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아홉살 한 아이가 운동회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대회에 나가 동상을 받았다.
생애 처음으로 받은 상에 놀라고 기뻐했는데 며칠 후, 그 그림이 액자에 담겨 복도에 떡 걸리기까지 하자 그 아이는 뿌듯한 마음에 일부러 그 복도를 뻔질나게 걸어 다녔다.
상이라는 것이 그토록 흐뭇하게 좋은 거라는 걸 속물스레 눈치를 챈 것인지
아니면 진지하게 그림 그리는 자체가 좋아서 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번도 스스로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그 꼬마는
그날 이후로 장래희망을 '화가' 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 옆에 붙어 있던 나래미술학원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아홉살이던 나이가 열 한살이 될 때까지 2년동안 그 아이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는 어른들의 질문이나 학년 초 써야했던 가정환경조사서의 장래희망란에도 지속적으로 화가라는 일관된 대답을 고수했다. 어느 날인가 누군지 모를 어느 어른의 한 마디 말을 듣기 전까지, 그 아이는 자신의 희망이 그저 좋았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네! 화가요!
......그래.
......참, 그거 되게 배고픈 직업인데. 왜 하필 화가가 되고 싶니?
집이 잘 살지 않아서 였을까. 그래서 스스로 벌지 않으면 굶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을까. 아니면 재능이 없다는 걸 기특하게도 일찍 눈치채서 였을까. 그도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야심이라도 은근히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4학년 그 아이는 휘청, 흔들리며 장래희망을 급선회해야 했다.
화가요! 라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해서는 왠지 비웃음을 살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배고플거라는 그 한마디가 그렇게도 무서웠나.
집은 쓰러져가고 배는 곯고 살았나.
그렇지도 않았으면서, 그 아이는 왜 그렇게 그것에 연연해야 했는지.
표정이 굳어지고 머리 속은 복잡해진채 왜 잔뜩 주눅이 들어야만 했는지.
그러던 어느 날 위인전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숙제가 그 아이를 찾아 왔다.
위인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녀석, 가장 만만해 보이는 슈바이처를 골랐다. 그리고 뻔한 독후감의 공식에 입각하여 마지막 줄을 멋지게 장식했다.
저도 커서 슈바이처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고 싶습니다.
일기장의 끝이 항상, '참 좋았다' '참 재미있었다' 등등으로 비슷하게 마무리되던 그 때, 독후감의 끝 또한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혹은 '본 받고 싶습니다'로 정해진 공식인양 따라하던 그 시절에, 그 아이는 문득 놀라고 말았다.
아, 이런 뜨거운 반응이라니. 예상치 못했던 주변 사람들의 이 열광이라니. 그렇구나. 그런거구나.
그 아이,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화가라고 말했던 예전보다 엄마가 더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본인의 결정이 주변 어른들의 칭찬에 의해 탄력을 받는 것을 느낀다.
tv속에 하얀 가운을 펄럭이는 멋진 의사들이 등장한다.
스스로도 머리 속으로 상상을 하며 잔뜩 고무된다.
정말로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로 떠나리라 다짐까지 한다.
그렇게 그 아이의 꿈은 결정되었다.
하지만 예상하다시피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저 열심히 해서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어른들이 말할수록 그 아이는 다시 예전처럼 슬슬 그 꿈을 입안에 감추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무척이나 작은 아이가 농구선수가 되고 싶어요- 라고 한다거나 못생기고 뚱뚱한 아이가 미스코리아가 될거에요! 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꿈을 가만히 들어주질 않는다.
어느새 중학생이 된 그 아이는 장래희망란에 의사라고 또박또박 적는 것은 웬지 허황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정말로 이루고 싶은 것이라면,
코피 터지게 공부해서 성적을 올리면 되는 것이 아니냐
그 정도로 노력하지도 않고 어떻게 꿈을 이루려고 하느냐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거라면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
누군가 말할 수도 있겠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 아이가 진정 원했던 것은 아무데도 없었다.
안그래도 한참 사춘기라는 괴물을 만나
나는 누구냐 어디로 가느냐 옆반의 용팔이는 왜 순이만 좋아하느냐
하는 질풍노도같은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던 그 아이는 그제서야 진정으로 슈바이처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이 그저, 본 받고 싶습니다,라는 문장 하나로 본 받아 지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 아이의 최대의 장점이자 최대의 단점은 바로 그것,
포기가 빠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은 사라졌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그 아이에게 더이상 커서 뭐가 될테냐 따위의 질문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대신 그 질문의 친척뻘쯤 되는 무슨 과에 가고 싶냐, 가 등장하긴 했지만,
그 아이는 순간순간 그 때의 기분에 따라 떠오르는 대로 대충 대답했다.
결국 아무 대학 아무 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아홉살에 시작했던 꿈의 여정을
제대로 반추해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로부터 20년이 가깝게 지난 지금, 그 아이는 아무 것도 되지 못했다.
화가나 의사. 다른 아이들의 장래희망으로 단골이었던 선생님, 간호사, 과학자, 대통령등등
심지어 그 당시에는 등장조차 별로 하지 않았던 평범한 회사원도 되지 못했다.
한 때는 가정법을 남용하며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지 않았나,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어떤 과정을 겪어야 했든 결국 그 아이에게는
뭔가가 되기 위해서나 이루기 위해 혹은 그저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가장 필요한
'열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어른이라는 껍데기를 둘러쓴 아이는 예전과 달리 열정에 불을 지피는 방법을 조금은 터득했다. 그리고 누군가 찬물을 끼얹더라도 개의치 않고 계속 지펴나갈 힘을 기르고 있다. 그것이 단지 이기심이라는 뻔뻔한 껍데기에서 나온 것일망정 더이상 그 아이가 착한아이컴플렉스에 빠져 있지 않길 바란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고 해서
스스로가 미미한 존재라고 느끼지는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죽음이 코 앞에 오기 전까지는 삶이란 항상 현재진행형인 것을
내내 상기하기를, 정말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