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말대로 진짜 몇푼 안 되는 돈 달랑 들고 '대책없이' 유학이란 걸 떠나 왔을 때...잘 갔다 오라는 지인들의 격려 뒤에 숨은.. 과연 쟤네가 잘 해내고 올까.. 하는 걱정반 호기심 반 섞인 그들의 마음들을 모르지 않았었다. 허긴 그럴만도 할만큼 우리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전세자금에서 남편 졸업작품 영화 찍고 남은 돈 달랑 들고 이곳에 왔을 때...우린 공부 다 마치기 전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맘이었다. 만에 하나 조교자리가 없으면 '뭐라도' 한다 굳게 맘먹고 왔으니까. 그런 우리한테 제대로 된 가구나 살림 살이를 돈주고 산다는건  거의 '사치'로 여겨졌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한 동네는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에 있는 시골 주립대학이었다. 거기 도착했던 첫날이 기억난다. 배정받은 학교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 아니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대부분의 학교 아파트엔 다 있다는 냉장고와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오븐이 갖춰져 있다는 지금 생각하면 참 당연한 것들인데 우린 그것만으로도 감사해했었다. 그것말고는 카펫도 안 깔린 휭한 거실 맨바닥에 아무 것도 없던 우린 며칠동안을 그렇게 차가운 바닥에 앉아 라면박스를 엎어 밥상으로 삼고 그 위에서 밥을 먹었다. 엠티온것마냥 들떠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운이 좋았던 건 그 즈음에 공부 다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 가족이 있어 그분들이 쓰시던 카펫, TV, 소파, 부엌 살림살이 등을 공짜로 얻을 수 있었다는거다. 그렇게 살림을 물려주는 그림은 유학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차피 공부하러 잠시 머무는 뜨내기 삶들인지라 그렇게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게. 비록 오래 쓰시던 물건들이라 대부분이 많이 낡긴 했었지만..한국서 갖고 온 압력밥솥이랑 우리 세식구 수저랑 밥그릇이 전부였던 우리한테 그분들이 넘겨주고 간 살림살이는 한동안 너무 유용했음은 물론이다. 해서 그분들한테 감사한 마음을 늘 갖고 있던 우린 그분들이 공부하시면서 몸담고 계시던 한국 교회 식구들중에 아이가 있는 한집을 택해서 우리 아들이 작아서 못 입지만 그래도 쓸만한 옷가지들을 챙겨 주는 것으로 그때 받았던 고마운 맘을 표현했지만 정작 그 옷들을 드린 분들에게 이런 우리의 속내를 얘기한 적이 별로 없던터라 철이 바뀔 때마다 훌쩍 훌쩍 크는 아들의 옷들중에 입을 만한 것들을 챙겨서 갖다 드리는 이유를 그분들은 모르셨을게다. 

그곳은 풍족하지 않은 유학생들끼리 모여사는 곳이라 누가 이사를 가거나 한국에 들어갈 때 쓰던 살림살이나 가구들을 남은 이들한테 물려주거나 헐값에 팔곤 한다. 물론 가난한 학생들만 있지는 않다. 형편이 되서 좋은 가구 놓고 살다가 한국에 들어갈 때 다 싣고 가는 이들도 있으니까. 만일 쓸만한 살림인데 마땅히 줄 상대가 없을 때엔 쓰레기통옆에다 슬쩍 내다놓으면  필요한 누군가가 들고 가곤 한다. 지금이야 웬만한 것들은 다 있는데도 가끔 쓰레기통 옆을 지나칠라치면 주변에 나와있는 가구들을..굳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살펴보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건 아마도 첫해 산책을 핑계로 열심히 동네 한바퀴를 돌아다니며 쓸만한 물건들이 나와있지 않나 탐색하던 그때의 버릇탓이다. 물론 제대로 된 물건을 찾는게 쉽진 않지만..그래도 운좋으면 제법 쓸만한 것들을 주워 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이런 융통성(?)은 생각하지도 못 했을게다. 그게 다 거기서 배운 살아가는 방법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돈을 주고 산 것 물건중에 제일 비싼 품목이 바로 '침대'다. 지금도 아주 잘 쓰고 있는. 그곳에 도착한 첫날 우리를 마중왔던 후배, 우리보다 그곳에 4년정도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던, 다른 건 몰라도 침대는 괜찮은 걸 사야 한다는 그 후배의 충고대로 그때 거금 400불 가까이 주고 장만한 게 침대였으니까. 그게 500불 주고 넘겨받은 중고 자동차 다음으로 가장 큰돈(?)을 주고 산 살림이였다. 

초창기, 우리 세식구는 살림살이를 장만하러 틈틈이 동네 야드세일(Yard Sale)을 찾아다녔었다. 그덕에 두살배기였던 아들의 장난감이랑 비디오 테잎이나  마이크로 웨이브, 수납장, 의자같은 살림살이들을 아주 헐값에 장만할 수 있었다. Yard Sale을 그렇게 부지런히 찾아다닌 것은 물건 사는 재미보다도 기실 이네들이 판다고 내놓은 이런 저런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탓도 있다. 처음엔 차가 없었던 관계로 주변 아는 사람들, 특히 후배한테 적쟎은 민폐를 끼치긴 했지만...그 재미로 아침마다 부지런을 떨면서 찾아 다녔었다. 아침에 일찍 가야 그나마 살 물건도 구경할 물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는 한동안 야드세일 대신 Good Will이라는 중고품 가게를 자주 갔었다. 대부분 개인들의 기부(Donation)한 물건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팔던. 우린 그곳의 단골이었다.

8년을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참으로 많은 지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몇몇은 졸업후 직장을 잡거나 다른 주에서 남은 공부를 계속한다고 다른 주로 떠나거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네들은 떠나면서 우리집 공간엔 그들이 넘겨주고 간 살람살이들이 하나 둘 채워져갔다. 해서 그곳을 떠나올 때 즈음 휭하니 텅 비어있던 우리집은 그네들이 남기곤 간 것들과 우리가 야금 야금 사들인 살림살이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런 살림들에 우리는 또 다른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맺었던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써 말이다.  

한동안 유용하게 썼던 허나 몇년 후에 폐차장으로 보내졌던 니싼 스포츠 차, 아들이 좋아하던 감았다가 떴다 하던 라이트가 달린 그 차랑 의자, 라운드 테이블, 서랍장은 먼저 한국으로 들어간, 지금은 모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후배들을 떠올리게 하고

TV, VTR, 철제 수납서랍은 락을 좋아하는 남편과 절친했던 동생을, 아들이 좋아하는 물감, 색연필등의 문방구, 책상, 스탠드, 의자는 일본 친구를, 장식장과 촛대는 지금 한국에서 강의 하고 있는 덩치좋은 미국 친구를, 책장이랑 하얀색 테이블, 예준이 눈썰매는 한국에서 결혼했다는 한 친구를, 세탁기, 빨래건조대, 부엌살림들은 우리 아랫집에 살던 부산내기 갑장 친구를, 식탁 테이블이랑 지금 깔고 있는 카펫, 플레이스테이션은 루지애나로 이사간 남편 선배 가족들을 , 식탁 의자, 밥통, 장식 선반, 그리고 여름에 펼쳐놓곤 하던 커다란 파라솔(?)은 금속공예가 전공이던 예술쟁이 부부를, 컴퓨터와 아들이 좋아하는 파워레인저가 그려진 큰 타올은 별명이 우리집 딸이라는 씩씩한 처자를, 아들 공부하는 책상이랑 소파는 지금도 우리곁에 있는 두딸을 키우고 있는 씩씩한 젊은 엄마를, 거실에 있는 또 하나의 체크 무늬 소파랑 오디오는 엘에로 이사가 결혼한 한 커플을, 그리고 지금은 한 아기의 아빠 엄마가  된 친구들은 우리집 낡은 TV 장식장을 업그레이드 시켜놓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들 대부분은 언젠가..한국에 돌아가면 결국 만나야 할.. 여기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네들이 남기고 떠난 물건들에 눈길이 머물 때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그리고 여기서 함께 했던 즐거운 혹은 마음 아팠던 순간들까지 딸려 생각나게 한다.  주머니는 비록 얄팍하지만 그런 소중한 인연들이 많아 마음은 늘 부자라고 얘기하는 남편말 처럼 가난한 유학생이기에 겪게 되는 흔치 않은..따스한 경험임엔 분명하다. 먼후일에도....이런 그림들은 선명하게 우리의 추억속에 남겨져 있을게다. 해서 이곳을 떠올릴 때마다 꺼낼 법한... 따뜻한 추억거리들이 배어있는 그 물건들도 같이 떠오를터이니.... 참으로 남다른 경험이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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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땅에 와서 8년을 한 곳에서 살았으니 오래 살긴했나 보다. 우린 지난 달 말에 이삿짐 트럭 뒤에다 차를 달고 남쪽으로 자그마치 11시간 남짓을 달려 처음으로 이사란 걸 했다.  일리노이..그러니까 중서부에서 옥수수밭만 보고 살다가 늪지대가 보이고 야자수가 보이는 남쪽으로. 몇 년전에 여행으로 왔을 때만해도 이렇게 더운데서 어떻게 사냐고...헉헉대면서..싫어하던 그 날씨에서 이제부터 우린 살게 된게다. 허니 우린 하루가 멀다하고 옛날 살던 동네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들이랑 둘이서..전에 살던 거긴 베란다 문만 열면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뒷마당이 있었는데 여긴 기숙사 건물들끼리 너무 다닥 다닥 붙어있는데다 풀밭이라곤 공용으로 쓰는 운동장이 다라고.. 거긴 아침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일어나곤 했는데 여긴 그런 새소리 듣기도 쉽지 않고 바짝 붙은 앞건물에서 내려다 보일까 싶어 문도 활짝 못 열겠다고, 거긴 사슴이랑 다람쥐등 우리아들이 좋아라 하는 동물들을 뒷마당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는데 여긴 학교 캠퍼스를 가야 볼 수 있는 다람쥐가 다고 거기 기숙사는 오래 되었어도 넓고 깨끗했는데 여긴 거기에 비하면 좁고 낡았다고..그리고 거긴 바퀴벌레나 개미라는 걸 모르고 살았는데 지금 우린 바퀴벌레와 씨름하느라 끙끙대고 있다고..그렇게 우리는 입만 열었다 하면 여기랑 옛날 살던 동네랑 비교하곤 한다.

여기 도착한 첫날, 우리가 살게 될 가족 기숙사라고 배정받은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그 난감함이란...그냥 한숨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순간 전에 살던 곳에서 우리와 이웃으로 살다 이곳으로 몇년 전에 옮겨 왔던 한 언니 말이 떠올랐다. 새로 이사한 곳에 비하면 우리가 살던 있던 그 기숙사는 거의 궁궐(palace) 수준이라고 하던.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한 귀로 흘러들었을게다. 설마 우리가 이곳으로 올줄도 모르고. 이제 그 언니의 말이 새삼스레 떠오르면서 새삼 그동안 우리가 너무 좋은 기숙사에서 사치스럽게(?) 살았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눈만 돌리면 옥수수밭 투성이던 그 지루한 시골이 너무 그립다. 작긴 하지만 운전하다 딴 생각을 해서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도 구석 구석 익숙해서 눈을 감고도 길을 찾아낼 수 있는....그리고 여전히 그곳에서 지내고 있는 좋은 사람들이 보고 싶다.

나도 그런데...그곳을 고향처럼 여기며 사랑하던 아들은 오죽하랴. 낯선 곳에서 이틀밤을 보내고 난 며칠전이었나..아들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학교를 다녀와서는 더 심해졌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아주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친구들이 골고루 있어서 친구 사귀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흑인이 많이 사는 동네다 보니 같은 반 친구들 대부분이 흑인들이라는 아주 낯선 환경에 아들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가보다.  학교 가는 아침만 되면 아들은 배가 살살 아파온다고 하고 이제 가슴께가 아프다고 한다. 거짓말할리는 없고..신경성인게다. 맘이 예민해지니 몸에서 반응이 오는게다. 물론 아들을 힘들게 하는 건 그것만이 아닐게다. 살던 곳하고 너무 다른 낯선 환경도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아빠도 함께 하지 않으니 우리 아들 맘이 더 안 좋을 수밖에. 남편은 여기 짐정리를 대충 도와주고 지난주에 다섯시간 차로 밟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가을부터 강의를 시작하는 그곳에서도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탓에 아쉽더라도 더 머물 여유가 없어서 서둘러서 올라갔다.

새삼스런 두집 살림이라니...그건 늦은 나이에도 접지 못한 공부에 대한 내 미련때문이라 아들이랑 남편한테 더 미안할 뿐이다. 공부를 먼저 끝낸 남편이 자릴 잡으면 그땐 내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지원했던 몇 학교들중에 이곳이 남편 학교랑 제일 가까운 곳이어서 당분간 떨어진 이곳에서 남편은 남편대로 그리고 난 나대로 제2의 미국생활을 시작하기로 맘 먹은게다. 누가 등 떠밀어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도 정작 남편이 혼자 돌아가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 왔다. 그러고보니 처음이다. 미국와서 한 일년쯤 지났을 때 한국서 챙겨온 알량한 유학총알(자금)이 바닥나자 여름방학동안 대도시에 가서 웨이터라도 해야겠다고 3개월동안 뉴욕에서 일하느라 떨어져 있었던 그때 이후로는. 아빠를 너무 좋아하는 아들한테는 모르긴 해도 아빠의 자리는 더 크게 느껴질게다. 아들이 나와 같이 지내기로 한 것은 남편이 살게 된 곳보다 내가 공부하게 된 이곳에 한국 친구들이 훨씬 많아서였는데 해서 좋은 한국친구들을 만나서 다행이다 하고 있는데..정작 학교엔 한국친구들이 별로 없고 흑인이 대부분이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가보다. 그런 모습을 후회가 된다. 괜히 데리고 왔나 하는 생각에. 그리고 아들한테 미안하다. 아빠 엄마 공부하겠다고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빠듯한 살림에 제대로 못 해주고 한국에 있었으면 듬뿍 받았을 할아버지 할머니등 친척들 사랑도 못 받고 늘 한국에 대한 그리움만 안고 살게 하고 있는게. 아빠가 떠나기 전날까지 아빠 안 가면 안되요...하고 어리광을 부리던 아들, 정작 아빠가 떠나시는 날 아침엔 의젓하게 나를 위로했었다. 엄마..괜찮지요..아빠 금방 또 오실꺼니까요..하면서.

이삿짐 푸는 걸 도와주겠다고 먼길을 같이 길동무해준 후배들중에 하나가 그랬다. 이젠 한숨 돌린거 아니냐고..누구말대로 남의 나라 땅에서 바닥은 치지 않냐고. 맨땅에 헤딩하면서 바닥을 쳐봤으니 이제부턴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 때보다 이래 저래 형편이 훨씬 좋아진거라고...그러니 좀 여유있는 맘으로 공부하라고 말이다.  그래..그렇긴 하다. 8년전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도 씩씩하게 잘 살았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다소 부실하긴해도 헬멧(?)을 쓴 듯이 든든하긴 하니 조금은 여유로운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도..이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아들이나 나나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다. 시골쥐모자 낯선 도시에 왔으니 옛날 그곳을 잊고 이곳에 적응하려면...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리라 믿는다. 아들도 나도. 조금은 삭막한 주변에도, 낯선 풍경들이랑 사람들도 그리고 살속으로 내리꽂히는 듯 강렬한 땡볕에도. 그런 햇볕을 올려다보면서도 이곳의 볕은 이 전에 살던 곳의 볕과는 강도부터가 다르다...싶은 걸보니 아직도 맘은 그 옛날 살던 시골에서 머뭇거리고 있나 보다. 어서 적응해야지...우선 저 땡볕부터.  

* 2007년 8월에 끄적였던 글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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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돌리는 곳마다 끝없이 펼쳐져있는 옥수수밭이 지루하긴 해도 8년 사는 동안 이렇다 할 큰 사건사고 없었던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중서부 시골동네를 떠나 이곳 남부동네로 이사와 뒷늦게 시작한 나한테 공부 잘 끝내기와 함께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그건 다름아닌 여기서 무사하기...살아남기.
얼핏들으면 처절하게 들리지만 허긴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그게 여기서 하루 하루 지내는 내 심정이다.

직장때문에 여기서 5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서 사는 아들이랑 남편은 이 험한(!) 도시에 혼자 남아있는 날 위해..혼자 적적해 할까봐..그리고 무엇보다 무사하게 하루를 잘 살았나..해서 하루에 몇번씩 전화를 주고 받는다. 특히 차를 갖고 어딜 나간다거나 늦은 시간에 밖에 있다거나 하면 어두컴컴하기 전에 집에 들어가라는 청소년지도용 멘트로 날 재촉한다. 허긴 그럴 만 하다. 처음엔 하루에 서너번 넘게 들려오는 요란한 싸이렌 소리에 대체 또 뭔일이 터졌길래..이 난리가 싶어 고개를 빼고 내다 보곤 했었는데..이젠 무덤덤해졌나보다. 싸이렌 소리엔 고개도 안 움직여지고 학교에서 단체로 보내주는 캠퍼스 사고소식에도..누가 또 총들고 주차장에 나타나 차를 털어갔구나..하고 흘려읽게 되었으니까. 일년사이에....내 알람은 이렇게 둔감해졌다.

물론 내 그런 무덤덤함이 섬짓하게 느껴질 때도 있긴 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한귀로 흘린 저 앰브란스 소리가 나는 그 어딘가에 일어났을 일들을 상상해서 떠올려 보면 누군가가 총에 맞아 다쳤다거나 죽었을 수도 있고 차사고가 나서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고...최악의 경우는 만일 그 누군가가 내가 아는 누군가라면...그때서야 돌아보게 되었다는게 참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여기 온 일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내 개인적인 일은 아니지만 이 동네에서는 좋은 일보다는 맘 아픈 일이 더 많았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여기 온 첫학기..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일년 전 가을학기가 거의 끝날 무렵...학교 기숙사에서 터진 총기사고였다. 그것도 우리가 사는 기숙사 아파트 바로 맞은 편에 살던 당시 공대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인도 남자랑 그집에 놀러왔던 같은 나라 친구 한명이 함께 변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한동안 이 주변은 흉흉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이 뜨고 기자들이 인터뷰하자고 문을 두들겨대고 같은 아파트에 살던 (대부분이 나처럼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어쩌면 자기자신들이 그 피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해했고 같이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러 왔다가 처참하게 변을 당한 피해자들의 일이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사건이후로 이곳의 안전이 안심이 안되서 그리고 내가 힘들기도 해서 지금은 아빠한테 가서 지내는 아들내미한테도 그일은 적쟎은 충격이었을게다. 비록 서로 잘 알지는 못해도 아침 학교가는 길목에 거의 매일마다 담배 한대 피워물고 집안에 들여놨던 화분들을 광합성시킨다고 햇볕에 내다 놓곤 하던 그 인도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니. 그나마 간단한 눈인사나 하이..하는 아침인사만 나눴을 뿐인데도 아들과 난 한참 동안을 그 아파트 앞을 지나가거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맘이 섬찟해 했으니까. 정작 남편을 보낸 그 각시의 맘은 오죽했을까. 더군다나 임신하고 있었다니.  

그 사건이 있던 날 밤 그 시간에...난 그 집쪽을 향해 난 창가에 앉아 그 다음날 아침부터 치뤄야 할 기말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남편은 가까운 동생네 집에 놀라가고 없었다. 아홉시가 좀 넘었을 때 조용하기만 하던 바깥에서 낯선 소리가 들리긴 했어도 설마 설마 했다. 실제로 총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멀리서 들리오는 땅..땅..하는 두번의 소리에 때마침 걸려온 남편한테 총소리 비슷한게 들렸다고 하니 이웃 아파트로 놀러갔던 남편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며 별일 아닐거라고 했었다. 헌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아파트가 방음시설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되어있어 집안에서 쐈다는 그 총소리가 바로 건너편에 사는 내 귀에도 어디선가 멀리서..들려오는 듯 햇던게다. 남편과 통화하면서 밖을 내다보긴 했었다. 그러다 방안의 불빛이 너무 밝아 밖이 잘 안 보여 실내등을 끄고 다시 내다봤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대신 어디선가 급하게 뛰어가는 몇개의 발자욱 소리들과 사람말소리들이 들려왔고..곧이어 서둘러 떠나는 듯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을 뿐...별 다른 게 없어 하던 공부를 계속 했다.

그러기를 한시간여 지났을까.. 갑자기 문밖이 시끌시끌하고 파란빨간 불빛이 창을 통해 번쩍번쩍해진다. 뭔일인가..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가까이 지내는 한국이웃이 토끼처럼 놀랜 눈으로 바로 앞집에서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뭐하냐고  묻는다. 사람이 죽었다니...하고 밖을 내다보니 이미 앞마당은 요란한 싸이렌을 켜댄 경찰차들로 가득 찼다. 그때서야 알았다. 그게 진짜 총소리였다는 걸. 정신을 놓은 듯해 보이는 인도 여자가 경찰의 부축을 받고 있었고 앞집은 노란선으로 차단되어있었다. 그때 그집 문가 밖으로 삐죽 나와있는 두개의 발들이 보였다. 힘없이 널부러져있는.. 눈이 마주친 경찰은 뭘 듣거나 본게 있냐고 물었다. 해서 사람들은 못 봤고 도망치는 발자욱 소리랑 차가 빠져나가는 소리만 들었다고 얘기해줬다. 발자욱 소리는 한명이 아니라 여러명이었다고. 난 그 증언을 오는 새벽녁까 찾아오는 경찰이나 기자들한테 몇번이나 반복해야 했고 기말시험공부는 둘째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 다음날 시험을 보러 가야했다. 사건은 한참을 가닥을 잡지 못한 채 오리무중이었다. 나를 포함한 이웃의 증언으로 범인이 한명이 아니라는 단서만 잡았을 뿐. 그 사건이후로 학교는 아파트 주민들의 안전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허술하기 짝이 없던 학교 아파트의 경비를 강화한답시고 씨씨티브이를 달고 경찰들이 수시로 순찰을 돌고 바로 뒷동네에 사는 좀 거친 이웃(?)들이 좀도둑질을 하러 수시로 넘곤 했다는 부실한 나무 담장도 튼튼한 걸로 바꾸는 등 우리 표현대로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열을 올렸다. 허긴 주립 대학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니 학교 망신이 아닐 수 없었을 게다. 누군 그랬다. 보복 살인일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총으로 관자놀이를 쏴서 죽이냐고. 담장 하나만 넘으면 흑인들이 모여산다는 이 동네엔 이런 식의 사건 사고는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라고. 그나마 학교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니 연일 신문에 나고 여론화되서 이렇게 외양간(?)이라도 고쳐주는 거라고 말이다.

듣자하니 힘든 박사공부 다 끝내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그 인도남자의 죽음은 같은 신세에 있는 많은 외국 학생들과 그 가족들을 허탈하게 했다. 게다가 남편과 남편 친구의 죽음을 신고한 사람이 다름아닌 임신한 그 남자의 아내였다니.. 그 처자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싶어 그 사람의 명복을 기린다는 모임에도 모두들 얼굴을 내밀었고 그 사람을 추모하는 사진 근처에 사람들이 갖다 놓은 꽃에도 한송이지만 맘을 보탰다. 그리고 나서 일년동안 그 집은 아무도 이사오지 않은 채 비어있었고 그 범인들이 잡힌 건 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일년이 지난 이번 여름이었다. 그전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었다. 죽은 인도사람이 그 전에 좀도둑질하는 뒷동네 흑인청년들을 경찰에 고발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일에 대한 보복살인일 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이 가난한 유학생 아파트에 뭐 훔칠게 있다고 들어와서 그렇게 두명이나 죽이겠냐고. 헌데 정작 잡혔다는 범인들은 좀도둑질을 하려고 맘 먹고 이곳으로 기어들어온 흑인 청소년들이었다고 한다. 겨우 돈 몇달러를 갖고 가려고 다큰 어른 남자 둘의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그 말에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좀 잠잠하나 했더니 올 봄 이곳 한인 사회는 여기서 오랫동안 살던 한 한인가족의 자동차 사고소식에 휘청거렸다. 아이 둘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아침 등교길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중앙선을 넘어 덤벼드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첫째 딸을 그 자리에서 잃고 둘째와 운전하던 엄마는 혼수상태로 만든 큰 자동차 사고였다. 상대차량은 밤새 술 먹고 그것도 무면허로 운전을 했다는 젊은 겁없는 흑인이었다고 한다. 비록 한번도 뵌적은 없지만 같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맘이 얼마나 아플까...가슴이 먹먹해져 작지만 십시일반 모으는 손길에 같이 했다. 누군가 그랬다. 미국에서 제 명대로 못 살고 가는 대부분의 경우가 자동차 사고랑 총기사고라고.

여기 이사오긴 전에 살던 중서부동네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집사님들 부부가 계셨는데 그 두 분 역시 교통사고로 고속도로 위에서 돌아가셨다. 남의 나라땅에서 그렇게 고생 고생하시다 그나마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살만 해 지셨다며 친하게 지내는 우리가 공부마치고 들어갈 때 즈음에 당신들도 같이 한국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하셨던. 헌데 그렇게 한국에 가고 싶어하시던 이유중에 하나가 당신들이 연세 들어서까지 운전대 잡고 다니고 싶지 않아서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지는 여기서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운전을 하시는 걸 볼라치면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노인분들이 운전하시는 차는 티가 나는고로. 해서 옆을 지나칠 때도 조심 조심...때로는 불안할 때가 어디 한두번인가. 게다가 그 두분이 하시던 가게 옆에는 청력센타(hearing center)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을 찾는 대부분의 손님이 청력에 문제가 있는 노인분들인데..자잘한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부분의 이유가 노인분들의 운전 미숙에서 비롯된 사고라고 한다. 예를 들어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으셔서 그 센타를 박기도 하고 가끔은 두분이 하시는 가게 유리까지 박으시는 통에 그 청력센타는 허구 헌날 공사중이었고 그 이웃가게들도 적쟎은 피해를 본다면서 그런 모습들에 나중에 이곳에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던 그 두분은 어느 겨울날 밤 술취한 백인이 운전하던 트럭이랑 충돌해서 어이없게 돌아가셨다. 이곳에선 필수품에 가까운 자동차가 눈깜짝할 사이에 영락없는 살인무기로 변하는 순간들인게다.

지금 사는 이 도시는 범죄율뿐 아니라 운전 험하기로 치면 여느 대도시 뺨친다고 한다. 해서 보험들때 여기 우편번호를 대면 보험료가 두배로 뛴다고 한다니 얼마나 사고 다발지역인지 짐작할만 할게다. 누구는 서울에 비하면 비할 바가 아니라고들 하지만 눈감고 운전해도 될만큼 사건 사고가 적었던 시골에서 운전하던 나한테 조금만 지체한다 싶으면 뒤에서 재촉의 빵빵이 들어오고 끼어들기는 비일비재하고 좀 늦게 간다 싶으면 뒤꽁지에다 차를 들이대는 겁없는 청춘들이 많은 이곳에서의 운전은 적쟎은 긴장과 부담이다. 해서 남편은 내가 차를 끌고 나간다고 하면 더군다나 밤길에 나선다고 하면 조심하라고 수차례 당부을 한다. 그렇게 안전운전을 늘 강조하는 남편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이곳에서는 내 스스로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남편 말대로 자칫하면 살인흉기로 변하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는게 예전 살던 그 동네처럼 편하지 않다. 혹 낯선 골목에 들어섰다 싶으면 자동적으로 창문을 잠그게 되고 좀 거친 운전이다 싶으면 아예 길을 터준다. 여기서 공부를 마치는 목표말고 무사히 별탈없이 이 도시에서 지내는 목표가 있는고로. 

그리고 이번 여름엔 태풍이 여길 강타했다. 그 태풍으로 부러진 나무들이 바람를 타고 달려들어 주차해놓은 자동차 유리들이 부서지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집을 덮기도 했다. 한 여름에 나간 전기는 열흘이 넘어도 들어올 생각을 안해 완전 수재민신세가 된 이 아파트 주민들은 먼저 전기가 들어온 어디론가 다들 피난을 떠났고 난 남편이랑 아들이 사는 동네로 피난을 갔었다. 태풍은 강력했다. 나무가지를 머리채잡고 휘둘리듯 불어대던 태풍은 내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남편과 아들한테 올라가는 고속도로에는 태풍때문에 넘어진 전신주들이랑 나무들이 여기 저기 도로를 막고 있어 돌아가야 했고 전기가 나가 신호등이 작동이 안되 차들은 연신 거북이 걸음이었고 문을 연 주유소를 찾아 헤매다 겨우 찾은 곳에서 차기름을 넣기 위해 한시간도 넘게 기다려야했다.

이렇게 적고보니 일년이 아니라 여기서 삼년은 더 산 그런 느낌이다. 시간이 지나고 이젠 또 평안한 일상이 돌아왔고 풋볼시즌인 요즘은 주말이면 다들 풋볼구경하느라 들썩 들썩댄다. 언제 전기가 나갔고 태풍으로 휘청거린적이 있냐는 듯말이다. 그 와중에도 남의 나라 살이하는 것도 서글픈데 어디서 칠지 모르는 날벼락은 피해야지...하는 외국학생들이 어디 나뿐일까. 뜸금없는 생각이 든 건 평소 즐겨찾는 커피집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또 뭔 사고가 터졌는지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아침을 뒤들어대고 있는데 이 커피집에 앉은 이들의 일상은 참으로 평안해뵌다. 누구하나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보는 이가 없다. 대체 이놈의 도시에서 사는 하루 하루동안 저 싸이렌 소리을 안 듣고 지내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얼마나 둔감해지기에 저런 모습들일까...둔감해졌다고 하나 난 여전히 싸이렌이 도착하는 그곳에서 일어났을 사고에 맘이 안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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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김질을 들어가기 전에...

공부한다고 한국을 떠나온지 햇수로 10년째가 되어온다. 어느새 여기 올 때 비행기 유아석(infant seat)에 누웠던 아들이 12살이 되어가고, 우리의 결혼 햇수 또한 12년이 넘었으니까.. 그 시간 동안 10년을 우린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새삼스레 그 짧지 않은 그 시간들을 되새김질하고 싶어진 것은 둘중에 먼저 공부를 끝낸 남편이 한 주립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이제사 여기서 보낸 시간들을 조금은 여유로운 웃음으로 떠올리고 싶다는 마음의 여유에서 일게다. 몇푼 안 되는 돈 달랑 들고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둘다 공부하겠다는 말그대로 똥배짱하나로 시작했던 남의 나라땅 살이...그 시간동안 겪었던...이런 저런 고비들이 많았기에..하여 주머니가 넉넉하다고 해서 유학하는 것만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유학을 꿈꾸지만 현실에 묶여 저지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얘기해주고 싶기도 해서. 물론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도 함께. 돈이 있으면 에둘러가지 않고 가로 질러 갈 수 있는 빠른 길이 있음에도 턱없이 가벼운 주머니덕에 한참은 돌아 가야 했던...마냥 더디게만 여겨졌던 거북이 걸음이긴 해도.. 끝을 보겠다는 뜻만 접지 않는다면.. 결국은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도 함께 되새기고 싶은 맘에 그냥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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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말렸었다. 형편도 안되는 우리가 여유있는 사람들이나 갈법한 유학이란 걸 간다고하니까. 그냥 저렇게 맘으로 꿈꾸다 말겠지 하는 주변의 반응에 은근히 오기가 동하기도 했다. 돈있는 사람만 유학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는....그런 오기말이다. 허긴 누가 봐도 '맨땅에 헤딩하기'가 따로 없긴 했다. 자식의 유학자금을 보태줄 만한 형편이 안 되는 건 시집이나 친정이나 다르지 않았으니 양가에 기대할 뭣도 없는데다 설사 있다 해도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늦은 나이에 우리만 잘 살아보겠다고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철없는 짓을 저지르는 주제들인터라 그런 도움은 아예 애초부터 꿈도 꾸지 않았다. 허나 그런 고집과는 달리 우리가 힘들 때 어찌 아시고 얄팍한 당신들의 주머니에서 건네주신 쌈짓 돈을 염치없이 몇번 받긴 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떠날 때 우리 맘은 그랬었다.

무조건 벌리고 보자는 식의 이몸하고는 달리 돌다리를 건너기전에 여기 저기 두들겨봐야 하는 돌다리파인 남편은 과연 우리가 잘 하는 짓인지..간다고 해도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하는 우려를 비행기가 뜨기전까지 접지 못했다.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봐도 그건 말 그대로 똥.배.짱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실력이 유학에 성공했다고 수기를 쓴 누구 누구처럼 출중하야 장학금을 받을 주제도 못 되었으니까.  주머니도 얄팍하기 그지없고 그렇다고 실력까지 내세울 뭣도 없는 우리가 과연 남들처럼 고생끝에 온다는 그 '복'(?)을 볼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어찌 전혀 없었겠는가. 기실 그렇게 주제파악하고 그만 접자는 맘이 고개를 들어 하루에 열두번 내 속을 휘저어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과감하게(!) 접지 못했던 건..그렇다고 유학을 꿈꾸지 못하지 말란 법은 없잖은가..하는 발끈함이었고..무엇보다  결혼 전부터 키워온 꿈인데..결혼했으니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 서로 힘 보태주면 혼자일 때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서 부딪혀보지도 않고.. 부딪혀서 머리가 깨지기도 전에... 미리 깨질 것을 걱정해 이대로 접는다면 나중에 후.회.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남은 시간동안 누구 누구탓을 하면서 살고 싶은 맘은 전혀 없었으니까.

허긴 오기 전에 주변상황이 많이 꼬이긴 했었다. 이러다 못 가고 주저 앉는거 아닌가..싶을 만큼. 그럼 그렇지..우리 형편에 무슨 유학이었냐.. 헛꿈을 한번 꾼거라치고 접고 싶을 만큼. 시아버님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고 친정어머니도 뱃속에 무슨 혹이 생긴 듯 하다고 하셔서 여기 저기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를 받으러 다니시는 마당에..자식된 도리로 어떻게 떠날 수 있었겠냐고 그때 처지를 핑계삼아 눌러 앉을 수도 있었다. 해서 이러 저러 해서 못 갔노라고..내 탓에다 처지 탓을 하면서 미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곱씹으며 살았을 게다. 허나 그렇게 밖에서 기웃거리면서 막연히 힘들거라고 못 해낼 거라고 접기 보다는 일단 어떻게 해서라도 그 안으로 머릴 들이밀고 시작하면 그 안에 다 방법이 있을거라는 맘에 그런 상황들이 나아지길 기다렸고 시아버님이 퇴원하셔서 집에 돌아오시고 친정어머니의 진찰결과도 나쁘지 않게 되면서 놓았단 마음을 다 잡고 천천히 구체화시켰다. 그렇게 오랫동안 별러왔던 계획을 그렇게 그냥 주저 앉히기에는 억울해서 결국 그래, 일단 가보자...가서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해보는거다..그래도 안 되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짐싸서 오는거다...라고 맘 굳게 먹고 말이다. 얼핏보면 이 무모해보일 우리의 계획은 우리의 남은 인생을 후회하면서 살지 않기 위해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이몸보다 생각이 많아 이것 저것 맘에 걸려하던 남편도 나랑 같은 맘으로.. 

난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고 싶어하는 유학의 꿈이 허영기 섞인 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언제 한번 제.대.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맘을 품었다. 내 이 야무진 꿈을 알면서도 가족이나 친구들은 결혼까지 했고 거기다 아들까지 낳은 내가 저렇게 그냥 꿈만 꾸다 접고 말겠지 했나 보다. 결혼한 지 이년만에 계획대로 떠난다고 했을 때..안 가는 줄 알았는데 결국 가긴 가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던 걸 보면. 여하튼 출국시기는 대학원에서 영화공부를 시작한 남편의 석사과정이 끝난 다음으로 잡았다. 뒤늦은 결혼에다 유학까지 생각하고 있었던터라 내 계획에는 아이에 대한 부분이 없었지만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남편의 뜻대로 난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갖었고 임신을 해서도 아들을 낳은 후에도 우리 둘은 최대한의 총알(유학자금을 우린 그렇게 얘기했다) 비축을 위해 과외에다 학원선생에다 리서치 파트타임에다 여기 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말 그대로 발바닥에 땀나게 말이다. 허나 그렇게 땀흘린 것에 비해 우리의 총알은 계획한 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그건 우리 벌이의 대부분이 생활비로 빠져 나갔기에 어느 세월에...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일년 반을 뛰어다니다 남편의 졸업작품을 찍을 즈음에 시댁으로 들어가 6개월정도를 살면서 유학을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이천만원 좀 넘는 전셋돈에서 졸업작품을 찍는데 드는 비용을 빼고 난 나머지 돈에다 조금이라도 더 보태서 유학살이에서 적어도 일년은 버틸만한 총알을 갖고 떠나고 싶었지만 우리의 계획과는 달리 오히려 알량한 총알은 자꾸 줄어들어만 갔다. 하여 총알확보되기를 기다린답시고 이렇게 미루다보면 점점 늦어져서 어쩌면 아예 접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끝에 우린 애초 계획대로 남편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난 그 해 여름(1999년)에 저질렀다.. 사천불(4백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돈을 들고.

유학준비도 유학원도 도움없이 혼자서 했다.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토플이랑 지알이 공부는 손에서 놓지 않았고 유학원을 통해서 하면 거의 백만원 넘게 든다는 학교 지원이나 비자 인터뷰에 필요한 서류등은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들 덕에 혼자 준비했다. 이때는 우리것 뿐만 아니라 우리랑 같이 공부하러 가겠다고 따라 나선 한 동생 것까지 같이 준비해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비자인터뷰때 재정증명으로 들이밀어야 하는 통장잔고 만들기였다.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여기 저기 돈을 끌어 모아 입금시켜 비자 인터뷰에서 거절당하지 않을 만큼의 금액을 만들어 잔고증명을 띠었다. 물론 그 증명서만 떼고 나서 빌린 돈들은 모두 쥔장들한테 돌려주었지만 잠깐동안이나마 적쟎은 돈을 선뜻 내준 친구들한테 고마울 따름이다. 학교는 대학원 동기가 먼저 가서 공부하고 있는 학교로 결정했다. 다른 주립대학교에 비해 학비도 저렴했고 남편과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둘다 있고, 부부중에 한명이 조교(assistanship)을 하면 그 배우자의 학비를 삼분지 일정도 감면받을 수 있고,아들도 3살이 넘으면 무료로 학교(pre-school: 유치원의 이전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는..기타 등등의 제반 조건등이 우리의 처지에 들어맞는.

마지막 결정은 우리 둘중에 누가 배우자 비자(F2 visa)를 하느냐 였다. 그건 둘다 학생비자(F1 visa)로 들어가면 미국내 합법적인 체류를 위해 외국학생이 최소한의 3과목(9학점)을 들어야 하는 풀타임 학생이기에 학비도 문제려니와 그 당시 두살이 채 안되는 아들내미를 둘중 하나가 돌봐야 하기에..둘다 학생비자(F1)로 공부할 형편은 못 된다는 생각에 우린 둘이 머릴 맞대고 고민했다. 지금은 이민법(immigration law)이 바뀌어서 배우자 비자(F2)로 공부할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배우자 비자를 갖고 있으면 풀타임(full time)이 아니라 파트 타임(part time)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터라 영어공부를 손에 놓지 않았던 내가 오기 직전까지 단편영화 만든다고 작업에만 매달린 남편보다는 영어적응을 위한 시간에 여유가 있다 싶어 입학을 연기하고 아들내미를 돌보기로 했다. 게다가 학교조교 자리를 얻는데 꼭 필요하다는 컴퓨터 다루는 기술들은 기계치인 나보다 남편이 훨씬 낫기에...더군다나 남편을 배우자비자(F2)로 신청하면 비자인터뷰에서 퇴짜(reject)당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근거없으나 그럴듯한 소문을 들었던 터라 우린 남편을 풀타임학생인 학생(F1)로 신청한 비자인터뷰를 했다. 지나고 나서 하는 얘기지만 많이 부실한 재정증명에도 혹시나 하는 맘에 잔뜩 긴장하게 했던 비자 인터뷰는 몇가지의 질문으로 싱겁게 끝났고 결국 우리는 1999년 7월 9일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20개월 된 아들을 infant seat에 앉히고.. 아니 눕히고.

오랫동안 지켜봐온 이몸의 고집을 아는터라 맘으로나마 걱정을 곁들여 격려해준 친정식구들에 비해 시댁 어른들은 우리의 유학을 마뜩찮아 하셨다. 안되는 형편에 저렇게 무릴 해가면서까지 가야 하나 싶으셨던게다. 이곳에 와서 남편이 아르바이트로 이런 저런 힘든 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러셨을게다. 이몸만 아니었으면 한국에서 고생 안 하고 잘 살고 있었을 아들이 남의 나라땅에서 그렇게 고생을 한다고. 애초 여기 올 때 고생을 각오하고 떠나는 우리한테 시부모님께서는 20개월짜리 아들내미를 당신들 곁에 두고 가라고 하셨었다. 돈없이 남의 나라 살이를 살러가니 아들내미까지 돌보려면 어려울거라시면서. 남편도 그러자고 했다. 허나 고생을 해도 같이 해야 한다고, 3살만 되면 그곳에서 학교에 갈 수 있다니까 그때까지 내가 돌보면 된다고 내가 우겨서 같이 데리고 왔다. 그런 내 고집스런 결정은 우리 힘든 미국생활내내 참 잘 한 짓이다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만일 한국에 두고 왔다면 아들내미 보고 싶어 힘들 때 한국으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우리 곁에 그 아들이 있었기에 힘이 되고 힘들어도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기에...

그렇게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비행기에 올랐다..그게 10년전이다. 오는 가는 동안, 예민해서 걱정했던 아들은 긴장한 아빠 엄마 맘을 알기나 하는 양 칭얼대거나 보채지도 않고 유아석(infant seat)에서 아주 곤히 잠만 잤고 남편과 난 앞으로 닥칠 새로운 경험들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서로의 손을 꼭 잡았었다. 누구말대로 맨땅에 해딩이라는 걸 시작하려니 그럴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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