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빼서 유학자금으로 챙겨간 총알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2000년도 여름. 남편은 뉴욕으로 일하러 떠났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5시간 걸리는 가까운 시카고도 있었는데 기차로 14시간 넘게 걸리는 뉴욕으로 갔는지..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그 먼 뉴욕으로 떠났고 난 아들과 단둘이 남아 그해 여름을 났다. 맨하튼가 한국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다는 남편은 석달만에 허리띠 구멍을 세개로 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되서 돌아왔다. 다음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서. 석달 동안 그곳에서의 남편의 생활을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져 눈을 껌벅대곤 한다.  

긴 기차여행 끝에 뉴욕에 도착한 남편은 아는 동생네서 이삼일동안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수입이 괜찮다는 말에 웨이터일을 하기로 하고 한국판 중앙일보나 한국일보에 난 식당에서 낸 웨이터 구인광고를 보고 식당 몇군데를 찾아다닌 끝에 뉴욕에 간지 며칠 안되 맨하튼에 있다는 한 한정식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웨이터일을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수염을 깎았다는 남편의 말을 전화로 들을 때 코끝이 아려 아무말도 못하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여기 생활도 재밌다고 하는 남편의 위로에도 떨어져 있는 내내 남아있는 난 그렇게 계속 맘이 아렸다. 숙소도 같이 일하는 웨이터 동료랑 같이 지내는 걸로 방값을 절약할 수 있다고 좋아했을 때도. 새벽에 뉴욕 전철을 타고 나가 하루종일 일을 하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쓰러져 잔다고 했을 때도. 여지껏 한번도 흘려본 적 없는 쌍코피가 났다고 했을 때도. 쉬는 날에도 누군가 일이 있어 손이 빈다고 하면 무조건 대타로 나가 일을 뛴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팁을 많이 받았다며 좋아라 하는 날에도.  

남편을 통해서 알게 된 뉴욕 웨이터와 웨이츄레스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듯 했다. 허긴 울 오마니 말씀대로 남의 주머니에서 돈받아가야 하는 일치고 쉬운 게 어디 있으랴 만은. 대부분의 웨이터와 웨이츄레스 주 수입원은 주인장이 주는 쥐꼬리보다도 짧은 주급이 아니라 손님이 주는 팁이라고 한다. 헌데 그 팁도 자기가 받았다고 해서 자기 몫으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받은 모든 팁들은 일괄적으로 한 곳에다 넣고 나서 하루일이 다 끝난 후에 헤드 웨이터가 각자의 비율에 따라 나누어 준다고 한다. 헌데 그 나누는 기준이란게 얼핏 들으면 공정하지 않은 듯 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일한 연수에 비례해서 나눈다고 하니 우리가 식당에 갔을 때 팁을 놓을 때는 대부분의 경우 친절하게 서비스해주던 이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얹어주곤 하는데 그런 짠밥에 비례해서 나눈다고 하니 친절해서 팁을 많이 받았을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듯 하기에 하는 소리다. 허나 어쩌랴 그것이 그 곳의 룰이라는데. 신입이 군말없이 따라야지. 해서 처음 한달 남편은 사람 명수대로 나누어서 할당되는 몫 전부가 아니라 그 40퍼센트만 받았다고 한다. 처음 온 신입은 40%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올려 두서나 달이 지나야 원래 받는 몫의 100%를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가을학기 개강 전까지 기껏해야 3개월 정도만 일하는 남편의 경우엔 일을 그만 둘때까지 계속 100%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니 더 더욱 공정하지 않게 들렸을게다. 허나 다행히도 남편은 한달도 안되서 100% 팁을 다 받을 수 있었단다. 그 이유는 적지않은 나이에 가족까지 떼어놓고 열심히 일하는 걸 보고 그런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눈썰미가 좋아 일을 금새 익힌데다 어딜가나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의 남편은 그곳 사람들과도 즐겁게 생활했을 테고 그곳에서 매일 매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남편과의 전화통화로 그리고 돌아와서 들려주는 얘기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때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주고받던 전화 대화의 주 관심은 일당 팁을 얼마나 받았냐는 거였다. 그날 팁을 많이 받았는지 시원챦게 받았는지는 남편의 목소리만 들어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많이 받을 때는 하루 팁이 거의 200불이 될 때도 있었지만 적은 날은 100불도 안 될 때도 있었으니까. 우린 그해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남편은 반찬그릇들과 뚝배기등이 얹혀진 쟁반들을 들고 식당 일이층을 오르내리면서 난 그날 하루 어떤 손님들을 만났고 팁을 얼마 받았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주는 남편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하루 하루를 사는 듯 했으니까. 그런 남편의 웨이터 아르바이트 경험덕에 우린 식당에서 식탁위에 놓고 나오는 팁에 대해 전보다 훨씬 신중해졌다. 팁을 주는 이들한테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한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그렇게 석달을 넘게 고생한 끝에 남편은 가을학기 등록금과 생활비가 될 만한 몫돈을 벌어왔고 그덕에 우린 자칫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심각한 고비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뉴욕에서 일하고 돌아온 후로 남편은 종종 과일 디저트를 담아내던 웨이터솜씨를 발휘해서 오렌지나 수박등을 제대로(!) 깎아 내놓곤 한다. 허나 입에 대지는 않는다. 특히 수박은. 남편이 수박을 안 먹는 이유는 그 맨하튼 식당에서 디저트용으로 너무 많은 수박을 잘라야 했던 기억에다가 뉴욕에서 돌아오고 나서 일하게 된 야채가게 아르바이트에서의 더 힘든 경험탓인지 수박엔 입도 대지 않는다. 그 야채가게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다른 곳에 비해 물건들이 싱싱한데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머니가 가벼운 유학생들이나 저소득층 주민들이 주된 손님들이었다. 남편은 그 곳에서 일주일에 스무시간 정도 일을 했는데 특히 여름이 제일 일이 많아 힘든 계절이었다.특히 한국 수박보다 두서너배 크고 길쭉한 이곳 수박이 여름 한철 잘 나가는 품목이다 보니 어쩔 때는 하루에 삼사백통의 수박들이 들어오는데 그 많은 수박들을 트럭에서 가게안까지 날라서 수박을 담아놓는 커다란 통안까지 깨지거나 곯지않게 차곡 차곡 쌓아야 하는 일이 가장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그 통이라는게 높아 수박을 쌓으려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작업을 수박통 갯수만큼 해야하기 때문에. 수박이 들어온 날 남편의 옷은 수박을 안으면서 묻었을 흙과 땀으로 흥건했던 걸 기억한다. 그때 질려서인지 남편은 수박을 먹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먹기 좋게 잘라주고 씨를 발라주면서도.  


남편은 그런 고생스런 경험들이 그땐 많이 힘들었지만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긴다. 영화작업을 하는 그에게 그런 경험들을 소재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니 남한테 들은 이야기가 아닌 자신가 겪은 이야기들이니 아마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힘이 될거라고 믿는다. 매사 긍정적인 남편은 늘 사람들을 좋아한다. 해서 어디서든 누구한테든 맘을 다하는 성격이다. 손님들도 아는가 보다. 그런 남편의 마음과 몸가짐이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을. 뉴욕에서 일할 때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손님들도 많은 이들이 그런 남편을 기억하고 보고 싶어하고 특히 저소득층 주민들이 많이 찾곤 하던 그 야채가게에서 일할 때도 무거운 수박을 사들고 가는 노인분들이나 여자들을 위해 수박을 차까지 들어다 주곤 하던 그는 언제 부턴가 거리나 월마트에서 만나는 누군가와 반갑게 안부를 주고 받곤 했는데 그 사람들 대부분이 야채가게 단골손님이라고 소개시켜주곤 했다. 기억에 남는 분들 중에 그 야채가게 단골 손님이었다는 할머니 한 분이 우리 가족을 추수감사절 저녁에 초대를 해주셨다. 풍족하지 않으신데도 우리를 위해 칠면조를 굽고 과일을 내어놓으시며 준비해주신 덕에 그 할머니랑 두 아들이랑 보낸 추수감사절의 소박하지만 정성어린 저녁은 우리가 여기서 먹은 여느 추수감사절 음식에 비할 바가 못될 만큼 오래오래 추억하게 된다.  

삼년 전 가족여행으로 뉴욕을 갔을 때 남편은 아들과 나를 그때 일했다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었다. 그때 같이 일했다던 헤드웨이터와 반가운 재회를 했고 아들과 난 그 식당을 둘러보면서 웨이터 복장이라는 까만색 양복바지에 하얀색 와이셔츠, 까만색 신발을 신고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한국음식들이 올려져있을 묵직한 쟁반을 들고 일이층을 오르고 내리고 했을 아빠와 남편의 모습을 그려봤다. 언젠가 그곳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하고 찍었다는 사진속에서 수염을 깎고 웃고 있는 남편의 낯설고 어색했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이듬핸가 시카고로 여행했을 때 남편은 우리를 미시간 호수 근처의 한 벤치로 데려갔다. 6년 전 뉴욕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앉았던. 그때 그 벤치에 앉아 기차시간을 기다리면서 내가 점심으로 싸줬다던 삶은 달걀을 먹었던 기억을 얘기해주었고 우리 가족은 그 벤치에 다 같이 앉아 그때 이야기를 했다. 근데 난 왜 하필 목이 잘 매는 삶은 달걀을 싸줬을까...입대시키는 것도 아닌데..하면서.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남편을 제일 힘들게 했던 건 일보다도 우리와 떨어져 있어서 였다고 했다. 특히 그렇게 이뻐하는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석달동안 엄마랑 지내던 세살배기 아들이 오랫만에 만난 아빠를 낯설어 했을 때 많이 서운해하던 남편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뉴욕을 다녀온 후에 가끔 자기도 방학동안 웨이터일 하면서 용돈 좀 벌고 싶어 뉴욕으로 떠나겠다는 청춘들이 몇  찾아왔었지만 그네들 대부분이 일주일도 못 되서 돌아오거나 뉴욕 관광만 하고 오는 그네들의 손엔 뉴욕에서 사들고 쇼핑가방들이 들려져 있었다. 남편 말대로 절실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일게다. 기실 외국인이 학생 신분으로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이 나라에서는 명백한 불법이다. 그럼에도 워낙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많다. 더군다나 뉴욕이나 큰 도시에서 학생들은 그런 아르바이트들로 용돈이랑 학비를 번다. 한인업주들도 세금에 대한 부담도 없고 영어 쓸 필요도 없으니 그네들을 고용한다고 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학비를 쓰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뉴욕 생활을 즐기는데 쓴다고 한다. 공부는 뒷전으로 한채 공부를 하러 왔는지 돈을 벌러 왔는지 헷갈려하다 결국은 공부를 접고 돈만 벌다 불법체류자로 남는 젊은이들이 뉴욕만 해도 꽤 많다고 한다.  

남편은 공부에다 아르바이트, 조교 그리고 나 역시 공부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린 힘든 고비를 하나 하나 넘길 수 있었다. 남편은 5월 졸업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8월까지의 여름방학동안 잠시지만 동네 한국식당에서 아르바이를 했다. 주위에서 말리는 이도 있었다. 이젠 하지 말라고. 허나 남편은 뭐 어떠냐며 노는 것 보다 낫다고 한달 넘게 웨이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는 아빠가 웨이터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들이 물었다. "그럼 아빠 잡(job)이 프로페서(professor)가 아니고 웨이터에요?" 물론 아들은 웨이터인 아빠에 대해 실망을 해서 물은 게 아니었겠지만 그런 아들을 보고 나와 주변 사람들이 한차례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들과 난 그렇게 건강한 정신의 아빠이자 남편을 사랑한다. 그런 그의 건강함이 우리가 지난 시간을 견디게 할 수 있었던 힘이기에. 물론 그렇게 일하는 과정이 쉽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던 건 그 시간동안 만났던 수많은 이들과 그 공간에서의 경험들덕에 우린 비록 주머니는 가난한 유학생부부였지만 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로 살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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