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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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정도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제목을 보며 그야말로 대담한 남자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대담을 넘어 발칙하다! 라는 생각이 먼저였지만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가끔이라는 단어가 붙여진다는 사실과 아내는 남편과의 결혼을 가끔만족한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아련한 기억만 남아있는 나로서 이 책을 다시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얼마 전 김정운 교수의 <오늘 미래를 만나다>라는 강의를 듣고 나서였다. 늘 유쾌하면서 가벼운 듯 하지만 나름의 진심과 진리를 담아 말하던 그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의무만 있고 재미가 사라진 이 시대의 남자들을 대변하기 위한 외침을 담은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그 동안 사회 속에 만들어 놓은 통념 속에 갇힌 남자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태어나서부터 죽는 날까지, 단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법조차 어색해하며 이 시대의 아버지상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돈만 물어다 주는 기러기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까 우리의 아버지들의 세대들은 가부장적이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를 외톨이로 점점 묶어두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어느 초등학생이 썼다는 한 줄의 시처럼 냉장고보다도 못한 존재로 낙인 찍혀 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인생의 한편의 서사인 듯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늘 피곤에 찌들어 살고 술 아니면 담배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그들에 대해서 그것이 가장의 무게이니 견뎌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사회를 향해 저자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균수명 50때에 만들어진 가치로 평균수명 100를 살아가야 하는 데서 오는 문제다. 대부분 50대 중반이면 직장에서 은퇴한다. 그러나 은퇴한 후에도 멀쩡한 몸과 마음으로 최소한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
성실과 근면은 철저하게 평균수명 50세에 맞춰진 가치다. 그러나 평균수명 100세를 살면서 그저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 수 만은 없는 일이다. ‘평균수명 100의 가치는 재미, 행복이다. –본문

머리 좋은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도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그것을 즐기면서 하는 이에게는 자연스레 성공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온다는 말이지만 과연 재미있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날 위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날 위한 것이 아닌 타인들과 같은 삶을 지내는 것이 바른 삶이라는 생각에 남들처럼 내달려 와서 정신을 차려보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라는 생각에 멍하기만 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나이가 들수록 점차 편협해지는 인간관계는 물론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야한 농담도 주고 받을 친구들은 점차 사라지고 사회, 경제, 정치 등 딱딱하지만 사회 생활이라는 명목하게 주가나 땅값이야기만 하고 있는 아저씨들의 하루하루가 즐거울 리가 없다.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어제와 같은 지겨운 하루를 지내고 있을 뿐인데 그가 말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은 어디에 있어도 내가 확인되는 그런 일이라 말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 어떤 일이 되었든 상관없다. 새소리 듣는 일이든, 개미새끼 보는 일이든 상관없다. 나훈아의 노래가 되었든 슈베르트의 가곡이 되었든 상관없다. 내가 헤맬 때, ‘나’와 ‘내가 아닌 것’이 구분되지 않아 헷갈릴 때 내 면역시스템을 가동시켜 내 안 의 항상성을 유지시킬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 되어도 상관없다. 남 들에게 피해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야 한 다. 그것이 바로 내 존재를 확인하는 비결이다. –본문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그를 기반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대학 교수로서 정년까지 보장받고 있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그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본으로 건너가 홀로 지내며 일본의 옛 그림들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왜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그는 그것이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는 이 책 안에서 주장하고 있는 삶대로 자신의 삶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웃음이 계속해서 지어진다. 이 웃음의 근원은 그가 그저 웃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 즐거운 삶을 찾고 있으며 그러한 삶 위에 자신이 있기에 이토록 당당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일 게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꽤나 많은 인세를 받았음에도 이 요상한 제목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아내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전해주고 자신은 그저 아침의 커피 한잔과 그림으로 행복을 찾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 참을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즐기고 있는 그 모습은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이런 아름다운 삶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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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공간 / 이문희, 박정민저

 

독서 기간 : 2015.01.1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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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목민심서 - 상
황인경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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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받은 묵직한 세 권의 책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두툼한 두께에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실학자였다는 것, 그의 호가 다산이었다는 것, 거중기를 발명했으며 목민심서라는 책을 후대에 남겼다는 것,이렇게 두 줄 정도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나로서는 과연 저자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이토록 방대한 이야기를 세 권에 나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방대한 양에 놀라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내가 그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책을 펼치기 전에 먼저 다시금 반성을 해 본다. 15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 안에서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는 그에 대해서 몇 개의 단어로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머리가 절로 숙여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밥은 굶지 않고 살려는 게 욕심 부리는 것은 아니질 않은가?”
답답한 생각에 약용의 어조에는 짜증기가 배어 있었으나 천만호는 별도리가 없다는 몸짓으로 묵묵부답이었다. 약용은 어조를 누그러뜨리며 정색을 하고 물었다.
자네 소원이 있다면 무엇인가?”
늘 백성들의 헐벗음과 굶주림에 마음이 쓰였던 터에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는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 난 지금 모른 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밥을 굶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매일매일 일거리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습니다요.” -본문

 조선 후기의 당시 시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함 그대로였다. 백성들은 늘 굶주리고 있었고 배불리 한끼만이라도 제대로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으니. 그야말로 곤궁 속의 삶을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정약용과 정약전은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들의 집에 함께 살고 있었던 천만호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은 정약용은 그를 돕기로 결심하나 그의 형인 약전은 과거를 앞에 두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린다며 그를 채근하게 된다. 그러나 약용은 학문의 모든 것은 결국 백성을 위해 쓰여야 한다 말하고 있고 그 모습에 감복한 약전 또한 그를 도와 천만호에게 솜틀기계를 마련해주게 된다.

 신분제가 여전히 확고히 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정약용의 모습은 시대를 뛰어넘어 모든 백성들을 아우르는 깊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의 나이 21. 만인을 위한 인재가 세상에 널리 널리 뜻을 펼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는 이야기 속에서 그의 뛰어난 재능과 인자한 성품은 정조의 눈에도 띄게 되는데 정조가 그를 곁에 가까이 두려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를 향한 비수의 화살들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벽을 마주하게 되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당시 유교 사상이 깊이 자리잡고 있던 조선시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다 외치는 등, 시대에 맞지 않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천주실의라는 책을 통해서 조선에 점차 퍼져나가던 천주교의 주축이 당시 조정에서 그다지 힘이 없는 변방의 인물들이었던 남인이 주축이었으며 조정을 호령하고 있던 노론의 눈엣가시였던 정약용이 이 천주교의 물살에 함께 했다는 것은 그의 앞날이 파란만장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옮겨 다니면서 세상의 여러 가지 단면을 대한 약용은 한층 성숙한 시각을 키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약용은 아전들의 못된 행각에 곧잘 분노하였다. 어머니에게 그들의 소행을 이른 것은 까닭 모를 모순이 한없이 답답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화순과 예천에서 만난 아전들의 모습은 예전과는 다르게 비쳐졌다. 그들도 백들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아버지 정재원은 노략질과는 거리가 먼 청백리였기에 지방 수령으로 이리저리 밀려다녀야 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은 윗사람에게 뇌물은 바치고 외지를 전전하는 고달픔을 면하려 하였던 것이다. –본문

 정약용이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남인 뿐만 아니라 정조의 신임을 시기했던 이들은 그를 계속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정조에게 올리지만 그를 진심으로 아끼던 정조는 그에게 곡산부사라는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백성들은 먹을 것 조차 제대로 없어 배를 곪고 있으나 관리들은 매점매석과 같은 비리를 통해 그들은 호위호식하며 살고 있고 이러한 모습에 격분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지만 그 찬란한 불꽃은 다시금 민초들에게 전해지고 있었으니 이 참혹한 현실을 알고 있었던 정약용은 곡산에 있는 동안만큼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그들의 노고를 이해하고서는 모든 이들이 잘 지낼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던 그의 노력은 결국 곡성의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 당시는 물론 현재의 우리에게도 너무도 필요한 리더의 모습이 아닐 수 없는데 모두를 위해 완벽했던 인재를 당시 벽파들의 눈에는 정약용이 사라져야만 하는 인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정조의 신뢰는 점차 깊어지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마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은 정약용이라는 인물 하나만 사라지면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들의 치밀한 계략은 결국 약용 형제를 귀향길로 오르게 만든다.

 그날부터 주막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멀리 약방까지 찾아가기 힘든 동네 사람들이 죄다 병증을 호소하며 몰려들었다. 약용은 인파를 반기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동안은 죄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강진 사람 그 누구도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던 그였지만 이젠 스스로 찾아와 조언을 구하고 기쁘게 돌아갔다. 사람이 모이는 덕분에 주모의 주머니도 한결 두둑해져 갔다. 아른 아들놈이 배고프다 칭얼대면 국밥이라고 한 사발 먹일 밖에 도리가 없는 탓이었다. 결국, 약용은 주모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사람들의 병증을 돌보아주었다. 큰 병이 아닌데도 몰라서 죽어가는 이가 허다했다. –본문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약용 형제들을 걱정했던 정조의 모습은 앞으로 그들에게 드리울 풍파를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18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안타까움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테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백성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기나긴 유배기간 동안에 그는 세상의 핍박으로 현재 강진에 갇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조선을 위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고뇌의 시간이 바로 <목민심서>의 모든 것인데 후대인 우리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사료이나 그가 유배생활 동안에 지냈던 모습을 책을 통해 마주하는 순간에 먹먹함이 눈앞을 가리게 된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던 약전과 약용은 바다를 건너 만날 수 있는 곳에 있었지만 해배될 날만을 기다리다 결국 약전의 죽음만을 마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약전이 남긴 <자산어보>는 도배지로 사용되고 있었으니. 세상이 그에게 던져준 고통은 깊다 못해 그의 모든 것을 갈기갈기 파헤치고 있었다.

 역사 소설을 볼 때마다 만약에, 라는 생각들을 하곤 했다지만 이번처럼 간곡하게 이 말을 붙잡게 될지 몰랐다. 옳은 말을 하고 옳은 일을 하던 그들에게 힘이 있었더라면, 누구라고 그들의 안위를 위해 조금만 힘을 써줬다면, 정조가 조금만 더 오래 버텨줬더라면, 그도 안 된다면 그들이 조금만이라도 더 늦게 세상의 빛을 보았더라면. 당시의 조선은 엄청난 변화들을 맞이했을 터인데 당시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이 찬란하게 빛나는 그들을 매장시키기에만 급급했으니 실로 안타까움을 넘어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인재가 있었음에도 그들을 지키지 못했던 당시의 모습과 현재 우리는 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약용이 그의 삶의 다해서 남기고 간 지난날의 행적을 또 다시 고스란히 답습하는 오늘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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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정약용저


 

 

독서 기간 : 2014.12.20~201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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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5-01-1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꼭 읽고 싶군요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허은실 글.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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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멜로디가 시작되고 이동진씨의 목소리로 빨간책방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한 줄 한 줄 전해지는 울림에 오늘은 또 어떠한 설렘을 전해줄지 귀 기울이며 오프닝을 듣고 있노라면 어쩜 이런 이야기들이 있을까, 싶은 그 아름다운 선율에 이미 마음은 동하고 있다. 그렇게 오프닝을 듣고 나서 다시 듣기를 하기를 몇 번. 그날의 오프닝 멘트가 익숙해져 혼자 읊조릴 수 있을 때 까지 듣고 나서야 그 날의 팟캐스트를 듣는 준비를 완료했다며 이동진과 김중혁작가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기를 시작했으니, 나에게 있어서 빨간책방의 오프닝은 첫눈에 누군가에 반해 그 모든 것을 맹신하게 만드는 마력의 시간이다.

 한 문장을 듣고 받아쓰고, 다시 되돌려서 받아쓰고. 그 일을 몇 번이나 하고서 그날의 멘트를 다 받아 적은 후에 다시금 읽어보는 그 느낌은 마치 연서를 받은 것마냥 설레곤 했다. 그래서 나는 빨간책방을 듣는 날이면 오늘의 오프닝은 어떤 것일까, 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그 순간만큼 더 없이 행복한 소녀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 시간들이 오롯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소식에 이 책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웬만해서는 펜을 잡아 무언가를 끄적이기 보다는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더 편한 지금의 나에게 오랜 아날로그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 이야기들을, 나는 무조건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책을 빌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가 그어놓은 밑줄을 만나서 가슴 뛴 기억 말이에요.

그게 내가 좋아하는 구절일 때, 밑줄은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영혼의 전류처럼 느껴집니다.
물결 같은 밑줄을 타고 그의 기슭에라도 가 닿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연애를 시작할 때 잠깐이지만요.(중략)

별 생각 없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들춰볼 때도 있어요.
책을 뒤적이다 보면 10, 20대의 나를 만납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여기다 줄을 친 걸까.’
그때 그 마음이 지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죠.

하지만 밑줄 위의 그 문장들은 몰래몰래 내 삶에 개입해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해보고도 싶습니다.
어떤 문장이 특별해서 밑줄을 긋기도 하겠지만 
내가 밑줄 그었기 때문에 그 문장은 비로소 특별해진다고요.
오늘은 어떤 문장에 밑줄을 그으셨는지요. –본문

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설이나 에세이도 아닌 이 이야기를 종이 안에 담아내기 위해서 한 문단과 문단의 띄어쓰기마저도 고심했다고 한다. 이동진씨의 목소리를 통해 들었을 때는 하나의 단락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실제 눈 앞에서 여백을 두고서 전해지기에 이 느낌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전해지고 있다.

 어찌 보면 청취자들에게 가장 먼저 맨 얼굴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에서 그들이 오늘의 이야기를 들을지 말지에 대해 결정하게 하는 단초가 되는 이 순간을, 나는 언제나 떨림을 안고서 기다리고 또 들으며 감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그날의 이야기를 모두 한 대 모으고 싶었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며 그리하여 책을 읽는 내내 수 많은 포스트잇을 사용하여 책에 표시하고 또 표시했으며 계속해서 그것을 읊조리고 있었다.

우리 몸의 속도는
애초에 이렇게 자연의 속도와 비슷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도 우린 시속 120킬로로 달려야 하고,
스마트해진다고 유혹하는 디지털의 속도에 끌려가느라
고단하기만 하지요.

이런 세상 속에서 자기 속도를 유지하는 건
점점 힘겨워지는데요.
낙엽이 지상에 내려앉는 찰나,
그 무한의 시간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은 어떤가요.

잠깐 멈춰서라는 계절의 빨간 신호등.
단풍이 붉은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본문

 가만히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 그 때의 계절을 느끼게 된다. 눈 앞에 보이는 것들만 맹신하던 시간을 넘어 귓가에 맴도는 이야기도 나지막이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 무섭도록 빠져들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꼭 거쳐야 했던 그녀의 잔잔한 울림은 빨간책방을 찾는 이들에게 어느 새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잔잔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담긴 파장에 늘 행복했던 그 시간들이 이 한 권에 압축되어 있기에 읽는 내내 미소를 지으며 책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한 장 한 장의 이야기마다 전해지는 잔향을 아주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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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오프닝 / 김미라저


 

 

독서 기간 : 201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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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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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태어나는 순간이 흰 빛깔의 영롱함이라면 죽음은 흑백의 까마득한 느낌이다. 색으로 인간의 삶을 표현한다고 하면 암에 걸려 절망에 빠진 이브 엔슬러라는 그녀의 이야기를 표지로 마주한 순간 나는 회색조의 삶을 예상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이라는 일련이 순간 속에서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듯한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무언가 초연하면서도 경건한 마음과 측은지심을 가지며 바라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 스스로 자신의 삶에 암이라는 존재가 퍼지기를 상상한 적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 불운의 그림자를 짊어지게 되었으니 나는 그녀를 초연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콩고에 도착했을 즈음 이미 나는 이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여성애 대한 폭력이라는 전염병을 충분히 목격했다. 그러나 나는 콩고에서 몸의 종말, 인류의 종말, 세계의 종말을 목격했다. 군대와 기업은 광물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 학살, 조직적 강간, 고문, 여성과 여자아이의 말살을 전술로 이용하고 있었다. 여성 수천 수만 명이 자신의 몸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과 몸의 기능, 몸의 미래가 형편없이 망가졌다. 자궁과 질이 영원히 파괴된 것이다. –본문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이 모든 생각들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강렬하다 못해 파격적이고 파격적이면서도 그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도무지 가늠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회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동안에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책을 바라보게 된다.

 그녀는 회색조의 빛을 띄며 처연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검붉은 빛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으며 너무도 강한 그 모습에 압도되는 것은 물론 때론 두려움이 느껴지기까지 하다. 과연 그녀의 이 모든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 일까. 내가 생각하던 환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아니 그 어떠한 이들보다도 되려 더 강한 이 아우라는 대체 어디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일까.

 콩고의 성흔처럼 수 많은 이들의 여성들의 고통을 마주해왔던 그녀의 몸에는 종양이 자라고 있다. 상처를 가진 자와 상처를 보듬어 주는 자로 콩고의 여인들의 마주해왔다면 이제는 도리어 상처를 가진 자들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 이브는 처음에는 자신의 병에 흔들리는 듯 했지만 다시금 일어서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채식주의자로 지냈던 지난 날을 넘어 사자처럼 햄버거를 물어 뜯고 있으며 어린 시절 이외에 손에 잡아 본적이 없던 붓을 들고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그리하여 이전에는 차마 알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나무를 통해서 마주하게 된다.

병마만이 온 세상을 뒤덮은 로체스터에서도, 화학치료를 위해 포트를 자신의 쇄골에 이식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늘 강자의 모습으로 서 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수천 여명의 여성들의 아픔을 차양막 아래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국제사회와 지식층 여성, 영부인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그 현장 속에 들어가 움직이며 자신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다 드러내며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화학치료는 당신에게 하는 게 아니에요. 암에게, 과거의 모든 죄악과 당신 아빠에게 하는 것이고, 강간범과 몸의 침입자 모두에게 하는 거예요. 그들을 독살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거죠. 당신에게 투사되었지만 절대 당신 것은 아닌 악을 모두 정화할거예요. 당신의 회복력과, 치유를 향한 당신의 몸과 영혼의 마술적인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어요. 당신이 할 일은 화학치료가 당신 안으로 치고 들어온 침입자를 죽여 없앰으로써 당신의 순결을 구하러 오는, 당신과 공감하는 전사라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거예요. 당신에게는 몸이 여러 개 있어요.사랑과 보살핌을 통한 이 변형의 시간으로부터 새로운 몸이 태어날 거예요. –본문

 자신을 강간했던 아버지를, 그 사실을 외면하기만 했던 어머니를 용서하고 자신보다 더 많은 아픔을 안고 살아야만 하는 여성들을 향해서 그녀는 다시 움직이고 있다. 남들에게 맞추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지금이 소리쳐야 할 때라고 그녀는 더 크게 소리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야말로 그녀가 마주했던 참혹했던 현장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10억명의 여성 중 3명에 한 명은 성적 학대나 폭력을 경험했으며 이것이 실제 우리의 현실이기에 최소한 그 현실을 마주해야 할 의무는 있지 않을까.제 몸을 불살라 이 모든 것들을 전해주는 그녀는 혁명의 전사처럼 느껴진다. 아무쪼록 그녀의 광활한 목소리가 더 널리 퍼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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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 / 쥘리 보니저


 

 

독서 기간 : 2015.01.14~01.15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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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까지 7일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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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누군가와 영영 마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이별의 시간을 건네야 하는 날들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라고 그 시간이 촉박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 동안 주어졌던 수 많은 시간들을 어찌하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내온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은 왜 이토록 짧아야만 하는 것인지. 이 소설은 이 세상의 자식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밖에 없는 부모님에 대한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한이자, 너무도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이별의 순간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한 마디의 이 책에 대한 변을 남기자면, 슬픔에만 취해 눈물만 쏟는 그런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뭉클한 눈물보다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개개인의 현실에만 취해 있던 모습들이 점차 하나로 모여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기에 때론 비정하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에 마냥 슬픔기만 할 것 같아 외면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는 말을 먼저 전해주고 싶다.

 시작은 장어라는 단어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중년의 여성 이야기로 시작된다. 젊은 이들도 깜빡 하는 일들이 종종 있기에 별다른 일이 아니겠거니, 하고 바라본 레이코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무언가 점점 이상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모습도 그러하고 둘째 아들인 슌페이를 만나러 갔을 때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그녀의 모습, 며느리인 미유키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사돈 댁과 함께 저녁을 하는 시간 동안 보여지는 그녀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가족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즉시하게 한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레이코의 뇌 속에 그림자가 보인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7일이 고비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이야기는 첫째 아들인 고스케, 둘째 아들인 슌페이, 그리고 레이코의 남편인 가쓰아키의 각각의 시선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

 천천히 다가가 퍼즐 조각을 하나 주었다. 그 빛바랜 살색을 보며 겨우 무슨 그림인지 생각해냈다. 형을 위해 일을 그만둔 어머니가 완성한,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였다.
 
슌페이는 그 그림이 너무 싫었다. 처음에는 퍼즐을 장식하는 행위 자체가 촌스러워 보였는데, 얼마 지나자 소녀의 초연한 눈매가 마음에 안 들었다.
 
만일 정말로 가족이 각각 맡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면, 이 소녀만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빚 독촉에 괴로워하던 어머니의 모습도, 불확실한 장래에 두려워하던 형의 모습도, 이 소녀만이 신처럼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본문

 자신의 가정 환경이 버겁기만 했던 고스케는 집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책임은 부모님의 몫이라며 그들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다. 슌페이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에 빠져 세상과의 타협보다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겠노라며 레이코의 마음을 쓰이게 했으며 좀처럼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할 줄 모르는 남편은 어느 새 집에만 오면 적막만을 유지하고 있는 채 레이코의 지갑에는 점차 대부 업체의 카드만이 쌓여가고 여기저기서 빚 독촉이 날라오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그 누구도 이 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이 없었던 이들에게 어머니의 병은 모든 것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시발점이 된 셈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가고 있는 레이코 앞에 서서히 드러나는 부모님의 부채를 보면서 7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시간보다도 그들에게 드리운 돈의 무게가 이들 가족을 더 힘겹게 짓누르게 된다. 이 순간이 이 가족에게 드리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인데, 아버지는 잠시 동안의 여행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하고 슌페이는 엄마의 통장 속에 담긴 보험회사의 존재가 무엇인지 찾게 하고 고스케로 하여금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미유키에게 자신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등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견뎌가며 각자의 군도 속에서만 살고 있던 이들의 간극을 조금씩 줄어들게 하고 있었다.

 기적 같았다. 어머니만이 아니다. 겐타가, 미유키가, 아즈사가, 아버지가, 형이 있다. 이 집에서 어느 누구 하나 모자라지 않은 것은, 절대 당연한 일이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쓰러지기 전에도 이랬다. 만나면 다들 즐겁게 웃고, 걱정 같은 건 없다는 듯 굴었다. 어머니가 빚을 졌을 줄은 상상도 못했고, 하물며 암에 걸렸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사람이 죽음과 등을 맞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어머니가 쓰러졌던 그날까지는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가족의 삶이 즐겁게 막을 내린 것은 아니다. 다음 순간에는 또 누가 쓰러질지 모르고, 누가 큰 빚을 진 게 드러날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만이라도 웃어야 한다. –본문

 다시금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느낌의 환호보다는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밀려든다. 7일이라는 시간을 넘어 54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이 시간이 계속되기만을 바라본다. 그들의 시간이 연장될수록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같이 연장되는 듯한 안도가 함께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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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간 : 201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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