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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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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쭉 읽어 내려 갔다. 구절구절마다 마음 절절이 다가오는 느낌을 받으며, 그래 나도 이제부터 뭔가를 해야겠어,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내가 무엇을 결심했더라? 기억이 아련하다.

죽음을 늘 생각하자.

그리고 내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지금 나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좋아, 지금 넌 죽어가고 있어. 죽어가는 너에게 물어보자. 어떻게 살고 싶니?

글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딱히 접고 뭔가 새로운 걸 찾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그러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잖아. 이런 대답이 나온다면 지금 난 잘 살고 있는 거겠지....

현재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수용이다.

분노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용하는 것과 만족하는 것, 그것은 어떻게 다른가?

모든 사람의 삶의 끝이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살아가는 동안 어차피 죽을 일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현재의 나를 수용한다는 것의 의미는? 나의 부족함(뭐에 대해?), 나의 연약함, 나의 이기심을 인정하는 걸까? 수용한 거기에서 조금씩 나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걸까? 어떤 방향으로? 나아진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결핍에서 생기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추구.

<범죄와의 전쟁>에서 깡패들은 싸움을 준비하고 싸움을 하는 그 와중에 그런 이야기들을 뱉는다.

살아있어.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

심장의 쿵쾅거림을 느끼는 순간? 고요한 평화와 안식을 느끼는 순간?

싸움에서 느끼는 살아있음이 진정한 살아있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내가 지금의 나를 수용하고, 나의 ...싶음을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용인가능한 형태로 평화롭고 진정성있게 나의 욕망을 추구해야 할 터인데.,...

내가 바라는 건, 오늘 아침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 벚꽃잎들을 보며 벚꽃 자욱한 경포대 길을 흐느적 거리며 걷는 것. 이지만, 칙칙한 도서관으로 가야 하는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

읽을 땐 정말 맞아! 그랬는데, 읽고 나서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니 다시 처음처럼 막막해진다. 잘못 읽은 게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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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디어드리 베어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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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 길이에 놀랍다. 아주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이었나 11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느라 무척 숨가빴다. 말로만 듣던 융, 그저 어렵게만 느껴졌던 융, 한때 프로이트의 총애를 받았으나 박차고 나와 홀로 정신분석을 개척했던 고집센 사람으로서 융,  그가 이야기 하는 아니마, 아니무스, 집단 무의식은 나름 재미는 있지만 조금 뜽금없지 않나 하는 생각, 이런 것들이 그동안 내가 융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며 사전지식이다.   

 융의 인생은 한마디로 "참 잘났다"이다. 이 잘남이 때로는 찬탄으로, 때로는 야유로, 때로는 숭배로, 때로는 경멸로 왔다갔다 해서 그렇지 잘난 것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듯 싶다. 

 전기를 읽는 내내 나는 융의 생애도 생애지만 융의 생애를 이토록 조목조목 짚어낸 전기작가의 노력이 더 감탄스럽다. 한 장에 붙는 자세한 미주의 목록이 때로는 전체 장의 분량에 육박한다. 얼마나 꼼꼼히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읽는 내내 디어드리 베어가 최대한 공정하게 최대한 꼼꼼히 융에게 접근하려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오만에 빠뜨릴 수 밖에 없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데 누군가 넌 이렇구나 라고 말해준다면 우리가 그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건 두가지다. 경멸과 의존.  

 그래서 융에게는 적도 많고 지지자도 많았나 보다. 그리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살면서 제일 힘든 과제는 자신의 머리 속을,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밝히고 그 안에서 통합된 자기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융은 한 생애 전체를 통해 보여 주었다. 

잘난 사람들끼리 모여 하는 자존심 싸움, 권력 싸움, 그들은 스스로를 충분히 분석을 한 걸까? 정신분석이 하는 분석과 성찰은 분명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석을 통해 자신을 성찰했다면 분노와 배신, 암투, 시기 같은 진흙탕 싸움을 없거나 덜하였을 터인데.... 

통합된 자기에 이른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당당할 수 밖에 없다. 자기에 직면했을 때 당당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삶을 말로 사는게, 아니라 그냥 사는 것, 매 순간, 자신과 직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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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스팟 - 내가 못 보는 내 사고의 10가지 맹점
매들린 L.반 헤케 지음, 임옥희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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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신체 구조상,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 볼 수 없다는 것,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더 잘 보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인간의 마음. 맹점이 있으되 맹점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들. 그래서 늘 저지르는 오류는 바로 자기중심성. 자기가 자기를 제일 잘 알고, 자기가 자기의 모든 것을 알고, 아니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인간의 심리. 일단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로 유기체로 환경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 엄중한 사명이 있다는 점에서 오류의 근원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응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적응된 상태란 익숙함을 말한다. 익숙한 상태에서 새로운 시도, 다각적인 검토는 또 다른 노력, 별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웬만하면 에너지를 비축하고자, 편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동양식으로 볼 때 적응된 상태에서 익숙한 상태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면 결정적인 실수와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그것이 주는 파장이 사실 되돌이킬 수 없거나 혹은 너무 엄청난 피해이기에 자기 중심성은 결국 자기 발등을 찍게 되는 근원적 오류가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라!" 생각해 보면 생각하지 않았기에 저지르는 실수 혹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얼마나 발을 동동구르고 얼마나 처절하게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 생각하지 않아 일어나는 실수와 오류들의 연속이다. "생각하라!" 이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새기고, 자신을 객관화 하는 최선의 방법은 (내가 찾은) 기록이다. 기록하고, 들여다보고, 다시 쓰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쓰고, 다시 생각하고,,,,, 그런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한 최선의 선택. 이제 거시적인 삶의 본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미시적 실천방안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라, 그리고 기록하라!" 를 오늘 부터 실천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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