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아도 어른일 수 밖에 없는 나이에 입성한 이후에는 어릴 때 아무런 생각 없이 보았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마치 철 없는 어른들이 하는 ‘주책’ 인냥 비쳐질까 쉬이 보지 못했던 것들 것 사실이다. 겨울왕국의 신드롬이 퍼져 나갈 때에도 아이들보다도 어른들이 먼저 찾아본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안심을 하며 영화관에 입성을 했으니, 그 누가 뭐라 하지는 않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가까이 하면 안될 것만 같은 영역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때론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그게 그저 어른들의 삶이려니 하고 보내고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벌써 네 번째 만나는 정지우 작가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을 통해서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는데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삶으로부터의 혁명은 이 책을 오롯이 이해하기 위한 전초전과 같은 것이었고 이 안에 소개되어 있는 애니메이션들을 거의 보지는 못했지만 과연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찾아본다고 한들 그와 같은 생각들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막연한 질문들을 안고서 쉼 없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위 ‘진보’에 대한 공격은 이렇게 시작된다. 인류는 스스로의 폭주하는 기술적 힘을 제어할 정도의 ‘정신적 능력’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아지는 것들이 있지만(가령, 동물 보호, 환경 보존, 인종과 남녀 차별의 해소 등), 그보다 더 빠르게 많은 것들이 나빠지며 때로는 더 악화된다. 여전히 학살과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더 심해 보이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본문
그는 가장 먼저 이 책 안에서 근대와 현대에 대한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신의 보살핌 속에서 살던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신의 그들이 아닌 인간 스스로를 믿게 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전에는 없던 과학의 발전은 물론 사회 사상들은 인류로 하여금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발전을 가져다 주는데 이렇듯 엄청난 발전 속에 인간은 자신들이 이룬 탑을 한 번에 무너뜨리고 있었으니 바로 시계 대전의 발발이었다. 그러니까 발전을 꿈꾸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도시들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 제 손으로 그 모든 것들을 부숴버리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보 자체에 대한 공격들이 쏟아지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렌라간>에서는 조국과 인류를 위한 진보적인 행태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현대는 ‘다윈주의’가 도래한 사회라 불리는데 그 속에서는 저마다의 꿈과 추구, 문화가 긍정된다. <원피스>의 세계는 하나의 대의명분이나 거대담론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처럼 다양한 이들의 다양한 꿈과 삶이 존재하는 다윈주의적 세계다. –본문
조국과 인류를 위한,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자면 새마을 운동을 주창하며 서로서로 잘 살기 위해서 나 하나쯤의 희생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근대의 모습이라면 현대에 들어선 인류는 이전과 같이 모두를 위해가 아닌 ‘나’를 위한 삶을 꿈꾸고 있으며 이는 <원피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렌라간>에서는 인류 해방을 위해 전쟁에 나섰다면 <원피스>에서는 개개인의 꿈을 쫓기 위해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며 확실히 근대와 현대 속의 개인의 모습은 확연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원피스>라는 작품 안에서도 현대인의 모든 것을 찾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으니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에게는 꿈만을 좇아가면 되는 이상적인 삶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이 매일매일을 살아가기 위해 벌이는 생활 따위는 없이 순수한 정수만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사물의 색깔은 인간에게 가시광선에 의해 반사된 범위 내에서만 보인다. 대부분의 생물들은 인간과 다른 색으로 사물을 본다. 그렇다면 사물의 진짜 색깔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사물은 모두 우리가 만지고 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과 촉각을 통해서가 아닌, 진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결코 우리의 감각과 이해 범위를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인식 프레임’ 안에서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본문
<충사>를 보면 인간세계와 벌레세계가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간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벌레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실제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우리에게 <충사>는 그 이외의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저 내가 본 것만이 세상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막연하게만 생각되는 꿈에 대해서 누군가가 물어오면, 우리는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과연 꿈이라는 것이 어떠한 직업을 쟁취하는 것으로 명명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서도 딱히 그렇다면 꿈이 무엇이란 말인가, 에 대한 똑 부러지는 대답도 할 줄 모르기에 자신이 꿈꾸는 직업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나에게 저자는 잠시 멈춰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과거에만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볼 줄 아는 자신이 되는 것은 물론 그 시간들을 통해서 나라는 오롯한 인간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이야기를 만든다. 시간이 없다면 어떠한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에서야 말로, 인생의, 삶의,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면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우리가 그런 아름다움을 포기해도 괜찮다면, 시간 같은 건 흐르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뿐인 삶을 아름답게 느끼고, 바라보고, 경험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상상의 이야기든, 자신의 이야기든, 남의 이야기든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이다. –본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나 다름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 하나하나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이 시간들을 살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그 어떤 인문학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라는 호기심에 집어 들었던 이야기 속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보면서 복잡한 현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저 한 편의 만화로 생각했던 것들 안에는 생각보다 우리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앞으로 어떻게 나를 찾아 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는, 오랜만에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