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Black Horses'

 Emil No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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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럴서가 > 신파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성이 퇴행하고, 상업적으로 굳어지면 신파가 된다. 생각해보면, 신파적인 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유형들ㅡ무엇으로 고통받고, 무엇으로 행복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장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직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도록 선정적으로 변해있다. 그러나 그 안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고정하고, 단순화하고, 선정화시켰기 때문에, 그토록 위력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신파 속에서 다시 보편성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 보편적인 예술을 끄집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누군가가 만들어낸 보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신파로 퇴행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열역학 제 2법칙 : 뜨거워진 것이 식는 것은 쉽지만 식은 것을 뜨겁게 하는 것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신파에서 보편성을 정제해 구원해내는 것은 창조적인 숨결을 요구한다. 인공호흡이다.

신파를 Cool한 형식으로 재편해서 그 속에서 보편성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것도, 역시 가능할 것이다.

저열한 것에 숭고한 것이 있다.

 

 

언젠가 파적 삼아 썼던 위의 글이 떠오른 건 Y 때문이다. 그녀에게 놀라는 것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드라마를 보면서 다음에 전개될 상황을 정확히 예견하곤 하는 것이다. 보아하니 저 여자는 곧 추락사하겠군, 이 남자는 곧 이런 대사를 내뱉겠군, 하는 식이다. 영화와 TV 드라마의 배경이 도회인 것이 특별씨티들의 감성과 길항하는 것인지(서울서 나고 자란 그녀를 나는 특별씨티라 부르고, 그녀는 나를 컨츄리라 부른다), 아니면 드라마에 감초처럼 박히는 클리셰 같은 것을 그녀가 감각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적시 뒤에 나오는 드라마의 실연實演은 내게 자주 놀라운 것이다.

신파가 일종의 보편에 닿아 있고,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의 재연은 내게 익숙한 일이 아니다. 생활의 보편이 빠져있을 때 나는 종종 고집스런 거위나 치기의 나신상태가 되고, 이럴 때 생기는 서로의 다툼은 퍽으나 골 깊은 것이 되기 마련인데, 이 경우의 많은 부분은 아마도 나의 잘못일 터이다. 俗에서 추출된 보편을 일종의 삶의 지혜라 부를 수 있다면, 그녀를 이해해가면서 나는 지금 허방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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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선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고양이 타마이다. 유교수가 타마와 친해지는 과정을 그린 에피소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로 화장실에서 가뿐하게 한 편 읽으면 장운동 촉진에는 이만한 게 없다.사실 요구르트 마시면서 이렇게 배를 잡고 웃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 다음으로는 역시 만화 '닥터 스쿠르'에 나오는 고양이 나비. 그 집 구성원 중 가장 강하다는 수탉 병순이를 제일 좋아하지만 나비도 구성원 중 가장 막강한 콧대를 자랑하는지라 나는 나비도 존경한다.-'구성원 중 가장 강하다'는 이 문구가 소설과 만화를 통틀어 나를 가장 웃긴 문구라는 게 내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잠시 우리집에 기거하다 사라진 도둑고양이.냉장고와 벽 틈에 들어가서 1주일을 버티기도 하던 엽기적인 성격으로 당시 개 이외의 동물과 의사소통경험이 전무하던 나를 놀라게 했다. 고양이 혀에 바늘이 돋아 있다는 것을 내게 처음 알려준 고마운 존재.  혀로 손을 핥을 때의 그 까슬까슬한 느낌.

나는 워낙 개를 좋아한다. 개는 오라고 하지 않아도 오고 고양이는 오라고 해도 오지 않는다는 --개의 그  무작정 덤벼드는 천방지축의 정이 헤픈 성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면 닮는다던가? 나는 그 동안 약간 개 같은 인간이 아니었던가.
심오한 반성과 성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즘 내 연구 대상은 고양이다.
일단 '에라,이 고양이 같은 인간아!'라는 욕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든다는 객적은 이유 외에도  내 아이가 아무래도 개같은 성격보다는 고양이같은 성격을 지닌 듯한 징후를 이래저래 포착했기 때문이고 생각이 흐르고 흘러
어쩌면 고양이같은 인간이 세상 살기 휠씬 수월하지 않은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아주 극단적으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하는 은혜도 모르는 순싸가지라는 견해와 도도한 성품에 매료되어 기꺼이 종이 되겠다는 충성파로 나뉜다.나는 쭉 전자였으나 (지금도,'에라 이 개같은 인간아!'보다는 '에라 이 고양이같은 인간아'가 훨씬 마음에 와닿는 욕이건만) 나도 좀 고양이같은 족속으로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유혹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봉착하는 이 문제. 고양이같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자질이 달린다는 것. 그 엄청난 능력을 어찌 구비할 수 있을 것인가.
연구를 위해 '고양이라서 다행이야'라는 책을 주문했다.
저런 제목을뽑은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내 아이가 고양이라서 다행이야..해야 하나?
개같은 아이가 되어도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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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03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mila 2004-07-26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아들은 아무래도 개같은 아이인 것 같습니다^^...근데 아주 싸나운 개.
<고양이라서 다행이야>는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전출처 : 이럴서가 > <칠조어론>, 덮기

<칠조어론>, 이 빌어먹을 종이뭉치를 처음 읽은 때가 재작년 이즈음이다. 어릴 때 서당에서 천자문 외운 가닥이 있어 한자엔 훤한 편인데, 이건 도무지 모르는 한자가 수두룩하다는 데에 먼저 부아가 치밀었다. 건성으로 훑으며 한 달 동안 옥편을 뒤져 네 권의 책에다 독음을 적었다. 읽기 시작했으나, 이번엔 칠조와 관련한 호칭들을 도통 어림잡을 수 없었다. 예컨대 본자어마本者語魔, 유사걸有事乞, 근사남勤事男 같은 호칭들. 본자어마의 '어마'란, 말을 파괴하는 자다. 여기서 말이란 기성종교의 화석화된 도그마로 해석할 수 있고, 유사걸과 근사남은 본자어마의 실천태적 호칭이다. 이런 따위의 것들을 내가 아는 대로라도 주석할 수 있으려면, 라다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 같은 책과 더불어 너댓 권의 고대종교서를 참조해야만 했다. 다시 읽기 시작했고, 또 다시 찾아보았으며, 그러느라 뒤져본 책들이 여러 권, 그러나 동시에 모든 책이 한 권인 책이었다. 네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한 때부터 6개월 남짓 지났을 때 읽기를 마쳤고, 읽고도 멍청한 머릿속엔 이미지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이 책, 이 빌어먹을 <칠조어론>을 삼독했다. 다 읽었다. 다 읽었다? 아니다, 터무니없다. 28대 달마 이후에 6조가 있고, 합하면 33조, 그렇다면 7조의 어론語論(!)을 쓰겠다는 것은 곧 자기가 34대가 되겠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박선생은 스스로 교주가 되어 <칠조어론>을 하나의 '경전'으로 내놓은 것인데, 그것을 두고서 고작 페이지 다 넘겼다고 '다 읽었다',라니……. <성경>을 '다' 읽을 수 없듯, <칠조어론> 역시 그러하다.

19세기 소설문법으로 보자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서사양식 없는 게 무슨 소설이냐. 그렇다고 이건 무슨 사상서도 아니다.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갈마분열, 인도신화 등등ㅡ동양의 온갖 정신적 원형들을 섞어놓고, 거기다가 기독(예수), 융, 니체, 들뢰즈, 르네 지라르까지 혼합해놓은 것이 무슨 사상서냐(문장을 겨우 따라가다가, 분명 지라르의 희생양 제의와 관련된 것인 듯한 구절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그 독서폭의 아득함!)

그렇다면 자신에게 묻자. 나는 왜 소설도 사상서도 아닌, 교주를 자처하는 동시대의 한 광인 남자가 쓴 이 '도도하고 오만한 경전'을 읽었으며, 또 한동안 그것을 앓았는가? 

답하건대, 한 사람인 남자가, 도대체 왜 이런 세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의 남다른 욕망이 비틀어 놓은 언어의 밭에서, 나는 이 같잖은 나라에서 비루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일용할 먹거리를 수확하고 싶었다.

자, 그래서 수확한 것이 뭔가, 라고 혹자는 물을 것이다. 

언어의 상징화 능력을 빌어, 나는 겨우 이렇게 답한다 :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라다크리슈난은 <인도철학사>에서 말한다. 인간의 삶은 '각성(깨어있음)/몽면(꿈 꾸는 잠)/숙면(꿈 없는 잠)', 이상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진정한' 형이상학은 삶의 세 가지 양상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서구 형이상학은 언제나 각성 상태가 중요했다. 각성 상태의 철학은 경험성과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데아(idea)와 독사(doxa)라는 형태로, 이원적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서양철학의 뼈대.

뇌의 뉴런 조직에 결정적인 비약이 일어나 '마음'이라는 것을 갖게된 후기 구석기 시대의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우리의 뇌는, 그 구조도 완전히 똑같으며, 능력에도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내부의 '힘의 배치' 양식에 변화가 일어났고, 세계에 대해 대칭성을 유지했던 '마음'의 작용은 변화가 일어, 수장 대신 왕이, 공동체 위에 국가가, 제의를 밀어내고 이데올로기가, 그리고 또…… 그렇다, 박상륭은 반anti문명론자, 진화론자, 패러다임의 전복자, 에콜로지 주창자, 이들 모두의 부분이자 전체이다.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이제 이 책을 손에서 놓는다. 내 책장 가장 후미진 자리에 오랫동안 이 책은 방치될 것이다. 2년 남짓 줄곧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이 책에서 나는 얼마간 벗어나야겠다. 한동안 내게 다시 읽힐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미욱했던 독서의 기회비용으로 치른 다른 많은 책들이 내 책상 위에 놓일 것이고, 또 나는 너무도 길게 칠조의 환영을 앓았으므로. 나는 다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그리고 한 시절의 '종교체험'을. 이 글은 그 조촐한 의식이다.

패어웰 투 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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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는 '강원도의 힘'  이후로 보지 않았다.   뒤로 나온 두 편의 영화  '오 수정'과 '생활의 발견'을 소개하는 글을 몇 편 찾아 읽었더니 역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개된 몇 개의 에피소드들이 의미가 좀 다른 스포일러가 되어, 뭔가 견디지 못하리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 어떤 이미지들에 아주 쉽게 들리는 내게 홍상수 영화의 몇몇 이미지들은 좀 과장하면 '앓을만큼'  지독하기 때문이다.

 더 과장하면 제자리에서 팔딱팔딱 뛰다가 숨을 헉헉 몰아 쉬고 그 영화를 보기 이전의 상태인듯이 ' 혼자 연기를 한다' .생쑈가 다른 게 아니다. 성철스님 말씀을 좇아 不欺自心 하기로 한 마당에 이런 쇼를 하다니.

 그런데 그의 새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곧 개봉된다고 한다. 이 영화를 봐야 할 것인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본다면 누구와 봐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친하게 지내는 혹자는 친절히 일러 주기를,  야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는 같이 보는 상대를 주의깊게 골라야 한다고 했다.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목석이 아닌 담에야 생리적으로 짤없는'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상대에게 들릴 수 있으므로. 돌비 서라운드 시스템 어쩌구 하는 최첨단 음향시설을 갖추어 숨소리까지 텅텅 소리를 내며 복원되는 영화관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고 반박했지만 자기는 숱하게 들었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 그소리가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린다고 한다.) 화면의 빛이 목에 반사되어 그 명암까지 함께 '꿀꺽' 출렁거리면 그렇게 추한 모습이 없다는 일침까지 곁들인 살뜰한 충고.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다시 홍상수 영화를 봐야한다면  적당히 낯선 사람과 봐야 한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주 잘 알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닌 사람.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 얘기도 아주 일상적인 수다도 아닌, 그렇다고 너무 불편하지도 않고 너무 익숙해서 판에 박히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모종의 수다를 떨 수도 있고 안 떨 수도 있는 사람. 영화 얘기를 하는 듯 현실의 이야기를 하는 듯 구분이 가지 않을만한 거리의 사람. 그래 좋다. 헌데 대체 이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그리고 이 낯선 이 곁에서 그 추하다는 '꼴깍'을 해야 한단 말인가.

 여기까지도 고민인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는 유지태의 베드신이 있다는 결정적인 소식까지 들려온다.앞의 충고와 뒤의 뜬금없는 고정관념 사이에서 유지태 팬인 나는, 드디어 황망해졌다.
 
 나의 갈 길은 몇 가지.
어딘가에 있을 그 적당히 낯선 이를 성공적으로 찾아내어 들키지 않으며  꼴깍한다. 가장 이상적. 안 되면?  목석이 된다.
(차라리 유체이탈을 하는 편이 쉽겠다.)  

 고로 나의 딜레마를 최종정리하면, 어디에 있는 지 모를 그 적당히 낯선 이를 찾아내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고 청하여 승낙을 얻은 후에 만나서 나란히 영화관에 앉아서 유지태 -성현아의 베드신을 보면서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꼴깍해야 하는 것. 갈 길이 험하고 멀다.

 때는 춘사월, 꽃 피고 새 우는 이 환한 봄날,
나는 왜 이 메주 덩어리를 머리 속에 넣고 사서 고생하고 있단 말인가.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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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심이 2004-05-1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식 영화가 이렇게 갈등을 만드는군요.ㅋㅋ..

Smila 2004-05-18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언젠가 저 '꼴깍' 소리를 안 들키려고 한입가득 침을 물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ownidefix 2004-05-1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 봐주실 분이 모처럼 허하신 3시간을 놓칠세라 헐레벌떡 달려가서 보고 왔지요.
그런데 홍상수 감독도 참..
침 삼킬 일 전혀 없는 베드신 찍는 것도 그만의 미덕일까요?
smila님 안 보셨으면 함 보시길..
그런데 둘째가 딸이면
태내에서부터 남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생길 수 있으니 심사숙고하셔야 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