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Ridley Scott였다. 새삼 그의 배짱이 맘에 든다. 예루살렘을 놓고 아직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대립하고 있는 이 마당에..이슬람과 전쟁을 벌일 때마다 기독교가 국교인 미국이란 나라가 내세우곤 하는 대의명분이 이교도와의 전쟁인 '성전(holy war)'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먹히는 이 미국이란 나라에서..이런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내걸수 있는 그의 뚝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 기독교와 연관된 대부분의 영화들 이 깔고 있었던 기독교 우월주의의 관점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그렇다고 이슬람한테 우위를 두느냐..그것도 아니다. 그건 이 영화가 기독교와 이슬람..두 종교 중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은근히 강조하거나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고, 대신 두 종교를 부족한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를 향해 지닐 수 있는 믿음(faith)의 형태들로서 동등한 분량의 무게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Ridley는 어느 한 종교가 좋다..나쁘다..우월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faith)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 화두를 그는 성지(holy city)인 예루살렘을 놓고 벌이는 십자군과 무슬림들의 갈등과 전쟁이야기로 풀어간다. 전쟁 이야기를 축으로 짜여져 있지만 그 이야기의 올들은 종교라는 명분하에 십자군 내부에서 자행되는 피비린내나는 숱한 권력의 암투에서 빚어지는 썪은 그림도 있고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도 있고 올곳게 자기의 길을 걷는 숨어있는 정의들에서 뿜어나오는 순수함도 있다. 이야기는 실제로 이런 인물이 있긴 할까..아니 있었으면...세계사가 바뀌지 않았을까..싶은 아주 괜찮은 남정네 Balian (Orland Bloom)을 중심으로 엮어진다. 물론 이 영화속의 캐릭터로서 괜찮다는 거지 자연인 Orland Bloom에 대한 호감은 아니다.
전체 스토리를 아주 엉성하게 얘기하자면 그저 평범한 대장장이였던 그는 어느날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라는 사람, Godfrey (Liam Neeson)를 따라 나서면서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으로 접어들게 된다. 아버지덕에 낙하산 승진(!)을 하게 된것이다. 그것도 그냥 승진이 아니라 아버지와 왕의 죽음으로 십자군 전쟁의 통치권까지 맡게 되면서 일신의 삶이 아니라 십자군 전체의 삶을 책임지게 된다는 게 이 영화 이야기의 대락 줄거리다. 그 이야기를 축으로 우리아들의 눈높이를 빌려 착한 놈 나쁜 놈들을 굳이 구분하자면 한편(착한 편)에는 나병에 걸려 평생을 은색 마스크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살다가는 불쌍한 Baldwin (Edward Norton)이 있고 Balian을 사랑한 그 왕의 여동생 (Eva Green)이 있고 십자군의 암투속에서 지조를 꺽지 않던 숱한 기사들이 있고 다른 한편 (나쁜 편)에는 믿음보다는 자기의 치부와 권력에 눈이 어두운 썪은 인간들이 있고 이슬람 군대들이 코앞에서 들이 밀고 쳐들오자 두려움에 떨며 이슬람으로의 개종까지 생각하는 껍데기 신자, 그것도 평신도가 아닌 지도자의 자리를 꽤 차고 있던 믿음의 분량이 덜 된 인간들도 있고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는 간신나라 충신들도 있다.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지금이나 그제나 어디서나 다르지 않다.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을 꼽자면 Balian(Orland Bloom)과 이슬람의 지도자 Saladin 둘이 대면하는 장면이다. 그들의 명령만 떨어지면 금새라도 피를 보기 위해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는 군사들을 등 뒤에 두고 비록 몇마디지만 심사숙고끝에 두 지도자가 내린 결론은 더 이상의 무모한 피흘림은 접자는 양심적인 판단이었고 결과...예루살렘을 남겨놓고 떠난다. 여기서의 몇마디엔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자리에 앉은 이들의 고민이 역력하게 배여있다. Baldwin (Edward Norton)도 Balian(Orland Bloom)도 이슬람의 지도자 Saladin도 하나같이 고뇌한다. 과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를 놓고..과연 어떤 신이 피를 원하겠는가..누구의 신이든 평화를 갈구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이분적인 대립구도에 익숙한 우리는 더군다나 늘 '선'으로 상징되는 기독교와 대립되는 다른 종교, 특히 이슬람을 기독교와 대적하는 '악'의 무리로 취급하던 기존 영화들의 이야기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한테 Balian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신중하고 이성적으로 뵈는 이슬람 지도자 Saladin의 모습이 낯설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를 그렇게 바라보는 Ridely의 시선이 낯설 수도 있다. 특히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 그의 삶에 대한 측은지심 탓인지 Leper King의 현명함이 제일 와 닿는다. 영화보는 내내 그 마스크속의 얼굴이 누구인지 궁금했었다. 목소리도 귀에 익고... 나중에 올라가는 credit을 보고 나서야 Edward Norton이라는 걸 알았다.역시..마스크를 쓰고도 연기가 된다 했더니.
영화속 이야기를 우리 현실로 끄집어 낸다면 영화속에서 접은 그 전쟁은 현실에서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굳이 영화랑 연관해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이 영화에 나오는 그렇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지도자를 갖기란 우리의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탓인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인게다. 오늘도 성지 Kingdom of Heaven을 순례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는 크리스챤의 발길은 이어지고 있을게다. 만일 그때 전쟁을 접지 않고 예루살렘을 접수(?)했다면 오늘날 종교를 걸고 벌어지는 숱한 전쟁들을 줄일 수 있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뿐만이 아니다. 재밌지 않는가..거의 100여년간 기독교와 이슬람이 holy city 예루살렘성안에서 공존했다는 사실이..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알라를 향해 절을 한다. 각자의 신에 각자의 방법으로 경배 드리는 것에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동의했다게..물론 거기엔 세금의 의무를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종교라는 명분을 내걸고 벌이는 전쟁의 어리석음에 대해 시원하게 일갈하고 있는 Ridley Scott은 어쩌면 종교 다원주의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믿는 절대적인 존재가 크리스챤이 God이라고 부르는 그 신이 이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그 신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가 이 영화에서 치는 대사들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두 종교가 극단으로 치닫지만 않았다면 그 100여년동안의 예루살렘 성 안에서처럼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 비록 희박하지만 그 당시로는 전혀 불가능한게 아니었을 거라는 암시에서도 종교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어느 종교건간에 평화와 선함을 추구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잖는가. 이 세상에 숱하게 치루어져 왔던 종교를 빙자해서 흘린 그 피들..지금도 자신의 종교만이 우월하다는 편협적인 이즘에서 비롯된 해서 이교도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종교적 이기주의는이 영화에서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는 모습과 영락없는 닮은 꼴이다. 종교 자체는 어느 종교든 선하다. 그걸 이용하는 인간들이 추할 뿐이지.
이 영화는 독실한 크리스찬들한테는 무지 불편한 영화일게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하다. 전쟁영화니 돈 수억 깨졌을 스펙타클한 전투 장면도 요즘 잘 나가는 배우들의 연기등의 볼거리지만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제대된 믿.음.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그냥 그런 풍성한 볼거리들에 족하고 넘기기엔 우리 맘에 곰곰히 씹어야 할 대목이 참 많은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Ridley Scott의 영화를 참..많이..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Blade Runner'. 그밖에 기억나는 건 그한테도 이런 감각이(!) 있었음에 놀라게 했던 'Thelma&Louise' 그리고 Russell Crowe한테 날개를 달아준 'Gladiator'가 있을게다. 이 작품에서 Ridley는 그의 영화 감각이 아직도 무뎌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영화를 빚는 그의 손끝에서 그 나이에 걸맞는 세상을 읽어내는 연륜의 무게도 느낄 수 있다. 하여 'Blade Runner'와 함께 이 영화 역시 다시 봐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영화들중에 하나로 남한테 권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 2006년 여름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