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일 밤부터 여유롭게 읽어보자, 라는 심산이었다. 책장에 있는 다른 책들보다도 얇기도 얇은 편이었고 그 아무리 어렵다고 하던 니체라고 하더라고 이렇게 누군가의 또 한번 거쳐서 마주하는것이라면 니체의 문체 그대로를 마주하는 것보다는 쉬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말 여유롭게 시작한 이 독서의 서막은, 시작은 너무도 편안하고 나태하게 시작되었다면 책을 읽어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자세를 곧추어 세워야했고 몸을 바르게 하면서 눈 안에 들어오는 하나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고 넘어가기 위해서 머리 속에서는 모든 세포를 일깨워야만 했다. 물론 이 과정을 거쳐 2박 3일 동안 거즌 10시간이 넘도록 이 책을 잡고서는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아보며 일독을 하기는 했으나 과연 제대로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220페이지 남짓한 책에는 수 십개를 넘어 페이지별로 빼곡히 포스트잇이 부착되었으며 일독 후 포스트잇 부분을 다시 읽고서 서평을 작성하는 나로서는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 정도로 많은 부분에 표시를 해 둔 탓에 다시 보는 것은 거의 포기하고 만 상태이다. 어찌되었건 이 책에 대한, 아니 니체를 마주하고 난 느낌을 이야기해보자면 아마 이 책을 대강대강 읽고 넘겼다면 나는 니체를 염세주의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타주의를 좋게 바라보지 아니하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을 갖는 것에도 반대하며 도덕에 대해서도 과연 무엇이 도덕이란가에 대해서 주창하는 그를 보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안이라고 비난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지금 그의 이야기를 모두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많은 읽어내려가다 보면 그의 초반의 주장들에 대해서 조금씩 고개를 주억거리며 니체의 이야기에 빠지게 된다.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를 쫓아가는 어린아이 처럼 말이다. 사회적 광학에서는 자연적 광학보다 문제가 더 심각하다. 인종주의 사회에서 유색인의 피부색은 그 사람의 개별 속성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사과와 눈이 맺는 자연학 수준의 관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관계가 은폐되어 있다. 유색인은 백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유색인이라는 사실, 한 사람의 피부색은 인종주의 사회에서 주목받는다는 사실을 감추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흑색이라 황색이 그런 피부를 가진 사람의 개별 속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가 '한 사물의 속성'으로 현상한다는 점에서 '인종주의'역시 하나의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우리의 눈에 비치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판단하는 오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지구 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발 아래 두고 있다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 니체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에 대해 반문하고 있다. 빨간 사과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과라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 어디 빨간 사과만이 사과라고 정의할 수 있느냐는 것과 함께 우리의 눈에게는 붉은 색이라는 색으로 보이는 그것이 다른 동물의 눈에는 또 다른 색으로 보일 수 있듯이 과연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이 과연 오롯한 진실이냐는 것이다. 그와 함께 니체는 인종 차별에 대한 촌철살인을 건네고 있는데 유색인종과 백인과의 관계 속에서 과연 누가 더 우월하고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할 수 있냐고 반문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해서 애둘러 말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떠한 현상들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하려 하는 우리에게 그 탐구의 끝은 결국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기 위한 현상이나 그 무지를 인정하기 보다는 모든 것들을 신의 뜻으로 전환하면서 무지의 피난처를 위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행태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불에서 떨어지는 벽돌'이란 무엇인가. (중략) 벽돌은 왜 그때 거기서 떨ㅇ졌을까.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왜 그때 거기서 불었을까. 바다가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왜 바다는 그때 거칠어졌을까. 우리는 원인을 말할 수 없을 때까지, 다시 말해 원인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고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원인으로서 신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결국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고 무능한 최종 장소에서 신을 발견하는 셈이다. -본문 특히나 그는 냉정하게 보이는 것은 그는 도덕에 대해서도 마뜩지 않게 생각하게 되는데 절대적인 도덕이라는 것은 없기에 무엇이 옳은 도덕이고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 없거니와 이러한 도덕이라는 것들 역시 우리 스스로가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만들기 위한 것들이기에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특히나 타인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동정'에 대해서도 그는 좋지 않은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 동정은 또한 동정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정을 받는 이를 불행하게 만든다. 동정을 구걸하는 이는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그것을 얻는다. 동정을 구걸하는 이는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그것을 얻는다. 바로 타인과 자신이 동등하다는 긍지를 포기한다. "동정을 받는다는 생각은 야만인들에게는 도덕적 전율을 일으켰다. 동정을 받을 경우 사람들은 모든 덕을 완전희 상실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동정을 베푸는 것은 경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본문 누군가의 안타까운 상태를 바라보면서 그자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한켠에 죄책감이라는 것을 된다. 그러면서 동일 선상에서 그가 겪고 있는 안타까움을 우리 스스로 겪고 있는 듯한 착각을 빠지게 되는데 타인을 통해서 내가 그 안타까운 상태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행위 자체를 니체는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바라보았으며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서 타인을 돕는다는 행위로서 나의 고통에 해방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타인을 돕는 행위를 자세히 바라보게 되면 남을 돕겠다는 순수한 목적이 아닌 남을 돕는 나를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거나 타인을 돕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를 제 3자가 바라보았을 경우 나에 대한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는 것들 등 수 많은 이유들이 포함된 것이 '동정'이기에 그는 이 동정이라는 것이 대체 누구를 위한 동정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맹세를 하는 우리는 그것이 달콤하기도 하거니와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남들이 하는 것이고 그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에 당연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범주의 테두리들에 대해서 니체는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그는 그 완벽함이 담고 있는 수 많은 오류들을 꼬집어 과연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기반에 대한 뿌리부터 뒤 흔들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나로서는 한 줄 한 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과연 제대로 이해하고서 글을 작성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정도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 두렵기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어찌되었건 첫 발을 내딛었다는 것에서, 그리고 그가 안고 있던 상념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아갔다는 것에서 만족하며 몇 번 이 책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