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빼서 유학자금으로 챙겨간 총알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2000년도 여름. 남편은 뉴욕으로 일하러 떠났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5시간 걸리는 가까운 시카고도 있었는데 기차로 14시간 넘게 걸리는 뉴욕으로 갔는지..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그 먼 뉴욕으로 떠났고 난 아들과 단둘이 남아 그해 여름을 났다. 맨하튼가 한국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다는 남편은 석달만에 허리띠 구멍을 세개로 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되서 돌아왔다. 다음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서. 석달 동안 그곳에서의 남편의 생활을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져 눈을 껌벅대곤 한다.  

긴 기차여행 끝에 뉴욕에 도착한 남편은 아는 동생네서 이삼일동안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수입이 괜찮다는 말에 웨이터일을 하기로 하고 한국판 중앙일보나 한국일보에 난 식당에서 낸 웨이터 구인광고를 보고 식당 몇군데를 찾아다닌 끝에 뉴욕에 간지 며칠 안되 맨하튼에 있다는 한 한정식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웨이터일을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수염을 깎았다는 남편의 말을 전화로 들을 때 코끝이 아려 아무말도 못하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여기 생활도 재밌다고 하는 남편의 위로에도 떨어져 있는 내내 남아있는 난 그렇게 계속 맘이 아렸다. 숙소도 같이 일하는 웨이터 동료랑 같이 지내는 걸로 방값을 절약할 수 있다고 좋아했을 때도. 새벽에 뉴욕 전철을 타고 나가 하루종일 일을 하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쓰러져 잔다고 했을 때도. 여지껏 한번도 흘려본 적 없는 쌍코피가 났다고 했을 때도. 쉬는 날에도 누군가 일이 있어 손이 빈다고 하면 무조건 대타로 나가 일을 뛴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팁을 많이 받았다며 좋아라 하는 날에도.  

남편을 통해서 알게 된 뉴욕 웨이터와 웨이츄레스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듯 했다. 허긴 울 오마니 말씀대로 남의 주머니에서 돈받아가야 하는 일치고 쉬운 게 어디 있으랴 만은. 대부분의 웨이터와 웨이츄레스 주 수입원은 주인장이 주는 쥐꼬리보다도 짧은 주급이 아니라 손님이 주는 팁이라고 한다. 헌데 그 팁도 자기가 받았다고 해서 자기 몫으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받은 모든 팁들은 일괄적으로 한 곳에다 넣고 나서 하루일이 다 끝난 후에 헤드 웨이터가 각자의 비율에 따라 나누어 준다고 한다. 헌데 그 나누는 기준이란게 얼핏 들으면 공정하지 않은 듯 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일한 연수에 비례해서 나눈다고 하니 우리가 식당에 갔을 때 팁을 놓을 때는 대부분의 경우 친절하게 서비스해주던 이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얹어주곤 하는데 그런 짠밥에 비례해서 나눈다고 하니 친절해서 팁을 많이 받았을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듯 하기에 하는 소리다. 허나 어쩌랴 그것이 그 곳의 룰이라는데. 신입이 군말없이 따라야지. 해서 처음 한달 남편은 사람 명수대로 나누어서 할당되는 몫 전부가 아니라 그 40퍼센트만 받았다고 한다. 처음 온 신입은 40%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올려 두서나 달이 지나야 원래 받는 몫의 100%를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가을학기 개강 전까지 기껏해야 3개월 정도만 일하는 남편의 경우엔 일을 그만 둘때까지 계속 100%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니 더 더욱 공정하지 않게 들렸을게다. 허나 다행히도 남편은 한달도 안되서 100% 팁을 다 받을 수 있었단다. 그 이유는 적지않은 나이에 가족까지 떼어놓고 열심히 일하는 걸 보고 그런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눈썰미가 좋아 일을 금새 익힌데다 어딜가나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의 남편은 그곳 사람들과도 즐겁게 생활했을 테고 그곳에서 매일 매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남편과의 전화통화로 그리고 돌아와서 들려주는 얘기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때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주고받던 전화 대화의 주 관심은 일당 팁을 얼마나 받았냐는 거였다. 그날 팁을 많이 받았는지 시원챦게 받았는지는 남편의 목소리만 들어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많이 받을 때는 하루 팁이 거의 200불이 될 때도 있었지만 적은 날은 100불도 안 될 때도 있었으니까. 우린 그해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남편은 반찬그릇들과 뚝배기등이 얹혀진 쟁반들을 들고 식당 일이층을 오르내리면서 난 그날 하루 어떤 손님들을 만났고 팁을 얼마 받았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주는 남편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하루 하루를 사는 듯 했으니까. 그런 남편의 웨이터 아르바이트 경험덕에 우린 식당에서 식탁위에 놓고 나오는 팁에 대해 전보다 훨씬 신중해졌다. 팁을 주는 이들한테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한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그렇게 석달을 넘게 고생한 끝에 남편은 가을학기 등록금과 생활비가 될 만한 몫돈을 벌어왔고 그덕에 우린 자칫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심각한 고비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뉴욕에서 일하고 돌아온 후로 남편은 종종 과일 디저트를 담아내던 웨이터솜씨를 발휘해서 오렌지나 수박등을 제대로(!) 깎아 내놓곤 한다. 허나 입에 대지는 않는다. 특히 수박은. 남편이 수박을 안 먹는 이유는 그 맨하튼 식당에서 디저트용으로 너무 많은 수박을 잘라야 했던 기억에다가 뉴욕에서 돌아오고 나서 일하게 된 야채가게 아르바이트에서의 더 힘든 경험탓인지 수박엔 입도 대지 않는다. 그 야채가게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다른 곳에 비해 물건들이 싱싱한데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머니가 가벼운 유학생들이나 저소득층 주민들이 주된 손님들이었다. 남편은 그 곳에서 일주일에 스무시간 정도 일을 했는데 특히 여름이 제일 일이 많아 힘든 계절이었다.특히 한국 수박보다 두서너배 크고 길쭉한 이곳 수박이 여름 한철 잘 나가는 품목이다 보니 어쩔 때는 하루에 삼사백통의 수박들이 들어오는데 그 많은 수박들을 트럭에서 가게안까지 날라서 수박을 담아놓는 커다란 통안까지 깨지거나 곯지않게 차곡 차곡 쌓아야 하는 일이 가장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그 통이라는게 높아 수박을 쌓으려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작업을 수박통 갯수만큼 해야하기 때문에. 수박이 들어온 날 남편의 옷은 수박을 안으면서 묻었을 흙과 땀으로 흥건했던 걸 기억한다. 그때 질려서인지 남편은 수박을 먹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먹기 좋게 잘라주고 씨를 발라주면서도.  


남편은 그런 고생스런 경험들이 그땐 많이 힘들었지만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긴다. 영화작업을 하는 그에게 그런 경험들을 소재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니 남한테 들은 이야기가 아닌 자신가 겪은 이야기들이니 아마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힘이 될거라고 믿는다. 매사 긍정적인 남편은 늘 사람들을 좋아한다. 해서 어디서든 누구한테든 맘을 다하는 성격이다. 손님들도 아는가 보다. 그런 남편의 마음과 몸가짐이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을. 뉴욕에서 일할 때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손님들도 많은 이들이 그런 남편을 기억하고 보고 싶어하고 특히 저소득층 주민들이 많이 찾곤 하던 그 야채가게에서 일할 때도 무거운 수박을 사들고 가는 노인분들이나 여자들을 위해 수박을 차까지 들어다 주곤 하던 그는 언제 부턴가 거리나 월마트에서 만나는 누군가와 반갑게 안부를 주고 받곤 했는데 그 사람들 대부분이 야채가게 단골손님이라고 소개시켜주곤 했다. 기억에 남는 분들 중에 그 야채가게 단골 손님이었다는 할머니 한 분이 우리 가족을 추수감사절 저녁에 초대를 해주셨다. 풍족하지 않으신데도 우리를 위해 칠면조를 굽고 과일을 내어놓으시며 준비해주신 덕에 그 할머니랑 두 아들이랑 보낸 추수감사절의 소박하지만 정성어린 저녁은 우리가 여기서 먹은 여느 추수감사절 음식에 비할 바가 못될 만큼 오래오래 추억하게 된다.  

삼년 전 가족여행으로 뉴욕을 갔을 때 남편은 아들과 나를 그때 일했다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었다. 그때 같이 일했다던 헤드웨이터와 반가운 재회를 했고 아들과 난 그 식당을 둘러보면서 웨이터 복장이라는 까만색 양복바지에 하얀색 와이셔츠, 까만색 신발을 신고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한국음식들이 올려져있을 묵직한 쟁반을 들고 일이층을 오르고 내리고 했을 아빠와 남편의 모습을 그려봤다. 언젠가 그곳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하고 찍었다는 사진속에서 수염을 깎고 웃고 있는 남편의 낯설고 어색했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이듬핸가 시카고로 여행했을 때 남편은 우리를 미시간 호수 근처의 한 벤치로 데려갔다. 6년 전 뉴욕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앉았던. 그때 그 벤치에 앉아 기차시간을 기다리면서 내가 점심으로 싸줬다던 삶은 달걀을 먹었던 기억을 얘기해주었고 우리 가족은 그 벤치에 다 같이 앉아 그때 이야기를 했다. 근데 난 왜 하필 목이 잘 매는 삶은 달걀을 싸줬을까...입대시키는 것도 아닌데..하면서.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남편을 제일 힘들게 했던 건 일보다도 우리와 떨어져 있어서 였다고 했다. 특히 그렇게 이뻐하는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석달동안 엄마랑 지내던 세살배기 아들이 오랫만에 만난 아빠를 낯설어 했을 때 많이 서운해하던 남편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뉴욕을 다녀온 후에 가끔 자기도 방학동안 웨이터일 하면서 용돈 좀 벌고 싶어 뉴욕으로 떠나겠다는 청춘들이 몇  찾아왔었지만 그네들 대부분이 일주일도 못 되서 돌아오거나 뉴욕 관광만 하고 오는 그네들의 손엔 뉴욕에서 사들고 쇼핑가방들이 들려져 있었다. 남편 말대로 절실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일게다. 기실 외국인이 학생 신분으로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이 나라에서는 명백한 불법이다. 그럼에도 워낙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많다. 더군다나 뉴욕이나 큰 도시에서 학생들은 그런 아르바이트들로 용돈이랑 학비를 번다. 한인업주들도 세금에 대한 부담도 없고 영어 쓸 필요도 없으니 그네들을 고용한다고 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학비를 쓰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뉴욕 생활을 즐기는데 쓴다고 한다. 공부는 뒷전으로 한채 공부를 하러 왔는지 돈을 벌러 왔는지 헷갈려하다 결국은 공부를 접고 돈만 벌다 불법체류자로 남는 젊은이들이 뉴욕만 해도 꽤 많다고 한다.  

남편은 공부에다 아르바이트, 조교 그리고 나 역시 공부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린 힘든 고비를 하나 하나 넘길 수 있었다. 남편은 5월 졸업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8월까지의 여름방학동안 잠시지만 동네 한국식당에서 아르바이를 했다. 주위에서 말리는 이도 있었다. 이젠 하지 말라고. 허나 남편은 뭐 어떠냐며 노는 것 보다 낫다고 한달 넘게 웨이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는 아빠가 웨이터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들이 물었다. "그럼 아빠 잡(job)이 프로페서(professor)가 아니고 웨이터에요?" 물론 아들은 웨이터인 아빠에 대해 실망을 해서 물은 게 아니었겠지만 그런 아들을 보고 나와 주변 사람들이 한차례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들과 난 그렇게 건강한 정신의 아빠이자 남편을 사랑한다. 그런 그의 건강함이 우리가 지난 시간을 견디게 할 수 있었던 힘이기에. 물론 그렇게 일하는 과정이 쉽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던 건 그 시간동안 만났던 수많은 이들과 그 공간에서의 경험들덕에 우린 비록 주머니는 가난한 유학생부부였지만 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로 살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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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돌리는 곳마다 끝없이 펼쳐져있는 옥수수밭이 지루하긴 해도 8년 사는 동안 이렇다 할 큰 사건사고 없었던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중서부 시골동네를 떠나 이곳 남부동네로 이사와 뒷늦게 시작한 나한테 공부 잘 끝내기와 함께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그건 다름아닌 여기서 무사하기...살아남기.
얼핏들으면 처절하게 들리지만 허긴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그게 여기서 하루 하루 지내는 내 심정이다.

직장때문에 여기서 5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서 사는 아들이랑 남편은 이 험한(!) 도시에 혼자 남아있는 날 위해..혼자 적적해 할까봐..그리고 무엇보다 무사하게 하루를 잘 살았나..해서 하루에 몇번씩 전화를 주고 받는다. 특히 차를 갖고 어딜 나간다거나 늦은 시간에 밖에 있다거나 하면 어두컴컴하기 전에 집에 들어가라는 청소년지도용 멘트로 날 재촉한다. 허긴 그럴 만 하다. 처음엔 하루에 서너번 넘게 들려오는 요란한 싸이렌 소리에 대체 또 뭔일이 터졌길래..이 난리가 싶어 고개를 빼고 내다 보곤 했었는데..이젠 무덤덤해졌나보다. 싸이렌 소리엔 고개도 안 움직여지고 학교에서 단체로 보내주는 캠퍼스 사고소식에도..누가 또 총들고 주차장에 나타나 차를 털어갔구나..하고 흘려읽게 되었으니까. 일년사이에....내 알람은 이렇게 둔감해졌다.

물론 내 그런 무덤덤함이 섬짓하게 느껴질 때도 있긴 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한귀로 흘린 저 앰브란스 소리가 나는 그 어딘가에 일어났을 일들을 상상해서 떠올려 보면 누군가가 총에 맞아 다쳤다거나 죽었을 수도 있고 차사고가 나서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고...최악의 경우는 만일 그 누군가가 내가 아는 누군가라면...그때서야 돌아보게 되었다는게 참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여기 온 일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내 개인적인 일은 아니지만 이 동네에서는 좋은 일보다는 맘 아픈 일이 더 많았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여기 온 첫학기..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일년 전 가을학기가 거의 끝날 무렵...학교 기숙사에서 터진 총기사고였다. 그것도 우리가 사는 기숙사 아파트 바로 맞은 편에 살던 당시 공대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인도 남자랑 그집에 놀러왔던 같은 나라 친구 한명이 함께 변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한동안 이 주변은 흉흉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이 뜨고 기자들이 인터뷰하자고 문을 두들겨대고 같은 아파트에 살던 (대부분이 나처럼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어쩌면 자기자신들이 그 피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해했고 같이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러 왔다가 처참하게 변을 당한 피해자들의 일이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사건이후로 이곳의 안전이 안심이 안되서 그리고 내가 힘들기도 해서 지금은 아빠한테 가서 지내는 아들내미한테도 그일은 적쟎은 충격이었을게다. 비록 서로 잘 알지는 못해도 아침 학교가는 길목에 거의 매일마다 담배 한대 피워물고 집안에 들여놨던 화분들을 광합성시킨다고 햇볕에 내다 놓곤 하던 그 인도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니. 그나마 간단한 눈인사나 하이..하는 아침인사만 나눴을 뿐인데도 아들과 난 한참 동안을 그 아파트 앞을 지나가거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맘이 섬찟해 했으니까. 정작 남편을 보낸 그 각시의 맘은 오죽했을까. 더군다나 임신하고 있었다니.  

그 사건이 있던 날 밤 그 시간에...난 그 집쪽을 향해 난 창가에 앉아 그 다음날 아침부터 치뤄야 할 기말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남편은 가까운 동생네 집에 놀라가고 없었다. 아홉시가 좀 넘었을 때 조용하기만 하던 바깥에서 낯선 소리가 들리긴 했어도 설마 설마 했다. 실제로 총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멀리서 들리오는 땅..땅..하는 두번의 소리에 때마침 걸려온 남편한테 총소리 비슷한게 들렸다고 하니 이웃 아파트로 놀러갔던 남편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며 별일 아닐거라고 했었다. 헌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아파트가 방음시설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되어있어 집안에서 쐈다는 그 총소리가 바로 건너편에 사는 내 귀에도 어디선가 멀리서..들려오는 듯 햇던게다. 남편과 통화하면서 밖을 내다보긴 했었다. 그러다 방안의 불빛이 너무 밝아 밖이 잘 안 보여 실내등을 끄고 다시 내다봤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대신 어디선가 급하게 뛰어가는 몇개의 발자욱 소리들과 사람말소리들이 들려왔고..곧이어 서둘러 떠나는 듯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을 뿐...별 다른 게 없어 하던 공부를 계속 했다.

그러기를 한시간여 지났을까.. 갑자기 문밖이 시끌시끌하고 파란빨간 불빛이 창을 통해 번쩍번쩍해진다. 뭔일인가..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가까이 지내는 한국이웃이 토끼처럼 놀랜 눈으로 바로 앞집에서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뭐하냐고  묻는다. 사람이 죽었다니...하고 밖을 내다보니 이미 앞마당은 요란한 싸이렌을 켜댄 경찰차들로 가득 찼다. 그때서야 알았다. 그게 진짜 총소리였다는 걸. 정신을 놓은 듯해 보이는 인도 여자가 경찰의 부축을 받고 있었고 앞집은 노란선으로 차단되어있었다. 그때 그집 문가 밖으로 삐죽 나와있는 두개의 발들이 보였다. 힘없이 널부러져있는.. 눈이 마주친 경찰은 뭘 듣거나 본게 있냐고 물었다. 해서 사람들은 못 봤고 도망치는 발자욱 소리랑 차가 빠져나가는 소리만 들었다고 얘기해줬다. 발자욱 소리는 한명이 아니라 여러명이었다고. 난 그 증언을 오는 새벽녁까 찾아오는 경찰이나 기자들한테 몇번이나 반복해야 했고 기말시험공부는 둘째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 다음날 시험을 보러 가야했다. 사건은 한참을 가닥을 잡지 못한 채 오리무중이었다. 나를 포함한 이웃의 증언으로 범인이 한명이 아니라는 단서만 잡았을 뿐. 그 사건이후로 학교는 아파트 주민들의 안전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허술하기 짝이 없던 학교 아파트의 경비를 강화한답시고 씨씨티브이를 달고 경찰들이 수시로 순찰을 돌고 바로 뒷동네에 사는 좀 거친 이웃(?)들이 좀도둑질을 하러 수시로 넘곤 했다는 부실한 나무 담장도 튼튼한 걸로 바꾸는 등 우리 표현대로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열을 올렸다. 허긴 주립 대학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니 학교 망신이 아닐 수 없었을 게다. 누군 그랬다. 보복 살인일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총으로 관자놀이를 쏴서 죽이냐고. 담장 하나만 넘으면 흑인들이 모여산다는 이 동네엔 이런 식의 사건 사고는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라고. 그나마 학교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니 연일 신문에 나고 여론화되서 이렇게 외양간(?)이라도 고쳐주는 거라고 말이다.

듣자하니 힘든 박사공부 다 끝내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그 인도남자의 죽음은 같은 신세에 있는 많은 외국 학생들과 그 가족들을 허탈하게 했다. 게다가 남편과 남편 친구의 죽음을 신고한 사람이 다름아닌 임신한 그 남자의 아내였다니.. 그 처자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싶어 그 사람의 명복을 기린다는 모임에도 모두들 얼굴을 내밀었고 그 사람을 추모하는 사진 근처에 사람들이 갖다 놓은 꽃에도 한송이지만 맘을 보탰다. 그리고 나서 일년동안 그 집은 아무도 이사오지 않은 채 비어있었고 그 범인들이 잡힌 건 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일년이 지난 이번 여름이었다. 그전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었다. 죽은 인도사람이 그 전에 좀도둑질하는 뒷동네 흑인청년들을 경찰에 고발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일에 대한 보복살인일 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이 가난한 유학생 아파트에 뭐 훔칠게 있다고 들어와서 그렇게 두명이나 죽이겠냐고. 헌데 정작 잡혔다는 범인들은 좀도둑질을 하려고 맘 먹고 이곳으로 기어들어온 흑인 청소년들이었다고 한다. 겨우 돈 몇달러를 갖고 가려고 다큰 어른 남자 둘의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그 말에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좀 잠잠하나 했더니 올 봄 이곳 한인 사회는 여기서 오랫동안 살던 한 한인가족의 자동차 사고소식에 휘청거렸다. 아이 둘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아침 등교길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중앙선을 넘어 덤벼드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첫째 딸을 그 자리에서 잃고 둘째와 운전하던 엄마는 혼수상태로 만든 큰 자동차 사고였다. 상대차량은 밤새 술 먹고 그것도 무면허로 운전을 했다는 젊은 겁없는 흑인이었다고 한다. 비록 한번도 뵌적은 없지만 같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맘이 얼마나 아플까...가슴이 먹먹해져 작지만 십시일반 모으는 손길에 같이 했다. 누군가 그랬다. 미국에서 제 명대로 못 살고 가는 대부분의 경우가 자동차 사고랑 총기사고라고.

여기 이사오긴 전에 살던 중서부동네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집사님들 부부가 계셨는데 그 두 분 역시 교통사고로 고속도로 위에서 돌아가셨다. 남의 나라땅에서 그렇게 고생 고생하시다 그나마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살만 해 지셨다며 친하게 지내는 우리가 공부마치고 들어갈 때 즈음에 당신들도 같이 한국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하셨던. 헌데 그렇게 한국에 가고 싶어하시던 이유중에 하나가 당신들이 연세 들어서까지 운전대 잡고 다니고 싶지 않아서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지는 여기서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운전을 하시는 걸 볼라치면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노인분들이 운전하시는 차는 티가 나는고로. 해서 옆을 지나칠 때도 조심 조심...때로는 불안할 때가 어디 한두번인가. 게다가 그 두분이 하시던 가게 옆에는 청력센타(hearing center)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을 찾는 대부분의 손님이 청력에 문제가 있는 노인분들인데..자잘한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부분의 이유가 노인분들의 운전 미숙에서 비롯된 사고라고 한다. 예를 들어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으셔서 그 센타를 박기도 하고 가끔은 두분이 하시는 가게 유리까지 박으시는 통에 그 청력센타는 허구 헌날 공사중이었고 그 이웃가게들도 적쟎은 피해를 본다면서 그런 모습들에 나중에 이곳에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던 그 두분은 어느 겨울날 밤 술취한 백인이 운전하던 트럭이랑 충돌해서 어이없게 돌아가셨다. 이곳에선 필수품에 가까운 자동차가 눈깜짝할 사이에 영락없는 살인무기로 변하는 순간들인게다.

지금 사는 이 도시는 범죄율뿐 아니라 운전 험하기로 치면 여느 대도시 뺨친다고 한다. 해서 보험들때 여기 우편번호를 대면 보험료가 두배로 뛴다고 한다니 얼마나 사고 다발지역인지 짐작할만 할게다. 누구는 서울에 비하면 비할 바가 아니라고들 하지만 눈감고 운전해도 될만큼 사건 사고가 적었던 시골에서 운전하던 나한테 조금만 지체한다 싶으면 뒤에서 재촉의 빵빵이 들어오고 끼어들기는 비일비재하고 좀 늦게 간다 싶으면 뒤꽁지에다 차를 들이대는 겁없는 청춘들이 많은 이곳에서의 운전은 적쟎은 긴장과 부담이다. 해서 남편은 내가 차를 끌고 나간다고 하면 더군다나 밤길에 나선다고 하면 조심하라고 수차례 당부을 한다. 그렇게 안전운전을 늘 강조하는 남편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이곳에서는 내 스스로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남편 말대로 자칫하면 살인흉기로 변하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는게 예전 살던 그 동네처럼 편하지 않다. 혹 낯선 골목에 들어섰다 싶으면 자동적으로 창문을 잠그게 되고 좀 거친 운전이다 싶으면 아예 길을 터준다. 여기서 공부를 마치는 목표말고 무사히 별탈없이 이 도시에서 지내는 목표가 있는고로. 

그리고 이번 여름엔 태풍이 여길 강타했다. 그 태풍으로 부러진 나무들이 바람를 타고 달려들어 주차해놓은 자동차 유리들이 부서지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집을 덮기도 했다. 한 여름에 나간 전기는 열흘이 넘어도 들어올 생각을 안해 완전 수재민신세가 된 이 아파트 주민들은 먼저 전기가 들어온 어디론가 다들 피난을 떠났고 난 남편이랑 아들이 사는 동네로 피난을 갔었다. 태풍은 강력했다. 나무가지를 머리채잡고 휘둘리듯 불어대던 태풍은 내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남편과 아들한테 올라가는 고속도로에는 태풍때문에 넘어진 전신주들이랑 나무들이 여기 저기 도로를 막고 있어 돌아가야 했고 전기가 나가 신호등이 작동이 안되 차들은 연신 거북이 걸음이었고 문을 연 주유소를 찾아 헤매다 겨우 찾은 곳에서 차기름을 넣기 위해 한시간도 넘게 기다려야했다.

이렇게 적고보니 일년이 아니라 여기서 삼년은 더 산 그런 느낌이다. 시간이 지나고 이젠 또 평안한 일상이 돌아왔고 풋볼시즌인 요즘은 주말이면 다들 풋볼구경하느라 들썩 들썩댄다. 언제 전기가 나갔고 태풍으로 휘청거린적이 있냐는 듯말이다. 그 와중에도 남의 나라 살이하는 것도 서글픈데 어디서 칠지 모르는 날벼락은 피해야지...하는 외국학생들이 어디 나뿐일까. 뜸금없는 생각이 든 건 평소 즐겨찾는 커피집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또 뭔 사고가 터졌는지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아침을 뒤들어대고 있는데 이 커피집에 앉은 이들의 일상은 참으로 평안해뵌다. 누구하나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보는 이가 없다. 대체 이놈의 도시에서 사는 하루 하루동안 저 싸이렌 소리을 안 듣고 지내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얼마나 둔감해지기에 저런 모습들일까...둔감해졌다고 하나 난 여전히 싸이렌이 도착하는 그곳에서 일어났을 사고에 맘이 안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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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나이'는 또 다른 이름의 이데올로기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나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열'을 매기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어디에 가면 자기 나이를 한 살이라도 줄이고 싶어하는가 하면 어딜가면 빠른 생일을 운운하며 한살이라도 더 붙일려고 한다. 전자는 젊어지고 싶은 심리일테고 내가 얘기하려고 하는 후자의 경우엔 인간관계에서 한살이라도 나이가 적다는 것은 처음부터나이때문에 밀리는게 부당하다는 심리에서 연유한게 아닌게 싶다. 기실 나이에 한해 한해 보태어지면서 '나이값'하고 산다는게 참 어렵다고 절감하는 본인으로서는 왜 그렇게 자기 나이를 부풀리려고 하는지 조금 의아하긴 하다. 농담으로 '나이가 깡패'라고 하지만 기실 밥그릇 순서대로 매길 수 있는 건 태어나는 순서뿐..그 다음부터는 각자의 환경에 맞게 돌아갈 수 도 있고 빨리 갈 수도 있으니 굳이 '나이'를 따지는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 때도 많다.

공부하러 온 이곳에서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드는 건 이곳 역시 '나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무시할 수 없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내 보기엔 좀 심한 경우도 있다. 그건 이곳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 살아온 각자의 배경에 대해 서로 잘 모른다는 점과 공부하기 위해 몇년간 머무르다 가면 된다는 한시적인 관계라는 생각탓인지 몰라도 여기서 만난 사람들중에 가끔 자기의 진짜 나이에 몇해를 보태거나 빼는 이들도 있다. 재밌는 것은 그런 경우의 대부분이 실제 나이보다 많게 보태지 결코 어려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해서 그 나이때문에 벌어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들이 실제로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일을 많이 겪어 본 남편은 농반진반으로 나이가 미심쩍은 사람한테 얘기끝에 '민증(?) 까자'며 생년월일이 적힌 신분증을 들이 밀기도 하지만 선뜻 같이 보여주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모른 척 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얘기했던 나이보다 신분증에 나온 나이가 왜 더 적은 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쓴다.

또 하나 재밌는 것은 그런 해프닝의 원인이 태어난 순서에서 벗어난 '예외' 에 있다는 것이다. 그건...한국사회의 또 다른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옛날말로..'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상투를 틀어야 어른'이라는 식의 생각들을 아직도 많이 갖고 있다는데 적쟎이 놀라곤 한다. 하여 똑 같은 나이라 해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선입견이 바로 그 예외의 근거가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자기 나이가 더 어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결혼했다는 이유로 자기보다 손 윗사람들을 '형'이나 '언니'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거나 심지어 그네들을 손위사람으로 대접해야 하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기의 나이에 몇년을 보태기까지 한다. 그건..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상투틀고 쪽지면.. 어른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는..생각탓인게다. 혹은 아무리 자기 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라고 해도 그 남편이 자기 남편보다 어리면 결코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누구 누구의 어머니'가 아니라 '누구 누구 엄마'라고 은근히 하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건 자기의 독자적인 관계가 아니라 남편을 통해 관계를 맺는여자들의 경우에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나이 대신 자신이 결혼한 지 몇년 되었고 자기 아이들이 몇살인지 부터 얘기한다. 해서 이곳에는 어떤 이는 진짜 그 사람의 나이가 몇살인지 정확하게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웃지 못할 경우도 있다. 내가 만난 한 친구도 몇년생이냐는 질문에 자기의 진짜 나이를 얘기하는 대신 자기보다 두 서너살 많은 누구를 가리키며 그 집 얘들이랑 자기얘가 동갑이라는 등, 결혼한 지 몇 년 되었다는 식으로 돌려서 대답하는 이도 있다. 동문서답이 따로 없다.

내가 입에다 자주 달고 다니는 말중에 하나가 '태어나는 것만 밥그릇 순서'라는 말이다. 그건 태어난 순서랑 우리네 인생살이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의미다. 어떤 이는 몇살에 졸업-취직-결혼-출산이란 정해 놓은 흐름대로 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정해진 틀과 상관없이 결혼 대신 공부나 일을 선택해서 살거나 나중에 늦깎이로 공부하거나 결혼해서 사는 나같은 뒷북형 인간들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헌데 같은 나이인데도 결혼을 안 했다는 이유로 결혼을 늦게 했다는 이유로, 혹은 여자라는 이유로...그렇게 하대를 받는다면 아직도 우리의 생각이 상투틀고 쪽을 올려야.. 대접받는 그 시대의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살다보면 다 알게 되는 건 실상 사람관계에서 물리적인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그럼에도 그렇게 나이로 인해 엮어지는 관계를 우선시하는 건 아니 우선시 하다 못해 자기 제조 연월일(?)까지 속이면서까지 인생 선배이고 싶어하는 건 '나이'가 어느새 사람관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버렸다는 의미일게다.  그럼에도 우린 안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친구들한테서도 배울 것이 있기 마련인 것을. 그네들이 결혼을 언제 했건간에...아이가 몇이냐..얘들 나이가 몇살이냐..여자냐 남자냐도 결국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온...삶의 단계...순서..다시 말해 나이 스물엔 이래야하고..서른엔 어떠해야 한다..결혼 적령기는 언제라는 식의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참...그노무 나이가 뭔지.
남의 나라 땅에 와서도 그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그 뿌리는 징하게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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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인사회의 중심엔 교회가 있다. 특히 유학생들사이에서 한인 교회의 역할은 지대하다. 미국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은 제대로 정착하기까지 한인 교회와 그 교회 식구들한테 이런 저런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처음 와서 아파트를 구하고 은행 계좌를 열고 전화나 케이블과 인터넷을 개설하는 등 사는 준비를 하고 살림살이 장만을 위해 여기 저기 들려야 할 곳이 한 두곳이 아니기에 그분들의 도움은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하는 이들한테는 "은혜의 단비"와 다름없다. 해서 한국에선 전혀 교회랑 안 친했던 이들도 그분들의 도움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주일예배를 참석하고 예배후에 늘 제공되는 한국음식으로 차려진 맛난 점심식사까지 같이 하면서 자연스레 어울려 같은 교회의 '믿음의 식구'가 되기 마련이다.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 때 갈 곳없는 이방인들에게 한인교회는 떡국과 송편등 함께 만들어 먹고 한국스러운 놀이들을 하며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터를 제공한다. 다 같이 모여 이방인으로 사는 서러움들을 한국에 대한 그리움들을 그렇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한국 명절 뿐아니라 땡스기빙이나 할로윈 같은 미국 명절이나 휴일에도 미국스러운 음식과 놀이 등을 제공하면서 미국 문화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또한 그 지역의 대부분 한글학교들은 지역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대개가 일주일에 한번 뿐이긴 하지만 당신 아이들한테 한글을 접하게 해주고 싶은 부모들은 그게 무료든 유료든 한글 프로그램이 있다면 아이 손을 데리고 찾는다. 하여 일단 교회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주일예배에서 만나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많게는 목장모임이다 수요예배다 해서 일주일에 서너번씩 모이게 되니 이만하면 한인 교회에서 맺는 사람관계가 유학생활에서 맺게 되는 인연들의 중심이 되기 마련이다.

아마 예비 유학생들이 유학생활에 관해 듣게 되는 조언들 중에 하나가 미국에 가면 그동네 한인교회를 찾아라..일게다. 그건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믿음생활말고도 교회를 통해 얻게 되는 부가적인 '득'이 많은 탓이다. 혼자서 심심한 유학생활을 견뎌야 하는 미혼의 청춘들은 교회라는 공간에서 같이 유학생활에서의 힘든 것들을 얘기하고 힘이 되어 줄 만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데다가 주중엔 햄버거나 시리얼등으로 연명(!)해야 하는 청춘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서 제공되는 한국 음식들은 그네들이 교회를 찾는 중요한 '동기'중에 하나다. 내가 아는 어떤 청춘들은 밥을 먹기 위해 주일예배시간을 견딘다고 해서 자긴 '밥신자'라는 우스갯 소리를 할 만큼 교회에서 제공되는 점심이 주는 유혹은 그들에게나 결혼한 이들에게도 강력하다. 기혼자의 경우 더구나 아이들이 있는 경우 교회를 통한 인간관계에 더 의지하게 된다. 특히 공부하는 자기를 뒷바라지를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의 나라 살이를 견뎌야 하는 상대 배우자한테 그리고 미국아이들 틈에서만 지내다 보면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를 한국사람들간의 정서를 자식한테 되새겨주기 위해 교회를 찾는 이들도 많다. 생각해 보라. 당신과 자녀가 학교 가고 난 종일동안 배우자가 한국에다 두고온 가족과 친척들을 그리워하고 새로운 동네에서 사람들도 제대로 섞이지도 못 한다면, 집에서만 지내면서 오로지 공부하는 자기만을 바라보고 산다면, 그거야 말로 부부 서로에게 더 없이 피곤한 일이다. 허니 교회랑 전혀 안 친했던 이들 주로 남정네들이라고 해도 배우자를 위해 주일예배나 교회행사에 참석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물론 본인들도 그안에서 엮어지는 인연들과 어우러져 잘 지내면서. 허나 그네들은 말한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배우자와 자녀들이 낯선 미국땅에서 지내는 동안을 무탈하게 그리고 즐겁게 지내게 해주고 싶은 맘이 가장 큰다고. 

이 정도되면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에서 교회는 이방인의 삶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고 버티는(!) 이들은 스스로를 변방 혹은 주변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한국 음식이 고파도 버티거나 자기들끼리 뭔가를 만들어 먹거나 우리 주변에 있던 청춘들이 그렇듯이 슬그머니 가족있는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섞이고 맛을 본다. 허나 그것도 결혼하지 않을 때 얘기일 수도 있다. 결혼하고 곧바로 미국으로 날라 온 우리가 아는 한 후배부부는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기실 교회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단다. 허나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를 또래와 같이 놀게 하고 아이의 교육과 관련된 정보등을 얻으려니 한인교회를 다닐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더란다. 교회를 안 다니고는 그런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 필요에 의해 한인 교회에서 섞여 사는 이들이 많은게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 명절이건 미국 명절이건 불러주는 이 없이 심심하게 지내거나 필요한 정보를 얻는 길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교회를 믿음이 아닌 사람관계때문에 다니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독실한 믿음이 생겨 한국에 돌아가서도 교회를 꾸준히 다니고 자기의 믿음을 잃지 않는 이들도 있을게다. 허나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람 관계때문에 교회를 다닌 이들한테 실제 교회에서나 생활에서 보여주는 믿는 자들의 삶들이 그리 좋은 본이 되지 못한 탓이 제일 크지 않을까.        


그렇게 교회가 '본'이 되게 하기 위해선 다시 말해 제대로 한인사회에서 '정'기능을 하기 위해선 전제가 필요한 듯 싶다. 적어도 내보기엔. 여기서 얘기하는 지역은 한인교회가 수백군데가 된다는 대도시 얘기가 아니다. 그런 동네야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가 전부니 열외로 치고 내가 언급하는 지역은 한인의 숫자가 이백에서 삼백정도되는 아주 없진 않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는 동네다. 그런 동네에서 교회가 한인사회에 제대로 중심에 서기 위해선 우선 그 지역에 한인교회가 한군데여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몇 안되는 한인들이 서로 담을 쌓지 않고 한군데에 모여 서로 부딪끼면서 제대로 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허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아쉽게도 한인 사회의 규모가 중간정도만 되는 도시들엔 한인교회가 적어도 두개 이상 있다. 교회의 갯수를 들었을 때 이 동네에 한인교회가 그렇게 많아..라고 할 정도의 숫자말이다. 물론 서로 다른 교회를 다닌다고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 힘들기에 하는 소리다. 대체로 보기 드문 현상이기에. 차라리 한인교회의 숫자가 수백개가 된다는 엘에이나 뉴욕, 휴스턴같은 큰 도시들에서는 워낙 많으니 그게 가능할 수도 있을게다. 경쟁자(?)들이 많으니 신경쓰지 않고 자기 교회 식구들만 잘 챙기면 되니까. 허나 이번 학기엔 누가 새로 이사왔고 어느 집이 공부마치고 어디로 들어갔고 하는 동네소식들이 며칠도 안되서 주변인에 속했던 내귀에 들어올 정도로 두서너명만 건너면 서로 다 알게 되는 정도 규모의 한인사회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모든 교회들이 그렇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중소규모 도시의 한인교회, 특히 유학생들이 많은 학교 타운의 한인교회들은 저마다 '분리'의 역사를 (내 맘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갖고 있다. 여기서 '분리'의 역사란 처음엔 하나여서 사이좋게 지내던 한인교회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 교회의 일부교인들이 나와서 다른 한인교회를 만들면서 싹트는 갈등들이 원래 교회의 정기능에 제동을 건다. 예를 들어 새로 이사오는 이들을 각기 다니는 교회로 인도하기 위한 물밑 경쟁부터 시작해서 자기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한테 등을 보이는 사실 개인들간의 갈등의 골들이 결국은 교회들간의 갈등의 골로 이어지곤 한다. 그나마 보기에 아름다운 것은 그런 갈등의 씨앗에도 불구하고 가급적이면 서로를 위하고 헐뜯지 않고 배려해주는 참으로 '크리스챤'다운 마음씨들이다.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들은 교회들이 서로 연합해서 한인사회의 대소사를 챙길 때 드러난다. 내가 지금 사는 이 동네 한인가족들이 교통사고라는 큰일을 당했을 때 세개의 한인교회들은 맘을 합해 그 가족들을 돕는데 힘을 모았고 지난번에 살던 동네에서도 한인학생 총격사고 뒷수습을 위해 평소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교회가 힘을 모았다. 허나 그런 큰일들이 아닌 사소한 일들에 대해 교회들은 각기 자기 식구부터 챙기는 모습이 대부분이고 학기초만 되면 새로운 신자를 영입하는데 온 신경을 모으는게 여기선 흔히 볼 수 있는 교회의 모습들이다.  

가벼운 예를 들어 볼까나. 설교시간에 목사라는 분이 누군가 라이드(차없는 이들을 태워주는)를 요청했을 때 우리교회 사람들부터 챙기라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하질 않나 자기의 교회사람을 한인학생 회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은근한 물밑작업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 이윤즉 그 교회의 식구가 한인회장이 되는 해엔 그 교회 신자 숫자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인학생회장이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들을 자기가 다니는 교회로 인도하는게 인지상정인고로. 심한 경우엔 '갑' 교회식구가 한인학생회장이 되서 일년에 두번있는 한인학생회를 주관하는 경우 한인학생회에서 상대편 교회인 '을'교회 식구들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해서 차라리 아예 아무 교회랑도 상관없는 이가 한인학생회장이 되는 게 낫다는 얘기들을 하기도 한다. 글쎄다..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하는 세력은 내가 보기엔 교회를 이끄는 목자들이나 학생들이 아니다. 그런 교회 '분리'의 역사는 공부하는 동안만 지내다 가는 뜨내기 유학생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오랜 시간동안 터를 잡고 사는 교민들에 의해 주도되는 경우가 많다.      


그곳에서 삶의 터를 잡고 오랜세월동안 생활하신 교민들 생활의 중심은 한인교회다. 대부분의 교민들이 주로 교회에서 만나 교제를 한다. 도시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그분들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분들도 있고 비지니스를 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이 지내신 세월은 유학생들의 길어봤자 오육년 세월에 비하면 참으로 긴 세월이 아닐 수 없다. 그 오랜시간동안 크지 않은 동네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다보니 유학생들이 감히 모르는 오래된 개인적인 혹은 교회간의 앙금과 간극이 많을 수 밖에 없을게다. 해서 인지 교회를 한군데로 합치고자 하는 마음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분들에 의해 제동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그분들한테 교회는 남의 나라 살이에서 풀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고, 당신의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사회 공간이기에 양보하기 힘든 공간이기 때문일게다. 가끔 듣는다. 다니시는 교회에서 뭔가가 안 맞아하시는 교민분들이 그럼 우리끼리 나가서 예배보자..는 말씀들을. 그땐 그게 서운한 맘에 그냥 하시는 말씀이겠지 하다가 어느날 그게 구체화되면서 몇분들이 주도해서 교회를 새로 만드셔서 두개 있던 교회가 세개가 되는 경우를 목격한 적이 있기에. 교회 하나를 세우는게 별로 어렵지 않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던. 그 분들한테 교회가 갖는 의미는 우리같은 뜨내기 유학생이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이라서 그렇게 까지 무리를 하시는 걸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당신이 맘편하게 다닐 교회를 갖고 싶으신 게다.

남편은 교회랑 전혀 안 친하지만 속칭 나이론이긴 하지만 친정가족이 크리스챤이었던 난 유학생활 초반에 미국교회를 참 열심히 다녔었다. 영어랑 친해지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오기전부터 들었던 한인교회에 대한 이런 저런 부정적인 얘기탓에 처음부터 멀리했었다. 그럼에도 감사하게도 그 교회에서 좋은 한국분들을과 미국 친구들을 만났다. 해서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 지역 한인교회들간의 크고 작은 갈등으로 불거진 이런 저런 일들을 한발 비껴서 누군가에게 듣기도 하고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아쉬운 점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교회랑 전혀 친하지 않던 사람들이 여기서 교회를 다니게 되고 그 교회식구들하고 서로 섞여 살다 공부를 끝내고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도 여기 있었던대로 교회를 다시 찾게 할 만큼 '본'이 되기엔 한인사회에서의 교회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이다. 아마도 그건 교회라는 공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서로 너무 가까이 지내다보니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사소한 갈등들이 쌓이다 보니 겪게 되는 '좁은 한인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이 교회안에서도 교회들 사이에서도 여전하기 때문아닐까. 허긴 누구말대로 내가 교회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탓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만일 나랑 친한 누군가가 유학을 간다면 그리고 한인교회를 다니고 싶어 한다면 어떤 교회인지 잘 알아보고 교회문을 두들기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유학 생활에서의 첫 단추를 어느 교회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교회에 대한 인식이 180도 달라질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교회문을 두드리기 보다는 차라리 한인학생회 게시판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고 그분들한테 도움을 받아 자리를 잡으면서 한인 교회가 많다면 과연 어떤 교회가 맞을 지 교회들을 찾아 예배도 보고 사람들하고 관계도 맺으면서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정하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아는 누구들처럼 한인교회들에 대한 안 좋은 경험들때문에 아예 교회를 더욱 멀리 하게 될 수 도 있으니 말이다.      

오늘 여긴 또 땡볕이 내리 꽂히고 있다. 팔월도 이제 거의 끝나간다. 그러면 이 땡볕도 사그러들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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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내가 총알을 마련하기 위해 했던 아르바이트 중에 하나가 청소부일이다. 지금은 이민법이 바뀌어서 배우자비자(F-2)로는 공부를 할 수 없지만 내가 수업을 듣기 시작했던 2001년도엔 배우자비자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학생비자 (F-1)이었던 남편이 한 학기에 3과목을 꽉 채워 들었던 full-time student였던 데 비해 배우자 비자였던 난 미국에 온지 일년 정도 지났을 때 공부를 시작했다. 아들이 오전시간에 유치원 전단계인 preschool을 다니게 되면서부터. 처음엔 한 과목을 듣는 걸로. 그러다 아들이 오후까지 학교를 다니게 되었던 다음해부터는 3 과목을 꽉 채워서 들었다. 헌데 여기 얘들 학교는 왜 그리 쉬는 날이 많은지. 빨간 날이 아니어도 선생님들 컨퍼런스다 학부모 간담회가 있다고 하루를 통째로 쉬어버릴 때면 우린 서로 번갈아 가며 두살배기 아들을 돌보면서 수업을 들어가곤 했다. 내가 수업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아빠랑 놀다 아빠가 수업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내차례. 그러다 석사논문을 쓰기 시작 할 때 즈음 내 기억으로는 2003년인 듯 싶은데.. 그 즈음에 이민법이 배우자비자로는 공부를 할 수 없게끔 바뀌는 통에 논문학점만 남겨놓았음에도 비자를 학생비자로 바꾸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할 생각이지만 잠시 언급하면 남의 나라 특히 미국에서 공부하는데 제일 귀찮게 하는 게 바로 이 비자(Visa)다. 여지껏 비자를 몇번이나 바꿨던가 생각하면 게다가 비자를 바뀌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참 많은 돈과 시간을 비자 바꾸는데 썼다. 이때 배우자 비자에서 학생 비자로 바꾸었다가 석사학위를 따고 나서는 남편이 자릴 잡은 뒤에 남은 공부를 마저 하기로 하고 비자를 배우자 비자로 바꾸었다가, 남편이 학교에 임용되던 그 해에 나도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또 학생비자로 바꾸었으니까. 비자를 바꾸러 한국 심지어 캐나다까지 갔었으니까 거기에 들인 시간이랑 비용이 결코 만만챦다. 비자 fee랑 비행기값, 숙박비용까지 포함해서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길에다 버린 시간을 생각한다면 제일 소모적인 절차들 중에 하나다 싶다. 그래도 어쩌랴..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부할 수 없는 것을. 허나 최근 현정부가 무슨 대단한 성과물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던 무비자대상국이란 혜택은 학생비자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그렇게 학생비자로 바꾸자 마자 학교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건 파트타임으로 수업을 들었던 배우자비자로는 할 수 없어서 아쉬웠던차에 조금이라도 벌기위해 신청을 했다. 논문 학기니 수업을 꽉 채워서 듣지 않아도 되는터라 조교일은 나한테 돌아올 턱이 없고 해서 학교에서 일하는 우리로 치자면 근로장학생(student worker)으로. 그 중에서도 청소부(janitor)일을 봄 정기학기와 기간이 짧은 여름학기..이렇게 두 학기정도 했다. 일주일에 20시간동안 일을 해야하는 근로장학생은 조교일과 달리 학비면제같은 건 없지만 한시간에 기본임금 (그 시절에 $6.50이었던)을 받을 수 있어서 조교일을 못 받은 나같은 인터내셔날 학생들이 그 험한(?) 일을 했다. 기실 말이 청소지 그닥 험하진 않다. 특히 맘씨 착한 조장들 (supervisors)을 만나면. 이 일을 하자고 맘먹은 건 무엇보다 일찌감치 청소를 끝내고 남은 시간동안 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유경험자들의 말에 솔깃해서 였다. 힘들거라고 하지 말라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가능하면 학교에서 주는 돈을 받아보자는 심사로 신청했다. 물론 그때 난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었다. 남편의 기우와는 달리 듣던대로 일은 그닥 어렵지 않았지만 오후 5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는 지라 남편과 아들이랑 저녁시간을 한동안 같이 보내지 못해 서운했던 것 말고는 오히려 나한테는 새로운 경험이어서 재밌게 일을 했다.

내가 맡았던 건물은 학교 회계사들이 근무하던 자그마한 3층짜리 건물(Thalm Hall).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하는 일은 5시 30에 늦지 않게 도착 조장아저씨 이름이 Dave인 그 아저씨한테 열쇠꾸러미를 받아들고 왔노라 사인을 하고는 배당받은 건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하는거다. 물품창고를 열어서 무장(?)을 하고 나서 책상마다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깨끗이 비우고 (쓰레기가 담긴 비닐봉지를 통째로 버리고 새 비닐로 갈아끼우는 일), 베큠을 하고, 계단을 쓸고, 화장실 청소까지.       

 


(내가 청소하던 2층짜리 학교건물 사진)
 

 

 

 

 

 

 

 

 

 

 

 

 

그때 알았다. 집안  청소랑은 별로  안 친한 내가 이런 일을 즐길 수 있다는 걸. 왜냐하면 첫날..내가 하는 걸 본 Dave 아저씨가 물었으니까. 전에 이런 일 해본적이 있냐고. 처음치곤 아주 능숙해 보여서라고 해서. 그말을 들은 남편 역시 그럴리가..하는 얼굴로 웃었다. Dave 아저씨가 그런 인상을 받은 주된 이유가 첫날부터 까만색 쓰레기봉투 뭉치를 청바지 양쪽 허리 고리에다 쑤셔넣고 쓰레기 통을 비우는 솜씨가 초짜치곤 꽤 능숙해보였던게다. 뭘 어떻게 하라고 얘기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니 일을 시작한 일주일동안은 가끔 들여다보더니 그 이후로 Dave아저씨는 내 청소를 아주 맘에 들어하면서 일만 일찍 끝내면 남은 시간동안 공부를 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그게 바로 이 일을 신청할 때 나는 꼭 Dave랑 일하고 싶다고 꼭 찍어서 밝혔던 이유였다.

나처럼 청소하는 한국 친구들사이에서 Dave 아저씨의 이런 너그러운 성격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내가 청소일을 할까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 현직(?)에 있는 한국친구들이 너나없이 이 아저씨를 추천해줬었다. 그건 정해진 세시간 네시간동안을 꼬박 일을 시키는 악명높은 조장들도 있기 때문이다. 해서 Dave 아저씨랑 일하고 싶다고 하면서 두달 정도를 기다더니 자리가 있다며 순서가 돌아왔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게다. 이렇게 인심후한 아저씨를 만났으니 말이다. 해서 난 가능하면 빠른 시간내에 일을 끝내려고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돌아다녔고.. 점차 시간이 지나 손에 일이 익으면서는 한 시간도 안되 일을 다 끝내고 남은 시간동안 그 건물 회의실에서 논문작업을 하곤 했었다. 이 아래 사진에 있는 통은 청소하는 내내 밀고 다녔던 통이다. 사무실 쓰레기 수거를 위한. 지금도 학교에서 이런 도구로 청소를 하는 아줌마 아저씨한테 유독 친근감을 갖는 이유가 아무도 이런 내 경험때문일게다.   

 


(아주 요긴한 청소도구통 사진: 청소에 필요한 도구들은 다 저 노란주머니에 들어있었고 난 저 통을 밀고 다니며 청소를 했던)

  

 

 

 

 

 

 

 

 

 

 

 

 

 

 

 

 

 

 

 

 

 

 

특히 텅빈 건물을 열쇠로 열고 들어섰을 때 하루의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난 흔적만들 남아있는 그 건물에 혼자 남아있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첫날 Dave 아저씨는 이 건물을 보여주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냐고. 무섭지 않겠냐고. 특히 자판기들이 놓여있던 컴컴한 지하에 내려갈 때는 불을 어디서 키고 끄고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 전화를 하라며 맘을 써줬었다. 큰 건물을 담당한 다른 친구들은 한 두명씩 짝이 있어서 일 끝나고 나면 수다를 푸는데 혼자서 심심해 할 내가 걱정되는게다. 해서 돈 워리...안심시켜주면서 단..나 혼자 있는 이 건물에 니가 들어오면 큰 소리로 왔다고 알려달라고 했다. 만일 니가 인기척도 안 내고 갑자기 나타나면 그게 바로 날 무섭게 하는거라고. 했더니 우리 Dave 아저씨는 이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내 이름을 부르며 자기가 왔노라 알리곤 하다...며칠 지나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은 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 일을 하면서 내가 즐겼던 놀이 중에 하나가 사무실이나 책상 상태만으로 그 쥔장의 성격을 짐작하는 거였다. 한결같이 치울게 유난히 많은 사람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뭘 해도 흘리는지 게다가 쓰레기는 왜 그리 차고 넘치는지... 그에 비해 어떤 책상은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어 손댈 것이 별로 없고 주변에 떨어진 종이조각조차 없다. 어떤 이는 여기 저기에 뭔 포스잇을 그리 많이 붙여놨는지.. 많은 이들이 가족들 사진들을 책상위에 올려놓았고..어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담았음직한 글귀나 만화등을 붙여놓기도 하는데..그런 다양한 얼굴의 책상들을 지나치면서 그 쥔장의 이미지를 상상해보는 놀이였다.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늘 서류를 책상가득 벌려놓은 채로 퇴근을 하곤 했던. 그리곤 늘 그 책상위에다 이런 문구가 새겨진 (적은게 아니라 아예 플라스틱에다 새긴 걸 보니 생활화되어있는 사람인 듯 했다) 플라스틱 카드를 올려놓곤 했다. 말인즉은 "자기가 둔 채로 놔둬달라" ("Please don't screw my world"). 나 역시 내 책상정리를 잘 못하는 같은 과(type)라 그 맘을 아는지라 그 상태 그대로 손하나 대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은 일을 하러 갔더니 그 책상의 쥔장이 퇴근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책상위보다 훨씬 깔끔(!)해 보이는 내 또래의 백인 남자였는데..난 그 사람의 Hi 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나도 무지 크게 하이로 맞받아치며 외쳤었다. 물론 그 사람은 모르지. 왜 저 본적도 없는 쪼그만 동양아줌마가 자기의 습관적인 인사를 그렇게 해맑게(?) 받았는지. 헌데 그렇게 가끔 늘 비워져있던 자리의 다른 쥔장들을 만날 때마다 반가운 건 매번 마찬가지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일을 참 즐겼던 것 같다. 본적도 없는 그네들이 퍽이나 친숙하게 여겨져 괜시리 마주치는 얼굴마다 하이톤의 하이를 연발해댔으니까. 남들보다 안면근육 발달이 덜 된 내가 평소엔 처음 보는 이들한테 하이 인사를 할 때도 별로 표정이 없어 가끔 뭔일 있냐는 얘기를 들을 만큼 여기 얘들한테 웃는데 후하지 않은 내가 그때는 말 그대로 웃음과 인사를 남발(!)하고 다녔다. 그랬던 적이 그때 말고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물론 그네들이 알턱이 있을리 없지...그 이유를.

다행스럽게도 Dave 아저씨는 내 청소에 대만족이라고 했다. 그 아저씨왈, 나 같은 한국학생들을 조장아저씨들이 선호하는 이유가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해서란다. 내가 얼마나 탁월한(?) 청소부였으면 그 조장 아저씨가 담당 건물이 다른 단대로 옮길 때도 날 같이 데리고 갔겠는가. 남편말대로 '의외의 선전'이었다. 졸업하면서 이 일을 끝내야 할 때 Dave 아저씨는 내 일에 대해 평가를 체크하는 모든 항목에다 "아주 우수하다(very excellent)"라고 체크하면서 그랬다. 다음에 또 청소일을 하게 되면 자기가 써준 이 평가서가 아주 요긴할거라며 혹시 모르는 일이니 평가서를 10부정도 복사해 주겠다는 친절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물론 그것들을 쓸 일은 아직까지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챙겨주는 Dave아저씨의 그 맘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 시절 제일 좋았던 시간은? 물론 청소를 빨리 끝내고 나서 회의실에 혼자 앉아서 논문작업을 하던 시간이였다. 아래 사진은 그때 한방 박아둔 그림이다. 아늑한 회의실에 앉아서. 지금도 난 그 건물 여기 저기를 청소하던 그림들을 자주 떠올린다. 특히 지금 공부하는 학교에서 아침 이른 시간에 만나게 되는 청소하는 분들을 만나면 괜한 친근감에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게 되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같은 일을 해본 이들한테 갖게 되는 일종의 공감대(?)탓인지도 모른다. 허나 여기선 그분들 대부분이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아줌마 아저씨들이고 역시 100% 흑인들이다. 이전 학교처럼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한테 청소일을 주지 않는 듯 하다. 그래서 난 지금쓰는 조교 사무실에서 가급적이면 쓰레기를 남기지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바닥이 깨끗하면 무거운 청소기를 매일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허나 못 고쳐지는 건 책상위 상태만은 여전히 정리가 잘 안된다. 늘 깔끔하지 못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나올 때가 한두번이 아닌고로. 아마도 청소하시는 누군가도 내가 했던 것 처럼 이 산만한 책상을 보면서 내 성격을 짐작하는 그런 놀이를 하는 지도 모른다.  
 


(내 첫번째 노트북 사진. 지금도 쓰고 있는)
 

 

 

 

 

 

 

 

 

 

 

 

 

그때 그렇게 번 돈으로 요 랩탑을 장만했다. 두주에 한번씩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에서 할부로 대금을 치루면서. 이자가 비싸긴 했지만 어쩌랴..한번에 낼 형편은 안되지만 논문 때문에 장만했다. 얼마였더라. 몇달을 그렇게 냈는지는 기억이 안 나니. 요즘처럼 가볍고 작아지는 모델들에 비해 이제 5년이 넘어가는 저 랩탑은 누구말대로 그냥 도서관에다 펼쳐놔도 아무도 안 갖고 갈거라고 할만큼 구식이다. 농삼아 탱크수준이라고 불릴만큼 무겁고 나일 먹어서 점점 느려지고 겨우 워드작업만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점차 맛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쓰고 있다. 자잘한 탈이 날 때마다 남편의 무료 에이에스를 버티면서. 묵은 걸 좋아하는 내 성격탓에 이 랩탑을 보면 그때 일하던 때의 그림들이 떠올리는게 좋기 때문일게다.

지금도 남편과 난 맥주 한잔을 기울일 때마다 우리 얘기의 단골 메뉴로 일했던 그 시절 얘기들을 되새김질한다. 이른 저녁을 5시경에 먹고 6시에 시작하는 청소를 하러 집을 나왔다가 아들이 잠자리에 드는 9시를 훌쩍 넘긴 10시 정도에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들을 재운 남편이 청소하는 건물앞으로 데리로 오곤 하던. 우리의 사랑스럽게 요란스러웠던 똥차를 끌고. 일을 끝내고 그 건물의 열쇠뭉치를 조장아저씨한테 건네주고 이제 청소끝나고 돌아간다는 싸인을 하고 나오면 건물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수고했어...하던 그 날들을.  집에 돌아와..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소소한 것까지 나누면서 하루를 마감하던 그때 그 시절 얘기들을 안주삼아 소들이 하는 양..또 하고 또 하고 되새김질을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돌이켜보면 힘들었을텐데도 그때 참 재밌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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