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교정의 만화를 보면 별명이 '소시지' 인 아이가 나온다.
소세지? 길쭉해서? 살이 말랑말랑해서? 아아니.

앞 뒤로 꽉 막혀 있어서.

큭큭큭 웃다가 흠칫, 찔려버렸다.
저거 혹시 내 얘기 아냐;;

늘 먹는 음식만 먹고 다니는 길로만 다니는 사람이 있다. 머리 모양도 늘상 똑같고 옷차림도 그대로. 그게 바로 나다. 심지어 책도, 내게서 골드멤버쉽(!)을 발급받은 이미 안전해진 것들만 주리줄창 섭취한다.
어쩌면 그냥 돈이 많지 않아서 일수도 있고 소심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치즈맛 소세지가 되기 위해서는 야들야들하면서도 탱탱한 탄력이 필요하다. 비닐옷을 홀라당 벗고 튀어 올라 호르륵 입 안으로 튕겨 들어가는 탄력이 아닌,
정체불명의 접근 물체는 미끈한 비닐옷에 싸인 탱탱한 몸뚱이로 무조건 튕겨낼테다, 지금 내가 입은 비닐을 절대 벗지도 갈아입지도 않겠다-- 하는 조금은 과격한 탄력.

나로 하여금 신간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만들고, 나오면 그 즉시 주머니 속 10원까지 득득 긁어 모아 사고야 말리라 울부짖게 만드는 작가는 5년 전만 해도 꽤 많았고 점점 많아져서 걱정까지 됐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들이 나를 실망시킨 것인지(X) 아니면 그냥 내가 시들시들해진 것인지(O) 하나 둘씩 슬그머니 멀어지더니 지금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래도 시큰둥 저래도 시큰둥이 되어버린 나. 이런 나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건성' 이 아닐까 싶다.  건조하거나 아니면 대충이거나.

어쨌거나 나는 점점 진정한 소세지로 거듭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시도를 하지 않았고 읽을 책이 없으면 읽은 책을 또 읽었다. 꽉꽉 틀어막아 놓고 혼자 소세지 비닐을 덮어쓰고 나날이 쫄깃하고 탱탱한 탄력만을 무한대로 키워 가고 있었다. 풀뿌리보다 엉성하게 남아있는 몇 안되는 골드멤버;의 책으로만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좁게 살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소세지 꼭따리를 우득 뜯어내며 몰캉한 속살을 한 입에 구겨넣듯 어느 날, 알라딘이 덥석 나를 잡아챘다. 끊임없이 내 귀에 속살거렸다. 천운영을 읽어봐. 박민규도 재밌어. 고종석은 안 읽어? 오정희도 다시 읽지? 야 야 국내 것만 읽을거냐? 시야를 넓히라구. 저 많은 외국 작가들을 좀 보라니까-- 이번 기회에 고전들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아-- 시끄러 시끄럽다구--

솔직히 시끄러웠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읽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번역문만 보면 완벽하게 졸아버리던 내가 많은 이국의 작가들을 이제는 반가운 마음으로 펴들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신나해도 되었다.

코엘료. 세풀베다. 보르헤스. 이제 이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가고 있다. 그러고보니 모두 지구 반대편 인물들이다. 땅 파고 계속 파서 지구를 뚫고 나가 얼굴 삭 내밀면 나타날 그 곳. 뭐 아직은 시작도 안 했다. 그러니 부디 그 여정이, 지구를 계속 파서 반대편으로 나가는 과정처럼, 계속 깊어지고 깊어졌다가 다시 그렇게 얕아진다면, 나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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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07-2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 뒤로 꽉 막힌 소세지라.. 재미있지만 뜨끔한 비유네요. (님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 잘 읽고 갑니다. 근데 글자 크기를 조금 크게 하시면 안될까요? 읽기 힘들어요 . ㅠ.ㅠ

반딧불,, 2004-08-1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비유군요..
저도 뜨끔뜨끔....

열린 듯 열리지 않는 내 안의 막힌 부분에 큰 소리로...

뚫어~~펑!!!
 
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된 고서점의 주인이자 음양사인 교고쿠도. 어느 날 3류 글쟁이를 자처하는 친구 세키구치가 그에게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제시한다. 자신들의 동창인 후지노 마키오가 밀실로 들어간 후 홀연히 사라졌으며 그 후 이미 임신 중 이었던 그의 아내가 20개월이 지나도록 출산을 못하고 계속 임신 중이라는, 마치 거짓말 같은 난해한 사건. 딸랑, 하고 고서점의 풍경이 울린다. 야옹, 하고 금화고양이가 운다. 교코구도는 과자항아리를 끌어당기며 말문을 연다.

교코구도는 이성적이다. 해박하다. 그의 해박함은 그를 냉철하고 강하게 보이도록 한다. 이 세상에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그는 음양사라는 신분에 어울리지않게 주술적이라기보다는 과학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지나치게 매력적이다.
반면 세키구치는 감정적으로 보인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우유부단함이나 사건해결에 방해가 되는 듯한 감정과잉은 답답한 인상을 준다. 물론 그의 감정은 사건 해결을 위해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우부메라는 요괴에 의해 잔뜩 촉발된 등골 섬뜩한 이미지는 20개월이나 임신하고 있는 임산부와 만나 강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초반 내내 고요한 공포가 책 전체를 휘감도록 만들지만 결국 세상에 이상한 일,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다는 교코쿠도의 단호한 말은 이소설의 결말에 대한 매우 명징한 암시다.
그리고 뒤로 갈수로 급박하게 흘러가는 사건들과 서서히 파헤쳐져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건의 고리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허겁지겁 그것을 섭취하게 하고 거대한 물음표의 해답이 제시될 결말을 향해 집중력있게 매진하도록 만든다. 작가가 정교하게 짜넣은 날줄의 현실과 씨줄의 환상 사이에서 독자는 세키구치가 경험하는 공포를 동시에 체험하면서 시종일관 멀미가 날 것 같은 행복한 어지러움증을 선사받는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후반부의 사건해결과 그 결말이 지나치게 상징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빙의나 주술을 민속사회 상의 특수상황과 연계시켜 재해석해낸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모두 그렇게 컴플렉스로 점철된 과거를 통과하여 성인이 된 지금 다중인격, 마더 컴플렉스 등의 응어리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병들게한 원인을 그대로 차용한 것은 지나치게 아귀가 들어맞아 오히려 감흥을 갉아먹는 면이 있다.

초반, 양자역학과 뇌의 작용에 관한 교코구도와 세키구치의 대화야말로 이 책의 백미이며 핵심이며 주제이다. 을씨년스럽게 풍화되어가는 낡은 병원 건물에서 1년이 넘도록 배만 불러있는 기이한 임산부, 개구리 머리를 한 사라진 신생아들, 그리고 우부메. 현실에서는 쉽사리 융화되지 못하는 이런 요소들의 기괴한 접합으로 소설은 끊임없이 우리들을 환상으로 몰아가지만 결국 작가는 그러한 이미지들조차 결국에는 보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의식의 무대에 올리는 우리의 뇌에서 발생되는 문제일 뿐, 실제로는 과학적 혹은 현상적으로 진위를 밝혀낼 수 있는 것임을 말하면서, 소설 속에서 보고 읽는 것 조차도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이미지일뿐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잔인하고도 무서운, 그리고 아름답고도 슬픈 이미지로 가득하면서도 결국에는 딸랑, 하는 풍경소리처럼 단호하고도 명쾌한 이 소설은, 그 모든 이미지를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찾아 보고 싶도록 만드는, 자꾸만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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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헐리웃 액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일견 그것은 완벽해 보였다. 대중적인 인지도와 검증된 연기력을 자랑하는 남녀 주인공, 흥미로운 사건, 탄탄하고도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 그리고 철저하게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스펙타클한 액션과 정교한 CG. 영화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는 듯한 그 자신만만한 물량공세. 하지만 헐리웃이라는 꼬리표만 달고 있으면 무조건 볼만 할 것이며 돈도 별로 아깝지 않을 것 같던 그 믿음은 곧 역전이 되어 이제 그 꼬리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운다. 식상 혹은 도식. 한마디로 뻔함.

다빈치 코드는 마치 한 편의 헐리웃 영화 같다. 아니 아예 이 책 두 권을 가져다가 잘 변형시키면 바로 그럴 듯한 시나리오 한 편이 탄생할 것 같다. 각각의 작은 장이 모두 하나하나의 장면이 되고 그 속에서 인물들은 숨막히게 바삐 움직인다. 롱테이크는 절대 금물. 긴장감 넘치는 진행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 전환은 점점 빨라진다. 게다가 이 소설은 대단히 친절하게도 머리 속에 직접 화면을 구성해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며 막판에 상상못할 반전까지 제공해줌으로써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덧붙여 남자 주인공이 해리슨 포드를 닮았다고 초장부터 선언한 것을 보면 미리 캐스팅까지 신경을 써 놓은 듯한 세심함(?)까지도 엿보인다.

기호학의 대가인 로버트 랭던. 암호해독가 소피 느뵈. 두 사람이 어려운 몇 겹의 수수께끼들을 파헤치고 풀어내며 시온 수도회가 2000년을 지켜온 성배에 대한 비밀을 찾아 나서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 줄거리이다. 초반, 죽어가는 사람이 몸으로 직접 남긴 암호를 해독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두 사람의 고단한 원정은 살인사건과 결부되면서 끊임없이 추격을 당하는 긴장감 속에서 진행이 되고, 그 과정 속에 등장하는 복잡다단한 암호들의 향연과 그것의 해석을 위해 이끌어져 나오는 고대에서 현대에 걸친 종교와 기호에 관한 해박한 지식들은 실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 권이라는 분량이 무색하도록 순식간에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강한 흡인력을 지녔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맥이 죽죽 빠진다. 그리고 그 강한 흡인력이 사실은 내용의 긴박함과 흥미진진함 때문이 아닌 단지 호흡 가쁘게 구성된 장면전환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의구심이 고개를 쳐든다.

일단은 엉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오푸스데이와 바티칸 교회 그리고 시온 수도회가 얽혀 있는 것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성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문제이므로 매우 밀도있게 설명되어져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두 권 내내 그럴듯한 복선과 암시로 성배를 놓고 줄다리기하는 듯 전개되던 모든 것은 싸그리 무시한 채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너무나 단순하다. 그냥 누군가가- 아니라면 아닌거지, 하는 식의 해석은 똥줄타게 읽어제끼며 결말을 향해 달려간 독자들을 패대기치는 짓이 아닐까. 그리고 암호를 해석해나가는 과정 또한 내가 맞다면 맞는거지,의 정신으로 일관한다. 역사와 종교에 두루 능통한 기호학의 대가인 랭던과, 어렸을 때부터 숙달된 조교에 의해 양성된 암호해석의 대가인 느뵈가, 이건 이래서 이런거다 라고 하며 암호를 풀었는데 과연 누가 거기에 왜? 라는 물음을 달 수가 있겠는가. 전문가가 맞다는데, 전문가가 혼자 머리 속으로 명상을 하다가 앗!하고 암호해독의 실마리가 스치고 지나갔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말이다. 계속되는 사건들의 쓸데없어 보이는 꼬임과 우연의 남발은 사실 후반부의 반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장치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누구나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이 될 거라는 건 다 알고 있다. 다만 범인이 누군지, 혹은 진실은 무엇인지 하는 문제가 얼마나 멋들어지고 정교하게 (심지어 뒷통수까지 때려주면서) 결말에 이르는가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신없이 부풀었던 일말의 그러한 기대감은 후반부에 가서 바람빠진 풍선처럼 쉬식 소리를 내며 쪼글쪼글해져 버리고 만다.

사실 기호니 암호니 하는 것은 일상에서 늘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흥미로운 동시에 생소하고 어렵다. 게다가 종교의 역사와 연관되고, 라틴어도 잘 모르는 판국에 더 어려운 듣도보도 못한 언어까지 등장을 하면 일단 겁이 나면서 보통의 추리소설을 읽듯이 스스로 해결을 해보려는 시도를 조금은 접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의 지적 활동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류의 소설을 읽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지나치게 친절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빠른 장면 전환과, 모처럼 고민을 하려고 하면 전문가들이 구체적인 과정도 없이 바로 해답을 제시해주는 과잉친절. 압축과 여운없이 구구절절 읊어서 나열되는 사건과 해결들. 진심으로 안타깝다.

작가 댄 브라운은 이 책에 나오는 날조된 성서와 숨겨진 성배에 관한 이야기가 100% 진실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가려져 있던 순전한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 게다가 그것이 세계를 받치고 있는 기둥 하나를 뿌리채 흔들만큼 강력한 것이라면, 불의를 향해 일침을 날리는 그런 보물찾기 같은 소재는 언제나 사람을 매혹시킨다.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뭉개진 여성성의 비밀이, 댄 브라운의 말대로 진정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과 놀라움,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의 즐거움, 어쩌면 이것이 이 책이 준 가장 크고도 유일한 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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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7-20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 진짜 잘 썼어요^^^^

andy 2004-08-0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로서는 c 학점.. 푸코보단 가벼운 인문학적 교양의 재미로서는 a 학점. 그 둘을 엄청나게 급박한 편집으로 얽어놓은 작가의 구성은.. b 학점

어디에도 2004-08-03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dy님.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단 두 줄에 압축해주시네요. ^^
(님의 리뷰를 읽고나서, 저는, 좌절했다죠-_-)

sayonara 2004-10-2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도 역시 저를 주눅들게 하는군요.
저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다 빈치 코드'의 리뷰를 못쓰겠습니다. ㅎㅎㅎ

어디에도 2004-10-29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이세요.
리뷰 1000편도 넘으시는 분께서 칭찬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
 

...그러나 나는 항상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나가지 말라는 가냘픈 호소도 내면에 있었다.
너는 네 안의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게 아니냐. 여기서 짐승처럼 사는게 네가 원한게 아니더냐. 사람 사이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거기에는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들여다 보면
뛰어 들고 싶은 법이다. 겉멋같으니! 뛰어 들겠다. 가고 싶으니 가겠다.

그래서 나는 절과 겨울과 눈의 극장에서 나왔다.
벗이여 스승이여 너는 세상에 참 아름다운 이름이 많다고 했다.
물빛의 수색(水色), 강의 서쪽 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인 서강(西江)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준 것은 너였다.
사람의 이름이 지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어떤 이름에는 살아 있어도 그런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가장 흔한 질료인 말에 힘을 넣고 신을 넣고 혼이 되어 함께 뛰어노는 일이 문학이라고 너는 말했다. 이 애, 세월 세월 세월은 가고 이름은 남았다. 추억은 경멸할 만한 것이다. 그것에 먹히는 한은.

가볍게 내리는 비처럼 머리를 두드려 깨우는 추억은 아름답다. 우리가 함께 살아있는 동안.

 

이 글은 성석제가 친구 기형도를 추억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5년도 더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의 책 [위대한 거짓말]을 만났을 때 난 대략 6%쯤 남아있던 불신을 모조리 거두고 완벽한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읽은지도 오래되고 수중에도 없는 책이라(아아, 너는 정녕 어디에 있단 말이냐 흑) 솔직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허나 수첩 한 귀퉁이에 옮겨 놓은 저 문장들 중 나는 특히 사람 사이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는 구절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그리고 심연 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데 무서워서 동동거리고만 있던 내 뒤통수를 가격하며 겉멋!이라고 일깨워 준 그를 나는 이 글의 제목처럼 '스승' 이라고 모시기 시작했다.

96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만난 그의 <첫사랑>은 특이한 울림, 정도로 기억되었다.
다음에 읽은 단편집 [새가 되었네]는 내 관심사를 그의 이름 세 글자로 온통 메다꽂게 만들만큼 재미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 낸 장편 [왕을 찾아서]와 장掌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연달아 내처 읽었는데 그 후 난 그를 재밌어서 죽겠는 사람의 1순위로 바로 등극시키고 내친 김에 그를 덜컥 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성냥불처럼 화르륵 타올랐다가 이내 꺼져버리지 않도록 만들어준 진정한 힘은 그의 '소설' 이 아니라 그냥 그의 '글' 이었다.  
그 '글'이 바로 [위대한 거짓말]의 말미에 나오는 <스승들>이다.

그 글에서 성석제는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 그 속에서 만난 '스승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낸다. 그 속에는 바로 성석제 본인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글이 재밌기는 했을 망정 대단히 훌륭하거나 뛰어나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속의 똘망한 소년이 혹은 얼치기 같은 젊은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버린, 사소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나온 책 [즐겁게 춤을 추다가]를 읽다가, '겨울 눈밭을 보며 나는 울었네'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곳에서 죽고 싶다' 고 고백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덩달아 눈물이 날 뻔 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사람들은 그의 농담과 수사에 익숙해져 그를 재미있는 혹은 웃긴 이란 형용사로 수식하기를 즐긴다. 물론 그것은 꽤나 어울리는데다 가장 적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게 그는, 웃음이 아닌 웃음으로 내 심연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 방심하게 만드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항상 나를,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게, 만드는 묘한 존재다. 
그리고 웃기는 것보다 울리는 것보다 언제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거라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 나의 애정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다. 어쩌다 놓쳤는지 제대로 가는건지 과녁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어 모르겠다. 화살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다해도, 나는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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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무려 4년 동안이나 나는 한 아이를 짝사랑했다. 짝사랑이라는 단어는 이미 너무 흔해져버리다 못해 빛을 잃고 너덜너덜해진지 오래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저 단어를 떠올리면, 먼 발치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다 쓸쓸히 돌아선다거나, 마냥 하염없이 기다리다 주려고 산 꽃이 시들다 못해 꼬부라져 버린다거나 하는 드라마에서 자주 우려먹는 간절한 모습의 상상을 하기도 하는데, 참나,
내가 그랬다. -_- 생각하면 정말 창피하고 안쓰러운, 그래서 중학교 얘기만 나오면 나는 머리 속에서 팔린 쪽들의 대장정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쓰면서, 읽던 책이 재미없으면 확 덮어버리듯 머리 속도 늘 그렇게 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사는 동안 전혀라고 해도 좋을만큼 생각지도 않고 사는 중학교 시절의 그 아이가, 신기하게도 1년에 한 두번은 꼭 꿈 속에 등장을 한다. 그 때 그 모습 그대로(물론 지금 모습은 동창회에 안 가봤으니 모른다.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여전히 그대로라고도 하더라만) 해사한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주로 잘해주는 역할로 당연지사 주인공이다. 시대배경은 물론 시시때때로 변하는게 꿈이긴 하지만 주로 중학교 시절이고 나도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다. 주위 친구들은 짬뽕이 되어서 고등학교 때 친구나 현재의 주변 인간들이 죄다 나오기도 하지만, 그애와 나는 항상 그 교복에 그 머리모양으로 친하게(!) 지내며 사랑의 줄다리기를 한다(우엑).

그런데 그 꿈을 꾸다가 깨고 나면 늘상 한동안은 엇 여기가 어디냐, 하는 어리둥절함을 느낀다. 꿈 속에서 너무 희희낙락 했기 때문에 깨고 나서 아쉬워 전화로 나를 깨운 인간을 저주하기도 했고, 되돌아온 현실이 문득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져서 울적했던 적도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그 때의 짝사랑이 얼마나 내 사춘기에 처절한 생채기를 남겼으면 이 날 이 때까지 욕구불만을 꿈으로 해소하려고 하는가 하는 조금은 안쓰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지금 따져보면 생채기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하다.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널뛰고 쓰러지고 하는 생쑈였을 뿐) 어쨌거나,  

그 애는 소위 말하는 전교적으로 노는 인기덩어리였다. 공부를 잘하는 건 기본이고 외모가 받쳐주는 건 필수코스에다 예체능까지 섭렵해서 매번 추종자들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만드는, 지금 생각하면 참 내 취향은 아니다. 사실, 그 때도 처음부터 그 애가 내 가슴에 와락 꽂혀서 내 파란 중학 시절을 온통 갖다 바치리 하고 마음 먹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편지였다.

그 당시 워낙 편지 쓰는 걸 좋아했던 나는 혼자서 쓴 편지에 스스로 도취되어; 아무도 원하지 않던 연대중(연애편지대필중앙위원회)을 홀로 자발적으로 결성하여 회장직을 자칭하고 다녔는데 장난처럼 시작한 그 일이 어쩌다보니 반은 진지해져버리고 만 것이 결정적으로 문제라면 문제였다. 친구 하나가 장난 식으로 대필을 부탁했고, 의뢰받고 쓴 그 첫 편지를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검수를 받았는데 의외로 괜찮다느니, 문장이 살아있고 구구절절 애틋하다느니, 심지어 계절의 변화까지 민감하게 포착하여 편지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연애편지사상 전무후무하다느니 하는 예상치 못한 뜨거운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짐작하다시피 결코 잘 쓰지는 못했다. 내가 친구들보다 잘 쓰는 것 처럼 느껴졌던 단 하나의 이유는 내가 또래에 비해 달짝지근하고  느끼한 단어들을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 느글한 단어들의 출처는 흠흠)

어쨌든 내가 진짜 잘써서 그랬건 잘 쓰느라 보려고 그랬건 지가 쓰기엔 귀찮아서 그랬건 난 우습게도 진짜로 몇 통의 편지를 대필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우스웠던 건 그 편지의 수신자는 단 한 명, 바로 그 인기덩어리였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이미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이 오고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 만발해 있고 사람을 그 속에 맞추는 일이 더 많다는, 그게 사춘기라는 걸 말이다. 스스로에게 감정이 생기자 그 인기덩어리에게 쓰는 편지는 쉽고도 어려워졌다. 감정을 드러내고 분출하기에는 쉬웠지만 발신자의 이름은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어려운 심정이었다.
아, 영화 '시라노 드 벨주락' 의 주인공 시라노처럼, 아리따운 록산느에게 추한 자신을 드러내진 못하고 그저 잘생긴 이의 뒤에 숨어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남의 이름으로 전하는 시라노처럼, 나는 진정 괴로워했다......
고 말하고도 싶지만, 사실 마침 그 즈음인지 언젠지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나오는 그 영화를 본 탓에 진정 그처럼 멋있는 사랑 이야기에 나를 대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도 남았지만, 어디 현실이 영화와 같으랴. 아니 내가 어찌 그리 멋있을 수가 있으랴;

그 애가 몇 반의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아니더라 새로 전학 온 누구한테로 넘어갔다더라 하는 진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 가운데, 그 애는 속절없이 써 보낸 발신인 없는 편지가(난 내 감정을 너무나 사랑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멋진 시라노가 되기를 애저녁에 때려친 나는 감정이 북받치는 날이면 일필휘지로, 용기가 없어서 그냥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둥의 무시무시한 편지를 몇 통 보냈던 것 같다;) 내 소행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답장. 네 마음 알았으니 고만 보내라,도 아니고 일단 친하게 지내자는 형식적인 내용도 아니고 그것은 그냥 편지였다. 그저 편지를 잘 받았다는 진정한 답장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를 바라는 애절한 심정도 아닌 채 그저 혼자서 연료를 소진해가며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까지도 그 꼭꼭 눌러 쓴 글씨체를 붙들고 계속 마음을 꺼트리지 못했다.

나는 정말 사춘기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로 그 때 창피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 감정을 너무 쏟아버려서 별로 남은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때는 심하게 출렁거렸다. 별것 아닌 그 때의 그 짝사랑이 지금까지 내내 그리운 게 아닌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 그 애가 나를 외면해서, 와 같은 상호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가 내 감정에 잡아먹혀서 그것이 나를 조종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인 것만 보아도, 한 마디로 나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맞구나 싶다. 
알럽스쿨이 한참 성황을 이루고 있었을 때 같이 가자는 협박이 들어와도 나는 중학교 모임에 갈 수가 없었다. 소심하고 작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확률은 무척 높지만 그래도 나는 그애들을(그리고 그 때의 나를) 기억하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간혹 꾸는 중학 시절의 꿈은,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안 좋은 꿈으로 분류된다.
하룻밤의 꿈 때문에 기분이 울적해져서, 그 땐 그랬지 하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들 허공으로 날리며 쓴웃음 짓는 일이나 생각도 하기 싫다며 황급히 머리를 뒤흔들어 기억들을 섞어버리는 일 따위 별로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떨칠 수 없는 아쉬운 자각 하나가 매번 고개를 쳐 든다.
아마도 다시는 그렇게 완벽하게 유치해지며 나를 내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안도하는 자각. 어쩌면 다짐하는 다짐.


뻔한 결말이지만 이젠 슬슬 그립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그 때의 내 모습을 경계한다.
또다시 감정에만 휘둘릴까봐(나는야 감정의 동물) 나는 그 시절을 오롯하게 간직할 수 없다.
   
허나 이젠, 꿈은 사랑하기로 했다. 다만 너무 자주 꾸지만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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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0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참 글 잘쓰시네요.
저는 찜해둔 방들 가끔 들어와 글 한두 편씩 꺼내어 읽고 나갑니다.
오늘 아침 좋은 글 하나 읽었네요.^^

어디에도 2004-08-0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저도 그래요. 좋은 님들이 늘어날수록 읽어야할 글은 많은데 머리는 하나, 눈은 두 개, 그대로니까요. 칭찬해주셔서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