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이럴서가 > 신파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성이 퇴행하고, 상업적으로 굳어지면 신파가 된다. 생각해보면, 신파적인 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유형들ㅡ무엇으로 고통받고, 무엇으로 행복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장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직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도록 선정적으로 변해있다. 그러나 그 안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고정하고, 단순화하고, 선정화시켰기 때문에, 그토록 위력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신파 속에서 다시 보편성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 보편적인 예술을 끄집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누군가가 만들어낸 보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신파로 퇴행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열역학 제 2법칙 : 뜨거워진 것이 식는 것은 쉽지만 식은 것을 뜨겁게 하는 것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신파에서 보편성을 정제해 구원해내는 것은 창조적인 숨결을 요구한다. 인공호흡이다.
신파를 Cool한 형식으로 재편해서 그 속에서 보편성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것도, 역시 가능할 것이다.
저열한 것에 숭고한 것이 있다.
언젠가 파적 삼아 썼던 위의 글이 떠오른 건 Y 때문이다. 그녀에게 놀라는 것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드라마를 보면서 다음에 전개될 상황을 정확히 예견하곤 하는 것이다. 보아하니 저 여자는 곧 추락사하겠군, 이 남자는 곧 이런 대사를 내뱉겠군, 하는 식이다. 영화와 TV 드라마의 배경이 도회인 것이 특별씨티들의 감성과 길항하는 것인지(서울서 나고 자란 그녀를 나는 특별씨티라 부르고, 그녀는 나를 컨츄리라 부른다), 아니면 드라마에 감초처럼 박히는 클리셰 같은 것을 그녀가 감각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적시 뒤에 나오는 드라마의 실연實演은 내게 자주 놀라운 것이다.
신파가 일종의 보편에 닿아 있고,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의 재연은 내게 익숙한 일이 아니다. 생활의 보편이 빠져있을 때 나는 종종 고집스런 거위나 치기의 나신상태가 되고, 이럴 때 생기는 서로의 다툼은 퍽으나 골 깊은 것이 되기 마련인데, 이 경우의 많은 부분은 아마도 나의 잘못일 터이다. 俗에서 추출된 보편을 일종의 삶의 지혜라 부를 수 있다면, 그녀를 이해해가면서 나는 지금 허방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