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라 그런지 입맛이 없다. 나이 들수록 밥맛은 없어지는데 이상하게 뭔가 하나씩 꼭 먹고 싶어지는 것은 많아진다. 오늘은 사과가 먹고 싶은데 그냥 보통 사과가 아닌 아주 맛있고 좋은 사과가 먹고 싶다. 지금까지 먹어왔던 사과, 봉지에 대 여섯 개씩 포장된 저렴한 사과들인데 대부분 맛이 싱겁거나 너무 새콤했고 육질도 이상해서 씹는 맛도 별로였던 것들이었다. 몇 해 전부터 사과값이 크게 올랐던 탓에 그런 봉지 사과도 결코 싼 편이 아니다. 돈은 돈대로 쓰고 맛은 없고 사과는 늘 만족하기 어려운 과일이었다.
그런 사과에 비해서 요즘 제철인 딸기, 곧 제철이 도래하는 참외는 비싸고 좋은 것을 고르면 거의 실패 없는 확실한 과일이다. 난 딸기를 좋아하지만 먹고 나서 소화가 잘 안되는 편이라 즐기지 않는다. 먹고 나서 속이 편하고 입안이 깔끔한 사과가 과일 중에서 제일이라는 생각은 늘 변함이 없었고 오늘따라 유난히 맛있는 사과 생각이 절실해서 큰맘 먹고 동네 마트로 향했다. 오늘은 기필코 비싸고 좋은 사과를 구입하리라.
설 명절이 다가와서 그런지 과일에 프리미엄이 좀 붙은 듯했다. 10킬로 한 상자에 7만9천원짜리 사과가 눈에 들어왔다. 34알이 들어있어 굵기도 적당했다. 마트 직원에게 상자를 열어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색깔도 좋고 굵기도 고르고 무엇보다 사과 특유의 단내가 확 풍기는 게 내가 원하던 달고 맛있는 사과라는 확신이 들었다. 망설임 없이 카트에 담았다. 집에 와서 한 알을 꺼내 씻으며 과연 얼마나 맛있을까 두근두근 긴장감이 들었다. 한 상자 8만원짜리 비싼 사과를 사서 먹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맛이 없다면 한 상자 다 망치는 거라서 모험인 셈이었다. 한 조각 와싹 씹었는데 내 확신이 맞았다. 진짜 맛있는 꿀사과였다. 달고 수분도 많고 아삭아삭 씹히는 육질도 적당하고 작년 가을에 수확한 햇사과가 틀림없었다.
세어보니 한 알이 더 들어있어 35알이었다. 청과 경매시장에서 한 알이 적으면 난리 나지만 한 알이라도 많으면 문제없다. 자신이 정성껏 키운 사과가 좋은 값에 잘 팔려 나가서 사람들이 맛있게 먹었으면 하는 그 바램. 한 알을 더 보탠 것은 사과를 키운 농부의 간절한 마음 같았다.
어릴 때 엄마가 남의 사과밭에 품앗이하러 간 날이면 늘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해지면 엄마가 빨간 다라이에 한가득 이고 오던 그 사과, 절반은 다 썩어서 썩은 곳을 도려내고 나면 남는 부분은 겨우 한입이던 그 사과 맛과 비슷했다. 사과밭이 있던 동네 친구 집이 부러웠다. 그 친구는 썩지 않은 온전한 사과를 실컷 먹을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썩지 않고 제대로 된 온전한 사과를 한 박스나 살 수 있었던 날이 오늘이었다.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못 샀던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렇게 좋은 사과에 인색했던 것일까? 아마도 나는 여전히 사과를 귀한 과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과 한 개를 힙색에 넣고 산책을 나섰다. 오랜만에 날이 풀려서 햇볕은 따뜻했고 무엇보다 맛있는 사과를 한 상자나 구입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맛있는 사과 때문에, 그리고 따뜻한 햇볕 덕분에 산책하는 내내 흥얼거리면서 즐겁고 행복했다. 예전에는 그런 고급 박스 사과는 비싼 가격 때문에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돈 아끼고 모아서 뭐하겠나 싶었다. 맛있는 사과 실컷 사먹자. 오늘처럼 돈을 써서 기분이 좋고 만족한 경험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해가 잘드는 벤치에 앉아 사과 한 알 와작 깨물어본다. 좋은 옷, 고급시계, 큰 자동차 이런 것보다 맛있는 7만 9천원짜리 사과 한 상자가 내겐 더 값진 명품이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앞으로 대단한 행복은 없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자주 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