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신문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고등학생이 대학에 떡 하니 들어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수능을 어떤 방식으로 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안보이는 대신 귀는 잘 들리니 공부할 내용을 모두 카세트 테잎에 녹음을 해서 그걸 주리줄창 들으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다른 이들에게 이 얘기를 해주면 대부분이, 그 좋은 대학을 들어갔으니 정말 대단하다 혹은 그 많은 내용을 어찌 다 녹음했나 아니면 계속 듣기만 했는데 성적이 좋은건 원래 머리가 좋은건가, 등등의 분분한 의견을 내놓기가 바빴는데, 사실 내가 그 신문기사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역시나 남들이 쉽게 해내지 못하는 것을 이룬 그의 뒤에는 엄마라는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 그 많은 내용을 수시로 녹음해주고 들려주고 공부도 봐주고 거기다가 엄마가 항상 붙어 있을 수 없을 때는 '아르바이트'까지 고용을 해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밀어준 대단한 엄마. 그럼 엄마 때문에, 그 뜨끈한 모성애 때문에 내가 내내 그 기사를 상기하고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솔직히 좀 우습지만, 정작 내 마음을 확 잡아끈 것은 단 하나, 그 '아르바이트'라는 단어였다.
그건 다시 말해 다름아닌 바로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
우오오 이런 세상에. 그런 멋진 일이. 비록 재미없는 교과서나 참고서만 읽어야 할 지언정 나도, 나도 그런거 하고 싶단 말이다-- 혼자 머리 속으로 울부짖으며 안타까워 하기를 석 삼일. 뭐 그런게 부럽냐고 웃기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아무에게도 말은 못하고 그저 마음만 빨갛게 충혈되었었지만, 정녕 나는 그 흔하지 않은 일을 보람있게 해치운 이름모를 그 알바생이 참 많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런 일로 내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혼자 상상하면서, 뇌주름 사이에 스윽-, 하고 싶은 일의 하나로 등재시켜 버렸다. 뭐 기왕이면 돈 무진장 많은 심심하고 무료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고용되어 재미난 소설 같은 걸 낭낭 읽어주는 일이라면 훨씬 더 멋들어지겠지만. 어쨌거나.
생각해보니 그래도 책 읽어주는 일은 영영 절대로 불가능해서 상상으로만 가능한, 꼭 그런 일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최고로 부러웠던 '그녀의 직업'에 비한다면, 말이다.
몇 년 전,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내, 나는 그녀를 질투했다. 정말로 내가 그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면 달까지 솟았을지도 모를만큼 어마하게 피어났고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아쉬움이 땅을 파고 들어가 지구 멘틀 위를 떠다닐 정도로,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사실, 웃기지만, 그녀는 영화 속 주인공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지구를 반 바퀴 돌아 그 곳을 찾아간다해도 웬지 그녀가 여전히 작은 책상을 앞에다 두고 거기 앉아 있을 것만 같다.
그 곳, '중앙역'에.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받고 편지를 대신 써 주고 부쳐주는 일을 하는 그녀. 의뢰인이 부르는데로 쓰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쓰기도 하고 돈만 받고 편지를 부치지는 않는 이상한 그녀. 나는 그 영화를 보고 포르투칼어를 배워볼까 하고도 생각했었다. 돗자리를 옆구리에 말아 끼고 그 곳을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아니면 다른 문맹국을 찾아가면 사업이 더 번창하지 않겠나, 하며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그리고, 힘들게 외국어 배우고 그 먼데까지 가느니 서울역은 어떨까 하는 웃긴 생각까지도, 나는 진지하게 해댔다. 지금 생각이지만 어쩌면, 나는 그저 부러워하고 상상하는 그 재미만 느꼈을 뿐, 누가 진짜로 하라고 확 밀어준다면 슬그머니 발을 뺐을지도 모르겠다. 등따시고 배부른 삶, 그 삶의 허기를 그저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 입에 풀칠, 하나 만을 목표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나는 그 풀칠할 돈을 버는 일이 진정 내가 바래왔던 것이며 하고 싶었던 일이며 보람도 있고 돈까지 많이 버는 것이기를, 하는 바램을 아주 예전에 내다버렸다. 그런 희망적이고 바람직한 생각만 하고 살기에는 내가 너무 늙어버렸고 찌들었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그 길을 가리라 할만한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것도 모두 다 희미해져 버렸다. 아니 사실 원래부터 선명하게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포기한 부분은 돈에만 국한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임금 저노동의 날날한 삶(이 판국에 고임금을 바랄 순 없으니;)을 아직도, 여전히,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그곳, 중앙역에 꼭 가보고 싶다. 보너스로 춘광사설 속 이과수 폭포까지 볼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지금 내가 꾸고 있는 두 겹의 꿈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