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의 흑백논리가 한창 극성을 부리고 있던 1950년대 미국은 Joseph McCarthy라는 일개 한 상원의원의 세치혀에 놀아나고 있었다. 미정부기관내에 공산분자가 있다는 그 초선의원의 말 한마디에 온 나라가 웅성댔으며 언론들은 저마다 설레발을 치며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시작된 이 희대의 마녀사냥은 당시 미국사회가 얼마나 Red Scare를 심하게 앓고 있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이런 비슷한 류의 집단적 광기와 다름 아닌 현상을 McCarthism이라는 부르게 되었으니 McCarthy라는 이 인물이 유일하게 기여(?)한 것은 그런 사회심리현상을 분석하는데 아주 적절한 용어를 제공했다는 것일게다. 이 마녀사냥의 칼날에 미국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희생양으로 바쳐졌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이 사냥의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동료들의 공산당원 전력을 깨발겨야만 했던 해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할 수 밖에 없게 했던 비인간적인 사냥 방법탓이었다. 그런 폭풍우속에서 찰리 채프린은 미국을 등졌고 그 당시 동료를 밀고했던 이들은 동료를 팔아먹은 배신자라는 낙인으로 평생을 고개숙인 채 살아가야  했다. 기실 그런 와중에 양심을 지켜내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이 마녀사냥을 미국이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은 비단 그 원흉이 McCarthy라는 일개 또라이만이 아닌 그런 지경까지 몰고갔던 그 당시에 팽배했던 그네들의 집단적 광기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일게다. 이 말도 안되는 마녀 사냥쇼에 언론이 아주 제.대.로. 한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 마녀 사냥꾼이 주도했던 비열한 굿판을 접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저널리스트의 이상적인 아이콘으로 회자되고 있는 Edward R. Murrow라는 한 저널리스트와 Murrow's boys들이라 불리우는 그와 방송일을 같이 하던 동료들의 용기있는 비판 덕이었다.
  

그 당시 ED는 굵직한 사회적 이슈를 주로 다루던 CBS의 간판 뉴스쇼인 'See  It Now'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의 단짝인 Producer Fred W. Friendly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되고 있었던 McCarthy의 무분별한 마냥사냥에 제동을 건다. 그 발단은 신문에서 다뤄진 한 사건이었다. 한때 공산당원 모임에 연루된 적이 있었던 공군 장교의 그 과거 전력을 문제삼아 공군당국이 사상검증이라는 이유로 퇴역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군당국의 결정에 대한 문제 제기로 불거져 나온 ED와 그 동료들의 용기있는 비판은 억울하게 퇴역당했던 그 공군장교를 복직시키게 되었고 그동안 McCarthy의 칼날에 다치지 않으려고 저마다 숨죽이고 있던 양심의 목소리들이 그들의 비판에 힘을 실어주면서 결국 이 집단에로 벌이던 광기 쇼는 5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라는 빨간 딱지에 대한 지나친 경계가 이렇게 한 사회의 모든 뇌관을 마비시킬 만큼 강력했던게 불과 50여년전 이었다니 그리 먼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정치사에서 큰 오점으로 여겨지는 이 이야기를 새삼스레 영화의 화두로 들고 온 이는 다름아닌 잘 나가는 헐리우드 배우 George Clooney다. 그동안 헐리우드 배우중에서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전이 갖는 무모함과 전쟁으로 뭉개지는 인권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그의 정치색으로 미뤄 보건대 아마도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당시 부시의 전쟁놀이 정당화를 위한 나팔수로써 부화뇌동하고 있는 미국 언론의 현주소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비판하고 싶었던 속내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공산주의자면 전후사정에 대한 고려없이 무조건 적이라고 판단해 버리던 흑백논리가 판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빗대려는 듯 George는 흑백 톤의 영상으로 아주 군살없이 담백하게 담아낸다. 마치 한편의 다큐멘타리를 보고 난 느낌이다. 군데 군데 집어넣은 감미로운 재즈 선율이 그 딱딱함을 누그러뜨리면서.그 재즈의 노랫말조차 흘려버리면 안 될 것같은 기분이 들만큼 하나 하나 귀 기울기에 했던 진지하기 그지없는 이 영화의 분위기에는 캐릭터들의 명암이 잘 드러나는 흑백 톤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싶다. 칼라로 찍었더라면 오히려 그 맛이 덜 했을 듯...뉴스 쇼를 마무리할 때 ED가 시청자들한테 던지는 클로징 멘트인 'Good Night and Good Luck'을 제목으로 달은 것은 그건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를 불안한 당시의 회상을 반영하려 한 듯 싶다. 우리말로 의역한다면 '밤새 안녕'정도 될까. 하룻밤 잘 자고 일어났는데 누군가에 의해 공산분자로 밀고되어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던 그 당시를 살아내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의미심장한 인사로 들린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이전에 사회 심리학 수업에서 들었던 한 실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건 사람들의 '집단 심리'에 대한 실험이었는데 실험자는 비슷한 길이의 끈 몇개와 한눈에 봐도 길이가 짧은 끈 한개를 놓고는 실험 대상자들한테 보여줬다고 한다. 그 실험 대상자들은 한명만 제외하고는
이 실험의 의도를 알고 있는 연구원들이었다고 하니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딱 한명을 위한 실험이었던 셈이다. 그 여러개의 끈들을 보여주면서 어느 끈이 가장 짧아 보이냐는 간단한 질문이었고 이때 미리 입을 맞춘 다른 실험대상자 즉 연구원들 모두가 짧은 끈 대신 비슷한 길이의 끈들을 가리켰을 때 딱 한명의 진짜 실험대상자의 반응을 보려는 실험이었다. 헌데 그 결과가 참 씁쓸하게 재밌다. 누가 봐도 길이가 다른 끈들에 비해 짧았던 것을 가리키는 대신 80% 이상이 고만 고만한 길이의 끈을 가르킴으로써 다수의 의견을 쫓았다고 하니. 그 결과를 일반화시키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이 간단한 실험이 눈에 보이는 분명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의견에 거스리기를 극도로 꺼려하는 사람들의 사회 심리를 보여주는 듯 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만의 판단을 접고 지배적인 의견을 쫓는 우리들의 유약한 심리말이다. 기실 여러 명이 한명을 바보 만들기는 아주 쉽다. 허나 중국집에 가서 남들 다 짜장하는데 혼자서 짬뽕을 달라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더군다나 그게 자신의 사상검증과 관련된 말 한마디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라면 혼자서 용감하게 짬뽕을 외치기는 더 더욱 쉽지 않은 법이다. 사회 전체가 집단몰이로 반공을 국시로 외쳐대던 그 때 웬만한 용기와 각오 아니면 그런 양심의 목소리를 내기란 목숨을 걸어야 했을터이니 말이다.  

이 영화 이야기의 대부분은 담배연기 자욱한 CBS Newsroom에서 이루어진다. 그 좁디 좁은 방안에 핵폭탄같은 뉴스를 준비하는 Murrow와 Fred(George Clooney)를 비롯한 Murrow's guys들이 겪을 숨가쁜 작업과 그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허나 언론인의 양심을 걸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에 총대를 매야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자신들의 판단에 불안해 하는 동료들의 약한 모습도 잡는다. 어찌보면 그건 그들의 양심과 함께 여지껏 받쳐온 저널리스트로서의 생명을 거는 일생 일대의 도박판과 다름없어 보이기 때문이다.만일 자신의 목소리가 저 거대한 지배 논리에 묻혀져 버린다면 혹여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게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들의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초록은 동색이라고 여지없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들의 동료인 Don의 삶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그럼에도 그들은 믿는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한 믿음은 자기가 딛고 있는 사회가 담보하고 있는 최소한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일게다.

기실 이런식의 언론 조작을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도 그쪽으로는 남다르게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는 정부를 둔적이 있니 말이다. 언젠가 그 수업의 term paper 주제로 한국 언론들이 서로 암묵적으로 짜고 조작했던 '이승복 어린이의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반공이데올로기가 군사 정부와 언론은 물론 제도권 교육에 의해 어떻게 확산되고 강화되었는지에 대해 썼던 적이 있었다. 그건 뒤늦게 이승복이라는 어린이가 외쳤다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문구가 조선일보가 만들어낸 조작된 이야기이고 그런 이야기를 사실 확인 없이 당시에 내노라하는 신문사들이 덩달아 춤을 춰댔다는 한 신문의 기사를 읽은 후였을게다. 그 기사는 무척 충격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듣고 자란 나같은 세대한테는 참으로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한 언론사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실화인양 미화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학교마다 운동장에 이승복 어린이 동상을 세우고 때가 되면 이승복 어린이 기념 글짓기 대회나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 나라의 언론과 교육이 한 통속이 되어 국민을 기만한 아주 희대의 사기극이다. 그 조작된 이야기는 반공교육에 아주 적절하게 이용된 셈이다. 나 역시 뭣모르고 그 대회에 나가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려 쪼간한 상 받고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림들을 떠올리니 참으로 입맛이 쓰고 기가 막혔다. 기억난다. 그때 우리가 포스터에 그렸던 공산당들은 하나같이 괴물의 형상이었다. 북한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괴뢰'라고 듣고 배우며 자랐으니까. 이곳에 와서 남편과 나는 우리보다 연배가 한참이나 어린 친구들의 입에서 '북한 괴뢰'라는 표현을 듣고 참 씁쓸해 했던 적이 있었다. 언론과 국가, 교육이 짜고 치는 그 판에서 보고 듣고 자라 온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싶으면서도 말이다. 헌데 만일 그때 누군가가 그 진실의 전모를 알고 있었을 그 누군가가 사실을 폭로했더라면...하고 바란다면 너무 순진한가.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내심 부러웠다. 그래도 살아있는 양심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소리에 힘을 모아 실어줄 수 있는 이들의 사회가 우리의 것보다는 훨씬 민주적인 그네들의 분위기가. 
 

ED를 연기한 David Strathairn은 그의 외모가 실제 Murrow와 비슷한 지 여부를 떠나 힘있고 굵은 선의 연기가 Murrow의 분위기를 제대로 잘 살려주고 있는 듯 하다. 자기가 만든 영화여서 웬만하면 자기가 ED역 욕심이 났을 법도 한데 George Clooney는 한발 물러서 있는 ED의 동반자 Fred Friendly를 연기했는데 아주 잘 한 선택인 듯 싶다. 그의 행적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미국 역대 저널리스트들중에서 본 받을 만한 언론인 상으로 꼽힌다는 Edward R. Murrow가 말했던 이 대목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해서 그의 어록을 뒤적여 올려본다. " If none of us ever read a book that was "dangerous," had a friend who was "differen," or joined an organization that advocated "change," we would all be just the kind of people Joe McCarthy wants." 물론 George Clooney의 의도와 상관없이 순진한 도덕 교과서같은 냄새가 나는 영화긴 하다. 그건 언론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파수꾼(gatekeeper)이라 던가 우리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기제로 역할 한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이가 과연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드는 걸보니. 그럼에도 부인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언론의 최소한의 정기능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품을 수 밖에 없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직은 언론이 우리가 미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세상의 구석 구석을 보여주는 세상을 향한 창구(window)로써의 역할한다는데 이의가 없으니 말이다. 그만큼 언론은 이제 우리한테 '필요악'인 셈이다. ED는 만일 TV(미디어)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즐겁게 하는데만 열심이고 현실로부터 단절시킨다면 말그대로 하나의 바보 상자로 남을 게 분명하다고 단언한다. 허나 그것에 대해선 회의가 먼저 생긴다. 과연.....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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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이 두 남정네간의 사랑을 그렸다는 이안의 'Brokeback Mountain'한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미국이 갖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잣대가 우리의 것 보다는 그 눈금이 훨씬 관대해서 그런가 '동성애'라는 소재보다는 최초로 동양인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아카데미의 변화에 더 관심을 보내는 듯 하나 그때 난 동양사람이 찍은 '동성애'영화란 대목에 더 흥미로워했다. 아마도 그때 우리나라 영화의 분위기 탓이었을게다. 논란의 여지가 늘 수북함에도 불구하고 미국보다는 몇꺼풀이나 단단한 보수의 벽을 덮고 있는 한국에서 '왕의 남자'가 흥행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제 우리사회에서도 '동성애' 코드가 조금씩 먹혀드는 걸까..하는 섣부를 수도 있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물론 그냥 일시적인 붐인지는 이 영화로 힘받은 이후 영화들이 동성애를 담론으로 내세우고 뛰어들었을 때 그 작품들에 대한 관객들의 대접을 보면 그게 일회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더 분명해 질 테지만. 허나 불과 몇년전 만해도..왕가위의 '해피 투게더'(1998)가 "국민정서에 反한다"는 되도 않는 정부의 딴지걸기로 수입이 되네 안되네..시끄러웠던 것을 기억하기에 설사 일시적이라고 해도 상당한 변화임에는 분명했다.  

그런 동성애 영화에 대한 소문들을 접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다. 혹자는 이 영화를 '저주 받은 동성애'영화라고 한다.  그건 아마도 동성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지금에 비해 동성애라는 코드를 받아들이기엔 준비가 안되었을 너무 이른 시기에 발표되어 흥행의 된서리를 맞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고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주제를 더욱 칙칙하고 무겁게 다룬 탓일 수도 있을게다. 완곡어법으로 흥행기록을 갈아치웠다는 해서 동성애 영화라고 보기엔 그 강도(?)가 그닥 세지않은 '왕의 남자'에 비해 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두 남자의 솔직한 사랑 이야기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우린 동성애하면 우선 性적인 것 부터 떠올린다. 어떻게..남자끼리..여자끼리...그럴 수 있냐며 본능적으로 도덕적이냐 아니냐라는 시비의 잣대를 들이댄다.어떤 이는 그건 태초에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빚으신 하나님의 섭리에도 어긋나며 말세의 불길한 징조라고도 혀를 차는 이도 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왕따 당해왔던  그들의 사랑도 우리들이 하고 있는 여느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제일 맘에 드는 점은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색칠하거나 관객의 비위(!)를 고려해서 들춰내기 거북스런 부분들을 은근 슬쩍 덮고 넘어가는 미덕(?)과는 거리가 먼..동성애 영화라고 하면서 다수와는 다른 그들의 '사랑'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다 빼버린 껍데기만 보여주는 내보기엔 적어도 그런 입에 발린 짓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대신 감독은 부담스러우리만치 솔직하게 때론 거북하리만치 노골적이다 싶은 그림들로 두 남자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남자를 사랑하는 대식(황정민)은 아내와 가족이 있는 제대로 된 집을 두고  거리의 부랑자같은 삶을 살고 있다. 사회라는 견고한 테두리에서 터부시되는 남들과 다.른. 사랑으로 인해 아빠인 줄 알면서도 자신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아들과 더 이상 찾지 말라고 다짐하는 아내의 덤덤한 포기에 흐느낀다. 그와 석원(정찬) 사이를 비집고 좋아한다고 들이대는 술집 처자 일주(서진)와의 쉽게(!) 갈 수 있는 이성애 사랑의 가능성은 애초에 저만치 밀어낸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음에도 사회에서 허용된 사랑이 주는 온갖 특혜(!)도 포기한채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대식의 사랑을 보면서 궁금했다. 과연 동성애의 시작은 어떨까...대식처럼 처음부터 남자를 사랑하지는 않았으리라..혹 처음엔 모두가 우정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그러다 어느날 자기가 스스로를 '동성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닐까..혹시 그 규정에 자기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타고 난 것 이라기보다는 그냥 스스로에 대한 암시 아닐까..하는. 이런 내 궁금증의 전제는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타고 났다'기 보다는 후천척으로 '만들어졌다'는데서 출발하는 걸 보면 나 역시 그들의 사랑을 보는 시선에 편견과 호기심 위주였던 게다. 다만 심정적으로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그 시작이 타고난 것에서 비롯된 것이든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간에 그게 나라면 그런 남들과의 다.른. 사랑을 위해 대식처럼 서른 중반 넘게 살아온 그간의 삶을 내치지는 못했을 거라는거다. 그처럼 기실 이 영화에서 담아내고 있는 동성애자의 감성선을 따라 잡기란 쉽지 않다. 허나 이 영화는 아내와 가족을 뒤로 하고 거리로 나설 수 밖에 없는 대식의 삶과 석원을 향한 변하지 않는 그의 사랑이 그에겐 더이상 선택이 아니라 타고난 운명이라는 공감을 끌어낸다.

허긴 어찌보면 사랑의 대상이나 방법에 사회의 테두리에서 허용되고 안된다는 기준이 있다는게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긴 하다. 그건 이제껏 우리한테 익숙했던 통념에서 어긋나지 않는 익숙한 코드들이라는 것 말고 그 이상의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사회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사랑만을 정상(normal)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간의 사랑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동성애 애인이 없는걸 부끄러워했었다니...혹 미래 언젠가..엔 대식의 사랑이 평범한 사랑의 유형이 될 수도 있잖을까. 동성간의 사랑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은 아직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을 유교적인 도덕관이나 동성애를 말세의 증후군으로 꼽고 있는 울 오마니의 기독교 시각, 거기다 에이즈라는 세기말 병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등이 마구 엉켜있어 기실 그런 편견을 거둬내기란 쉽지 않다. 허나 김인식은 영화로 그런 우리의 편견을 향해 한 소리를 내고 있다. 견고하고 두꺼운 보수와 도덕의 벽에 대고. 사회가 그어놓은 금 밖의 사랑 역시 금 안에 있는 우리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음을 아니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는  금단의 사랑이 짊어지고 가는 천형으로  더 절절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큰 즐거움은 거칠지만 우직한 대식을 연기하는 황정민을 보는 데 있다.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해서 아내와 아들까지 버리고 산을 떠나 노숙을 하며 떠도는 산 사나이 대식을 그는 제.대.로 보여준다. 이후 그가 맡았던 여느 캐릭터들보다도 황정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긴머리의 대식이다. 정찬 역시 처음엔 여느 사람처럼 동성애에 대해 완강하게 거부하던 남자가 한결같은 남자의 낯선 사랑이 버거워 갈등하는 석원의 역할에 아주 적격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고 누군가 영화 만드는데 드는 돈을 대고 누군가 그 영화를 극장에 걸었다는 것만로도 충분히 놀라워했었다. 너무 심하게 뒷북인지 몰라도. '저주받은 동성애'영화라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만일 조금 더 늦게 관객을 만났다면 관객들의 거부감이 조금은 덜 하지 않았을까..싶어 아쉬울 뿐이다.   

*2006년에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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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영화에는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는 구석이 참 많다. 해서 많은 이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며 그 뒷맛이 영 '찝찝하다'고들 한다. 그런걸로 치자면 이 영화는 내가 본 그의 영화들 중에서 그 찝찝함의 '초절정'이라고 해도 가히 손색이 없을 듯 하다.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위좋은(?) 이몸도 보고 난 뒷맛이 개운치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난 김기덕의 영화를 즐긴다. 그런 뒷맛이 나쁘지 않다. 대부분 그의 영화가 우울하고 극단적이다 보니 어떤 이들은 그의 영화속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향해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냐..저런게 사랑이냐...고 끌탕을 할 만큼 그의 영화에서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떡일만한 공감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그의 영화에서 예를 들을 수 있을게다. 그의 영화에서 대부분의 사랑은 '소유'와 '집착'의 또 다른 이름이다. 쉽게 말해 한번 찍힌(찍은) 사랑은 반드시 소유(당)해야만 하는 대상이고 종국에 가선 그 사랑은 극단에 이르는 집착으로 표현된다. 때론 남자가 여자한테('나쁜남자', '활'), 때론 여자가 남자한테 ('섬', '시간').

그의 영화에 그려지는 사랑법들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떠나가는 남자를 낚시 바늘로 자학해서 묶어두려 한다거나('섬'), 사랑한다면서 창녀촌에 묶어놓고 지켜본다거나 ('나쁜 남자'), 키워서 잡아먹는(?) 속내('활')로 표현되는 그네들의 사랑법들은 평범한 우리들이 이해하기엔 기형적인 것들이고 보니 그의 이름 뒤에 붙는 세간의 수식어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것들이다. 특히 소위 페미티스트라고 분류되는 이들이 그의 영화에 던지는 시선은 곱지 않다. 그네들의 공통된 지적을 단순화시키자면 그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자들은 단순한 성(욕)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일게다. 이런 지적에 감히 내 얄팍한 생각을 얘기하자면 왜 영화가 굳이 일반적인 공감대를 얻어야만(must) 하는가에 대한 회의에서부터 나 역시 페미니스트적인 생각에 동의함에도 영화를 비롯한 작품에 대한 시각은 조금 다르다. 쉽게 말해 영.화.는 그냥 영.화.라는거다. 영화가 굳이 공통분모의 덕을 그려야 할 필요는 없잖은가. 거기다 특정 사회의 규범이나 관습의 잣대를 들이대고 재단하려 한다면 특유의 뒷맛 찝찝한 영화를 만드는 재주를 타고난 김기덕같은 감독이 설 자리는 현실적으로 거의 없게 될터. 누구나 결론을 예상할 수 있는 권선징악의 도덕 교과서같은 착한 영화(?)를 만드는 이가 있다면 김기덕같이 자기만의 칙칙한 색조로 혹은 장진처럼 특유의 희화적인 말빨로 세상을 그려낼 수 있다면 우린 아주 다양한 영화 메뉴판을 들여다 보면서 풍.성.한 선택의 폭을 누릴 수 있을텐데 하나같이 착하고 개운한 영화만을 봐야 한다는 건 너무 심한 고.문.이다. 모두가 좋아하고 사회통념에서 받아들일 만한 영화만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영화를 해부하려고 드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 입맛이 쓰다. 그런 모습에서 옛날의 '대한뉴스'처럼 (아니 요즘도 다시 만들고 있다는 얘기에 뜨악하게 했던)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류의...초지일관 반공과 애국심 모드였던 과거 시절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를 통해 표현된 생각들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짓들은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게 장황하지만 간단한 이몸의 얕은 소견이다.  


 
 이 영화는 '야생동물보호구역', '악어', '파란대문'에 이은 그의 네번째 작품일게다. 아니..'수취인 불명'이 먼전가...정확하지 않지만 초반에 만들었다는 이 영화를 본 건 비교적 최근이다.  그때까지 난 이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었다. 제목이 비슷한 다른 영화(송일곤의 '꽃섬')랑 헷갈렸다는 것도 모르고. 보고 나서 역시 이 영화는 다른 영화랑 절대 헷갈릴 수 없는.. 보고 난 그 뒷맛의 찝찝함이 쉽게 가셔질 수 없는 영화임을 알았다. 고립된 공간을 좋아하는 김기덕의 취향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부터 시작된 듯 하다. '나쁜남자'에서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외면당하고 있는 유곽이 무대였고 '해안선'의 무대는 철책선 밖의 사회으로 부터 철저하게 단절된 '군대'였고, '빈집'에서는 그들만의 또 다른 세상이었던 '빈집'이었고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에서는 물위에 떠있는 세상에서 격리된 절간이었으니까. 특히 현실에서 뚝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낡은 배'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최근 영화 '활'은  여기 저기 낚시배들이 둥둥 떠있는 이 영화의 주무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단절된 공간에서의 삶들 역시 그 공간을 닮았다.  하나같이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사회에서 버려진 밑바닥의...비주류의 삶들이다. 그 삶들이란게 이 영화 '섬'에서는 낚시꾼을 상대로 커피와 몸을 파는 여자의 삶이였고 '봄.여름..'에서는 수행정진이라는 한곳만 응시하며 살려는 한 남자의 것이었고, '빈집'에서는 남의 빈집만 골라서 남의 삶을 자신의 것인양  살아가는 총각이었다. 하나같이 외골수고 폐쇄적인 이 캐릭터들은  외부의 작고 사소한 긁힘에 여지없이 금이 가버리는 면역결핍의 인생들이다. 이 '섬'낚시터 주인인 여자(서정)의 일상은 그곳을 찾은 낚시꾼들한테 음식과 함께 몸을 팔며 살아가는 그냥 '살아지는' 삶이다. 그런 별다를 것 없는 그녀의 일상은 애인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 온 한 남자(김유석)로 인해 달라진다. 그 남자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이 공간의 칙칙한 분위기 만큼이나 집요하고 어둡고 소름끼친다. 특히 낚시바늘이 쓰이는 장면들에 가선 우리가 몰랐던 낚시바늘의 다양한 용도(?)에 놀라게 되고 그 찝찝함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그의 영화가 우릴 불편하게 하는 건 그게 영화임에도 왠지 우리의 이면에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랑이란 이름을 걸고있는 이지러진 집착이나 사이킥하고 변태적인 본능이 숨어있을 것 같고 눈을 돌리면 우리 주변에도 왠지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임에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개연성탓이 아닐까. 재밌는 것은 한편으론 그런 금기시된 본능이나 정상적인 사람들사이에선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해프닝들이 우리의 도덕성을 새삼스레 재무장시킨다는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끌탕을 하면서도 혹시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얼마나 달랐을까..하는  이런 반응을 혹 김기덕은 예상했을까..그건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런 소재를 풀어가는 그의 이야기 방법도 불편한 구석이 있긴 마찬가지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주절 주절 늘어놓는 대신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말을 최대한 아낀다. 그런 그네들의 화법 이면엔  구태여 그럴 이유가 있냐는 불친절함이 깔려있다. 아니면 단절된 공간에서의 의사소통 기능에 장애를 지닌 듯한 여느 캐릭터들 처럼 이 영화에서 역시 여자(서정)는 몇번의 비명 소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사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 영화는 우울하고 찝찝하기 짝이 없지만 좋았다. 논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관심이 가는 건 상당히 나른한 톤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을 얘기하는 것으로 우리들의 숨겨진 이면들을 드러내는 홍상수의 것과는 사뭇 다른 방법으로 우릴 불편하게 때론 우울하게(!) 하는 김기덕만의 극단적이게 노골적인 화법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거미숲'이나 '녹색의자'에서와는 전혀 다른 서정의 모습과 '가능한 변화들'에서 봤던 김유석을 만날 수 있다. 서정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분위기 탓인지..엊그제 그의 최근작  '시간'을 보고 있자니 국내영화시장에서 밀리고 있다는 김기덕감독이 그 타협점으로 그의 영화 매력인 찝찝함의 수위를 점점 낮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의 어느 작품보다 가장 '김기덕'스러웠던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이 영화를.  

* 2007년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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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Ridley Scott였다. 새삼 그의 배짱이 맘에 든다. 예루살렘을 놓고 아직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대립하고 있는 이 마당에..이슬람과 전쟁을 벌일 때마다 기독교가 국교인 미국이란 나라가 내세우곤 하는 대의명분이 이교도와의 전쟁인 '성전(holy war)'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먹히는 이 미국이란 나라에서..이런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내걸수 있는 그의 뚝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 기독교와 연관된 대부분의 영화들 이 깔고 있었던 기독교 우월주의의 관점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그렇다고 이슬람한테 우위를 두느냐..그것도 아니다. 그건 이 영화가 기독교와 이슬람..두 종교 중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은근히 강조하거나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고, 대신 두 종교를 부족한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를 향해 지닐 수 있는 믿음(faith)의 형태들로서 동등한 분량의 무게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Ridley는  어느 한 종교가 좋다..나쁘다..우월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faith)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 화두를 그는 성지(holy city)인 예루살렘을 놓고 벌이는 십자군과 무슬림들의 갈등과 전쟁이야기로 풀어간다. 전쟁 이야기를 축으로 짜여져 있지만 그 이야기의 올들은 종교라는 명분하에 십자군 내부에서 자행되는 피비린내나는 숱한 권력의 암투에서 빚어지는 썪은 그림도 있고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도 있고 올곳게 자기의 길을 걷는 숨어있는 정의들에서 뿜어나오는 순수함도 있다. 이야기는 실제로 이런 인물이 있긴 할까..아니 있었으면...세계사가 바뀌지 않았을까..싶은 아주 괜찮은 남정네 Balian (Orland Bloom)을 중심으로 엮어진다. 물론 이 영화속의 캐릭터로서 괜찮다는 거지 자연인 Orland Bloom에 대한 호감은 아니다.  


전체 스토리를 아주 엉성하게 얘기하자면 그저 평범한 대장장이였던 그는 어느날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라는 사람, Godfrey (Liam Neeson)를 따라 나서면서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으로 접어들게 된다. 아버지덕에 낙하산 승진(!)을 하게 된것이다. 그것도 그냥 승진이 아니라 아버지와 왕의 죽음으로 십자군 전쟁의 통치권까지 맡게 되면서 일신의 삶이 아니라 십자군 전체의 삶을 책임지게 된다는 게 이 영화 이야기의 대락 줄거리다. 그 이야기를 축으로 우리아들의 눈높이를 빌려 착한 놈 나쁜 놈들을 굳이 구분하자면 한편(착한 편)에는 나병에 걸려 평생을 은색 마스크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살다가는  불쌍한 Baldwin (Edward Norton)이 있고 Balian을 사랑한 그 왕의 여동생 (Eva Green)이 있고 십자군의 암투속에서 지조를 꺽지 않던 숱한 기사들이 있고 다른 한편 (나쁜 편)에는 믿음보다는 자기의 치부와 권력에 눈이 어두운 썪은 인간들이 있고 이슬람 군대들이 코앞에서 들이 밀고 쳐들오자  두려움에 떨며 이슬람으로의 개종까지 생각하는 껍데기 신자, 그것도 평신도가 아닌 지도자의 자리를 꽤 차고 있던 믿음의 분량이 덜 된 인간들도 있고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는 간신나라 충신들도 있다.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지금이나 그제나 어디서나 다르지 않다.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을 꼽자면 Balian(Orland Bloom)과  이슬람의 지도자 Saladin 둘이 대면하는 장면이다. 그들의 명령만 떨어지면 금새라도 피를 보기 위해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는 군사들을 등 뒤에 두고  비록 몇마디지만 심사숙고끝에 두 지도자가 내린 결론은 더 이상의 무모한 피흘림은 접자는 양심적인 판단이었고 결과...예루살렘을 남겨놓고 떠난다. 여기서의 몇마디엔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자리에 앉은 이들의 고민이 역력하게 배여있다. Baldwin (Edward Norton)도 Balian(Orland Bloom)도 이슬람의 지도자 Saladin도 하나같이 고뇌한다. 과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를 놓고..과연 어떤 신이 피를 원하겠는가..누구의 신이든 평화를 갈구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이분적인 대립구도에 익숙한 우리는 더군다나  늘 '선'으로 상징되는 기독교와 대립되는 다른 종교, 특히 이슬람을 기독교와 대적하는 '악'의 무리로 취급하던 기존 영화들의 이야기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한테 Balian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신중하고 이성적으로 뵈는 이슬람 지도자 Saladin의 모습이 낯설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를 그렇게 바라보는 Ridely의 시선이 낯설 수도 있다. 특히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 그의 삶에 대한 측은지심 탓인지 Leper King의 현명함이 제일 와 닿는다. 영화보는 내내 그 마스크속의 얼굴이 누구인지 궁금했었다. 목소리도 귀에 익고... 나중에 올라가는 credit을 보고 나서야 Edward Norton이라는 걸 알았다.역시..마스크를 쓰고도 연기가 된다 했더니.  

영화속 이야기를 우리 현실로 끄집어 낸다면 영화속에서 접은 그 전쟁은 현실에서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굳이 영화랑 연관해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이 영화에 나오는 그렇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지도자를 갖기란 우리의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탓인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인게다. 오늘도 성지 Kingdom of Heaven을 순례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는 크리스챤의 발길은 이어지고 있을게다. 만일 그때 전쟁을 접지 않고 예루살렘을 접수(?)했다면 오늘날 종교를 걸고 벌어지는 숱한 전쟁들을 줄일 수 있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뿐만이 아니다. 재밌지 않는가..거의 100여년간 기독교와 이슬람이 holy city 예루살렘성안에서 공존했다는 사실이..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알라를 향해 절을 한다. 각자의 신에 각자의 방법으로 경배 드리는 것에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동의했다게..물론 거기엔 세금의 의무를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종교라는 명분을 내걸고 벌이는 전쟁의 어리석음에 대해  시원하게 일갈하고 있는 Ridley Scott은 어쩌면 종교 다원주의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믿는 절대적인 존재가 크리스챤이 God이라고 부르는 그 신이 이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그 신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가 이 영화에서 치는 대사들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두 종교가 극단으로 치닫지만 않았다면 그 100여년동안의 예루살렘 성 안에서처럼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 비록 희박하지만  그 당시로는 전혀 불가능한게 아니었을 거라는 암시에서도 종교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어느 종교건간에 평화와 선함을 추구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잖는가. 이 세상에 숱하게 치루어져 왔던 종교를 빙자해서 흘린 그 피들..지금도 자신의 종교만이 우월하다는 편협적인 이즘에서 비롯된 해서 이교도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종교적 이기주의는이 영화에서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는 모습과 영락없는 닮은 꼴이다. 종교 자체는 어느 종교든 선하다. 그걸 이용하는 인간들이 추할 뿐이지.


이 영화는 독실한 크리스찬들한테는 무지 불편한 영화일게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하다. 전쟁영화니 돈 수억 깨졌을 스펙타클한 전투 장면도 요즘 잘 나가는 배우들의 연기등의 볼거리지만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제대된 믿.음.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그냥 그런 풍성한 볼거리들에 족하고 넘기기엔 우리 맘에 곰곰히 씹어야 할 대목이 참 많은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Ridley Scott의 영화를 참..많이..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Blade Runner'. 그밖에 기억나는 건 그한테도 이런 감각이(!) 있었음에 놀라게 했던 'Thelma&Louise' 그리고 Russell Crowe한테 날개를 달아준 'Gladiator'가 있을게다. 이 작품에서 Ridley는 그의 영화 감각이 아직도 무뎌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영화를 빚는 그의 손끝에서 그 나이에 걸맞는 세상을 읽어내는 연륜의 무게도 느낄 수 있다. 하여 'Blade Runner'와 함께 이 영화 역시 다시 봐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영화들중에 하나로 남한테 권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 2006년 여름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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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온 지 제법 오래된 영화다. 1988년에 개봉되었으니까. 이 영화를 보려고 맘 먹었던 건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과  '나의 왼발 (My left foot)'이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에서 봤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Daniel Day-Lewis)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나온다니 궁금했다. 한국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걸로 기억난다.

체코 망명작가인 Milan Kundera의 작품에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다. 그걸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농담(The joke)'일게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심코 뱉은 농담 한마디로 인해 그때까지 누려왔던 것과는 너무 다른 나락의 삶으로 떨어진다는 한마디로 참 재수없는(!) 한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았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의학계 뇌수술의 최고 권위자였던 한 의사(Thomas)가 친구들과의 토론끝에 가벼운 맘으로 신문에 기고했던 글이 그의 인생에 발목을 잡는다. 병원에서 쫓겨난 그는 청소부로 살아간다는 대략의 줄거리를 가진 이 이야기는 한 나라의 정치적 ism이 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 개인의 삶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는 가를 보여준다. 기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우리한테는 그리 낯설지 않긴 하다.

정작 Milan Kundera 본인은 자기 작품엔 어떤 정치적 동기도 없다고 했다지만 내가 읽었던 그의 몇 작품들만으로도 그는 조국 체코의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평범한 이들의 삶을 어떻게 좌지우지하고 하루 아침에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그런 체제의 칼날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에..그리고 어쩔수 없이 지배체제의 꽉 막힌 사회의 메카니즘과 그 사회에 팽배한 이데올로기를 그리고 있다는 걸 그의 작품에서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그의 소설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렇게 한 개인의 삶들을 짓누르고 있을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주제들의 무거움을 특유의 희화적이고 풍자섞인 표현들로 거둬내...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의 특유한 입담에 있다. 그건 진지한 주제를 바윗덩이만한 무게로 다루는 것보다 그런 진지함을 가벼움으로 더 진지하게 만드는 쪽을 더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탓이다.   

해서 이 영화를 보기전에 궁금했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누군지. 그런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독특한 정서들을 영화라는 그릇에 잘 담아냈을까...하는 궁금증으로 이 해묵은 영화를 찾아 봤다. 책을 먼저 읽은 터라 잘못(?) 찍으면 영락없는 포르노일 수도 있고 아주 잘 찍으면 제법 쓸만한 예술영화겠다...며 어줍잖은 기대로 말이다. 보고 난 후엔...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무엇이든 가벼움으로 일관하는 Tomas를 연기했던 Daniel Day-Lewis와 답답하리만치 진지하기만 한 Teresa를 맡았던 Juliette Binoche의 연기가 이 영화의 맛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었다 싶다.

영화 끄트머리에 가면 알 게 된다. Thomas의 가벼움은 결코 단순한 가벼움이 아니며,  Teresa의 진지함 역시 순전하게 진지할 수 만은 없다는 것을. 처음엔 그 둘의 가벼움과 진지함은 다소 어긋난 것 처럼 보이나 결국엔 자신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 둘한테서 그런 가벼움과 진지함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종내엔 서로 마주 하고 있는 통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여자관계에서만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Thomas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번복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이전의 풍요로운 세월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물걸레를 들고 유리창을 청소하는 그 자리에 남기로 한 Tomas한테도 그의 삶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Thomas의 가벼움으로 상처를 받았던 Teresa 역시 한 정치집회에서 찍었던 자신의 사진들이 반정부적 인물을 색출해내는 정부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일에 그런 그녀의 진지함도 결국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허긴 굳이 그런 영화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삶이라는 게 우리로 하여금 줄곧 가벼울 수 있게..시종 진지할 수 있게..내버려 두질 않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잖는가... 영화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벼움과 진지함이 세상에서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 지고 심지어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이 두 사람은 아주 비싼 댓가를 치루며 배우고 있다.  Milan Kundera는 그의 소설 초반에서 이렇게 묻는다. "What then shall we choose?,"  "Weight or lightness?"  내 기억으론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의 마지막부분에 있다. .이 영화 역시 그 해답을 후반..Thomas와 Teresa의 삶에서 보여주지만 원작의 맛을 충분히 살리기엔 미진한 감이 있다.

알고 보니 Philip Kaufman은 북회귀선(Henry&Jane)이랑 퀼스(Quills)를 만든 감독이었다. 포스터에는 'A lovers Story'라는 부제가 붙었건만 내 눈엔 그냥 단순한 '남녀상열지사' 라기 보다는 시대와 사회를 잘못 타고 난 두 사람이 각자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사람사는 이야기다. 해서 좋았나 보다. 이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경우들 역시 우리에게 가벼울 것인가..진지할 것인가..중 선택을 요구하고 있긴 별 다르지 않기에. 그네들의 살아내는 모습이 우리네 하고 그닥 달라 보이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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