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사진으로 보는 절판본 (12) : 가브리엘 가르시아-마르케즈
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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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홍보업 옮김, 민음사, 1977 초판)

동명의 중편과, 단편집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을 번역해 엮었다. 마마 그란데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도 마꼰도의 역사상 가장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던 것으로 잠시 언급되고 지나가는 인물이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홍보업 옮김, 민음사, 1982 3판)

저자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증보되어 나온 책. 가르시아 마르케즈와의 대담인 "만년 동안의 문학"(마뉴엘 페레이라 / 송기형 옮김)이 수록되어 있다.

<예고된 죽음의 기록>(차봉희 옮김, 샘터, 1982)

장편소설 외에 "포르베크 부인의 행복한 여름," "사랑을 넘어서 지속되는 죽음," "마꼰도에서 비를 관찰한 이사벨의 독백" 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빤딸레온과 위안부들 /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민용태 옮김, 오늘의세계문학 11, 중앙일보사, 1982 초판; 1984 보급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빤딸레온과 위안부들>과 합본되었다. 수록 작품은 다음과 같다 :

화요일의 낮잠
어느 날
이 고을엔 도둑이 없다
발따사르의 운수좋은 어느 날 오후
몬띠엘의 미망인
토요일 다음 날
인조장미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낙엽>(이종관 옮김, 지문사, 1982 초판; 1985 중판)

장편소설 <낙엽>과 단편소설 6편 수록 :

낙엽
물에 빠져 죽은,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생긴 사나이
거대한 날개가 달린 노인
선한 사람 블란카만
유령선의 마지막 항해
이사벨의 독백
천사를 기다리게 한 흑인

<어느 예고된 죽음의 이야기>(김정화 옮김, 정음사, 1983)

장편소설.

<족장의 가을>(안정효 옮김, 청하, 1983)

장편소설.

<순진한 에렌디라>(이종관 옮김, 기문사, 1983)

단편집. 수록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순진한 에렌디라와 냉혹한 할머니 사이에서 일어난 믿기 어렵고 슬픈 이야기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
사랑을 초월한 변함없는 죽음
세 번째 체념
죽음의 저 너머에서
에바, 고양이 속에 들어가다
거울과의 대화
세 몽유병자의 고뇌
파란 개의 눈
여섯시면 찾아오는 여인
누군가 이 장미꽃을 흩어놓고 있었다
마도요 새의 밤

<백년의 고독 (상)(하)>(박일상 옮김, 마당문고 122-123, 1986)

<에렌디라>(로베르또 파벨로 그림, 박채연 옮김, 까치, 1987)

에렌디라 역시 <백년의 고독>에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어린 시절 첫사랑이었던 몸을 파는 소녀로 잠깐 등장한다. 멋지고도 애처로운 기분을 더해 주는 삽화가 들어 있다.

<웃으면 죽는다 : 군사계엄하의 칠레 잠입기>(김진욱 옮김, 문학사상사, 1988)

칠레의 군부 쿠데타로 외국에 망명한 영화감독 미겔 리틴이 신분을 속이고 잠입해 취재한 계엄령 하의 칠레에 대한 르포를, 그의 친구인 가르시아 마르케즈가 단행본으로 써낸 것이다. 학민사에서 <독재의 거리>라고 나온 책과 같은 내용.

<콜레라 시대의 사랑>(김병욱 옮김, 늘푸른나무, 1988)

장편소설.

<행복한 무명시절>(정성호 옮김, 하늘, 1991)

저자가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기자로 활동하던 "무명시절"에 쓴 기사 모음집. 수록작품은 다음과 같다 :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운 날
싸우는 성직자
베네주엘라를 뒤흔든 72시간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가
목숨의 남은 시간은 12시간
1958년 6월 6일 메말라 버린 카라카스
베네주엘라여, 안녕!
베네주엘라는 희생을 치를 가치가 있다
숨어 사는 법
7명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
빈곤 속의 낙원
4년 동안 말뚝에 매인 남편
명마 세네갈이 팔리다

<미로 속의 장군>(김이배 옮김, 청계연구소, 1991)

장편소설.

<인질>(신용석 옮김, 학민사, 1992)

시나리오.

<사랑과 다른 악마>(김준, 서성철 옮김, 한뜻, 1995)

장편소설.

<이방의 순례자들>(정효석 옮김, 한나래, 1995)

단편집. 수록작품은 다음과 같다 :

서문 : 열두 가지, 순례, 이야기라고 한 이유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
성녀
잠자는 미녀와 비행기
꿈을 꾸어 주고 돈을 받습니다.
"단지 전화를 걸려고 왔는데"
8월의 유령들
마리아 도스 쁘라세레스
17명의 독살된 영국인들
북풍
가정 교사 미스 포르베스의 행복한 여름
불빛은 마치 물 같아
눈 위에 새긴 당신의 핏자국

옮긴이의 말

<사람이 살았던 시대>(송병선 옮김, 예문, 1995)

단편소설 및 에세이 모음.

<꿈을 빌려드립니다>(송병선 옮김, 하늘연못, 1997)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개정판. 단편 "꿈을 빌려드립니다," 에세이 "노벨상의 환영" 1과 2, 그리고 제3부로 인터뷰 및 해설 등이 추가되었다.

왼쪽부터,
<이방의 순례자들>의 영어판 Strange Pilgrims (NY: Penguin Books, 1993)
<백년 동안의 고독>의 스페인어판 Cien Anos de Soledad (Madrid: Edicions Catedra, 1987)
<백년 동안의 고독>의 영어판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London: Penguin Books, 1970)

<백년 동안의 고독>(임호준 옮김, 고려원, 1996)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처음 읽은 <백년동안의 고독>은 문학사상사의 안정효 번역본이 아니라, 육문사라는 곳의 번역본이었다. 워낙에 재미있게 읽은 까닭인지, 나중에 문학사상사 판을 보고는 몇 군데 번역이 엉성한 걸 보고 좀 놀랐다. 고려원의 번역본이야말로 내가 알기론 <백년 동안의 고독>의 다양한 역본 가운데서도 "스페인어 전공자"가 옮긴 "최초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백년 동안의 고독>(김형섭 옮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2)

저자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나온 것으로 보아, 어디선가 "급조된" 해적판이 아닐까 싶은 책. (역자와 발행인의 이름이 똑같다는 점도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 당시만 해도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선가 나온 책이 하나 "뜬다" 싶으면, 여기저기서 똑같은 책을 우르르 따라 내는 풍조가 있었다. 솔직히 지금은 출판계도 상당히 양반 된 것이 아닐지..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의 스페인어판 Los Funerales de la Mama Grande (Barcelona: Libro Amigo,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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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8 06: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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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럴서가 > 신파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성이 퇴행하고, 상업적으로 굳어지면 신파가 된다. 생각해보면, 신파적인 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유형들ㅡ무엇으로 고통받고, 무엇으로 행복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장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직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도록 선정적으로 변해있다. 그러나 그 안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고정하고, 단순화하고, 선정화시켰기 때문에, 그토록 위력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신파 속에서 다시 보편성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 보편적인 예술을 끄집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누군가가 만들어낸 보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신파로 퇴행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열역학 제 2법칙 : 뜨거워진 것이 식는 것은 쉽지만 식은 것을 뜨겁게 하는 것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신파에서 보편성을 정제해 구원해내는 것은 창조적인 숨결을 요구한다. 인공호흡이다.

신파를 Cool한 형식으로 재편해서 그 속에서 보편성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것도, 역시 가능할 것이다.

저열한 것에 숭고한 것이 있다.

 

 

언젠가 파적 삼아 썼던 위의 글이 떠오른 건 Y 때문이다. 그녀에게 놀라는 것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드라마를 보면서 다음에 전개될 상황을 정확히 예견하곤 하는 것이다. 보아하니 저 여자는 곧 추락사하겠군, 이 남자는 곧 이런 대사를 내뱉겠군, 하는 식이다. 영화와 TV 드라마의 배경이 도회인 것이 특별씨티들의 감성과 길항하는 것인지(서울서 나고 자란 그녀를 나는 특별씨티라 부르고, 그녀는 나를 컨츄리라 부른다), 아니면 드라마에 감초처럼 박히는 클리셰 같은 것을 그녀가 감각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적시 뒤에 나오는 드라마의 실연實演은 내게 자주 놀라운 것이다.

신파가 일종의 보편에 닿아 있고,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의 재연은 내게 익숙한 일이 아니다. 생활의 보편이 빠져있을 때 나는 종종 고집스런 거위나 치기의 나신상태가 되고, 이럴 때 생기는 서로의 다툼은 퍽으나 골 깊은 것이 되기 마련인데, 이 경우의 많은 부분은 아마도 나의 잘못일 터이다. 俗에서 추출된 보편을 일종의 삶의 지혜라 부를 수 있다면, 그녀를 이해해가면서 나는 지금 허방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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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럴서가 > <칠조어론>, 덮기

<칠조어론>, 이 빌어먹을 종이뭉치를 처음 읽은 때가 재작년 이즈음이다. 어릴 때 서당에서 천자문 외운 가닥이 있어 한자엔 훤한 편인데, 이건 도무지 모르는 한자가 수두룩하다는 데에 먼저 부아가 치밀었다. 건성으로 훑으며 한 달 동안 옥편을 뒤져 네 권의 책에다 독음을 적었다. 읽기 시작했으나, 이번엔 칠조와 관련한 호칭들을 도통 어림잡을 수 없었다. 예컨대 본자어마本者語魔, 유사걸有事乞, 근사남勤事男 같은 호칭들. 본자어마의 '어마'란, 말을 파괴하는 자다. 여기서 말이란 기성종교의 화석화된 도그마로 해석할 수 있고, 유사걸과 근사남은 본자어마의 실천태적 호칭이다. 이런 따위의 것들을 내가 아는 대로라도 주석할 수 있으려면, 라다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 같은 책과 더불어 너댓 권의 고대종교서를 참조해야만 했다. 다시 읽기 시작했고, 또 다시 찾아보았으며, 그러느라 뒤져본 책들이 여러 권, 그러나 동시에 모든 책이 한 권인 책이었다. 네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한 때부터 6개월 남짓 지났을 때 읽기를 마쳤고, 읽고도 멍청한 머릿속엔 이미지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이 책, 이 빌어먹을 <칠조어론>을 삼독했다. 다 읽었다. 다 읽었다? 아니다, 터무니없다. 28대 달마 이후에 6조가 있고, 합하면 33조, 그렇다면 7조의 어론語論(!)을 쓰겠다는 것은 곧 자기가 34대가 되겠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박선생은 스스로 교주가 되어 <칠조어론>을 하나의 '경전'으로 내놓은 것인데, 그것을 두고서 고작 페이지 다 넘겼다고 '다 읽었다',라니……. <성경>을 '다' 읽을 수 없듯, <칠조어론> 역시 그러하다.

19세기 소설문법으로 보자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서사양식 없는 게 무슨 소설이냐. 그렇다고 이건 무슨 사상서도 아니다.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갈마분열, 인도신화 등등ㅡ동양의 온갖 정신적 원형들을 섞어놓고, 거기다가 기독(예수), 융, 니체, 들뢰즈, 르네 지라르까지 혼합해놓은 것이 무슨 사상서냐(문장을 겨우 따라가다가, 분명 지라르의 희생양 제의와 관련된 것인 듯한 구절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그 독서폭의 아득함!)

그렇다면 자신에게 묻자. 나는 왜 소설도 사상서도 아닌, 교주를 자처하는 동시대의 한 광인 남자가 쓴 이 '도도하고 오만한 경전'을 읽었으며, 또 한동안 그것을 앓았는가? 

답하건대, 한 사람인 남자가, 도대체 왜 이런 세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의 남다른 욕망이 비틀어 놓은 언어의 밭에서, 나는 이 같잖은 나라에서 비루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일용할 먹거리를 수확하고 싶었다.

자, 그래서 수확한 것이 뭔가, 라고 혹자는 물을 것이다. 

언어의 상징화 능력을 빌어, 나는 겨우 이렇게 답한다 :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라다크리슈난은 <인도철학사>에서 말한다. 인간의 삶은 '각성(깨어있음)/몽면(꿈 꾸는 잠)/숙면(꿈 없는 잠)', 이상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진정한' 형이상학은 삶의 세 가지 양상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서구 형이상학은 언제나 각성 상태가 중요했다. 각성 상태의 철학은 경험성과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데아(idea)와 독사(doxa)라는 형태로, 이원적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서양철학의 뼈대.

뇌의 뉴런 조직에 결정적인 비약이 일어나 '마음'이라는 것을 갖게된 후기 구석기 시대의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우리의 뇌는, 그 구조도 완전히 똑같으며, 능력에도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내부의 '힘의 배치' 양식에 변화가 일어났고, 세계에 대해 대칭성을 유지했던 '마음'의 작용은 변화가 일어, 수장 대신 왕이, 공동체 위에 국가가, 제의를 밀어내고 이데올로기가, 그리고 또…… 그렇다, 박상륭은 반anti문명론자, 진화론자, 패러다임의 전복자, 에콜로지 주창자, 이들 모두의 부분이자 전체이다.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이제 이 책을 손에서 놓는다. 내 책장 가장 후미진 자리에 오랫동안 이 책은 방치될 것이다. 2년 남짓 줄곧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이 책에서 나는 얼마간 벗어나야겠다. 한동안 내게 다시 읽힐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미욱했던 독서의 기회비용으로 치른 다른 많은 책들이 내 책상 위에 놓일 것이고, 또 나는 너무도 길게 칠조의 환영을 앓았으므로. 나는 다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그리고 한 시절의 '종교체험'을. 이 글은 그 조촐한 의식이다.

패어웰 투 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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