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nd-up Bird Chronicle (Audio CD, Unabridged)
Murakami, Haruki / Naxos Audio Books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이전에 읽었던 그의 작품이라고는 '노르웨이의 숲'인가...그 책 한권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오래전에. 그게 몇년전이었는지는 정확지 않지만. 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다만 한번 빠지면 한 작가의 책들을 다 읽는 내 책읽는 습관으로 미루어 볼 때  책 한권으로 끝내고 다른 작품들을 읽지 않았던 걸 보면 적어도 그때는 하루끼의 소설이 내 코드랑 그리 맞지 않았나..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게 한국에서도 읽지 않았던 그의 소설들을 여기 와서 읽게 된 건 2005년 여름부터였다.  지겨운 논문작업을 끝내고 나서 벼르고 벼렀던 대로 이제부터 실컷 놀자는 맘에서 영화랑 딱딱하지 않은.. 아주 재밌는 소설들을 찾아 읽는데 쏠쏠한 재미를 붙이고 시작했을 때였으니까. '용두사미'의 스타일이라 뭐든지 초반엔 너무 심하게 열심히 하는 터라...그때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동네 도서관(public library)에 들려 한번에 5개까지 공짜로 빌릴 수 있는 영화들이랑 무한정으로 빌릴 수 있는 책들을 잔뜩 빌려다 집에 쌓아놓고 시간날 때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댔다. 그렇게 놀려고 맘 먹었으면서도 그냥 '순전히' 놀자니 웬지 그래서는 안 될 것같구 해서 구실을 붙인게 '영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놀자는 거였다. 그건 그나마 영어로 된 것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면 공부하면서 절감했던 턱없이 후달리는 영어실력에 대한 내공을 키워보자는...대신 빡쎄게는 말고..좀 느긋하게.. 영화로 들으면서 듣기실력 좀 늘리고.. 재밌는 책들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즐기다보면 영어의 표현력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맘에서 시작한 셈이다. 물론 '용두사미'스타일답게 시간이 갈수록 그 초반의 열성은 점점 식기는 했지만...아직까지 하고 있기는  하다.

영화는 이것 저것 주워들은 귀동냥도 있고 원체 좋아하는 터라 이것 저것 좋은 것들을 고를 수 있었던데 비해 책의 경우..처음엔 주제파악을 못하고 넌픽션을 빌려 읽다가 그 참을 수 없는 지루함에 졸기를 몇번..빌린 책들에 은근히 내 침자욱까지 찍어놓고 혼자 미안해 하기를 몇번...그러다 아주 재밌는 소설을 빌리기로 했다. 뭘 빌릴까..하며 둘러보다 눈에 화악 들어오는게 적당한 두께의 문고판 크기 책들이었다. 물론 그 두께와 크기가 눈에 들어왔을리는 만무고 그 표지의 노골적인 남녀상열지사 그림에 필이 꽂혀서 한두권을 빌려 읽고나서 내린 결론은 역시 내용은 표지만도 못한 수준이었고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그렇고 그런..영어 표현을 익히는 차원에서라도 거의 영양가가 없다는 거였다. 베스트 셀러 아니면 미국 작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고로 그 다음으로 빼든게 일단 귀에 익은 존 그리샴(John Grisham)이란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처음엔 그런대로 재밌었다. 'Broker,' 'the King of torts,' 'Partner'등...그렇게 몇권을 읽다 보니 한마디로 물린다고 해야하나. 너무 뻔한 플롯에다 끝부분이 예상되는 반복된 패턴... 물론 덕분에 법률표현이나 뒷골목에서 행해지는 은밀하고 거친 표현등은 재밌게 읽긴 했지만. 그러다 뉴욕타임지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려진 책들을 몇개 읽었다. 허나 하나같이 '그저 그런'류의 소설들이었고 계속 다음 작품을 읽고 싶게하는 작가는 못 찾았다.

그렇게 이책 저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여기서 알게 된 한 동생이 'The Wind-Up Bird Chronicle'라는 제법 두툼한 소설책을 건네줬다. 그녀는 아주 재밌게 읽었다면서. 받고보니 다름아닌 하루키의 작품이었다. 교포인 그녀한테서 받은 책이 미국 작가가 아니라 일본작가의 책이라니..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어도..그래도 정서는 오리엔탈쪽인걸 신통해하면서 그 책을 받긴 했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을 떠올렸고 그 뒷맛에 대한 기억때문에 그닥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미적대며 읽기 시작한 나는 얼마 안 있어 그 책 한권을 읽었고 그 뒤에도 동네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빌려읽기 시작했다..'Ather the quake,' 'An elephant vanished,' 'Kafka on the shore,' 'South of the Border, West of the Sun,'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A wild sheep chase.'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의 소설들은 참 매력적이다.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조금씩 알듯 했다. 왜 이런 시골구석 동네 도서관에서도 남의 나라 작가의 소설들을 몇권씩이나 갖고 있는지.. 책을 빌릴 때 사서들이 가끔 그의 소설을 'fantastic'하다며 빌리는 나보다 더 좋아하는지..그의 소설이 46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팔리는지..  말이다. 얼마 안 있어 난 그 도서관에 있는 그의 책들을 다 읽었고 지금은 다른 인근 도서관에서 갖고 있다는 'A wild sheep chase'을 interlibrary loan으로 빌려 읽고 있다 (잠시 샛길로 빠져 여기 도서관시스템이 좋은 점들중에 하나가 인근 도서관간의 연계( interlibrary loan이란 이름으로)가 아주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학교 도서관도 물론 동네 도서관까지도 자기들이 갖고 있는 않는 책이나 저널들을 학생이나 지역주민이 원한다면 같은 주(State)나 인근 시(city)에 있는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서 챙겨주는 아주 사랑스런 시스템이다. 학교 도서관같은 경우엔 논문(article)을  신청하면 해당 페이지를 복사해서 우편으로 보내주고 동네 도서관에서는 신청한 책을 언제쯤 빌려갈 수 있는지 친절하게 전화로 알려준다. 물론 순전한 공짜일리는 없다. 우리가 학교나 지역에 내는 학생회비 혹은 세금에 그런 비용이 포함되어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얼마나 착한 시스템인가 말이다).

다시 하루키책들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우선 드는 생각은 그의 이야기 방식이 영어라는 언어랑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는 거였다. 물론 이건 순전한 개인적인 느낌이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어차피 소설책을 손에 든것도 다양한 영어 표현방식을 연습하자는 속내도 있었으니 다른 소설보다도 훨씬 읽기 편하게 써내려간 게 원작을 영어로 번역하다보니 결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세세하게 어쩔 때는 지나치게 하나 하나 친절하게 묘사하는 그의 글쓰는 방식이 영어식 표현이랑 참 잘 어울린다. 아마도 그게 나로 하여금 그의 소설들을 계속 찾게 한 첫번째 이유일게다. 그건 한국에서 읽었던 '노르웨이 숲'에 대한 내 기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 책이 어느 출판사였고 역자가 누구였는지도 지금은 기억 못 하지만 그때  기억으론  하루키의 이야기 스타일이 내 표현대로 한다면 참 많이 '번진다'는 거였는데. 글쎄..다른 말로하자면 좀 산만하다고 해야하나. 지나치게 세밀하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그건 우리말로 읽어서 그렇지 않았을까..싶다. 예를 들어, 영어로 된 그의 표현들중에 얼추 비슷한 것을 떠올려보면 "He pushed the bridge of glasses without a word" 을 우리 말로는 "그는 아무말없이 안경을 밀었다" 정도로 표현될게다. 사뭇 다른 느낌이지 않은가. 이런 영어문장의 특징을 언어학자들은 어떻게 구분지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말의 표현으로는 그냥 사물을 뭉뚱그려져 표현되는 느낌인데, 영어의 표현은 하나 하나 그려내는 그의 소설방식을 아주 돋보이게 한다. 다르게 말한다면 우리말로 번역된 책에서 그의 표현은 제대로 정리 정돈이 안 된 방안을 멀리서 찍어서 그안에 담겨진 사물 하나 하나가 제대로 안 잡힌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런 기분인데 반해 영어의 표현은 그 방의 구석 구석 그 하나 하나의 그림을 아주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는 기분을 들게 한다. 물론 그냥 기분이나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 언어구조나 느낌의 차이를 딱 집어내는 건 내 능력밖이니 번역의 차이에서 오는 느낌에 대한 얘기는 그만 하련다.

짐작컨대 한국에서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만 해도 현실과 비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가 나한테는 무척 낯설기도 했을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다른 젊은친구들이 열광했다는 그의 그런 화법에 익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전에 읽었던 그 책의 번역수준이 많이 딸려서 그럴수도 있을거라고 괜히 트집도 잡아보긴 하지만. 암튼 한 작품이 좋으면 그 소설가의 다른 작품까지 다 읽어야 직성이 풀이는 내 책읽는 스타일에 그의 다른 작품을 더 이상 읽지 않았던 걸 보면 적어도 그때는 그의 소설을 소화하기엔 이래 저래 적합하지 않았던게다. 해서 왜들 그렇게 하루키..하루키..하고 그의 소설을 찾아 읽어대는지 대체 그 맛이 뭔지를 몰랐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좋아서 떠들어대고 있다. 이 또한 영락없는 뒷북근성이다.  

그의 소설...매력의 핵은 독특한 그의 상상력에 있다 싶다. 도대체 나보다도 훨씬(!) 오래된 나이(49년생이라니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 그런 환상들을 품고 있다가 꺼내서 빚어내는지...읽다가 덮고 나서 나머지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글쓰는 재주까지 타고 났는지...마냥 부럽기만하다. 그의 소설에서는 고양이가 말을 하고 (Kafka on the shore), 개구리가 춤을 추고 (After the quake), 우리말로 괴물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할 수 있는 아주 비현실적인 존재는 그의 소설 여기 저기에 심심찮게 나타난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현실이라는 건지 꿈속이라는 건지를 헷갈리게 하는 대목도 많고, 그의 소설속 캐릭터들은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나 운명에 의해 엮여서 만나고 헤어진다. 해서인지 그의 소설에서 일본 애니의 대가인 미야자끼(Hayao Miyazaki)냄새가 많이 난다. 아마도 그건 일본산 작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아닌가 싶다. 그네들의 문화적 뿌리에서 기인하는. 지금 우리한테는 미신이네 뭐네하며 무시되어오고 있는 존재들이 일본의 문화 곳곳..그네들 일상 곳곳에서 아직도 제몫의 숨을 충분히 내쉬고 있기 때문일게다. 허긴 일상에서 눈만 돌리면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 인간의 존재를 초월한 기운 혹은 정령(spirit)이 있다고 믿는 일본인들한테 그의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소재들은 미야자끼 만화나 일본 애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존재들이라 우리처럼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일 수도 있을게다. 허나 서구문화의 눈으로 보기엔 그런 일본문화의 세계는 동양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을 부채질해왔고 일본의  다양한 귀신 캐릭터들은 하루끼의 소설이나 미야자끼의 만화등을 통해 문화상품으로 세계시장에서 팔리고 있잖은가.

그의 소설에 단골 소재꺼리가 몇 있다. 예컨대, 집을 나간 아내, 아니 나갔다는 표현으로는 뭔가 부족한..어느 날 깜쪽같이 실종된 아내가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중심에 속하지 않고 변두리에서 특이하게 산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보통이고 일하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직장을 때려치우는 캐릭터들이 많다. 결혼을 했다고 해도 뭔가 현실적인 부부들의 살가운 냄새는 별로 없다. 아마도 그의 쿨(cool)한 표현탓인지도 모르지만. 해서 인지 왠지 그의 실제 결혼 생활도 그렇게 쿨(?)하지 않을까..하고 넘겨짚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에도 이차세계대전(World War II)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든지 등장한다. 다소 뜸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전쟁에 대한 그리고 전쟁에서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 섞인 그의 일별은 새삼스럽게 어렴풋하게나마 전쟁을 겪었을 그의 세대를 새삼스레 일깨워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다른 소재는 섬사람답게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작품에 많이 나타나있다. 해서 정령의 힘을 빌어 누군가가 지진의 공포에서 도꾜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천진난만한 동화적 모티브로 얘기하고 있지만 그 밑에는 피할 수 없는 '지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몇가지 소재들은 굵직한 이야기꺼리에 어떤 식으로든지 엮어져있다. 그중 재밌게 읽은 책들은 그의 단편들을 엮은 'Ather the quake,'랑  장편 'The Wind-Up Bird Chronicle'랑 'Kafka on the shore'다. 참..책읽기를 할 때 최근작부터 읽는건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지 싶다. 그런 걸 염두하고 읽지 않은터라 지금 읽고 있는 'A wild sheep chase'은  이전에 썼는지 신선도(?)가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덜하다. 읽으면서 낯익은 표현이랑 소재들을 자주 대하게 되니 하는 말이다. 허니 그의 책 읽는 재미가 조금은 시큰둥해졌다.

조만간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뒤적거릴게다. 하루끼만큼 매력적이진 않더라도...또 다른 매력적인 작가의 책을 찾으려고.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참 많이 부러워했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시골구석 도서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하는 맘에. 이젠 하루끼가 잘 쓰는..하루끼 책들을 영역한 이들이 잘 쓰는 영어표현들은 많이 익숙해지긴 했다..눈에 띌만한 괄목상대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소설책 읽는게 영어 실력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긴 되는 듯하다. 물론 책 읽는 재미가 먼저지만 말이다. 
 

덧붙임: 2005년 여름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한 2007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읽었다. 그리고 그때 끄적거려 놓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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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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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 제목부터 특이했다.
프로 야구 원년 그 말도 안되는..
기도 안 차게 엄청난 점수차로 꼴찌자리를 고수하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기억하기에
대체 그들을 소재로 그것도 장편의 이야기로 꾸려갈 뭔가가
과연 있겠냐는 섣부른 판단은 책장을 넘기면서 사라졌다.

박민규라는 작가의 입담은
구세대인 내 보기엔 '신세대' 화법이라고 구분지을 수 있을 만큼
기존 작가 (적어도 내가 아는 이들)의 화법과는 다르다.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에 가까운
궁시렁 대는 듯한 그의 이야기 방식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마도 이 소설에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탓이 아닐까..
그것에 대한 판단은 그의 다른 소설을 읽어보고 나서 해야할게다.

일단 한낮 개인사에 묻혀질 법한 소소한 이야기를
가볍고 재치있게 풀어가는 그의 이야기 스타일엔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여기서 '가벼움'이란 표현하는 방식을 이름이다.
만일 알맹이 없는 가벼움이라면
이 책은 우리집에서 볼일(?)보는 동안에만 읽혀지는
화장실용으로 그쳤터이나
대환과 나는 줄곧 볼일이 끝난 후에도
그 책을 접기 싫어 밖으로 갖고 나와 읽으며
킁킁 대고 웃었다.

주인공이 이야기 하는 세상은
'프로'와 '아마추어'로 나뉘어져 있다.
주인공은 한때 일류대와 명함이 부끄럽지 않은 회사를 거침으로써
'프로'들의 세상에 적을 둔 적이 있긴 하지만
결국 그는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는
상당히 철학의 깊이가 느껴지는 결론으로
그냥 '아마추어'세상에서 머물며 느긋한 삶을 택한다.
아니 생각해보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듯이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삼미’가 갖고 있는 메타포는
단순한 꼴찌 야구팀으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늘 일등만 기억한다는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 대한
'반기'자 '역행'이다.
자본주의 프랜차이즈의 첨병인 프로야구 바닥에서
전혀 프로답지 않은 경기를 벌인
'삼미'를 그토록 추억하는 이유가
일견 '프로'의 세상에서 수용되지 못한
변두리 삶들의 ‘넋두리’라고 할 수 있음에도
이 책에 일관되는
그 삼미 야구팀의 플레이 방식과 철학(?)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궤변스럽다기 보다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할 만큼
나름대로의 이유와 논리가 있다.

받아치기에 엄두 안나는 공은
절대 무리해서 치지 않고
잡지 못할 공은 굳이 무리해서 잡지 않는다는
삼미의 플레이방식은
'프로'의 세상에선 용납되지 않았던 것 처럼..
여느 프로야구 팀들처럼'프로'의 세상에서
피터지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이 팀은 경기와 훈련을 통해
'정신을 수양'한다는 뜸금없는 철학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주인공과 또 한명의 열성당원인 그의 친구 조성훈은
자신들의 삶이 그런 '삼미'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기를 추구한다.

새삼 우리의 기억에 잊혀졌던
꼴찌 '삼미'에 주목하는 이유는 과연뭘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삼미의 투수였던 '감사용'을 캐릭터로 했던 영화가 있더니
이런 소설도 있다.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정확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오직 일등과 일류만 쳐주는
우리 사회에서
꼴찌들에게는 결코 있을 법 하지 않은
그 꼴찌의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그냥 우리 대중문화의 일시적인 트랜드라 해도
반가운 건
획일적인 면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우리 사회의 융통성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징조가 아닐까 하는 넘겨짚음 탓이다.

언제부턴가 우린 이전엔 대접받던 '범생'이란 말에
경기를 일으키며
이젠 착한 것만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 세상이란 암시들을
여기 저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는
칭찬받던 그 평범하고 모범적인 전형들이 거부당하고 있는게다.
일례로 대중문화에 한민감한 우리의 청춘들은
스스로 '엽기적’이기를 자청하면서
허구와 현실을 헷갈려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한때의 트랜드 따위로
일류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 인식이 바뀔 거라고
기대 할 만큼 순진한 이는 없을게다.
사람들은 다만 그런 '낯선’ 트랜드에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스스로 '프로'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고시를 보고 일류대학 합격 등의 공인된 장치를 통해
그 ‘프로’의 세계에 어떡해서 든지 비집고 들어가려고
피끓는 청춘을 고스란히 도서관에서 썪히길
마다하지 않긴 지금도 마찬가지일터이니.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굳어진 시각과는 다른
낯설고 소소해 보이는 코드 하나로
세상을 빗대어 풍자하는 작가의 입담과
시종일관 그 코드를 놓치지 않는 그 일종의 내공에
있을지도 모를 그의 다른 소설들을 기대하게 된다.

이 '꼴찌'의 철학에 충분히 공감하게 되는 건
나 역시 '프로'의 세계가
늘 남의 세계라고 여겨왔던 변두리 체질이기 때문일게다.
물론 프로야구 원년 삼미가 꼴등의 자릴 지킬 때
난 우승팀이었던 오비베어즈의 박철순을 향해
열광의 박수를 보냈음에도
내가 주인공인 내 삶을
그런 무엇과 동일시한다는 게
허구에서나 가능한 설정이라는 걸 알아버린 아줌마한테
굳이 적용해보자면...
기실 초등학교때부터 줄곧 한번도 일등이 되기 위해,
어떤 조직의 중심에 서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적이 과연 나한테 있었던가..
이책을 읽으며 되물은 적이 있다.
대답은 별로 없었다는 거다.

동시에 누군가가 했던 말도 생각났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내 희망사항에 대해
그건 내 전공바닥에서 더이상 아마가 아닌
프로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는
그 당연할지도 모를 말이
왜 나한테는 무지하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프로의식’의 함량이
기준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일게다.
거기에 대한 내 반응은 '프로'는 무슨..
그냥 '좋아서' 하는거지..라는 아주 맥빠진 몇마디로
진지한 상대방을 실망시켰었다.

물론 나같은 함량미달들이 겪는 문제는
말한 대로 좋아서 하는 짓이
항상 '좋지만은 않다'는 거다.
하기 싫고 집어 던지고 싶을 때가 허다하다.
그때마다 난 그 잦은 빈도의 이유가
남들의 그 '프로 근성'이 나한테는 아주 부족해서 일거라는
자기 진단을 주저없이 내린다.

사실 그런 함량미달 근성이
무엇에나 쫓기기 보다 조금이라도 느긋해지고 싶은
내 특유의 똥배짱을 만들어 내는 지도 모른다.

있는 껏
느긋하고 싶다.
쫓기면서 계획된 대로 차곡 차곡
뭔가에 맞추어 숨을 헐떡이며 뭔가를 하고 싶지 않다.
그랬다면
난 훨씬 일찍 내 삶의 방향을 결정했을 지도 모른다.

남편은 그랬다. 
공부 끝난 이후의 삶도 삶이겠지만
물론 그 삶엔 우리의 기대치가 높아진 삶이겠지만
지금의 삶도 즐기자고.
지금도 살고 있는거니까.

그러고싶다.
나 역시.

덧붙임: 이책은 여기서 같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의 후배한테서 빌려 읽었다. 읽은 지 꽤 되는데 이제라도 몇자 끄적이는건 순전히 내 삶의 되새김질을 위해서다. 여기서의 우리 삶이 그렇듯이.  

또 덧붙임: 2005년에 끄적거린 글이다. 사년이 흐른 지금...공부를 끝낸 남편은 미국 남부 시골의 한 주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가 남은 난 아직도 학생노릇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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