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이럴서가 > <칠조어론>, 덮기
<칠조어론>, 이 빌어먹을 종이뭉치를 처음 읽은 때가 재작년 이즈음이다. 어릴 때 서당에서 천자문 외운 가닥이 있어 한자엔 훤한 편인데, 이건 도무지 모르는 한자가 수두룩하다는 데에 먼저 부아가 치밀었다. 건성으로 훑으며 한 달 동안 옥편을 뒤져 네 권의 책에다 독음을 적었다. 읽기 시작했으나, 이번엔 칠조와 관련한 호칭들을 도통 어림잡을 수 없었다. 예컨대 본자어마本者語魔, 유사걸有事乞, 근사남勤事男 같은 호칭들. 본자어마의 '어마'란, 말을 파괴하는 자다. 여기서 말이란 기성종교의 화석화된 도그마로 해석할 수 있고, 유사걸과 근사남은 본자어마의 실천태적 호칭이다. 이런 따위의 것들을 내가 아는 대로라도 주석할 수 있으려면, 라다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 같은 책과 더불어 너댓 권의 고대종교서를 참조해야만 했다. 다시 읽기 시작했고, 또 다시 찾아보았으며, 그러느라 뒤져본 책들이 여러 권, 그러나 동시에 모든 책이 한 권인 책이었다. 네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한 때부터 6개월 남짓 지났을 때 읽기를 마쳤고, 읽고도 멍청한 머릿속엔 이미지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이 책, 이 빌어먹을 <칠조어론>을 삼독했다. 다 읽었다. 다 읽었다? 아니다, 터무니없다. 28대 달마 이후에 6조가 있고, 합하면 33조, 그렇다면 7조의 어론語論(!)을 쓰겠다는 것은 곧 자기가 34대가 되겠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박선생은 스스로 교주가 되어 <칠조어론>을 하나의 '경전'으로 내놓은 것인데, 그것을 두고서 고작 페이지 다 넘겼다고 '다 읽었다',라니……. <성경>을 '다' 읽을 수 없듯, <칠조어론> 역시 그러하다.
19세기 소설문법으로 보자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서사양식 없는 게 무슨 소설이냐. 그렇다고 이건 무슨 사상서도 아니다.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갈마분열, 인도신화 등등ㅡ동양의 온갖 정신적 원형들을 섞어놓고, 거기다가 기독(예수), 융, 니체, 들뢰즈, 르네 지라르까지 혼합해놓은 것이 무슨 사상서냐(문장을 겨우 따라가다가, 분명 지라르의 희생양 제의와 관련된 것인 듯한 구절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그 독서폭의 아득함!)
그렇다면 자신에게 묻자. 나는 왜 소설도 사상서도 아닌, 교주를 자처하는 동시대의 한 광인 남자가 쓴 이 '도도하고 오만한 경전'을 읽었으며, 또 한동안 그것을 앓았는가?
답하건대, 한 사람인 남자가, 도대체 왜 이런 세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의 남다른 욕망이 비틀어 놓은 언어의 밭에서, 나는 이 같잖은 나라에서 비루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일용할 먹거리를 수확하고 싶었다.
자, 그래서 수확한 것이 뭔가, 라고 혹자는 물을 것이다.
언어의 상징화 능력을 빌어, 나는 겨우 이렇게 답한다 :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라다크리슈난은 <인도철학사>에서 말한다. 인간의 삶은 '각성(깨어있음)/몽면(꿈 꾸는 잠)/숙면(꿈 없는 잠)', 이상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진정한' 형이상학은 삶의 세 가지 양상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서구 형이상학은 언제나 각성 상태가 중요했다. 각성 상태의 철학은 경험성과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데아(idea)와 독사(doxa)라는 형태로, 이원적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서양철학의 뼈대.
뇌의 뉴런 조직에 결정적인 비약이 일어나 '마음'이라는 것을 갖게된 후기 구석기 시대의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우리의 뇌는, 그 구조도 완전히 똑같으며, 능력에도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내부의 '힘의 배치' 양식에 변화가 일어났고, 세계에 대해 대칭성을 유지했던 '마음'의 작용은 변화가 일어, 수장 대신 왕이, 공동체 위에 국가가, 제의를 밀어내고 이데올로기가, 그리고 또…… 그렇다, 박상륭은 반anti문명론자, 진화론자, 패러다임의 전복자, 에콜로지 주창자, 이들 모두의 부분이자 전체이다.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이제 이 책을 손에서 놓는다. 내 책장 가장 후미진 자리에 오랫동안 이 책은 방치될 것이다. 2년 남짓 줄곧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이 책에서 나는 얼마간 벗어나야겠다. 한동안 내게 다시 읽힐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미욱했던 독서의 기회비용으로 치른 다른 많은 책들이 내 책상 위에 놓일 것이고, 또 나는 너무도 길게 칠조의 환영을 앓았으므로. 나는 다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둥근 것, 모나지 않은 것. 그리고 한 시절의 '종교체험'을. 이 글은 그 조촐한 의식이다.
패어웰 투 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