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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홍성림 옮김 / 지호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우리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 중 태어나서 연필 한 번 안 잡아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필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글씨 쓰기 자세와 힘 조절 능력을 길러준다는다는 점에서 사용이 장려되고 있다. 태어난지 1년이 되면 으레 하는 돌 잔치에서도 연필을 볼 수 있다. 아이가 연필을 집으면 나중에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고 믿어지고 있기 때문에 연필은 때로 아이가 그걸 잡길 바라는 기대에 찬 부모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한다. 연필의 가격은 보통 200원 정도,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필기구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다스 정도의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놓고서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고 했다.
위의 이야기는 연필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정작 연필은 어 디 서 왔는가? 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연필의 향긋한 냄새, 연필을 쓸 때 나는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 때문에 좀 불편해도 깎아 쓰는 연필을 고집하고 예쁜 연필을 보면 내 손에 잡아보고 싶어하는 특이한 편집증적 취향 을 가진 나에게 이 책의 발견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작가는 연필 한 자루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해준다. 연필 이전의 필기구에서부터 시작하는 연필의 역사와 내가 가장 궁금해 했던 연필의 제조방법, 연필의 주재료인 흑연광산을 둘러싼 암투, 세계적인 연필 제조사, 나와 같은 연필 매니아에 관한이야기 등 544쪽에 걸친 긴 이야기.
이 중 나의 가장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연필의 제조방법이었다. 그림을 곁들인 설명을 보며 10년 동안 가졌던 연필에 어떻게 흑연심이 들어갈 수 있은가에 대한 의문이 시원스럽게 풀렸다. 좋은 연필의 조건, 연필깎는 직업이 있던 시절, 연필 산업을 했던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 등 연필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나서 연필 한 자루를 바라보는 눈이 전보다 더 사랑스러워졌다. ^^;
쓰다가 짧아지면 주저없이 버리고 없어져도 잘 모르는 하찮은 물건 연필에 관해 무슨 할 이야기가 이렇게 많나 싶지만 '연필'은 인간이 현재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기에 존재 할 수 있는 공학의 산물 중 하나이다. 연필이란 필기구의 존재가 당연한 우리에게는 연필이 하찮게 느껴지지만 '하나의 나무자루에 흑연심을 집어넣어 완성되는' 연필 한자루가 만들어지기까지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고민과 노력, 공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했을 것이다.
연필 한자루를 통해 '공학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는 이 책을 읽는 다면 우리가 죽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물들에서도 장인의 팔딱거리는 심장소리와 뜨거운 열정이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