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아직 신림 사거리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서 신림서점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인인 구씨 아저씨는 폐점이 어찌나 분하셨던지 서점 밖에 커다란 플랭카드를 걸어 두셨다고 한다. 서점을 운영하시는 동안 단 한번도 업종 변경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 서점 운영이 순탄치 않을 때도 구청 이동도서관 등에 책을 기증해오신 데 대한 자부심, 이렇게 폐점할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한 한탄, 다시 서점을 열고 싶다는 결의 등을. 나도 울고싶은 심정이었다.
신림서점은 아마 내가 초딩이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오빠와 같이 '새소년', '어깨동무' 사러 다니던 시절부터 서른살까지 내 단골서점이었다. 각종 만화책과 동화책을 거쳐, 검은 표지에 삽화가 멋진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와 루팡 시리즈같은 추리소설과 SF소설을 가볍게 찍고, 주옥같은 문고 시리즈에 알알이 침 바르고, 고딩 때부터 서가에서 한두 시간씩 책을 뒤져 만난 릴케와 쿤데라까지, 도대체 나라는 사람에게서 신림 서점을 빼고는 제대로 건질 만한 알맹이가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그랬다. 서른살까지도,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계산대에 놓여있는 무가지나 한길 리브로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하던 책정보지라도 집어가려고 들르곤 했다. 나는 지금도 교보나 영풍 같은 대형 서점에서는 책을 잘 고르지 못한다. 도대체 사람 많고 소리가 웅웅거리는 곳에서는 아무리 분야별로 책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심리학에 마케팅 공부한 전문가들이 책을 진열해놓아도 책 한 권 선뜻 고르기가 쉽지 않다. 교보에서는 책 구경, 사는 건 신림서점.그건 어린 시절부터 늘 낯익게 인사하고 다니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에 대한 의리 때문이기도 했다.
중딩 무렵부터 내가 작가가 되리란 믿음에 나중에 인터뷰 하면 신림서점이 나를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고 꼭 한 마디 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으시던 주인 아저씨와 친구들 모르게 책값 깍아주기도 하고 오래된 책 덤으로 얹어 주시기도 하던 아주머니. 내 동생, 오빠, 친구들까지 줄줄 꿰고 계셔서 내가 산 줄 모르고 오빠가 책을 사려고 하면 동생이 사갔으니 빌려 읽으라고 하실 정도였고 서점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와 길이 엇갈려 헤맬 때 찾아주시기도 했다. 주인집 큰 딸은 내 중학교 2년 선배로 학교에서 조금 놀던 그 언니는 학교에서 만나도 아는 체 하며 잘(?) 봐주었던 기억이 선하다.내 독서취향까지 꿰고 있는 아저씨는 잘 팔리지 않는 책이라도 나같은 손님을 위해 일부러 들여놓고 알려 주시곤 했다.하긴 이 서점엔 아마 나 정도 단골 아닌 손님은 없었을 것이다.
신림서점은 세들어 있는 건물 증개축 등의 사정으로 자리를 몇번 옮겼지만, 내 마음의 신림서점은 20대 때 신림 본동 맞은 편 코너건물에 있었던 시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지금은 홍상수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만 볼 수 있는 신림극장 라인을 따라나오면 넒은 평수에 천장까지 가득 책이 차있는 신림서점이 있었다. 친구들과 수다 떨며 틀어 박혀고른 책을 읽곤 했던 시집 골목. 반대편에 서가에 몸을 기대고 서면 바로 내 눈높이에 문지 시선 그 아래 세계사 시인선 옆에는 민음사 시인선 그 아래는 청하 시인선. 목을 빼고 기다려도 20대 때는 완역되지 않았던 '티보 가의 사람들', 김현,파울 첼란,마르께스, 쿤데라, 네루다 같은 이들을 나는 이 서점의 서가를 뒤지다 만났다. 지금은 여러 친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쿤데라의 '참-존-가'의 하드커버본.그의 책을 발견하고 첫 장의 첫 줄을 읽었을 때의 전율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고딩 시절 어느 하교길에 릴케 시집을 발견하고 내가 읽은 그의 첫 시는 '가을날'이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서점이 있어서 책정보가 쏟아지던 시절도 아니고 때 되면 읽을 책을 권해주는 길잡이도 없었던 내게 신림서점은 눈치 안 보고 젖동냥할 수 있는 인심 후한 동네 아줌마였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저 한 때나마 단골서점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에 대해, 그 서점에 빚진 것이 아주 많다는 것에 대해, 그 신림서점 시집골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는 십대와 이십대의 내 모습에 대한 아련한 자기연민이랄까 향수랄까, IMF 때도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내 단골서점이 당시 시공사 부도로 몇년 간 흉하게 녹슨 골조로만 서있었던 복합쇼핑몰 지하의 대형서점 때문에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하고 슬프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 보다.
아니다. 저게 다가 아니다. 신림서점이 문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내 안의 무엇인가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자기 앞의 생'을 발견한 날 누런 종이봉투에 담긴 책을 안고 신림교 칼바람을 맞으며 귀가하던 열여덟살부터 내려앉은 더께같은 것에 갑갑증이 도진다.
무슨 변비 환자처럼, 닿을 듯 말듯한 절정 앞에서 기분 더러워지는 지루환자처럼.
기분 한번 뭐 같다.
.......영화 'You've got mail'처럼 되려면 주인집 큰 언니가 대형서점 아들과 연애하는 수 밖에 없는데 그 언니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결혼해서 지금 학부형이다.
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