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의 힘 앞에서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면서,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불가항력, 그러니까 예를 들어 홍수나 지진, 토네이도 등의 자연재해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함께 그럼에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대 역경을 그린 인간사를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악한 나의 상상력의 한계를 여실히 들어 내는 위의 내용들을 기반으로 하여 첫 장을 펼치기 시작한 책의 내용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한 남자가 살아오는 동안의 지내왔던 사랑에 대해서, 한때는 현재였고 지금은 과거이자 이제는 혼자만이 모든 것을 견뎌야만 했던 그 아련한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소설로서 특히나 마지막에 다다르면 다다를수록 아련한 마음과 함께 그의 애달픔을 넘어 고통에 차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이 가슴 속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인 토마스가 서술하고 있는 그의 인생 속의 여인들, “들”이라는 복수형을 쓰기는 했으나 그가 말하고 있는 여자는 단 두명인 잉테네와 얀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마자 등장하는 ‘피에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토마스의 이야기가 넘어가는 그 경계에서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을 뒤척였는지 모르겠다. 물론 어떠한 선이 딱 그어져 있어 지금부터는 나의 이야기이다, 라는 식의 경계는 아니었지만 이 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초반에는 나름 고심을 하고 있었는데 피에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 관한 이야기는 토마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시킨, 책 안에서 또 다른 책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액자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은 자연을 거스르는 괴기스럽고 곡해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거울 속, 시대를 벗어난 이미지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두 사람은 영원히 서로에게 속하고 싶어했다. –본문
신학자이자 철학 작가인 피에르 아벨라르가 풀베르의 조카이자 20살 이상 연하였던 엘로이즈의 선생으로서 그녀를 가르치게 되었고 이른바 ‘중세의 최대 스캔들’이라는 이들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가 없었던 나로서는 토마스의 왜 이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 속에 함께 품어 이야기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했으며 그가 이들의 애틋했던 사랑에 대해 어떠한 심정으로 바라보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제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그 둘에게는 사랑이었지만 그 둘을 뺀 세상의 모든 이들은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던 이들의 인연은 거세 당한 아벨라르가 그 이후 잠식하며 은둔 생활을 지냈던 것처럼 토마스 역시 그러한 길을 가게 되고 말았으니 그는 이들의 사랑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것이라 느껴졌을 것이다.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당시 엘리를 제외한 다른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걸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녀가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훗날, 정작 나와 결혼한 여자를 앙테네였다. 그날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나는 앙테네와 결혼했다. –본문
이미 10대의 토마스는 자신의 삶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한 가정의 주인이 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며 노동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당시 엘리의 남자친구로서 파티장에 있었던 그는 미래의 부인이 될 앙테네가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발전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나 그들은 지금 한 이불을 덮고 함께 하고 있으며 아말리에의 부모가 되어 있었다.
우리 집 안팎은 이런저런 이유로 무너져 버렸다.
어쩌면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내부의 갈등보다 훨씬 감당하기 쉬울지도 몰랐다.
우리는 매일 저녁, 대문과 현관문, 유리창과 덧창을 꼭 걸어 잠갔다. 그리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때가 되었다는 듯 서로를 공격하곤 했다.
우리는 집과 가족, 가정과 결혼 생활을 모두 한꺼번에 파괴시켜 버렸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가져다주는 원천이기도 했다. –본문
하지만 그들의 삶을 우리가 흔히 꿈꾸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과는 달랐다. 배우를 꿈꾸던 앙테네가 책에 점점 심취해 질수록 그녀는 이전의 모습과는 달라졌으며 앙테네가 꿈꾸는 자연스러운 삶을 쫓아갈수록 그녀는 이 세상과의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딸과 지내야 하는 시간만이 점점 늘어갔으며 그렇게 세상을 떠난 앙테네에 대해서 그는 엄청난 아픔보다는 자연스럽게 다시 그의 삶을 살고 있었다. 세상이 전쟁으로 생과 사의 사이에서 가파른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들은 서로를 향한 칼을 겨누고 있었으니, 그들 관계의 종식은 토마스의 말마따나 교통사고를 당했어도 다시금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다시 내일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앙테네가 사라진 자리에 자연스레 얀네가 드리우게 된다. 앙테네가 책을 접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와 토마스와의 관계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얀네와 토마스 사이에서는 책이라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매개체가 된다. 함께 글을 쓰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던 이들에게 있어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샤워를 즐기고 있던 얀네에 대한 토마스의 불만, 아니 그 시간마저도 그리움을 참을 수 없었던 조바심이었는지 모른다. 아니, 더 근본적인 것은 그들의 나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연인이라 칭하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들을 부녀관계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피에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처럼. 그렇기에 토마스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듯이 그들의 관계 역시 이전의 순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고 그렇게 홀로 남겨진 그가 지하에 들어가 써내려 간 일기를 보노라면 울컥한 마음이 절로 들게 된다.
안 보이는 사이에 슬픈 수염을 길렀군요. 설마 수염을 기르고 노숙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건 아니겠지요? 계산대 앞에서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슬픈 수염. 그의 표현은 정확했다. 오, 에이나르, 실연의 아픔을 맛보고 있는 중이에요. 최악은 상황은 그 아픔이 가신 뒤에 온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게 정말이예요?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이예요? 거짓말이죠? –본문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이 모든 것들을 다분히 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토마스를 보면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나이가 든다고 해도 심장에 굳은 살이 박히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자연을 거슬러 그는 자신만을 지키고자 했지만 그 무엇도 인위적으로 되지 않던 그의 삶을 보면서 왜 나는 이토록 공감이 되는 것일까. 벌써부터 그의 이야기가 끄덕여지는 나 역시도 그와 같이 아픈 시간들을 견뎌왔었다는 것을, 그를 보면서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