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는 사람이 없어도 나는 답한다.
-호어스트 에버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진지하게 실컷 이야기했는데 말이 끝나기게 무섭도록 '누가 물어봤나?' 하는, 찬물 한 바가지 끼얹은 듯한 반응이 연출되면, 참 그것만큼 얼굴 벌개지는 일도 없다.
내가 한동안 필사적으로 꺼려해온 일이 있다면 바로 그것, 아- 누가 물어봤냐고-의 분위기이다. 그러니. 묻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머리 속의 오만육천가지 대답 혹은 잡생각들을 그저 그 속에 계속 가두고 있어야 했다. 솔직히 편했다.
하지만 때로는 입을 계속 꾹 다물고 있다가, 혹은 혀 밑으로 부글거리는 말들을 굴리고만 있다가 혼자 뒤돌아서서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내 자신이 발견되는 날도 있었다. 오래된 사원의 갈라진 틈새에 비밀을 불어 넣고 천년 봉인을 해버린 양조위처럼 멋있게도 아니고, 대나무 숲에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임금님 전속 이발사처럼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비맞은 땡중마냥 궁시렁궁시렁 혼자 추임새를 넣어가며. 거 참 처량하게시리.
허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택도 없는 신비주의 전략;은 이제 그만 때려치련다. 묻지 않아도 혼자서 주절주절했던 벌건 얼굴의 나로, 잠시 돌아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