아래로 몰려들었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라도 더. 축복의 생명수를 입 안에 넣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크게 벌리고 혀를 쭉 내민다. 불룩이도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아 힘없는 애들을 밀치고 양손과 입으로 물을 받았다.

소녀도 천천히 따라갔으나 아이들의 아수라장 속에는 그가 있을 자리가 없었다. 아이들이 밀치고 당기고 하는 틈에 그만 축축한 개펄에 넘어졌다.

"물을 다오. 내게……"

소녀의 조그만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으나, 그 마음만은 하늘우물에 가닿으리라. 소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고, 하늘우물이 잿빛 하늘 속으로 얼굴을 감춘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해갈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비가 그치자 아이들은 투덜대며 흩어졌다. 불룩이는 소녀에게 싫증이 났는지 그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말했다.

"우린 밥 먹을 거야. 너도 우리랑 같이 먹고 싶으면 네가 아는 걸 가르쳐줘야 돼. 바깥 세상으로 가는 방법 말야. 아니면 너도 우리처럼 땅을 파서 지렁이를 잡든가."

아이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주저앉은 채로 반쯤 엎드렸다. 갈증과 피로로 이미 일어날 힘도 없어보였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뭉치며 자기들의 소굴인 고둥 모양 바위산 밑으로 모였다.

하아. 숨을 내쉬자 연한 입김이 피어났다. 어느새 주위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공기도 땅도 차갑고 눅눅했다. 소녀는 돌무덤을 돌아보며 그곳에 누운 이가 자신에게 전해준 삶의 기억과 그 절망과 슬픔, 그리고 아이들에게 남긴 희망의 편린을 되새겼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과 인생을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영원히 이어지려는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자식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서만이 태어나고 존재하는 건 아닐 텐데.
소녀는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을 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했다. 잿빛 하늘과 땅, 검푸른 바다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채 영원히 세상과 유리된 이 작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아갈 아이들의.

"저기, 저기요. 마법사님?"

소녀는 떨리면서도 똘망똘망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깨닫고 무덤쪽을 향했던 얼굴을 제자리로 돌렸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바위산 위에서 보았던, 등에 커다란 혹을 짊어진 아이였다.

"마법사님이시죠?"

다짐을 구하려는 듯 아이는 재차 물었다. 힘들게 달려왔는지 연신을 숨을 헐떡인다. 소녀의 시선이 아이를 처음 보았던 바위산 꼭대기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분명 꼽추 아이가 내려오기에는 힘들었으리라.

"혼자 힘으로 내려왔나보구나."
"흙이 무너진 쪽으로 내려와서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어요. 벽이 울퉁불퉁해서 미끄럽지도 않고 붙잡을 곳도 있었거든요. 저 네 발로 바위산 오르내리는 건 자신있어요."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발이라. 비유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 소녀의 마음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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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흙과 돌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경사진 벽이 있었다. 쪼삐는 사람 혹은 어떤 존재가 만든 인공적인 건축물이었고, 그 위로 진흙이 덮혀 있어 바위산처럼 보였을 뿐이란 사실을, 아이는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어떤 집도 건물도 본 적이 없었기에, 저 아이들 외의 사람 역시 만난 적이 없었기에. 유일한 어른이었던 아버지도 이제는 없고, 눈앞의 신비와 경이를 누가 가르쳐줄런지. 이 알 수 없는 노란 외벽을 바라보며 아이는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의 싹이 벌써 커다란 싹을 틔워 두려움을 슬그머니 가려주었다.

짙은 황색의 벽돌로 이루어진 경사진 벽 한 가운데에는 문이 있었다. 모래가 잔뜩 뒤덮여 자세한 모양은 알 수 없었지만 쇠창살이 둘러친 창문임에는 틀림없다. 문에서 계속 먼지구름과 흙더미가 성마른 기침처럼 쏟아져 나왔다.
몇 번의 흔들림이 경련처럼 이어지고 철제 문틀이 흙더미와 함께 앞으로 튀어나왔다. 서서히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모래 먼지 이외에는 움직이는 존재는 이제 없었다. 찰나의 생명을 얻은 듯 흙을 토해내던 쪼삐는 다시 바위산이었던 본래의 임무로 되돌아간 듯 긴 침묵에 빠졌다.

혼비백산이 되었던 아이가 정신을 차린 것도 그 때쯤이었다. 정말로 쪼삐가 살아서 움직이기라도 할 것만 같았는데, 껍질 일부가 벗겨지며 보여준 속살과 떨어져 나온 창문틀이 짧은 활동이 남긴 흔적이었을까. 한결 가라앉은 고소공포를 달래며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펴보았다.
이제 문틀이 빠져 나간 창문은 반원형의 구멍이 되어 있었다. 조금 지나자 연기 같은 흙먼지가 몽실몽실 새어 나왔고, 움직이는 물체가 구멍을 통해 밖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기 키보다 큰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문에서 몸을 빼내었다. 문과 땅까지의 거리는 그의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으나 벽돌도 된 외벽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기에 미끄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어지럽게 널린 흙과 돌멩이, 바위와 자갈 때문에 그의 걸음은 느릿하고 조심스러웠다.

아이는 꼭대기에서 그가 흙더미를 건너 평평하고 무른 마른 개펄로 무사히 몸을 옮길 때까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늘 보아오던 아이들 외의 다른 사람을 보는 게 처음이었기에 그 모습, 동작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다. 사실 길고 거친 천으로 온몸을 가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는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한 후에야 큰 짐을 내려놓은 듯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팡이를 무른 땅 위에 꽂아놓고, 그 옆에 앉아서 양 손을 땅에 대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둘이 서로를 마주보게 된 건 그 순간이었다. 아이는 멀리서나마 두건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조그만 얼굴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다. 얼굴 주위에 일렁이는 머리카락의 물결을 보았다. 그건 아이에게 있어 낯설고 신비로우면서도 어딘지 익숙한 아름다움이었다.
짙은 회색의 땅 위에 미친 동그랗고 하얀 얼굴은 바로 하늘우물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으니. 아이는 설명하기 힘든 자신의 마음이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임을 알게 될 날이 오리라.

그 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이를 향했다. 거리 때문에 서로 또렷하게 볼 수는 없었으나 아이는 상대의 호기심을, 그는 아이의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을 터. 수런거리는 소리와 거친 발걸음만 아니었으면 둘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만 같은 정경이었지만, 정지된 것처럼 보였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씩 섞여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양손에 돌을 쥔 아이도 있었고, 겁먹은 아이는 덩치 큰 아이의 뒤에 바짝 붙어서 조금씩 따라오고 있었다. 대장의 체면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야말로 위엄과 권위를 보여줘야 겠다는 호승심도 생겨서, 불룩이는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세게 울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고 난 후에야 불룩이는 상대가 자신들과 비슷한 덩치의 작은 소녀임을 알았다. 커다란 두건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자기들보다 큰 줄로만 여겼던 탓이다.
소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건이 머리보다 위로 비쭉 솟아 있었을 뿐 키 역시 자신의 어깨 정도밖에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굴은 새하얗고, 두건 사이로 흘러나온 가늘고 긴 연녹색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을 타고 쉴새없이 일렁였다.

아이들은 모두 여기서 태어나 아버지의 손에 의해 자란 지라 처음 만나는 낯선 인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불룩이는 자기보다 키가 작은 아이란 걸 확인하고는 괜히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뒤에는 충실한 심복 배툭이도 있지 않은가. 혹시 싸움이라도 나면 혼자서 열 명도 넘는 자기들을 이길 리가 없다.
그렇게 마음 먹으며 용기를 냈지만 역시 처음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넌 누구냐 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디서 왔는지 부터 물어야 할까. 그것보다 저 바위산 속에서 어떻게 나온 건지, 바위산 안에 어떻게 저런 집과 창문이 있었는지 그것부터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일단 입을 열어보았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아…… 너는……"
"목이 마르구나. 마실 것을 주지 않겠니?"

소녀의 말이 더듬거리는 불룩이의 말보다 먼저였다. 낮고 단조롭지만 시냇물이 흐르듯 잔잔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 뭐? 물? 없어. 우린 하늘우물에서 줄 때만 물을 먹걸랑."

불룩이는 상대방이 갈증과 피로로 지쳐 있음을 알고는 한층 자신감을 얻어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우리가 잡은 벌레랑 짐승들이 있지. 근데 그냥은 못주겠고, 그보다 넌 뭐야? 산을 뚫고 나온 거야? 저 바위산 속에는 뭐가 있는데?"

불룩이가 쌓였던 의문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붓자 역시 호기심이 부풀어 오를대로 오른 아이들이 순식간에 달려와 불룩이와 소녀를 둘러싸려는 듯이 모였다. 침착한 눈동자로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던 소녀는 마침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지치고 목이 말라 이야기를 할 기운이 없단다."

소녀의 말에 아이들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소녀가 가볍게 손짓을 했으나 물러나는 아이는 없었다. 불룩이도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아이들의 반응에 힘을 얻고 다시 다그치기 시작했다.

"너 혹시, 저 바깥 세상에서 온 거야?"

아이들은 불룩이의 한 마디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절뚝이가, 코줄줄이가, 쉭쉭이가, 헬쑥이가, 또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소리를 쳤다.

"바깥 세상? 바다 건너 산 너머 바깥 세상 말이야?"
"아버지가 말한 겁나게 큰 나라?"
"나무도 있고 집도 있고 사람이 엄청 많다는 곳에서 왔다고?"
"대장, 그럼 우리도 거기에 갈 수 있는 거야?"
"우와! 우리도 바깥 세상으로 갈 수 있대!"
"바깥 세상! 바깥 세상!"

어느새 아이들은 바깥 세상을 연호하듯 외치고 있었다. 불룩이가 조용하라며 몇 번이나 소리를 친 뒤에야 소란이 가라앉을 정도로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조용히 안 하면 저 꼽등이랑 같이 굴러 떨어지도록 만든다?"

불룩이가 주먹을 들어보이며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아이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불룩이는 물론이고 아이들은 방금 전까지도 바위산 꼭대기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사실 본인도 자신에 대해 신경쓰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이곳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 이 상태 그대로 조용히 있어. 내가 대표로 물어볼 테니까. 어이, 너. 이제 말해봐. 너 정말 바깥 세상에서 온 거 맞아?"

그 목소리에는 궁금해서 물어본다기보다 동의를 구하는, 확신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소녀는 가만히 불룩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짙고 검은 아이들의 것만 보며 살아오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게 되니 본능적인 외경과 공포가 솟아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아무 말 없는 조그만 덩치의 소녀에게 압도되는 자신을 느끼며, 불룩이는 주위 아이들이 없었다면 진작 도망치고 말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은 이 작은 높드리에서 나고 자랐구나. 그래서 세상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고 있는 게야."
"빨리 묻는 말에나 대답해! 바깥 세상, 바깥 세상에서 온 거 맞지?"
"바깥 세상! 바깥 세상!"

아이들이 또 흥에 겨워서 대장의 경고도 무시하고 바깥 세상을 외쳐대었다. 소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곤 말했다.

"하늘우물…… 여긴 하늘우물 외엔 물을 얻을 곳이 없나보구나."
"아니면 넌 저 땅 밑에서 온 거야? 아버지가 그러는데 땅 밑에는 무서운 괴물들이 살고 있어서 실수로 떨어진 사람을 잡아먹고 산대."

다분히 두려움이 녹아든 목소리였다. 아이들은 외침을 뚝 그치고 불룩이와 소녀의 눈치만 살폈다. 소녀가 흩어놓을 때까지 잠시 동안은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의 공기에 모두들 휩싸인 채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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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야, 꼽등이 너! 누가 자랬어!"

불룩이의 성난 목소리가 꼽등이의 정신을 돌려놓았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듯 인상을 쓰며 아이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허둥지둥 땅을 파헤쳤다. 하지만 불룩이는 그런 우수룩한 행동만으로 넘어갈 아이가 아니었다.

"얼마나 잡아놓고 조는 거야, 응?"
"아, 아니. 안 졸았어. 그냥 잠깐 생각하느라……."

불룩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의 주위를 훑어봤다. 애초에 보나마나지만, 늘 굼뜨고 둔한 꼽등이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꼽등이가 건진 건 하나도 없었고, 발치에는 돌로 그린 둥글둥글한 무늬 뿐. 구름이라도 그리려던 것일까? 심술이 난 불룩이는 발로 돌을 하나 걷어찼다. 깜짝 놀란 아이가 고개를 들자 그 겁먹은 동그란 눈망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같이 열심히 저녁거리를 찾느라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구석에서 낙서하고 졸고 있고 말야. 도저히 안 되겠어. 너에게 벌을 줘야겠어."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꼽등이는 얼른 빌기 시작했다. 제발 밥을 굶으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그것만은 참기가 힘들었다. 결정권을 쥔 불룩이의 미소는 먹잇감을 잡은 포식자의 것이었다. 뒤에서 절뚝이가 소리쳤다.

"대장, 저 쪼삣 위에서 굴리자. 몸이 둥그러니까 잘 굴러갈 거야."

불룩이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끝이 유난히 뾰족하고 경사가 급해서 쪼삣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그쪽에 있었다. 종종 먹을 것을 빼돌려 혼자 먹거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벌줄 때 저 쪼삣 꼭대기에 올려놓고 내려오게 시키곤 했다. 아무리 애를 써서 조심스레 내려오다가도 한 순간 발이 미끄러지면 가파른 경사를 굴러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

흐흐, 불룩이가 다시 꼽등이를 쳐다볼 때는 얼굴이 이미 기대감과 장난기로 가득 부풀어 있었다. 아이는 두려움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을 치고 있었으나, 어느새 불룩이의 심복처럼 움직이는 배툭이와 절뚝이가 아이의 양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불룩이의 손가락이 아이의 얼굴을 향했다가 쪼비의 꼭대기로 움직였으니, 형벌의 선포는 그토록 간단했다. 울고불며 잘못을 비는 아이의 외침은 들어주는 이 없는 진흙 위로 흩어지고.

덩치 큰 두 아이에게 팔을 잡혀서 아이는 억지로 쪼삣의 꼭대기까지 끌려 올라갔다. 불룩이는 아이들과 함께 아래에 모여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등의 혹 때문에 웅크리고 앉으면 정말 동그랗게 보이는 아이였기에, 공처럼 잘 굴러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배툭이와 절뚝이가 길쭉한 나뭇가지로 바닥을 찍으며 무사히 아래로 내려오자 불룩이는 꼭대기에서 반쯤 엎드린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아이에게 외쳤다.

"자, 꼽등아! 거기서 몸을 공처럼 말아서 굴러 내려와. 그러면 오늘 잘못을 용서해주고 저녁도 나눠줄게. 안 그러면 넌 오늘 밤새 거기서 밥도 못 먹고 그러고 있어야 될 거야."

아이는 입 안 가득히 머금은 듯 울음을 세차게 토해내었다. 저 모습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효과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는 누구도 불룩이 자신에게 반항하거나 덤벼들 생각을 못할 거라는.

꼽등이는 목이 메일 때가지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이런 일은 없었다. 아이들끼리 다툼이 나면 늘 아버지가 잘잘못을 가려주었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내었다. 불만을 가지는 아이는 없었고 잘못한 아이도 아버지의 엄한 꾸중을 들은 후에는 다함께 밥을 먹으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곤 했다.

아버지. 속으로 외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목이 막혀서 목소리는 나오지도 않았고 들어줄 사람도 더는 없다. 아버지는 죽었어. 죽는 게 뭐야? 영원히 답을 들을 수 없을 허무한 자문. 죽으면 어떻게 돼? 아버지는 흙 속에 있다. 흙을 파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몸을 누이고 조그만 돌을 가득 모아 그 위에 쌓았다. 그건 아버지 본인의 부탁으로 한 일이었다. 이제 난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거야. 그게 죽음이지. 아버지는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일어나지 않는 아버지를 몇 번이나 부르며 몸을 흔들었는지 모른다. 몸에서 역한 냄새가 나고 벌레들이 날아와 달라붙을 무렵 아이들은 깨달았다. 아버지는 죽었어. 몸은 썩고 고약한 냄새를 풍겨. 먹고 버린 벌레와 짐승의 찌꺼기처럼. 죽음이란 그렇게 더럽고 역겨운 거야.

쪼삐의 꼭대기에서 본 아이들은 손가락보다 작았다. 그렁그렁한 눈가의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나니 주위 풍경이 또렷하게 보였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탄식이 새어나온다. 위에서 올려다본 풍경은 이토록 새롭구나, 라고.
늘 보던 거무튀튀하고 단조롭던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크고 작은 뾰족하고 둥그런 바위들이 주위에 불쑥불쑥 솟아 있고, 그 사이로 희미한 물결 같은 무늬를 그리며 마른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를 묻은 돌무덤도 희미하게 보이고, 짚과 마른 풀을 모아서 만든 잠자리도 보이고, 저 멀리 낭떠러지 너머엔 검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것마저도.

하지만 아이들의 거친 목소리가 아이의 정신을 빼앗아 현실로 돌려놓는다. 빨리 내려오라고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죽을지도 몰랐다. 다른 아이들도 아이의 등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엄명 때문이었다.
등을 바위에 살짝 부딪히거나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아이는 하루 온종일 고통을 삼키며 드러누워야 할 정도였고, 이를 안 아버지는 좀처럼 힘든 일도 시키지 않는 등 각별히 신경써주었다. 그때만 해도 참 좋았는데, 지금 아이들은 다소곳한 그때의 아이들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사육사가 없는 아이들은 야생동물처럼 사납고 잔인했다.

누군가 던진 돌이 아이의 근처에까지 날아왔다. 몸서리를 치는 아이의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저마다 손에 작은 돌멩이를 쥐고 힘껏 던졌다. 몇 개가 아이의 귀에, 발목에, 엉덩이에 맞았다. 몸에서 가장 큰 부분인 등의 혹에 맞자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의 킥킥대는 소리가 귓전에 벌레소리처럼 맴돌았다.

아이가 마침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돌팔매질이 뚝 그쳤다. 얼이 빠진 듯한 아이의 얼굴에서는 표정변화가 사라졌다. 아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그 결과를 깨달았던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처럼. 자신의 몸도 곧 썩고 냄새가 나면 아이들이 땅 속에 묻고 돌무덤을 쌓아주겠지. 하지만 그게 다일까? 아이는 두려운 와중에서도 궁금했다. 그저 계속 잠을 자는 것일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더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아이는 절을 하듯 몸을 수그린다. 이제 혹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것이고, 가파른 비탈을 따라 굴러가게 되겠지. 나는 십중팔구 죽을 거야. 아이는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인지 혹의 무게 때문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어어어.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아아아! 그 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비명 비슷하게 바뀌었다. 비틀거리다 그만 주저앉아 고개를 드니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정신이 없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알지 못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된 후에야 자신의 몸이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누군가가 사정없이 흔들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몸에는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니 마치 쪼삐 전체가 몸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뾰족한 바위 덩어리가, 생명도 없는 돌덩이 주제에 긴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려는 짐승처럼 그렇게.

떨림이 가라앉을 무렵 쪼삐의 사분의 일 정도 되는 면적의 옆면에서 모래 먼지가 피어오르며 자갈과 흙이 쏟아져 내려왔다. 아이는 그제야 쪼삐와 양파와 다른 모든 바위 덩어리들의 참모습을 알았다. 그들은 그저 특이하게 생긴 바위산이 아니었음을. 긴 세월에 걸쳐 진흙과 돌에 뒤덮힌 채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었을 뿐임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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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으로 발매된 소설 《코뉴코피아~The Dream of Cornucopia~》의 일부를 맛보기로 연재합니다.


제1장 하늘만큼 그리운 꿈이 있다


검은 하늘에 조그만 구멍이 열렸다.

하늘우물로부터 새어나온 볕뉘가 검은 하늘과 뻑뻑한 공기 사이를 가로지르며 가느다란 빛줄기를 대지에 늘어뜨리자, 아이들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빛을 좇아 달려왔다.
그 소리는 틀림없이 기쁨에 찬 웃음과 환호성이고, 알아듣기 힘들어도 모양새는 틀림없이 인간의 말소리다. 아이들은 두 발로, 네 발로 뛰고 구르며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자기들만의 잔치판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방울이 하나 둘, 한 줄기 두 줄기, 조그맣게 방울져서 흩날렸다. 아이들은 애가 타서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혀를 길게 내밀어본다. 비를 내리는 요정이 있다면, 그는 필시 짓궂은 심술쟁이거나 인색한 욕심쟁이일지도.
그래도 아이들은 투정은 하되 불평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 말씀대로 그 모든 건 하느님의 은총일 테니까. 목을 축일 생명수를 내려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애타게 쳐다보아도 물방울은 아쉬움만 남기고 이내 그치고 만다. 지우개로 지운 듯 하늘우물은 그 모습을 감추고 하늘은 다시 잿빛 장막에 둘러싸였다. 아이들의 세상은 도로 색이 없는 모노크롬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보다. 체념한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느님이든 요정이든 그 누구든 하늘우물에 사는 이는 변덕쟁이임에 틀림없었다. 어느날인가는 빛은 내리지 않고 대신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린 적도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잔칫날의 시작이었다. 지저분하고 헤진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물을 맞으며 마음껏 마시고 몸을 씻을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도 말하지 않았던가, 하늘우물에서 내리는 빛과 물은 우리를 위한 하늘의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다른 아이들이 물러간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움푹 파인 땅 위에 고인 물을 손으로 조심스레 떠올려 입술로 빨아들이기를 몇 번. 아이는 혼자 남은 채로 느리지만 신중한 몸짓으로 그러고 있었다. 손바닥이 진흙 투성이가 되자 옷에 슥슥 닦고서 아이는 쭈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우물이 있던 자리를 찾아봤다.
분명 저기 어디, 저쪽 어딘가일 텐데. 방금 전까지 환하게 웃던 하늘의 얼굴이 지금은 흔적도 없다. 잠깐 그러고 있었는데도 목이 뻐근하고 뒤로 넘어질 듯 몸이 쏠렸다. 필경 아이의 등에 있는 큰 혹이 아이의 몸을 사정없이 땅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듯 잡아당기고 있을 터.

등이 무거운 이 아이는 일어서선 하늘을 볼 수 없기에, 네발 짐승처럼 엉덩이를 땅에 붙여야 고개를 위로 들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이리저리 꽃잎처럼 흩날리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는 건 온몸이 멀쩡한 다른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미처 놓치고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 아이의 몫이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옅은 먹빛의 땅을 훑어보며 물의 흔적을 찾았다. 아이들이 모여 사는 높드리 전체는 말라서 굳은 개펄, 부드러운 진흙으로 뒤덮인 무채색의 세계였다. 절반쯤은 깎아지른 벼랑에 둘러싸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칠고 황량하며 하늘 너머로 희미해져 그 끝도 보이지 않는 높은 바위산에 가로막힌 땅과 바다의 틈새. 그곳엔 하늘도 땅도 주위의 풍경도 잿빛 가득한 고요와 침묵의 장막에 둘러싸여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한 무색무취의 정경만이 있을 뿐.

하지만 거기엔 하나가 더 있었다. 커다란 양파, 소라고둥, 피라밋, 그리고 뿔이 있었다. 땅은 완만하고 평탄했으나 주위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은 돌기들이 솟아올라 짙은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열 여남은 정도 되는 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손을 맞잡고 늘어서도 반도 감싸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바위, 혹은 작은 산이 수없이 흩어져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각뿔, 원뿔, 양파, 고둥 모양. 크기와 모양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땅에 난 뿔들은 아이들의 척박한 환경을 상징하는 듯 무섭고 성질 고약해 보였다.

간신히 갈증을 달랜 아이는 무거운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등에 난 혹은 조그맣고 가느다란 아이에겐 너무 크고 가혹한 징벌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양파' 아래에 모여 있었다.

"꼽등이, 빨리 이리 와."

대장격인 불룩이가 아이를 부르며 손짓을 했다. 등이 곱아서 꼽등이, 배가 불룩 나와서 불룩이.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자기들끼리 생긴 걸 보고 지어 불렀다.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마저도 까먹고, 이내 부르기 쉽고 떠올리기 쉬운 자기들끼리의 호칭에 익숙해졌다. 주위의 사물도 마찬가지 이유로, 양파 처럼 생긴 바위는 양파가 되었고, 폴짝폴짝 뛰어 다니는 벌레는 폴짝이가 되었다. 맨 처음 발견하고 먹은 아이가 '푸앗!'이라고 소리치며 뱉어 내었다는 이유로 푸앗이 된 과일, 긴 콧물을 늘 흘리고 다닌다고 코줄줄이, 배꼽이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배툭이, 앞니가 부러져서 웃을 때면 바람 새는 소리를 낸다고 쉭쉭이…… 모든 이름은 아이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생겨나고 불렸다. 아버지마저 없이 아이들만 남은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게 그랬다.

"너도 이리 와서 땅을 파. 벌써 쉭쉭이가 지렁이랑 물렁이를 몇 개 잡았어. 여기 놈들이 모여 사는 소굴이 있나봐."

몇몇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양파의 그림자 아래 거무칙칙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겉의 말라굳은 흙을 조금만 걷어내면 이내 거칠고 축축한 진흙이 살결을 드러내었다. 아이들은 조금씩 쌓이는 경험을 통해 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 아래의 흙이 부드럽고 물기가 많다는 걸, 그런 흙 속에 벌레나 먹을 만한 생물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걸 알았다.
아이도 그들 가까이로 와서 양파의 거대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서 땅을 손가락으로 긁어내고 돌을 주워 할퀴었다. 등에 혹을 기대니 한결 편하고 가벼운 느낌이 들어 좋았다. 왜 진작 이러지 않았을까? 몸이 굼뜨고 느려서 늘 구석자리를 차지하던 아이는 우연히 벽의 울붕불퉁한 표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움푹 들어간 곳에 등의 혹을 갖다놓고 앉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후로 아이는 근처에 벽이나 조그만 바위가 있으면 그쪽에 붙어 앉곤 했다.

"게으름피지 마, 꼽등이. 너도 저만큼 잡지 못하면 오늘 저녁은 굶을 줄 알아."

대장격인 불룩이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가리키는 쪽에는 쉭쉭이와 절뚝이가 잡아놓은 작은 생물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게, 지렁이, 민달팽이…… 아이들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아궁이에서 저것들을 구워먹고 살았다. 불룩이 자신은 아버지처럼 다른 아이들을 닦달하면서 불룩 나온 배를 흔들면서 어슬렁거렸다. 꾀 많은 아이들은 갖가지 모양의 돌을 모아서 그걸로 땅을 파고 파헤쳤다.

아이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마도 뺨도 온통 검댕을 뭍힌 듯 진흙 투성이. 팔다리가 저리고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다. 아이는 흐릿한 시선을 들어 하늘로 향한다. 하늘우물은 언제 또 나타날까. 요 며칠은 비가 너무 뜸해서 목마름을 참기가 힘들었다. 많을 때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타나 물을 뿌려주던 하늘우물.
그럴 때면 작은 웅덩이가 생겨나기도 했고, 아이들은 아예 그 근처에 죽치고 앉아서 우물이 열리길 기다리곤 했다. 누구도 정확하게 가리킬 순 없었지만, 하늘우물은 아무데나 생기는 게 아니라 몇 군데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고둥과 양파가 아이들의 잠자리였다. 아버지는 그런 곳에 마른 풀을 모아 잠자리를 만들고 바위의 겉에 덮인 흙을 파내어 아궁이를 만들어주었다.

잿빛 하늘에 금이 간 듯한 무늬가 떠오른다. 그 무늬는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움직이며 모양을 바꾸었다. 아버지가 구름이라 부른 커다란 덩어리가 바다 저편의 하얀 수평선을 향했다.
아이의 시선이 구름을 따라갔다. 저 구름은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이 있다고 아버지는 얘기했다. 저 하늘지붕에 닿을 정도로?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은 왜 높이 떠 있나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너희가 더 크면.
단지 그런 얼버무림 뿐. 구름은 언젠가 비가 된단다. 조그맣게 덧붙인 한 마디. 하지만 비는 하늘우물에서 나오는 건데?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아버지는 웃음으로 넘기려 한다. 저 구름은 너무 작잖니. 그리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왜 이쪽으로 오지 않을까요? 이쪽으로 와서 비가 되면 좋을 텐데. 아버지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름은 그 사이에 더 멀리, 아이들의 땅에게서 더 먼 곳으로 떠나간다.

나도 데려가면 좋으련만. 아이는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이 야속했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실어다주었으면. 저쪽은 하늘이 하얗고 바다는 푸르게 보였다. 구름도 하얗고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에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게 가득 있을 것만 같은데. 아이의 마음은 구름을 따라 하늘지붕에 닿으려는 듯 두둥실 떠올랐다.

저 높디 높은 구름 위에서 본다면 그림자 아래 웅크리고 앉은 아이들은 모두 뻘밭 위에 놓인 돌멩이처럼 보이겠지. 땅이고 바위고 모두 하나가 되어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게 될 거야. 그저 검은 땅과 잿빛 바다만이 보이겠지. 이토록 작은 땅덩어리 위에, 벌레를 캐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문득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힘 없이 드넓은 하늘지붕 위를 마음껏 달려봤으면. 하지만 아이의 몸은 너무 무겁고 등에 얹혀진 혹의 무게는 감당하기에 벅차다. 잠깐이나마 꿈결처럼 떠올랐던 마음이 억센 손에 이끌려 내려오듯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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