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심리적 경력 혹은 경험이 중요하다,는 글을 며칠 전에 어디에선가 읽었다.

정확한 문장인지조차 몰라서, 며칠을 계속 어디서 읽었더라 어디였더라 고민을 하고
검색까지 해봤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치매의 진정한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랄까.

저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당연하지!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 나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이것저것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결국
'내가 글 못 쓰는 것은 어쩌면 이리도 당연한가' 하는 서글픈 결론이었다.
 
사실 나는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심리적 경험이라면 왠만큼은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나의 환경은 평범하지만은 않으며 핵심적으로 나의 부모는 평범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기에 나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덕에 경력도 좀 쌓지 않았나,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거의 완벽하게 평범한 존재다.
평범해서 싫다는 게 아니라 나의 과거와 나의 기억만으로는 아무런 상상력도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 못내 서글픈 것이다.

사실 이건, 변명이다. 글을 쓰고 싶은데 소재가 없거나
소재를 발굴해도 그것을 글로 짜 낼 실력이 모자라거나
아니면 결국 여차저차 귀찮거나, 한 요즘의 내 상태에 대한 우스운 위안이다.

종종 나는 머리 속으로 글을 쓴다. 하나의 꼬투리가 잡히면 그걸 물고 늘어져서
머리 속의 하얀 메모장을 한 줄 한 줄 채워나간다. 실제로 워드를 치듯 단어를 고치기도 하고
문장의 순서를 재배열하기도 한다. 혼자 멍하니 그러고 있다 퍼뜩 정신이 돌아오면
아, 이걸 놓치면 안되겠다, 얼른 옮겨야겠다, 생각하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머리 속은 다른 표정을 짓는다. 백치처럼 배시시 웃기만 한다.

야! 웃지만 말고 아까 그거, 내 생각 내가 쓴 것, 그걸 내놓으란 말이야!
몰라? 먹었어? 배고파서 삼켰어?
야! 이건 또 뭐야. 아까 그게 아니잖아. 비슷하지도 않잖아. 이왕 뱉어낼거면 좀 닮은 걸
내놓는게 예의 아니냐. 뭐, 기억이 안나? 배째?

늘상 내가 진다. 머리는 지르르 울리며 쥐가 난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나는 열받은 마음으로
꾸역꾸역 마침표를 위해 달려간다. 그리하여 결국, (예를 들면)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맛도 좋고 든든하다, 행복한 여름밤이여, 하고 쓰려던 글은
아이스크림의 속살을 묘사하다 슬슬 속이 터지고
맛을 써내려가다 입 안에 남은 단맛의 잔해에 기분이 상하고
든든한 기분은 아이스크림이 한 숟가락씩 엄청난 칼로리로 변신하는 과정을 거쳐 결국,
아- 아이스크림도 살도 여름도 다 싫어 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쓴다. 글이 제멋대로 형용사 하나 접속사 하나로 방향을 바꾸며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버린다.
그래서 상상한다. 머리랑 컴퓨터랑 케이블로 연결을 해서
생각하는 게 바로바로 문장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 속에서 길을 잃는다.
좁은 길 하나로 우르르 나오려는 것들이 병목현상을 일으키기도 하고
폐쇄된 도로처럼 음산한 공동이 되기도 한다. 혹은
파도에 휩쓸려 멀어지는, 잡을 수 없는 쓰레빠 한 짝이 난무하기도 한다.

나는 오늘도 둥실둥실 멀어지는 그것을 잡으려 안간힘을 써본다.
적확하지 않은 것들을 뭉뚱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화장실 벽의 낙서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결국 혼자서 위안한다.

 


 

 

뜬금없는 이 이미지는
영화 <내가 쓴 것>의 포스터.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나의 글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_-

역시나 이 글도, 나를 먹어치웠다. 처음에 무슨 얘기를 하려던 것인지 기억이 까맣다.

나의 주절거림, 나의 낙서, 너는 정녕 어디로 가는 것이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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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0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랑 컴퓨터랑 케이블이랑 연결되면 좋겠다고요?
아이 무서워.^^;;;

▶◀소굼 2004-08-09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 보단 무선으로 하심이^^; 중간에 날아가는 정보들을 쓱싹;

어디에도 2004-08-0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저도 쓰면서 생각했어요. 이거 머리통엔 꽂을 데도 마땅찮은데 을마나 게으르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았나-하구요. 무서워하지 마세요. 귀여우시잖아요.^^;
소굼님: 무선이라니! 역시 님은 한 수 위시군욥! 근데 쓱싹- 요것은 쓱싹- 가로채시겠다는 뜻인가요? 우호호 그러시다면 님이 원하시는 정보와 이미지들(뭉게뭉게;)을 날려드릴게요. 흐흐

urblue 2004-08-09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하시네요. 밤에 잠 안 올 때면 저도 이런저런 문장을 만든답니다. 그러다, 이거 글로 옮겨야지, 하고 컴 앞에 앉으면 졸리고 글도 안나오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물론 깡그리 잊어먹지요. ^^

tarsta 2004-08-1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어째서 정처없는 주절거림입니까.
<하려던 이야기끈을 자주 놓치게 된다>는 멋없는 주제를 요렇게 재밌게 말씀하시고서는.!

음..머리를 케이블로 연결하면 정말 좋겠어요 공각기동대를 보니까요, 생각만으로 의사전달이 가능하더군요.
...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도 참 번거로운점이 있겠구나 싶습니다. 생각은, 마치 통제할 수 없는 꿈처럼 순식간에 자기 멋대로 이리저리 굴러가는데 그 중에서 이것은 전달할 것, 이것은 나 혼자 생각할 것으로 분류하는게 느릿느릿하고 그러면.. 역시 엉키지 않을까요. 분류하는 중에 고민하고 헤메다가 생각을 또 놓치고... ㅠ.ㅠ

어디에도 2004-08-1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스타님!! 그 생각은 제가 또 못했네요. 역시 단순.; 님 말씀을 듣고보니, 그렇게 하면 전송된 그 생각들은 글이 아니라 정말 무슨 파편 덩어리들일거 같네요. 그래도 님, 울지 마세요. 님의 파편들은 아름답잖아요.

(우울하냐님. 일루 잠깐만... 님 머리랑 제 컴퓨터랑 좀 연결해야겠어요. 부시럭부시럭)

아영엄마 2004-08-14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토미노커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런 류의 이야기가 나오네요.. 자기는 다른 일을 하면서 생각(작가인지라 소설의 글이 되겠죠)이 타자기에 전송되어 저절로 쳐진다는... 내용상으로는 우주선의 약영향을 받은 탓으로 몸과 영혼이 잠식당하는..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네요.쩝~

아영엄마 2004-08-14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나..(더 써야하는데 저장을 눌러버렸음..^^;;) 실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한 것이 날라가 버리기 전에-귀찮다고 메모를 할 생각은 안하고..- 어딘가에 저장되었으면 하고 싶을 때가 많답니다. ^^* 아예 노트북이라고 끼고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어디에도 2004-08-14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저도 그 소설 읽어보고 싶네요.
사실 케이블 어쩌구 하면서 글을 쓸 때도 기계치인 제가 가당찮은 말을 늘어 놓는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몸과 영혼을 잠식당한다...는 그 소설은 웬지 섬뜩한 것이 재미있을 듯 해요.^^
아 근데 전 노트북이 있어도 케이블 어쩌고 하는 소리를 했을거에요. 결국은 제가 손가락 움직여서 키보드 치는 것조차 귀찮아 하는 게으름뱅이라는 결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