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겨울날이었다. 가뜩이나 마음이 스산한 겨울에 날이나마 풀려 다행이었다. 공허해진 마음을 달랠 길 없기에 전부터 벼렸던 ‘음악의 이해’과제를 하기로 했다. 세종문화회관이 그나마 학교에서 가깝기에 그곳에서 하는 공연을 보기로 마음먹는다. 인터넷에서 구미에 맞는 공연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눈을 끄는 공연이 있었다. ‘피아니스트 현재희 독주회’였다. 티켓 가격이 20000원으로 저렴하다. 대학생은 반액 할인을 해준다 하니 좋은 조건이다. 공연 기획사에 전화를 하니 예매는 안 되고 현장구매를 하라 한다. 7시 30분에 하는 공연이니 시간도 넉넉하다. 시험공부를 하다 여섯시 즈음 학교를 나선다.
클래식은 거의 일상처럼 들어오고 공연도 자주 보아 왔기에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집했던 클래식 음반은 2000여 종. 많다면 많을 수 있는 앨범 개수지만 아직 듣고픈 음악이 많다. 이번 공연에도 여태껏 듣지 못한 곡이 수록돼 있어 기대가 된다. 표를 끊고 자리에 앉는다. 팸플릿은 받아 오지 않았다. 이미 음악회가 어떻게 진행될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팸플릿에 머리를 묻은 채 현장의 느낌을 등한시 하는 것 또한 그리 좋은 일은 아닐 테다. 청중들은 대부분 서로를 아는 듯하다. 보스턴 대학교 동문회에서 후원한 음악인데다 연주자가 현직 대학교수이기 때문일 테다. 부산스레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 모습들이 음악을 들으러 왔다 기 보단 사교를 위해 온 느낌이다. 아마 혼자 음악을 들으러 온 적적함이 그런 일그러진 심사로 사람을 바라보게 하지 않았을까 한다.
고상하게 생긴 아줌마가 무대에 오른다. 현재희 씨다. 관객은 박수를 보낸다. 첫 번째 연주목록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인 ‘템페스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템페스트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이 곡은 여러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기에 익숙한 곡이다. 가장 좋아하는 연주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의 연주다. 폭풍우의 격정을 피아노 선율로 나타내는 그의 솜씨는 일류 피아니스트답다고 할 수 있다. 알프레드 브렌델이나 블라드미르 아쉬케나지의 연주도 떠오른다. 조곤조곤하면서 깊이 있는 이 둘의 연주는 참으로 고요한 울림을 선사해주곤 했다. 연주가 시작된다.
여류 피아니스트라 그런지 1악장의 몰아침이 다소 무디다. 하나하나의 타건에 신경 쓰는 것도 좋지만 전체적인 면이 조금은 일그러진 듯했다.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는 날카로움이 덜해 아쉬운 1악장이었다. 3악장의 흉폭함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2악장은 무리 없이 소화해 낸다. 3악장의 터지는 격정을 어떻게 표현해 낼지 사뭇 기대가 된다. 다시 그녀의 손가락이 빠른 뜀박질을 하기 시작한다. 피아노에서 울리는 한음 한음이 귓가에 아로새겨진다. 하지만 1류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자주 들어온 내 귀이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이 들린다. 그렇다 해도 라이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은 또 다른 감동으로 내 귓가를 적신다. 디지털화 된 음악을 들려주는 씨디에선 느끼지 못했던 생생한 느낌. 어느새 이 격정적인 폭풍이 끝난다. 베토벤의 템페스트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확실히 있는 듯하다. 그리 숨 가쁜 연주가 아니었음에도 가슴이 콩닥 거린다.
두 번째 연주가 이어진다. 브라질 작곡가인 빌라 로보스의 음악이다. 처음 듣는 작곡가다. 대부분 피아니스트들이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음악에 천착하는 데 비해 이 사람은 조금은 색다른 선택을 한 듯하다. 생경한 음악. 첼리스트인 요요마가 보사노바 음반을 발표한 적이 있기에 이러한 크로스-오버적인 음악이 그렇게 까지 특이한 선택은 아니지만 남들과 다르다는 건 그만큼 특이하다는 것의 방증이다. 연주는 독특해서 좋았다. 처음 듣는 곡이기에 왈가왈부하긴 어렵지만 이전에 낙소스에서 발매한 음반으로 들었던 피아졸라가 생각나기도 한다. 같은 남미 출신이기에 그가 떠올랐는지 아니면 진짜 음악적 유사성에 의해 떠올랐는지는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약간의 휴식 뒤 연주된 마지막 곡은 슈만의 작품이었다. 10시까지는 학교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조금은 초조했다. 이러한 초조함과 불안감이야 말로 슈만의 곡과 제일 잘 맞는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클라라 슈만이라는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라인 강으로 자신을 내던진 남자. 1류 피아니스트가 되길 소망했지만 손가락 부상으로 작곡가가 돼 버린 비운의 남자. 브람스를 발굴해내어 고전파의 흐름을 이어가려 했던 남자. 4개의 교향곡을 남겼지만 관현악 사용에 많은 약점을 가졌으며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 듯한 교향곡을 만들었다며 당대 평론가들에게 조금은 폄훼 당했던 남자. 그 남자의 카니발이 시작되려 한다. 원래 피아니스트였기에 어쩌면 피아노곡이야 말로 슈만을 잘 나타내주는 음악이 아닐까 한다. 그마저도 동시대 천재 피아니스트인 리스트와 후세 사람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쇼팽에 의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첫 번째 연주부터 매우 감상적인 선율이 돋보인다. 카니발 연주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와 빌헤름 켐프의 연주를 들어본 것이 다다. 그나마 빌헤름 켐프의 연주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온 켐프의 슈만 모음곡 앨범을 구매한지 얼마 안됐기에 아직 귀에 낯설다. 그러기에 현재희 씨의 연주는 별다른 편견 없이 귓가를 간질여 주었다.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 귀는 너무 많은 연주를 들었기에 클래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흥이 무뎌진 게 아닐까 하는. 라이브로 울리는 한음 한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연주를 듣는다. 쇼팽의 녹턴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애절한 아름다움이 다시금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슈만 특유의 서정이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해 방황하는 젊음에게 조그마한 쉼터를 제공한다. 그의 비교적 초기작이기에 슈만을 평생 괴롭힌 정신병이 그의 심신을 해치기 전이 분명할 터인 이 음악에서 놀라운 치유의 힘을 느꼈다. 클라라 슈만을 얻기 위해 장인과 10여 년에 걸친 싸움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손가락을 다치지 않아 계속해서 피아니스트로 활동 하였다면. 그가 브람스를 격찬했던 만큼이나 권위 있는 누군가도 슈만의 재능을 인정하고 키워줬더라면. 그랬다면 슈만의 업적이나 클라라와의 사랑은 지금 회자되는 것 보다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인생은 찬란한 행복으로 여울지지 않았을까 한다.
연주가 끝나고 바로 일어났다. 혹여나 앙코르 곡을 연주할까, 10시에 같이 공부하기로 한 친구와의 약속에 늦지나 않을까 저어하는 마음이 이러한 결례를 범하게 했다. 기실 결례는 내 복장에서부터 찾을 수 있었다. ‘보스락’ 소리가 나는 잠바를 입고 갔기 때문이다. 타인의 음악 감상을 방해할지도 모를 이러한 옷매무새는 최근 지쳐있는 내 옹이진 마음의 표식일까. 아니면 조우석의 ‘굿바이 클래식’이란 책에서도 언급했던 클래식이란 음악이 지닌 권위에 대한 무언의 저항일까. 이 또한 모를 일이다.
예술의 전당 밖의 밤하늘은 고요한 공간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이야기한 ‘아비투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 다음번엔 조금 더 열린 공간에서 조금 덜 형식적인 모습으로 마주하길 바란다. 학교로 돌아가는 발길 위에 슈만이 흩어 놓은 음표들이 사근사근 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