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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평점 :
약으로 병을 다스리듯이 책으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 마음을 다스릴만한 책이 있을까 싶어 내 방안 책장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니 실존주의 관련 책 4권이 보였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상, 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게리콕스의 실존주의 입문서『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이다. 『존재와 무』를 해설서 없이 읽어내기는 불가능할 것이고 2년전에 대충읽은 사르트르의『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게리콕스의『실존주의자로 사는 법』2권을 꼼꼼히 다시 읽어 보고 며칠 동안 생각을 정리해보다 오늘 겨우 자판을 두드린다.
이 두 책은 실존주의에 대한 얇은 입문서 정도라 할 수 있지만 읽다보면 생각해볼 거리가 만만치 않다. 게리콕스의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은 진정한 자기계발서라는 어울리지 않는 부제도 붙어있다. 아무튼 두 책 다 읽기 쉽고 실존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적당한 입문서다.
전화 걸면 컬러링으로 자주 나오는 아름다운 CCM이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일단 리듬이 너무 아름답고 노래가사도 환상적이다. 이 노래 듣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데 말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자신이 너무나 특별해지는 것 같고 소중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사르트르의『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게리콕스의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을 읽고 나서부터 이 CCM을 들을때마다 약간씩 불편한 느낌이 든다. 지금부터 왜 이 노래가 내게 불편해졌는지 몇 마디 할 것이다. 물론 나는 특정종교의 종교적 신념을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어떤 특정 종교적 신념을 믿는 사람들이 생물학 이론인 진화론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처럼 나도 내가 가진 신념때문에 불편해지는 것들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정도의 표현의 자유와 관용은 우리사회가 이미 오래전에 확보했다고 믿고 싶지만 현실은 아무래도 너무 살벌하다. 지난 정권부터 이어져온 고소, 고발이 남발하는 현실은 글 한편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할 정도로 내 마음속의 자가 검열자가 된지 오래다. 나는 늘 인터넷상에 글을 쓰는 것이 두렵다.
나는 무신론자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면 무신론이라는 것도 결국 아무 근거없는 믿음체계에 불과할 것이다. 어찌됐든 간에 나는 무신론자이고 내 종교는 불교도 기독교도 송혜교도 아닌 이성의 힘으로 얼개를 짜고 과학을 동력원으로 삼는 철학이다.
실존주의하면 보통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말하지만 실존주의(특히 사르트르)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논증하려 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차라리 이렇게 선언한다.
신이 실존한다 하더라도 이 실존이 결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관점입니다. 즉 신이 실존한다고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신의 실존 여부에 대한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p87-
실존주의는 신이 없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신을 가정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 그 자체만을 정확히 보려한다. 즉, 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은 그 존재도 증명할 수 없고 부재도 증명할 수 없다. 절대자가 있고 없음에 대한 반증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과학적 지식이나 이론은 반증의 가능성이 완전히 열려 있다. 최첨단 이론물리학인 끈이론에 의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이 세상이 3차원이 아닌 4차원, 5차원, 6차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발견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칼 포퍼가 합리적 비판주의에서 반증이 불가능한 것은 열린사회의 밑절미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반증의 가능성이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로 취약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런 믿음은 열린사회가 아닌 닫힌 사회의(전체주의 사회같은) 신념으로 오히려 더 적당하다. 신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신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훨씬 어렵지 않을까?
20세기 중반기는 사르트르의 시대였다고 한다. 당대의 또다른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시몬느 드 보봐르와 계약결혼을 하고 그의 주저<존재와 무>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무게가 1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이 방대한 작품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고 한다(서동욱, 『철학연습』, p92)
실존주의는 어떤 철학일까? 실존주의는 지독하게 솔직한 철학이다.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에서 게리콕스는 실존주의를 이렇게 소개한다.
쉽게 말하면 실존주의는 이 거칠고 미친 세상에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허튼소리나 조심스러운 배려 따위 집어치우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철학이다.
-p32-
실존주의는 지극히 반관념적이고 반형이상학적이고 무신론적이다. 머릿글이 너무 길어져버렸다. 실존주의의 제1원칙으로 들어가본다.
실존주의의 센트럴 도그마(실존주의의 제1원칙)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철학 사상 체계를 떠받치는 센트럴 도그마다. 아시는 분은 이미 잘 알고 계시는 그 유명한 말.
존재(exist, being)이란 말 그대로 이 우주와 세상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럼 실존(existence)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존재와 실존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쉽게 말해 존재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포함되지만 실존은 의식을 가진 인간만을 뜻한다. 그 의식중에서도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다. 다시말해, 실존이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존재, 혹은 내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는 존재다. 컴퓨터, 책상, 고양이등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고민하는 개나 고양이를 상상할 수 있을까? 물론 개나 고양이도 어떤 감정이나 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사실 인간은 개나 고양이의 감정과 의식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인간은 개나 고양이는 커녕 같은 종인 다른 사람의 생각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이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what is like to be a bat?)라고 물었던 이유가 바로 의식(특히 자신만이 느끼는 감각등)은 지극히 주관적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나 고양이의 뇌가 유발하는 의식상태가 어떤 것인지, 그들의 의식이 실존을 느끼는지 어떤지는 실존주의와 무관한 논의가 된다(그런 논의는 인지과학과 심리철학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일단 요 실존주의의 센트럴 도그마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존과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동양화 그림에서 밤하늘의 달을 그릴 때 달을 직접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커먼 하늘을 먹으로 먼저 그려나가다가 하얀 공백을 남기면 그 공백이 달로 보이는 것처럼 실존을 직접 설명하기 보다는 본질이 어떤 것인지 먼저 색칠해 보자. 컴컴한 밤하늘을 그려 달을 표현하는 것처럼 본질이 어떤 것이지 대충 그리고 나면 실존의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본질이란 무엇일까?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 가짜고 이데아만이 진짜라고 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는 수많은 사각형이 있다. 지금 당장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lcd패널 모니터부터 사각형이고 키보드 자판 하나하나도 모조리 사각형이다. 당신이 들락날락하는 방문도 사각형이고 책상도 사각형이고 스마트폰도 사각형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런 수없이 많은 사각형들의 원본 사각형이 따로 존재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각형들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망가지고 닳아서 오각형이 되기도 하고 둥그렇게 변하기기도 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형체를 볼 수 없는 분자들의 이합집산으로 흩어질 운명임은 물리법칙이 명백히 증명한다.
이런 무상한 것들은 진정한 실재가 아니다. 반드시 어딘가에 이런 사각형들의 모태가 되는 원본 사각형,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사각형이 있지 않을까? 본질의 개념은 바로 이 플라톤이 말하는 영원불변의 원본사각형과 같다. 현실의 사각형들은 영원불변의 사각형이라는 형상을 본뜬 질료들의 집합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플라톤이 상정한 그런 영원불변의 사각형은 존재할까?
그럼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본질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본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책이나 종이 자르는 칼 같은 대상을 고려해봅시다. 이 대상은 어떤 한 개념을 통해서 영감을 받은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인은 종이 자르는 칼이라는 개념을 참고하여, 또 그자체가 개념의 일부분을 이루며, 그 자체가 제작법에 해당하는, 대상에 선행하는 생산기술을 참고하여 종이 자르는 칼을 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종이 자르는 칼은 이처럼 일정한 방법으로 생산된 대상이면서 또한 한정된 용도를 갖는 대상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대상이 무엇을 위해서 쓰일지 알지 못한 채 종이 자르는 칼을 생산하는 사람을 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종이 자르는 칼에 있어서는 본질-종이 자르는 칼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며 종이 자르는 칼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제작법의 성질의 전부-이 실존에 앞선다고 말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런저런 종이 자르는 칼의 현존 또는 이런저런 책의 현존은 이처럼 그 자체가 결정된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창조적인 신을 상상할 때, 대부분의 경우 신은 탁월한 장인에 비유됩니다.
~중략~
또 우리는 신은 창조를 할 때 그 자신이 창조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정신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개념은 공예가의 정신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개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즉 마치 장인이 그 어떤 정의와 기술을 따라서 종이 자르는 칼을 제작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이 기술과 그 어떤 개념을 따라서 사람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인간은 이처럼 신적인 오성 속에 있는 그 어떤 개념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p30~31-
인용이 다소 길어졌지만 이 대목만 대충 읽고 나도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제1원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대목을 한 문장으로 줄여보자면 결국
“사람이라는 존재, 혹은 인간의 삶에는 아무런 목적도 운명도 없다”로 압축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결론에 불편할 것이다. 특히나 특정 종교를 가진 분들한테는 그 불편함이 더 심하리라. 자크모노는 <우연과 필연>에서 운명에 대한 진한 향수애를 경계하라고 하면서 인간의 운명은 미리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행되어 나가면서 쓰여지는 것이라고 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칼과 같이 어떤 의지적 존재가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저 우연히 이 세상에 아무런 목적도 운명도 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한다.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부른 먼지 한 점 보다 더 미미한 지구라는 행성위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무슨 운명이 있을까? 인간은 그저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에 그 어떤것도 의지할 대상 없이 내던져져 있다.
아래 사진은 1990년 태양계 외곽에 도달한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의 모습.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을 보고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명명했다. 파란색 원안에 거의 보이지도 않는 점이 바로 지구다. 우리는 저런 곳에 살고 있다. 태양이 만든 중력때문에 휘어져 보이지 않는 시공의 골을 따라 공전하는 먼지같은 존재인 지구. 이 사진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글 맨마지막 ps참조..
인간이 처한 이런 상황은 결국 극도의 형이상학적 불안감을 초래한다. 한마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이 무시무시한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인간은 종교와 도덕과 선악을 발명했다. 우연이 아닌 필연에 안주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그러나 그 안식은 과연 우리 인간의 실존과 부합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이 내던져진 인간존재라는 그 현실을 부정하고 허상과 같은 필연과 신이 미리 써놓은 운명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과연 내 삶의 입법자는 누구인가?
그럼 정말로 솔직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르트르가 말한 종이 자르는 칼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인간존재를 종이 자르는 칼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인다면 사르트르가 말한 지독한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셈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기기만은 바로 자신의 실존을 회피하려는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스스로 속이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종이자르는 칼의 본질은 종이나 물건을 잘라내는 기능이다. 날카롭고 예리한 금속제 칼이라는 존재보다 종이 자르는 기능인 본질이 앞선다. 종이 자르는 기능이 먼저 존재해야 칼이라는 존재가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이 자르는 기능이 없으면 종이 자르는 칼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자르는 기능이 결여된 칼은 그냥 길바닥에 흔히 채이는 돌멩이, 바위같은 무생물처럼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구석기인들이 냇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 갈고 다듬어 자르는 용도로 썼던 것들이 유의미한 석기시대 문화적 유물로 인정받듯이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 우리는 어떤 본질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어떤 본질을 캐낼 수 없다. 칸트도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고 했지 않던가? 인간은 인간이라는 목적 그 자체다.
이제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은 정말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까? 그리고 그 사랑은 도대체 누가 주는 것인가?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인간이라는 고유한 생명체가 가진 삶의 행동 방식에 불과하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사랑을 한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가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고 하면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노래가사 하나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게 아닌가 하고 반문할 분들이 많음은 충분히 짐작한다.
그래도 철학이란 것은 남들이 다 YES라고 할 때 NO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철학의 생명이다.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받아들이는 상식을 그 밑바닥부터 깨부수어 나가는 작업이 철학이다. 그럼 나는 왜 이렇게 인간의 삶에 무슨 목적을 두는 것에 대해 열불나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게 대체 뭐가 잘못됐단 말인가? 좋은게 좋은 거 아니야?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삶에 어떤 목적을 노정하는 순간, 온갖 근본주의와 원리주의, 파시즘의 파리들이 우리 삶에 들끓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면 사랑받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돈이라면 돈을 위해서는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인간 아닌가? 거시적으로 지금까지 인류가 저지른 악행의 대부분은 이렇게 인간존재에 특수한 목적과 운명이 있다고 믿은 인간들이 저질러왔다.
십자군 전쟁,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몰살, 선민 사상에 물든 나치가 저지른 유태인 대학살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일본 군국주의의 잔인한 만행,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테러, 911사태, 인종차별에 의한 학살, 현재진행형인 IS원리주의자들의 테러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앙들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이제는 자본주의라는 무시무시한 근본주의가 우리의 삶에 목적을 노정한다. 바로 돈이라는 목적 말이다. 근본주의는 다시 근본주의를 낳고 원리주의는 또다른 원리주의를 낳는다. 오로지 유일하고 절대적이고 완벽한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과 담론과 사상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일본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원리주의자는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다고 하면서 원리주의자들은 책을 읽을 수 없음과 읽기 어려움에 맞설 용기도 없이 나약한 사람들이라 칭한다. 오로지 하나의 텍스트에 목매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폭력성이 나타난다. 목적과 운명에 중독되는 순간 인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나약해지고 비굴해지고 반이성적으로 돌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모여드는 곳을 안식처라 부르지만 나는 그곳이 그저 도피처로 보인다. 그들은 사람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노래부르면서 우리를 대체 어디로 끌고 가려하던가..
내 삶엔 이 현실 이외에 그 어떤 도피처도 안식처도 없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은 실존주의 철학의 제1원칙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를 완전히 뒤집는 정반대의 도그마가 되고 만다. 즉,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가 되어버린다.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것은 인간 존재에 특수한 목적이 있다는 말이며 그 목적은 위에서 종이 자르는 칼의 예처럼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기 전에 사랑을 받는다는 어떤 기능상의 본질을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 사랑은 도대체 누가 주는 것인가? 그 사랑은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절대자가 인간에게 주는 것이다. 종이자르는 칼을 만드는 장인이 자르는 기능을 염두에 두고나서 칼을 만든 것처럼 신이 사랑을 하사하려는 계획을 하고 나서 그 사랑을 받을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이 무슨 헤괴망칙한 작업인가?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포상하고 징벌하거나, 우리와 이해할 수 있는 의지를 지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 or has a will of the type of which we are conscious in ourselves)-
이 CCM은 영어로 이렇게 번안되고 있다.
you are born to receive his love
(또는 you are created to receive the greast love)
왜 저 번안 가사가 to receive our love가 아니라 his love 또는 the greast love일까?
바로 절대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다.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신이라는 절대자가 주는 사랑에는 관심도 없고 그런 사랑을 받을 생각도 없다. 파스칼은 "신을 믿는 것이 안 믿는 것보다 이익이다" 라고 하는 어이없는 비용편익분석으로 신의 존재를 믿는게 났다고 주장했다는데 파스칼은 중세 유럽인이었고 그가 아무리 논리적인 수학을 연구한 지식인이었다 해도 중세 교회의 권위를 거스를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빅토르 델보스는 삶은 살기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그저 살아가면 될 뿐이다. 그리고 잘 살아가면 된다. 새삼스럽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떠들 이유도 없다. 사랑을 듬뿍 주고받는 사람들한테 굳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면서 달콤한 힐링꿀물을 권할 필요도 없다. 이제 플라톤이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원본 사각형이라는 이데아 같은 사랑에 대한 동경은 버리도록 하자. 영원불변한 절대적인 사랑은 없다. 절대자가 주는 사랑은 플라톤의 원본 사각형처럼 형체도 냄새도 모양도 소리도 온기도 질감도 없다. 공허한 사랑을 팔아 진짜 사랑에 목마른 사람의 믿음을 사려는 모습은 추해 보인다.
수없이 다양한 불완전한 사각형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지구상에 50억의 인간이 있다면 50억개의 불완전한 개별적인 사랑이 있을 뿐이다. 사랑은 오로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우리의 오감으로만 느낄 수 있다. 너와 나, 우리와 너희들이 주고받는 따뜻하고 정감어린 눈빛, 정다운 말 한마디, 따스한 포옹, 수시로 주고받는 메세지, 전화통화, 주고받는 선물, 함께 어울리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몸짓들이 곧 사랑이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공허하다.
그리고 알랭드 보통이 말했듯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 더 원초적이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서 컸지 않은가..
2015년 7월 15일 작성
ps: 칼 세이건<창백한 푸른 점> 中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이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자들이 보여준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서로를 얼마나 자주 오해했는지, 서로를 죽이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 증오는 얼마나 깊었는지 모두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을 본다면 우리가 우주의 선택된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 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실존주의의 또다른 면에 대해서 생각해볼 계획임. 1.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2.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3. 인간은 결핍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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