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내가 총알을 마련하기 위해 했던 아르바이트 중에 하나가 청소부일이다. 지금은 이민법이 바뀌어서 배우자비자(F-2)로는 공부를 할 수 없지만 내가 수업을 듣기 시작했던 2001년도엔 배우자비자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학생비자 (F-1)이었던 남편이 한 학기에 3과목을 꽉 채워 들었던 full-time student였던 데 비해 배우자 비자였던 난 미국에 온지 일년 정도 지났을 때 공부를 시작했다. 아들이 오전시간에 유치원 전단계인 preschool을 다니게 되면서부터. 처음엔 한 과목을 듣는 걸로. 그러다 아들이 오후까지 학교를 다니게 되었던 다음해부터는 3 과목을 꽉 채워서 들었다. 헌데 여기 얘들 학교는 왜 그리 쉬는 날이 많은지. 빨간 날이 아니어도 선생님들 컨퍼런스다 학부모 간담회가 있다고 하루를 통째로 쉬어버릴 때면 우린 서로 번갈아 가며 두살배기 아들을 돌보면서 수업을 들어가곤 했다. 내가 수업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아빠랑 놀다 아빠가 수업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내차례. 그러다 석사논문을 쓰기 시작 할 때 즈음 내 기억으로는 2003년인 듯 싶은데.. 그 즈음에 이민법이 배우자비자로는 공부를 할 수 없게끔 바뀌는 통에 논문학점만 남겨놓았음에도 비자를 학생비자로 바꾸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할 생각이지만 잠시 언급하면 남의 나라 특히 미국에서 공부하는데 제일 귀찮게 하는 게 바로 이 비자(Visa)다. 여지껏 비자를 몇번이나 바꿨던가 생각하면 게다가 비자를 바뀌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참 많은 돈과 시간을 비자 바꾸는데 썼다. 이때 배우자 비자에서 학생 비자로 바꾸었다가 석사학위를 따고 나서는 남편이 자릴 잡은 뒤에 남은 공부를 마저 하기로 하고 비자를 배우자 비자로 바꾸었다가, 남편이 학교에 임용되던 그 해에 나도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또 학생비자로 바꾸었으니까. 비자를 바꾸러 한국 심지어 캐나다까지 갔었으니까 거기에 들인 시간이랑 비용이 결코 만만챦다. 비자 fee랑 비행기값, 숙박비용까지 포함해서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길에다 버린 시간을 생각한다면 제일 소모적인 절차들 중에 하나다 싶다. 그래도 어쩌랴..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부할 수 없는 것을. 허나 최근 현정부가 무슨 대단한 성과물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던 무비자대상국이란 혜택은 학생비자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그렇게 학생비자로 바꾸자 마자 학교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건 파트타임으로 수업을 들었던 배우자비자로는 할 수 없어서 아쉬웠던차에 조금이라도 벌기위해 신청을 했다. 논문 학기니 수업을 꽉 채워서 듣지 않아도 되는터라 조교일은 나한테 돌아올 턱이 없고 해서 학교에서 일하는 우리로 치자면 근로장학생(student worker)으로. 그 중에서도 청소부(janitor)일을 봄 정기학기와 기간이 짧은 여름학기..이렇게 두 학기정도 했다. 일주일에 20시간동안 일을 해야하는 근로장학생은 조교일과 달리 학비면제같은 건 없지만 한시간에 기본임금 (그 시절에 $6.50이었던)을 받을 수 있어서 조교일을 못 받은 나같은 인터내셔날 학생들이 그 험한(?) 일을 했다. 기실 말이 청소지 그닥 험하진 않다. 특히 맘씨 착한 조장들 (supervisors)을 만나면. 이 일을 하자고 맘먹은 건 무엇보다 일찌감치 청소를 끝내고 남은 시간동안 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유경험자들의 말에 솔깃해서 였다. 힘들거라고 하지 말라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가능하면 학교에서 주는 돈을 받아보자는 심사로 신청했다. 물론 그때 난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었다. 남편의 기우와는 달리 듣던대로 일은 그닥 어렵지 않았지만 오후 5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는 지라 남편과 아들이랑 저녁시간을 한동안 같이 보내지 못해 서운했던 것 말고는 오히려 나한테는 새로운 경험이어서 재밌게 일을 했다.

내가 맡았던 건물은 학교 회계사들이 근무하던 자그마한 3층짜리 건물(Thalm Hall).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하는 일은 5시 30에 늦지 않게 도착 조장아저씨 이름이 Dave인 그 아저씨한테 열쇠꾸러미를 받아들고 왔노라 사인을 하고는 배당받은 건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하는거다. 물품창고를 열어서 무장(?)을 하고 나서 책상마다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깨끗이 비우고 (쓰레기가 담긴 비닐봉지를 통째로 버리고 새 비닐로 갈아끼우는 일), 베큠을 하고, 계단을 쓸고, 화장실 청소까지.       

 


(내가 청소하던 2층짜리 학교건물 사진)
 

 

 

 

 

 

 

 

 

 

 

 

 

그때 알았다. 집안  청소랑은 별로  안 친한 내가 이런 일을 즐길 수 있다는 걸. 왜냐하면 첫날..내가 하는 걸 본 Dave 아저씨가 물었으니까. 전에 이런 일 해본적이 있냐고. 처음치곤 아주 능숙해 보여서라고 해서. 그말을 들은 남편 역시 그럴리가..하는 얼굴로 웃었다. Dave 아저씨가 그런 인상을 받은 주된 이유가 첫날부터 까만색 쓰레기봉투 뭉치를 청바지 양쪽 허리 고리에다 쑤셔넣고 쓰레기 통을 비우는 솜씨가 초짜치곤 꽤 능숙해보였던게다. 뭘 어떻게 하라고 얘기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니 일을 시작한 일주일동안은 가끔 들여다보더니 그 이후로 Dave아저씨는 내 청소를 아주 맘에 들어하면서 일만 일찍 끝내면 남은 시간동안 공부를 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그게 바로 이 일을 신청할 때 나는 꼭 Dave랑 일하고 싶다고 꼭 찍어서 밝혔던 이유였다.

나처럼 청소하는 한국 친구들사이에서 Dave 아저씨의 이런 너그러운 성격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내가 청소일을 할까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 현직(?)에 있는 한국친구들이 너나없이 이 아저씨를 추천해줬었다. 그건 정해진 세시간 네시간동안을 꼬박 일을 시키는 악명높은 조장들도 있기 때문이다. 해서 Dave 아저씨랑 일하고 싶다고 하면서 두달 정도를 기다더니 자리가 있다며 순서가 돌아왔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게다. 이렇게 인심후한 아저씨를 만났으니 말이다. 해서 난 가능하면 빠른 시간내에 일을 끝내려고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돌아다녔고.. 점차 시간이 지나 손에 일이 익으면서는 한 시간도 안되 일을 다 끝내고 남은 시간동안 그 건물 회의실에서 논문작업을 하곤 했었다. 이 아래 사진에 있는 통은 청소하는 내내 밀고 다녔던 통이다. 사무실 쓰레기 수거를 위한. 지금도 학교에서 이런 도구로 청소를 하는 아줌마 아저씨한테 유독 친근감을 갖는 이유가 아무도 이런 내 경험때문일게다.   

 


(아주 요긴한 청소도구통 사진: 청소에 필요한 도구들은 다 저 노란주머니에 들어있었고 난 저 통을 밀고 다니며 청소를 했던)

  

 

 

 

 

 

 

 

 

 

 

 

 

 

 

 

 

 

 

 

 

 

 

특히 텅빈 건물을 열쇠로 열고 들어섰을 때 하루의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난 흔적만들 남아있는 그 건물에 혼자 남아있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첫날 Dave 아저씨는 이 건물을 보여주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냐고. 무섭지 않겠냐고. 특히 자판기들이 놓여있던 컴컴한 지하에 내려갈 때는 불을 어디서 키고 끄고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 전화를 하라며 맘을 써줬었다. 큰 건물을 담당한 다른 친구들은 한 두명씩 짝이 있어서 일 끝나고 나면 수다를 푸는데 혼자서 심심해 할 내가 걱정되는게다. 해서 돈 워리...안심시켜주면서 단..나 혼자 있는 이 건물에 니가 들어오면 큰 소리로 왔다고 알려달라고 했다. 만일 니가 인기척도 안 내고 갑자기 나타나면 그게 바로 날 무섭게 하는거라고. 했더니 우리 Dave 아저씨는 이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내 이름을 부르며 자기가 왔노라 알리곤 하다...며칠 지나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은 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 일을 하면서 내가 즐겼던 놀이 중에 하나가 사무실이나 책상 상태만으로 그 쥔장의 성격을 짐작하는 거였다. 한결같이 치울게 유난히 많은 사람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뭘 해도 흘리는지 게다가 쓰레기는 왜 그리 차고 넘치는지... 그에 비해 어떤 책상은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어 손댈 것이 별로 없고 주변에 떨어진 종이조각조차 없다. 어떤 이는 여기 저기에 뭔 포스잇을 그리 많이 붙여놨는지.. 많은 이들이 가족들 사진들을 책상위에 올려놓았고..어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담았음직한 글귀나 만화등을 붙여놓기도 하는데..그런 다양한 얼굴의 책상들을 지나치면서 그 쥔장의 이미지를 상상해보는 놀이였다.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늘 서류를 책상가득 벌려놓은 채로 퇴근을 하곤 했던. 그리곤 늘 그 책상위에다 이런 문구가 새겨진 (적은게 아니라 아예 플라스틱에다 새긴 걸 보니 생활화되어있는 사람인 듯 했다) 플라스틱 카드를 올려놓곤 했다. 말인즉은 "자기가 둔 채로 놔둬달라" ("Please don't screw my world"). 나 역시 내 책상정리를 잘 못하는 같은 과(type)라 그 맘을 아는지라 그 상태 그대로 손하나 대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은 일을 하러 갔더니 그 책상의 쥔장이 퇴근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책상위보다 훨씬 깔끔(!)해 보이는 내 또래의 백인 남자였는데..난 그 사람의 Hi 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나도 무지 크게 하이로 맞받아치며 외쳤었다. 물론 그 사람은 모르지. 왜 저 본적도 없는 쪼그만 동양아줌마가 자기의 습관적인 인사를 그렇게 해맑게(?) 받았는지. 헌데 그렇게 가끔 늘 비워져있던 자리의 다른 쥔장들을 만날 때마다 반가운 건 매번 마찬가지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일을 참 즐겼던 것 같다. 본적도 없는 그네들이 퍽이나 친숙하게 여겨져 괜시리 마주치는 얼굴마다 하이톤의 하이를 연발해댔으니까. 남들보다 안면근육 발달이 덜 된 내가 평소엔 처음 보는 이들한테 하이 인사를 할 때도 별로 표정이 없어 가끔 뭔일 있냐는 얘기를 들을 만큼 여기 얘들한테 웃는데 후하지 않은 내가 그때는 말 그대로 웃음과 인사를 남발(!)하고 다녔다. 그랬던 적이 그때 말고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물론 그네들이 알턱이 있을리 없지...그 이유를.

다행스럽게도 Dave 아저씨는 내 청소에 대만족이라고 했다. 그 아저씨왈, 나 같은 한국학생들을 조장아저씨들이 선호하는 이유가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해서란다. 내가 얼마나 탁월한(?) 청소부였으면 그 조장 아저씨가 담당 건물이 다른 단대로 옮길 때도 날 같이 데리고 갔겠는가. 남편말대로 '의외의 선전'이었다. 졸업하면서 이 일을 끝내야 할 때 Dave 아저씨는 내 일에 대해 평가를 체크하는 모든 항목에다 "아주 우수하다(very excellent)"라고 체크하면서 그랬다. 다음에 또 청소일을 하게 되면 자기가 써준 이 평가서가 아주 요긴할거라며 혹시 모르는 일이니 평가서를 10부정도 복사해 주겠다는 친절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물론 그것들을 쓸 일은 아직까지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챙겨주는 Dave아저씨의 그 맘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 시절 제일 좋았던 시간은? 물론 청소를 빨리 끝내고 나서 회의실에 혼자 앉아서 논문작업을 하던 시간이였다. 아래 사진은 그때 한방 박아둔 그림이다. 아늑한 회의실에 앉아서. 지금도 난 그 건물 여기 저기를 청소하던 그림들을 자주 떠올린다. 특히 지금 공부하는 학교에서 아침 이른 시간에 만나게 되는 청소하는 분들을 만나면 괜한 친근감에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게 되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같은 일을 해본 이들한테 갖게 되는 일종의 공감대(?)탓인지도 모른다. 허나 여기선 그분들 대부분이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아줌마 아저씨들이고 역시 100% 흑인들이다. 이전 학교처럼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한테 청소일을 주지 않는 듯 하다. 그래서 난 지금쓰는 조교 사무실에서 가급적이면 쓰레기를 남기지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바닥이 깨끗하면 무거운 청소기를 매일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허나 못 고쳐지는 건 책상위 상태만은 여전히 정리가 잘 안된다. 늘 깔끔하지 못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나올 때가 한두번이 아닌고로. 아마도 청소하시는 누군가도 내가 했던 것 처럼 이 산만한 책상을 보면서 내 성격을 짐작하는 그런 놀이를 하는 지도 모른다.  
 


(내 첫번째 노트북 사진. 지금도 쓰고 있는)
 

 

 

 

 

 

 

 

 

 

 

 

 

그때 그렇게 번 돈으로 요 랩탑을 장만했다. 두주에 한번씩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에서 할부로 대금을 치루면서. 이자가 비싸긴 했지만 어쩌랴..한번에 낼 형편은 안되지만 논문 때문에 장만했다. 얼마였더라. 몇달을 그렇게 냈는지는 기억이 안 나니. 요즘처럼 가볍고 작아지는 모델들에 비해 이제 5년이 넘어가는 저 랩탑은 누구말대로 그냥 도서관에다 펼쳐놔도 아무도 안 갖고 갈거라고 할만큼 구식이다. 농삼아 탱크수준이라고 불릴만큼 무겁고 나일 먹어서 점점 느려지고 겨우 워드작업만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점차 맛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쓰고 있다. 자잘한 탈이 날 때마다 남편의 무료 에이에스를 버티면서. 묵은 걸 좋아하는 내 성격탓에 이 랩탑을 보면 그때 일하던 때의 그림들이 떠올리는게 좋기 때문일게다.

지금도 남편과 난 맥주 한잔을 기울일 때마다 우리 얘기의 단골 메뉴로 일했던 그 시절 얘기들을 되새김질한다. 이른 저녁을 5시경에 먹고 6시에 시작하는 청소를 하러 집을 나왔다가 아들이 잠자리에 드는 9시를 훌쩍 넘긴 10시 정도에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들을 재운 남편이 청소하는 건물앞으로 데리로 오곤 하던. 우리의 사랑스럽게 요란스러웠던 똥차를 끌고. 일을 끝내고 그 건물의 열쇠뭉치를 조장아저씨한테 건네주고 이제 청소끝나고 돌아간다는 싸인을 하고 나오면 건물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수고했어...하던 그 날들을.  집에 돌아와..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소소한 것까지 나누면서 하루를 마감하던 그때 그 시절 얘기들을 안주삼아 소들이 하는 양..또 하고 또 하고 되새김질을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돌이켜보면 힘들었을텐데도 그때 참 재밌었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