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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살던 중부에서 살면서 오년 넘게 일주일에 삼일을 교회에서 만난 가까이 지내던 집사님 내외가 운영하시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죽 제품을 팔면서 구두와 가죽옷등을 수선하는 가게였다. 학교다니던 시절, 가정 가사 시간이랑 그리도 안 친했건만, 가정 가사가 오죽이나 하기 싫었으면 대입때 가정 가사 대신 제2 외국어 일본어를 선택했을 정도로 싫어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했던 몸이 어쩌다 보니 남의 나라에서 재봉틀을 돌리고 단추를 다는 수선 아르바이를 하게 된게다. 그런 거랑 거리가 먼 이몸을 당신들 가게에서 일하게 해주신 건 우리의 얇은 주머니 사정을 익히 아신 집사님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래도 집사님 두분이 교통사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런 수선일은 내몫이 아니었다. 그런 거에 별로 소질이 없는 걸 잘 아시는터라 내 할일은 가죽 제품을 팔고 수선이 된 물건을 찾으로 온 손님한테 돈을 받고 내어주는 게 다였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두분이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난 후 그분들 딸이 가게를 운영하게 되면서 부터 이전엔 두분이서 하시던 수선일을 혼자 도 맡아야 하는 그 친구한테 도움이 되어야겠다 싶어 야금 야금 수선에 손을 대다 보니 어느새 가죽 재봉틀에 앉아 틀을 밟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단추달기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손님들은 두 부류였다. 스피드를 즐기는 거칠지만 낭만적인 바이커 족 일명 폭주족과 새것을 사기보다 있는 것을 고쳐서 쓰는 알뜰 수선족.  

폭주족들이 주 단골 손님이었던 까닭은 그 가게에서 팔던 가죽제품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바이크(Bike)를 타는 이들을 타켓으로 한 제품들이었기 때문이다. 늘 가게 앞은 차 한대 값보다 더 비싸다는 유명 브랜드의 폼나는 오토바이(여기선 바이크라고 부른다)들이 자동차 대신 즐비하게 주차해있었고 그 바이크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가죽 점퍼에서부터 챞(Chap)이라고 부르는 바지위에 덧입는 가죽 바지, 손목까지 덮는 장갑에 벽돌무게같이 묵직한 부츠랑 모자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죽을 두르고 싶어한다. 그 가게가 작은 규모임에도 그런대로 실하게 운영될 수 있었던 까닭은 폭주족이라면 누구나 사고 싶어하는 허나 너무 비싸서 못사는 바이커들 제품의 최고 유명 브래드인 할리 데이빗슨 (Harley Davidson) 제품 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대비 품질도 그리 나쁘지 않아 경제적인 가격에 나름 멋진 폭주족 세트를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에 특별히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바이크 매니아들이 주 고객층이었다.

폭주족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문제의 청소년이나 거리의 무법자들인 젊은 친구들이 아닌 내가 만난 폭주족들은 대부분이 연세가 제법 지긋하신 분들이 더 많았다. 걔중엔 스피드를 즐기기엔 너무나 연로해 보이는 분들도 있었고, 너무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 아줌마들도 있다. 대개 그런 분들은 평상시엔 직장에서 일하고 주말에 오토바이를 끌고 멋지고 달리는 취미를 즐기시는 분들이고. 또 다른 한 부류는 한눈에도 가히 범상찮음을 알아 볼 만큼 험한 차림을 한 일명 전문(?) 폭주족들로 많은 분들이 몸 여기 저기에 그림을 그려넣으신 우락 부락한 인상들을 하신 까닥에 처음엔 가까이 하기에 상당히 저어했던 이들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단골 손님들중 한 아저씨는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맨살에 가죽조끼 하나만 걸치고 등과 팔 여기 저기 한 문신들을 뽐내면서 검은 썬그라스까지 쓰고 나타나시곤 했는데 건축업을 하신다는 그 분의 연세는 60. 도저히 그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근육질의 몸이었고 여자친구도 올 때마다 바뀌곤 하던 그 아저씨가 어느날 평일에 정장차림을 하고 나타났을 때는 모두 놀랐었다. 근육질과 문신이 안 보인다고 해서 저리도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게 놀라워서. 암튼 그분은 올 때마다 한보따리씩 사가는 단골중에 단골이었다. 

한 배짱한다는 나도 처음엔 그런 험한 하드웨어의 분들이 가게에 들어오면 말 붙이기도 조심스러웠다. 허나 얼마 안 되어 알게 되었다. 집사님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거칠어 보이는 폭주족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가 의외로 신경쓸일이 별로 없다는 걸. 그건 거친 외모와는 달리 일단 친해지면 친절하고 특히 물건을 살 때도 가타부타 군말없이 말 그대로 화끈하게 한무더기의 물건을 사가는 이들이 많은 탓이다. 이것 저것 꼼꼼하게 체크 해보고 이것 저것 다 입어보고 나서도 그냥 빈손으로 나가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해서 집사님들이 그러셨다. 그래서 나같이 무뚝뚝한 성격으로도 물건을 팔 수 있는 가게라고. 맞는 말씀이었다. 손님이 들어왔다고 해서 뭘 사갈거냐 이것 저것 골라주는 대신 난 물건 구경하다 뭐 필요한 것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고 내 하던 일을 그냥 하곤 했으니까. 어찌보면 불친절한 점원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그네들은 별말없이 그것도 오래 걸리지도 않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고 나가곤 했으니 나한테는 더없이 제격인 손님들이었던게다. 

그렇다고 손님들한테 불친절한 것은 아니었다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별말없이 있다가 도와달라고 하던가 자기가 입은 게 어때보이냐고 의견을 묻는 이들이 있으면 성의껏 대해줬으니까. 해서 어떤 손님은 내가 해주는 몇마디 충고에 혹해서 안 살 물건도 더 샀다며 내 장사수완이 좋다는 남편조차 믿지 않았던 칭찬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건 옷을 다 입고 나온 손님들한테 무조건 잘 어울린다고 하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그건 너한테 별로 안 어울린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주고 다른 대안이 되는 물건이 있으면 권하고 그게 아니면 다른 제품의 카달로그를 보여주고 주문해줄 수 있다고 제안을 하곤 한다. 그런 내 방법이 이네들의 정서에 맞았던 건지 몰라도 대부분이 내 말대로 갈아입어보거나 다른 걸 주문해서 구입하고는 잘 한 선택이었다고 평하는 이들이 많긴 했다. 어느 날은 가죽점퍼가 너무 사고 싶은데 수중에 있는 현찰이 이게 다라면서 지갑 안에 있는 현금을 다 보여주는 손님이 있었다. 계산을 해보니 모자라는 금액이 세금 (여기선 세금이 9.6%) 액수길래 세금을 안 붙이고 그 가격에 물건을 파는 대신 앞으로 필요한 모든 바이크제품은 여기서 사가라는 장담못할 약속을 받고 물건을 판 적이 있었다. 물론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이후로 그 아저씨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듯이 수시로 드나들며 크고 작은 물건을 사가기도 하고 자기의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서 물건을 팔아주는 단골이 되었다. 친구들한테 날 소개하기를 스윗 비지니스워먼(sweet business woman)이란다. 그렇게 폭주족들한테 바이크제품을 파는 아르바이는 재밌었다.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을 만나는 듯 해서 그곳에서 일하는 해가 거듭될 수록 난 손님들하고 수다를 떠는 재미,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네들이 다녔다는 이곳 저곳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크고 작은 허드렛일이 많은 수선에 비하면.  
 
동창 중에 한국에서 세탁소를 하는 한 친구한테 농담삼아 미국와서 세탁소를 하라는 얘길 했었다. 가죽옷이긴 하지만 단추 하나 달아주고 1불을 받는다고 했더니 요즘 한국 세탁소에서는 단추는 서비스로 그냥 달아주는 거라고 하길래 농반진반으로 그랬었다. 물론 한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는 피해야한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주로 많이 하는 사업종들로 흑인들을 상대로 하는 뷰티 서플라이(가발을 비롯한 각종 소모품), 세탁소, 수선집, 식료품 등이 있는데 내 보기엔 재료비가 적게 드는 수선의 경우 인건비만 안 든다면 수입이 괜찮은 업종인 듯 싶다. 그건 우리나라처럼 여기 사람들은 바느질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가정 가사 시간에 놀았던(?) 나도 단추 달 줄을 알건만  여기 사람들은 단추 한 개에 일불씩 내고 달아 달라고 하니 되는 장사가 아닌가. 대신 한국 사람들이 많이 없는 동네에다 사업을 해야지 수익성이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 보면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으로 번져 동네에 한국사람들이 하는 세탁소가 두 세군데 된다는 한 친구는 셔츠 다림질에 1불도 안 한다고 하기에 하는 소리다. 허니 한국사람도 많이 없고 기존의 수선가게도 별로 없다면 재료비도 적게 드는 수선이 괜찮은 업종이겠다 싶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동네에선 뷰티서플라이는 한국사람들이 잡고 있는데 비해 수선은 베트남사람들이 잡고 있다. 동네마다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수인종들이 다르다고 하니 이 또한 미리 알아보고 결정해야 한다.  

수선집이 잘 되는 이유는 이네들의 알뜰함 때문이다. 가끔 대체 그 가격을 주고 고치느니 새것을 사는게 낫겠다 싶은 낡은 물건들을 갖고 와서 고쳐달라는 이들이 있다. 동네에서 소문난 부자도 유명인사도 수선이 필요한 물건들을 들고 들어온다. 유명한 상원의원 아저씨는 10년도 넘게 신었다는 구두들을 수시로 갖고 오신다. 닳은 굽을 갈아달라고. 색이 바래고 안감이 다 헤질 만큼 오래입은 가죽점퍼의 안감을 새로 달아달라고 갖고 오는 이들도 있다. 그 안감을 다는데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우리 가게에서 파는 가죽점퍼 하나 사는게 낫다고 농담삼아 이야기해도 그네들은 그 옷이 자기한테 왜 중요한 가를 한참 설명하고 나서 만만챦은 가격임에도 해달라고 맡기곤 한다. 그런 이들의 검소함은 오래동안 몸에 밴 듯 하다. 수선때문에 일이 많고 가게안도 깨끗하지 않긴 하다. 내가 여기로 이사 온 후 그 딸은 수선을 그만두고 싶어하지만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 하고 있다. 일이 많아 피곤하고 힘은 들지만 그런 수선으로 들어오는 푼돈이 꽤 큰 수입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덕에 반찬값을 해결 할 수 있어 우리의 얄팍한 가계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곳에 와서도 그곳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리면 입가에 슬쩍 웃음부터 말린다. 재봉틀을 처음 배워보겠다고 왠지 막해도 티가 안 날 것 같아 보이는 일감을 재봉틀로 들입다 박아대다 결국 잘못 박아 다시 뜯어내야 했던 일 (물론 그 실수 이후로 나의 재봉틀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내 자평), 값비싼 루비똥가방 안감을 원래 제품과 똑같은 감으로 해달라고 맡겼던 한 처자가 수선 된 물건을 보고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가방값을 100% 변상해달라고 떼쓴는 통에 변호사까지 오고 가야 했던 일, 특히 토요일 일을 끝내고 나면 온 가족이 그날 받은 주급으로 한국식료품 장을 보고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곤 하던 그림..몇해동안 변함없이 늘 똑같은 메뉴를 시킨 까닭에 어느순간부턴가 우리가 가면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음식을 내어주곤 하던 쥔장 아저씨..허긴 생각나는 그림들이 어디 한둘이랴.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지금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힘들었다고 해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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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전에 예상은 했었다. 한국서 유학준비를 하는 동안 아무리 토플이나 지알이같이 학교 지원에 필요한 영어점수가 웬만큼 된다 해도 막상 가서 살면서 공부하는 동안 부딪히게 될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 영어가 우리의 발목을 수시로 잡아챌 것이라는 것을. 그덕에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것 정도는 굳이 미국땅에 가지 않아도 여기 저기에 줏어들은 충분한 경험담들 덕에. 더군다나 남편이나 나나 조동사 뒤에는 동사원형이 와야 하고 사형식 문장에 오는 동사는 수여동사여야 한다는 식의 성문종합식 영어가 익숙한 오래된 세대인터라 자칫하면 주객이 전도되어 영어가 공부를 하기 위한 수단(way)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었더랬다.

남의 나라 땅에서 살면서 우리처럼 영어때문에 쓴맛을 겪어 본 이가 어디 한둘이랴. 이미 다 아는 것들인데도 영어문장으로 입밖으로 내보기가 쉽지 않아 말들이 혀끝에서 빙빙돌기만 하는 그 답답함을 느껴본 이가 우리뿐이랴.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래도 내깐에는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는 그 가락하나 믿고 어줍잖은 관광객 수준의 영어를 떠들어댔던 적이 있었다. 그땐 참 용감했었다. 지금보다는 적어도. 헌데 여기서 살아온 세월이 한해 두해 보태지면서 깨닫게 된다. 그 뒤로 보낸 시간에 비례해서 상승곡선을 그리며 유창해질 줄 기대했던 우리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내 영어실력이 그 처음에 떠들어대던 영어 수준에서 그리 많이 나아지지 못했다는 것을. 해서인지..언젠가부터 누군가가 미국 오신 지 얼마나 되냐고 물으면 대답 대신 그냥 씨익 웃고 만다... 그건 묻는 사람들의 대개가 여기서 산 짠밥만큼이나 영어를 잘 할거라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물론 여기서 보낸 세월이 전혀 꽁은 아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혀끝에서만 뱅뱅 돌 뿐 내뱉지 못하고 삼켰던 말들을 그래도 오랜 짠밥덕에 그런대로 주섬 주섬 얘기를 해대기도 하고, 수업 듣는데 백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뭔말을 하는지 알 만큼은 들리기에 하는 소리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상대방이 말 하는 것을 이해하는데는 영어실력과 함께 요구되는게 '눈치'다. 오래 산 만큼 비례해서 느는 건 그런 '눈치'다. 미쳐 작은 것 까지는 다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무슨 얘길하는지 예상할 수 있으니 답답한 신세는 면한 셈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누군가가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을 때 제일 먼저 자신의 차가 얼만큼 잘 못 되었고 얼마나 다쳤는가 보다 그걸 경찰이나 상대방에게 영어로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하는 걱정부터 앞 선다는 말에 고개를 주억 주억할 만큼 공감에 또 공감하게 되는 걸 보면 아직은 내 나랏말처럼 입에 귀에 착착 달라붙지 않고 귀랑 입이랑 머리랑 여전히 따로 놀면서 엉키는 수준인 셈이다.   

영어랑 관련된 웃지 못할 해프닝들은 남의 나라 살이를 하는 이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몇박 몇일로 엮어낼 만큼 소소하게 많긴 하다. 그 중에서 기억나는 몇가질 끄집어 내자면 처음으로 대한항공을 타고 미국땅에 도착해서 미국내 비행기로 갈아타려고 들렸던 LA 공항내에서 겪은 충격이었다. 때를 놓쳐서 우리 셋다 많이 배가 고팠기에 한끼 때울 요량으로 맥도널드에 들렸다. 남편이 주문한다고 간지 한참 지나서야 햄버거랑 감자튀김을 갖고 돌아온다. 줄 선 사람들 많지 않던데 늦었냐고 했더니 남편이 대뜸 헛웃음을 웃어대면서 하는 말이 "나..참나..너 그거 아냐. 여긴 포테이토가 아니라 프렌치 프라이즈란다..프렌치 프라이즈." 무슨 말인가 했더니 햄버거랑 같이 나오는 감자 튀김을 하나 더 시키려고 "포테이토"라고 주문을 했더니 맥도널드 점원들 반응이 니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다시 말해달라는 말만 몇번이나 반복해서 그렇지 않아도 영어에 약한 남편 무지 당황했단다. 그때 남편의 기분이 어땠는지 그날 이후로 수시로 공감할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뻥뻥 터지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의 경우처럼 자기깐에는 자신있게 말했는데 상대방이 여영 못 알아듣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오면 대부분이 등에 식은땀이 나게 마련이다. 우린 대개가 그네들이 우리가 한말을 잘못 알아 들을 수 있다는 쪽보다는 혹시나 우리 발음이나 액센트가 틀렸나 싶어 뒤따라 나오는 목소리는 첨보다 더 자신없어 지고 발음은 더 어색해지기 마련이다. 그때 남편 역시 혹시나 이 간단한 단어조차도 자기의 발음이 틀린건가 싶어 "포테이토" 라는 단어에서 나올 수 있는 억양과 발음들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대며 서너번 얘기해댔더니 그중 한명이 웃으면서 "오..프렌치 프라이즈.." 하더란다. 알고도 남는다. 그때 남편이 느꼈을 허탈감을.  

그 이후로 그런 류의 일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주 겪고 듣는다.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남의 나라 사람들에 대해 배려할 줄을 모른다. 물론 대부분이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무지 억울해 할 만큼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친절한 이들도 많긴 하다. 대체로 외국학생들하고 가깝게 지내는 미국 사람들은 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게..특히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들한테 모국어와 전혀 다른 문장구조로 되어있는 영어를 한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해서 이들은 외국학생들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네들의 낯선 억양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며 대화를 주고 받는다. 헌데 앞에서 얘기했던 그런 류의 패스트 후드점에서 그런 일을 자주 당하게 된다는걸 보니 거기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편견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 대체 손님들이 주문할 수 있는 그 몇가지 안되는 빤한 메뉴들에서 상대방이 무슨 주문을 했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렇게 외계의 언어로 떠들어대는 것처럼 영 못 알아들을 수준도 아니건만.  허긴 억양도 발음도 형편없을 우리말을 진땀흘려가며 하려고 애쓰는 외국인들이 기특해서 그들의 덜된 말이 끝날 때까지 들어주고 그 어려움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되어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배려들을 그네들한테 기대하지 마라. 그렇게 우리가 미국땅에서 제일 먼저 받은 인상은 자기나라 말인 영어만 한다면 세계 어딜가도 불편함이 없을 이 나라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에 대한 턱없는 오만함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려고 조금만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못 알아들을 말들이 과연 몇 개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빤한 패스트후드점에서 말이다. 그건 순전히 태도나 마음가짐의 문제다. 내가 자꾸 패스트후드점을 얘기하는 건 학교 다니는 동안 제일 많이 부대낀 곳이기 때문이다. 어디 비단 패스트후드가게 뿐이랴.  예를 들어 우리 학교 학생회관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점원들중 몇명은 못 알아듣겠다는 자기들의 반응에 당황하는 외국학생들, 특히 아시안 학생들한테 때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 한두번 봤겠는가. 그러다 한번은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시키는 한 동양처자 뒤에 줄을 서있있다. 그때 주문을 받던 흑인 남자 종업원이 워터를 달라는 그 처자의 말에 "왓(what)?"이라고 다시 되묻는다. 아주 불친절한 반응에 그 처자의 목소리는 쏙 기어들어 가고 그런 처자를 종업원은 쳐다보고 있는 거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그 흑인 종업원에 태도에 더 열을 받아 오지랖넓게 나서서 물었다. 대체 그  간단한 '워터(water)'라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못 알아들을 수 있는지..어떻게 그 빤한 메뉴에서 고른 워터를 듣고 니가 뭘 원하는지 영 모르겠다는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지..이해가 되지 않아서 였다. 진짜로 얘가 무슨 말하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는거냐고..니네 메뉴에 워터라는 발음하고 헷갈릴 메뉴가 있냐고. 물론 나라고 제대로 된 영어로 따져댔겠는가. 열을 받으면 더 버벅대곤 하면서도 열받아서 묻는 내 태도에 질렸는지 그 종업원이 두말 않고 물 한컵을 갖다 주고는 내 뒤를 향해서서 넥스트(다음 손님을 향해)하고 소릴 지른다. 이건 결코 내 자랑이 아니다. 그건 내가 퍼부어댄 영어가 유창해서도 결코 아니고 그건 순전히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내 아줌마 기질에 질려서 그리고 알아 듣고도 못 알아들은 척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할말이 없어서였을게다. 결국 아무 말 않고 물을 갖다 주는 모습에 오히려 그 동양처자 더 열받았을게다. 그렇다. 그 종업원은 못 알아들은게 아니고 못 알아들은 척 한게다. 그 처자는, 알고보니 일본처자, 그 이후로 가끔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우린 그때 일이 떠올라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안면을 트고 지냈다. 

그렇다고 이렇게 당당할 만큼 영어를 잘 하느냐...면 물론 그건 아니다. 영어를 잘 하는게 아니라 여기서 소수인종(minority)로 오래 살다 보면 그렇게 무시 받지 않으려는 기질들이 강해지는 것 같다. 아직 10년이 지났어도 내 발음은 여전히 조형기식 버젼에 더 가까운 정도니까. 영어에서 그나마 짠밥에 비례해서 많이 나아지는 건 '듣기' (listening)가 아닐까 싶다. 영어를 배우는건 타고난 성격하고도 같이 가는 듯 싶다..남편과 나를 보면. 나보다는 선천적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고 촘촘히 듣는 남편의 영어 듣기 실력은 성격 급하고 덜렁대느라 상대방 말을 대충 대충 듣는 이몸보다는 여기의 짠밥에 정비례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더군다나 영어 듣기연습에서 교과서로 간주되는 티브이 보는 걸 아주 즐겨하는 남편이다 보니 지금은 이네들이 하는 왠만한 말들이 귀에 들어온다고 하니 아직도 그 경지가 요원하기만 한 난 마냥 부러워할 뿐이다. 티브이 보는 걸 안 즐겨하는 대신 내가 택한 방법은 소설같은 읽을꺼리들을 손에 들고 소리내서 읽는거다. 그렇게 이네들의 표현들을 내 나름 잔뜩 혀에 버터를 바른 듯이 읽다 보면 이네들의 표현도 익혀질 거라는 게 희망사항이다. 허니 말하고 쓰는 건 몰라도 듣기 실력은 여전히 후달릴 수 밖에 없다. 내 이 형편없는 듣기 실력덕에 여기 온 초부터 남이 하는 말을 대충듣고 엉뚱한 데를 긁어대기는데 빛나는 활약상을 보인 적이 어디 한두번이랴. 다 얘기하면 그렇고 한가지만 얘기하자면, 미국 온지 첫해였다. 그땐 남편이 수업때문에 학교에 가고 세살짜리였던 아들내미하고 둘이 집에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것도 아주 문이 부서질만큼 세게...쾅쾅. 문을 여니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이 몇이 서있다. 그네들의 갑작스런 떼거리 방문에 이율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그런다. 아니 내가 듣기로는 그랬단다. "buck control"이라고. 순간 당황했다. 뭐이..돈을 어케한다고. 해서 물었다. 왜 나한테 돈 어쩌구 하냐고. 했더니 아시안 아줌마의 동문서답에 할말을 잃은 아저씨들 할말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아주 천천히 다시 얘기해준다. 벅스가 아니고 버그 콘트롤(bug control)이라고. 우리말로 하면 집안에 벌레약을 쳐준다는 거였는데 난 그 "bug"를 "buck"으로 잘못 알아듣고는 큰소리 친게다. 그때서야 제대로 알아듣고 한참을 웃어댔었다...나만. 그 아저씨들은 안 웃고. 잘 모르면 가만히 있는게 중간에라도 간다는 말이 생각나는 하루였다. 어줍잖게 줏어들은 단어로 buck이 돈이라는 뜻도 있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왜 돈 얘기가 나오냐고 했으니. 내말을 들은 남편..위로랍시고 자긴 buck에 돈이라는 뜻이 있는지도 몰랐다며 때론 아는게 이렇게 병이 될 때도 있다고 웃어댔지만 난 아직도 그일을 잊을 수 없다. 특히 왜 돈얘기를 하냐고 외치던 내 당당함을. 

어디 듣는 것 뿐이랴. 많이 듣는 만큼 발음도 좋아지는 건 분명하다. 남편보다 덜 보고 덜 들으니 내 발음도 그냥 저냥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 특히 다들 어렵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R과 L발음은 쉽지 않다. 이거랑 관련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초반에 나가기 시작했던 미국교회를 다닌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였을게다. 한번은 한국에 있는 모대학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단체로 이곳 학교로 단기 어학연수를 밟으러 왔다고 하기에 나를 포함해서 그 교회에 다니던 몇명의 한국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다 같이 호숫가에 있는 한 공원에서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먹기 전에 한 교회 남자집사님한테 기도를 부탁드렸다. "Can you pray for us before taking lunch?"라고. 헌데 내 부탁을 받은 그 남자 집사님 반응이 심상찮다. 내가 하는 얘기를 못 알아들었다는 얼굴이다. 흠..뭔가 잘못되었나 했더니 그 집사님은 기도(pray)를 부탁한다는 내말을 같이 놀자는(play)는 말로 들은게다. 이런 이런...이노무 r이랑 l..지금도 그 발음을 하려면 의식적으로 혀를 굴리고 입을 옆으로 더 늘리는통에 더 어색하게 들릴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잠시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혀를 입천장에다 붙였다 굴렸다 하면서 R과 L 두 발음을 연습한 적도 있지만 그거야 단어 하나 하나일 때는 의식할 수 있지만 문장속에 있을 때는 그렇게 연습한 것들을 잊어버린 내 입에서 나오는 R과 L의 발음은 거의 차이가 없이 나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언어에 대해 남편이나 나나 공통적으로 절감하는게 있다. 아무리 세월이 가도 영어에서 여전히 안되는 건 안 된다는 거다. 이런 데 학교 다닐 때 일년 미국 어학연수 다녀온 후배들한테 일년동안 배웠으니 잘 하겠다 싶어..농삼아..어디 영어한번 유창하게 해봐는 물정모르는 소릴 해댔으니...참 그때 그 녀석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여기 와서야 그 맘들이 이해된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데 무엇보다 제일 마지막에 걸리는 건 다름아닌 '문화'의 차이다 싶다. 이네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언어에 대한 이해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누군가 물었다. 수업시간에 손들고 선생님(teacher)하고 부르는게 예의없는 거냐고. 얼핏 듣기엔 선생님하고 부르는 거니까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아주 기분나빠할 만큼 예의가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보다는 미스터(Mr.) 혹은 미즈(Ms)라고 부르는게 일반적이라니.. 이런 작은 예에서도 단순히 문법에 맞는 말을 할줄 안다고 해서 남의 나라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면 섣부른 판단이 되는게다. 예 온지 얼마 안 되서 파리채를 찾으러 월마트에 가서 헤매다가 거기서 일하는 직원한테 파리채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안 되는 영어로 생각나는 단어들을 마구 연결시켜 떠들어댔다. 이건 날아가는 파리를 잡는 도구라고(it's akind tool to smash flies)... 내 덜된 영어를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던 그 직원이 알려준 건 "Oh..swatter."였다. 아주 간단한 그 단어를 몰라 그 넓은 매장을 돌아다니고 길게 설명을 해댔던거다. 그럴때면 참 허탈하다. 이렇게 우리의 발목을 잡는건 책상앞에서 읽게 되는 영어가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또 다른 예는 직접 겪은게 아니고 아는 언니를 통해서 들은 에피소드다. 미국와서 아이를 처음 학교 보낸 한국 부모, 학교에서 brown bag을 갖고오라는 말에 브라운색의 백을 찾으러 월마트며 어디며 온동네를 헤매고 다녔단다. 헌데 여기서 brown bag이란 그냥 점심에 먹을 것을 싸갖고 오라는 말인데.. 첨 듣는 이들이야 알리가 없다. 허니 곧이 곧대로 브라운색 백을 찾아서 담아줬다고 하니.. 웃지 못할 일화다. 그런 일상적인 것들은 책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살면서 부딪히면서 알수 밖에 없으니 자연히 잘못 잡히고 깨질 수 밖에. 한 나라의 언어를 익힌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가를 우린 여기서 살면 살수록 뼈속깊이 절감하기에 이곳에서 언더그라운드 인생인 우린 시간이 흘러도 안 되는 것 여전히 안 되는 거라고, 남의 나라땅에서는 사는 한 그런 건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미국문화를 제대로 흡수하겠다고 한국사람들보다는 미국사람들하고 어울려 영어를 조금이라도 잘 해보겠다고 애쓰는데 말이다.  
 
그런 영어의 문제는 어디 우리뿐이랴. 한국에서 갓 오신 분들을 보면 그런 모습은 더 절실하다.특히 공부하는 남편따라 오로지 내조만 하겠다고 오시는 여성동지들을 보면. 처음 여기 올 때는 한국에서 선생님이다 치과의사다 조각가다 해서 자기 분야에서 잘 나갔다며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분들도 영어가 잘 안 되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까지 영어를 잘 하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게 되는 신세고 보면 일년도 안되서 목에 들어갔던 힘이 빠지고 스스로 무력감을 느끼는 분들을 많이 뵈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대체 영어가 뭐길래...싶어진다.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 나라 말을 못 한다고 해서 저렇게 까지 움추려들까..다른 언어가 아니고 영어라서 그럴까..아주 사소한 표현들을 영어로 말하고 조금이라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날엔 영어공부에 대한 의지가 불끈 불끈 쏟다가도 기껏 얘기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시원챦을 때는 그 의지가 한번에 바람빠진 공처럼 느껴지니...말 그대로 영어에 웃고 영어에 우는 신센게다. 언젠가 한국에서 아주 잘 나간다는 한분이 남편따라 이곳에 와서 지내다 한번은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학교에 가셨더란다. 헌데 아이를 조퇴시키야 되는데 그 말이 입에서 안 나와서 말도 못한 채 주춤대다 때마침 학교에 들렸던 한국사람을 잘 모르는 분인데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했다며 한숨을 내쉬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더군다가 한국에서 갓 오셨을 때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그분에 대해 못마땅했던 이들의 입을 타고 내 귀까지 전해진게다. 말 그대로 영어에 관한 한 다 동병상련인게다. 어디 그런 일이 한둘이겠는가. 여기서 영어때문에 웃고 우는 일이.

그렇다고 영어 때문에 기죽어 살 필요는 없다는게 남편과 나의 생각이다. 언어는 우리가 여기서 공부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tool)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안되는 영어에 대한 합리화라고 해도 할 수 없다. 허나 수업시간에 번드르르하한 영어로 참으로 알맹이 없는 말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떠드는 미국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남편말대로 니들이 영어말고는 나보다 나은게 뭐있길래...하고 말이다. 그런 남편 답게 그는 강의 첫시간에 자기 수업에 들어온 아이들한테 자기의 영어 액센트나 발음때문에 불평할려면 수강신청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공표를 해버렸단다. 그건 그네들 귀엔 어색하게 들릴 지도 모를 영어때문에 정작 배워야 할 알맹이들을 배우지 못하게 될 거라는..아주 자신에 찬 얘기였을게다. 그런데도 수강신청을 취소한 아이는 하나도 없었고 이제는 다들 남편의 억양과 발음에 익숙해졌는지 잘 따라온다고 하니.. 우리가 해왔던 생각.. 태도에 달려있다는 거다. 남의 나라 언어를 그 나라 사람보다 못 하는 건 당연하다. 대신 우린 그네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갖고 있다고 착각(!)이라도 해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자. 배우고 가르치는데 모자라는게 어디 언어뿐이랴. 남의 나라 말을 자기 말처럼 익힌다면야 더 없이 좋겠지만 우린 그렇다고 영어때문에 좌절하지 말자. 해서 우린 이네들이 듣기엔 덜된 영어라고 해도 자신있게 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어찌보면 짠밥에 비례해서 느는 건 눈치뿐 아니라 말 그대로 똥배짱인지도 모른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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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금 빼서 유학자금으로 챙겨간 총알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2000년도 여름. 남편은 뉴욕으로 일하러 떠났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5시간 걸리는 가까운 시카고도 있었는데 기차로 14시간 넘게 걸리는 뉴욕으로 갔는지..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그 먼 뉴욕으로 떠났고 난 아들과 단둘이 남아 그해 여름을 났다. 맨하튼가 한국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다는 남편은 석달만에 허리띠 구멍을 세개로 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되서 돌아왔다. 다음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서. 석달 동안 그곳에서의 남편의 생활을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져 눈을 껌벅대곤 한다.  

긴 기차여행 끝에 뉴욕에 도착한 남편은 아는 동생네서 이삼일동안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수입이 괜찮다는 말에 웨이터일을 하기로 하고 한국판 중앙일보나 한국일보에 난 식당에서 낸 웨이터 구인광고를 보고 식당 몇군데를 찾아다닌 끝에 뉴욕에 간지 며칠 안되 맨하튼에 있다는 한 한정식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웨이터일을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수염을 깎았다는 남편의 말을 전화로 들을 때 코끝이 아려 아무말도 못하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여기 생활도 재밌다고 하는 남편의 위로에도 떨어져 있는 내내 남아있는 난 그렇게 계속 맘이 아렸다. 숙소도 같이 일하는 웨이터 동료랑 같이 지내는 걸로 방값을 절약할 수 있다고 좋아했을 때도. 새벽에 뉴욕 전철을 타고 나가 하루종일 일을 하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쓰러져 잔다고 했을 때도. 여지껏 한번도 흘려본 적 없는 쌍코피가 났다고 했을 때도. 쉬는 날에도 누군가 일이 있어 손이 빈다고 하면 무조건 대타로 나가 일을 뛴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팁을 많이 받았다며 좋아라 하는 날에도.  

남편을 통해서 알게 된 뉴욕 웨이터와 웨이츄레스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듯 했다. 허긴 울 오마니 말씀대로 남의 주머니에서 돈받아가야 하는 일치고 쉬운 게 어디 있으랴 만은. 대부분의 웨이터와 웨이츄레스 주 수입원은 주인장이 주는 쥐꼬리보다도 짧은 주급이 아니라 손님이 주는 팁이라고 한다. 헌데 그 팁도 자기가 받았다고 해서 자기 몫으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받은 모든 팁들은 일괄적으로 한 곳에다 넣고 나서 하루일이 다 끝난 후에 헤드 웨이터가 각자의 비율에 따라 나누어 준다고 한다. 헌데 그 나누는 기준이란게 얼핏 들으면 공정하지 않은 듯 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일한 연수에 비례해서 나눈다고 하니 우리가 식당에 갔을 때 팁을 놓을 때는 대부분의 경우 친절하게 서비스해주던 이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얹어주곤 하는데 그런 짠밥에 비례해서 나눈다고 하니 친절해서 팁을 많이 받았을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듯 하기에 하는 소리다. 허나 어쩌랴 그것이 그 곳의 룰이라는데. 신입이 군말없이 따라야지. 해서 처음 한달 남편은 사람 명수대로 나누어서 할당되는 몫 전부가 아니라 그 40퍼센트만 받았다고 한다. 처음 온 신입은 40%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올려 두서나 달이 지나야 원래 받는 몫의 100%를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가을학기 개강 전까지 기껏해야 3개월 정도만 일하는 남편의 경우엔 일을 그만 둘때까지 계속 100%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니 더 더욱 공정하지 않게 들렸을게다. 허나 다행히도 남편은 한달도 안되서 100% 팁을 다 받을 수 있었단다. 그 이유는 적지않은 나이에 가족까지 떼어놓고 열심히 일하는 걸 보고 그런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눈썰미가 좋아 일을 금새 익힌데다 어딜가나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의 남편은 그곳 사람들과도 즐겁게 생활했을 테고 그곳에서 매일 매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남편과의 전화통화로 그리고 돌아와서 들려주는 얘기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때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주고받던 전화 대화의 주 관심은 일당 팁을 얼마나 받았냐는 거였다. 그날 팁을 많이 받았는지 시원챦게 받았는지는 남편의 목소리만 들어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많이 받을 때는 하루 팁이 거의 200불이 될 때도 있었지만 적은 날은 100불도 안 될 때도 있었으니까. 우린 그해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남편은 반찬그릇들과 뚝배기등이 얹혀진 쟁반들을 들고 식당 일이층을 오르내리면서 난 그날 하루 어떤 손님들을 만났고 팁을 얼마 받았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주는 남편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하루 하루를 사는 듯 했으니까. 그런 남편의 웨이터 아르바이트 경험덕에 우린 식당에서 식탁위에 놓고 나오는 팁에 대해 전보다 훨씬 신중해졌다. 팁을 주는 이들한테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한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그렇게 석달을 넘게 고생한 끝에 남편은 가을학기 등록금과 생활비가 될 만한 몫돈을 벌어왔고 그덕에 우린 자칫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심각한 고비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뉴욕에서 일하고 돌아온 후로 남편은 종종 과일 디저트를 담아내던 웨이터솜씨를 발휘해서 오렌지나 수박등을 제대로(!) 깎아 내놓곤 한다. 허나 입에 대지는 않는다. 특히 수박은. 남편이 수박을 안 먹는 이유는 그 맨하튼 식당에서 디저트용으로 너무 많은 수박을 잘라야 했던 기억에다가 뉴욕에서 돌아오고 나서 일하게 된 야채가게 아르바이트에서의 더 힘든 경험탓인지 수박엔 입도 대지 않는다. 그 야채가게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다른 곳에 비해 물건들이 싱싱한데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머니가 가벼운 유학생들이나 저소득층 주민들이 주된 손님들이었다. 남편은 그 곳에서 일주일에 스무시간 정도 일을 했는데 특히 여름이 제일 일이 많아 힘든 계절이었다.특히 한국 수박보다 두서너배 크고 길쭉한 이곳 수박이 여름 한철 잘 나가는 품목이다 보니 어쩔 때는 하루에 삼사백통의 수박들이 들어오는데 그 많은 수박들을 트럭에서 가게안까지 날라서 수박을 담아놓는 커다란 통안까지 깨지거나 곯지않게 차곡 차곡 쌓아야 하는 일이 가장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그 통이라는게 높아 수박을 쌓으려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작업을 수박통 갯수만큼 해야하기 때문에. 수박이 들어온 날 남편의 옷은 수박을 안으면서 묻었을 흙과 땀으로 흥건했던 걸 기억한다. 그때 질려서인지 남편은 수박을 먹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먹기 좋게 잘라주고 씨를 발라주면서도.  


남편은 그런 고생스런 경험들이 그땐 많이 힘들었지만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긴다. 영화작업을 하는 그에게 그런 경험들을 소재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니 남한테 들은 이야기가 아닌 자신가 겪은 이야기들이니 아마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힘이 될거라고 믿는다. 매사 긍정적인 남편은 늘 사람들을 좋아한다. 해서 어디서든 누구한테든 맘을 다하는 성격이다. 손님들도 아는가 보다. 그런 남편의 마음과 몸가짐이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을. 뉴욕에서 일할 때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손님들도 많은 이들이 그런 남편을 기억하고 보고 싶어하고 특히 저소득층 주민들이 많이 찾곤 하던 그 야채가게에서 일할 때도 무거운 수박을 사들고 가는 노인분들이나 여자들을 위해 수박을 차까지 들어다 주곤 하던 그는 언제 부턴가 거리나 월마트에서 만나는 누군가와 반갑게 안부를 주고 받곤 했는데 그 사람들 대부분이 야채가게 단골손님이라고 소개시켜주곤 했다. 기억에 남는 분들 중에 그 야채가게 단골 손님이었다는 할머니 한 분이 우리 가족을 추수감사절 저녁에 초대를 해주셨다. 풍족하지 않으신데도 우리를 위해 칠면조를 굽고 과일을 내어놓으시며 준비해주신 덕에 그 할머니랑 두 아들이랑 보낸 추수감사절의 소박하지만 정성어린 저녁은 우리가 여기서 먹은 여느 추수감사절 음식에 비할 바가 못될 만큼 오래오래 추억하게 된다.  

삼년 전 가족여행으로 뉴욕을 갔을 때 남편은 아들과 나를 그때 일했다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었다. 그때 같이 일했다던 헤드웨이터와 반가운 재회를 했고 아들과 난 그 식당을 둘러보면서 웨이터 복장이라는 까만색 양복바지에 하얀색 와이셔츠, 까만색 신발을 신고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한국음식들이 올려져있을 묵직한 쟁반을 들고 일이층을 오르고 내리고 했을 아빠와 남편의 모습을 그려봤다. 언젠가 그곳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하고 찍었다는 사진속에서 수염을 깎고 웃고 있는 남편의 낯설고 어색했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이듬핸가 시카고로 여행했을 때 남편은 우리를 미시간 호수 근처의 한 벤치로 데려갔다. 6년 전 뉴욕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앉았던. 그때 그 벤치에 앉아 기차시간을 기다리면서 내가 점심으로 싸줬다던 삶은 달걀을 먹었던 기억을 얘기해주었고 우리 가족은 그 벤치에 다 같이 앉아 그때 이야기를 했다. 근데 난 왜 하필 목이 잘 매는 삶은 달걀을 싸줬을까...입대시키는 것도 아닌데..하면서.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남편을 제일 힘들게 했던 건 일보다도 우리와 떨어져 있어서 였다고 했다. 특히 그렇게 이뻐하는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석달동안 엄마랑 지내던 세살배기 아들이 오랫만에 만난 아빠를 낯설어 했을 때 많이 서운해하던 남편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뉴욕을 다녀온 후에 가끔 자기도 방학동안 웨이터일 하면서 용돈 좀 벌고 싶어 뉴욕으로 떠나겠다는 청춘들이 몇  찾아왔었지만 그네들 대부분이 일주일도 못 되서 돌아오거나 뉴욕 관광만 하고 오는 그네들의 손엔 뉴욕에서 사들고 쇼핑가방들이 들려져 있었다. 남편 말대로 절실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일게다. 기실 외국인이 학생 신분으로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이 나라에서는 명백한 불법이다. 그럼에도 워낙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많다. 더군다나 뉴욕이나 큰 도시에서 학생들은 그런 아르바이트들로 용돈이랑 학비를 번다. 한인업주들도 세금에 대한 부담도 없고 영어 쓸 필요도 없으니 그네들을 고용한다고 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학비를 쓰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뉴욕 생활을 즐기는데 쓴다고 한다. 공부는 뒷전으로 한채 공부를 하러 왔는지 돈을 벌러 왔는지 헷갈려하다 결국은 공부를 접고 돈만 벌다 불법체류자로 남는 젊은이들이 뉴욕만 해도 꽤 많다고 한다.  

남편은 공부에다 아르바이트, 조교 그리고 나 역시 공부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린 힘든 고비를 하나 하나 넘길 수 있었다. 남편은 5월 졸업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8월까지의 여름방학동안 잠시지만 동네 한국식당에서 아르바이를 했다. 주위에서 말리는 이도 있었다. 이젠 하지 말라고. 허나 남편은 뭐 어떠냐며 노는 것 보다 낫다고 한달 넘게 웨이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는 아빠가 웨이터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들이 물었다. "그럼 아빠 잡(job)이 프로페서(professor)가 아니고 웨이터에요?" 물론 아들은 웨이터인 아빠에 대해 실망을 해서 물은 게 아니었겠지만 그런 아들을 보고 나와 주변 사람들이 한차례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들과 난 그렇게 건강한 정신의 아빠이자 남편을 사랑한다. 그런 그의 건강함이 우리가 지난 시간을 견디게 할 수 있었던 힘이기에. 물론 그렇게 일하는 과정이 쉽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던 건 그 시간동안 만났던 수많은 이들과 그 공간에서의 경험들덕에 우린 비록 주머니는 가난한 유학생부부였지만 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로 살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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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내가 총알을 마련하기 위해 했던 아르바이트 중에 하나가 청소부일이다. 지금은 이민법이 바뀌어서 배우자비자(F-2)로는 공부를 할 수 없지만 내가 수업을 듣기 시작했던 2001년도엔 배우자비자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학생비자 (F-1)이었던 남편이 한 학기에 3과목을 꽉 채워 들었던 full-time student였던 데 비해 배우자 비자였던 난 미국에 온지 일년 정도 지났을 때 공부를 시작했다. 아들이 오전시간에 유치원 전단계인 preschool을 다니게 되면서부터. 처음엔 한 과목을 듣는 걸로. 그러다 아들이 오후까지 학교를 다니게 되었던 다음해부터는 3 과목을 꽉 채워서 들었다. 헌데 여기 얘들 학교는 왜 그리 쉬는 날이 많은지. 빨간 날이 아니어도 선생님들 컨퍼런스다 학부모 간담회가 있다고 하루를 통째로 쉬어버릴 때면 우린 서로 번갈아 가며 두살배기 아들을 돌보면서 수업을 들어가곤 했다. 내가 수업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아빠랑 놀다 아빠가 수업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내차례. 그러다 석사논문을 쓰기 시작 할 때 즈음 내 기억으로는 2003년인 듯 싶은데.. 그 즈음에 이민법이 배우자비자로는 공부를 할 수 없게끔 바뀌는 통에 논문학점만 남겨놓았음에도 비자를 학생비자로 바꾸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할 생각이지만 잠시 언급하면 남의 나라 특히 미국에서 공부하는데 제일 귀찮게 하는 게 바로 이 비자(Visa)다. 여지껏 비자를 몇번이나 바꿨던가 생각하면 게다가 비자를 바뀌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참 많은 돈과 시간을 비자 바꾸는데 썼다. 이때 배우자 비자에서 학생 비자로 바꾸었다가 석사학위를 따고 나서는 남편이 자릴 잡은 뒤에 남은 공부를 마저 하기로 하고 비자를 배우자 비자로 바꾸었다가, 남편이 학교에 임용되던 그 해에 나도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또 학생비자로 바꾸었으니까. 비자를 바꾸러 한국 심지어 캐나다까지 갔었으니까 거기에 들인 시간이랑 비용이 결코 만만챦다. 비자 fee랑 비행기값, 숙박비용까지 포함해서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길에다 버린 시간을 생각한다면 제일 소모적인 절차들 중에 하나다 싶다. 그래도 어쩌랴..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부할 수 없는 것을. 허나 최근 현정부가 무슨 대단한 성과물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던 무비자대상국이란 혜택은 학생비자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그렇게 학생비자로 바꾸자 마자 학교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건 파트타임으로 수업을 들었던 배우자비자로는 할 수 없어서 아쉬웠던차에 조금이라도 벌기위해 신청을 했다. 논문 학기니 수업을 꽉 채워서 듣지 않아도 되는터라 조교일은 나한테 돌아올 턱이 없고 해서 학교에서 일하는 우리로 치자면 근로장학생(student worker)으로. 그 중에서도 청소부(janitor)일을 봄 정기학기와 기간이 짧은 여름학기..이렇게 두 학기정도 했다. 일주일에 20시간동안 일을 해야하는 근로장학생은 조교일과 달리 학비면제같은 건 없지만 한시간에 기본임금 (그 시절에 $6.50이었던)을 받을 수 있어서 조교일을 못 받은 나같은 인터내셔날 학생들이 그 험한(?) 일을 했다. 기실 말이 청소지 그닥 험하진 않다. 특히 맘씨 착한 조장들 (supervisors)을 만나면. 이 일을 하자고 맘먹은 건 무엇보다 일찌감치 청소를 끝내고 남은 시간동안 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유경험자들의 말에 솔깃해서 였다. 힘들거라고 하지 말라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가능하면 학교에서 주는 돈을 받아보자는 심사로 신청했다. 물론 그때 난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었다. 남편의 기우와는 달리 듣던대로 일은 그닥 어렵지 않았지만 오후 5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는 지라 남편과 아들이랑 저녁시간을 한동안 같이 보내지 못해 서운했던 것 말고는 오히려 나한테는 새로운 경험이어서 재밌게 일을 했다.

내가 맡았던 건물은 학교 회계사들이 근무하던 자그마한 3층짜리 건물(Thalm Hall).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하는 일은 5시 30에 늦지 않게 도착 조장아저씨 이름이 Dave인 그 아저씨한테 열쇠꾸러미를 받아들고 왔노라 사인을 하고는 배당받은 건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하는거다. 물품창고를 열어서 무장(?)을 하고 나서 책상마다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깨끗이 비우고 (쓰레기가 담긴 비닐봉지를 통째로 버리고 새 비닐로 갈아끼우는 일), 베큠을 하고, 계단을 쓸고, 화장실 청소까지.       

 


(내가 청소하던 2층짜리 학교건물 사진)
 

 

 

 

 

 

 

 

 

 

 

 

 

그때 알았다. 집안  청소랑은 별로  안 친한 내가 이런 일을 즐길 수 있다는 걸. 왜냐하면 첫날..내가 하는 걸 본 Dave 아저씨가 물었으니까. 전에 이런 일 해본적이 있냐고. 처음치곤 아주 능숙해 보여서라고 해서. 그말을 들은 남편 역시 그럴리가..하는 얼굴로 웃었다. Dave 아저씨가 그런 인상을 받은 주된 이유가 첫날부터 까만색 쓰레기봉투 뭉치를 청바지 양쪽 허리 고리에다 쑤셔넣고 쓰레기 통을 비우는 솜씨가 초짜치곤 꽤 능숙해보였던게다. 뭘 어떻게 하라고 얘기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니 일을 시작한 일주일동안은 가끔 들여다보더니 그 이후로 Dave아저씨는 내 청소를 아주 맘에 들어하면서 일만 일찍 끝내면 남은 시간동안 공부를 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그게 바로 이 일을 신청할 때 나는 꼭 Dave랑 일하고 싶다고 꼭 찍어서 밝혔던 이유였다.

나처럼 청소하는 한국 친구들사이에서 Dave 아저씨의 이런 너그러운 성격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내가 청소일을 할까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 현직(?)에 있는 한국친구들이 너나없이 이 아저씨를 추천해줬었다. 그건 정해진 세시간 네시간동안을 꼬박 일을 시키는 악명높은 조장들도 있기 때문이다. 해서 Dave 아저씨랑 일하고 싶다고 하면서 두달 정도를 기다더니 자리가 있다며 순서가 돌아왔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게다. 이렇게 인심후한 아저씨를 만났으니 말이다. 해서 난 가능하면 빠른 시간내에 일을 끝내려고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돌아다녔고.. 점차 시간이 지나 손에 일이 익으면서는 한 시간도 안되 일을 다 끝내고 남은 시간동안 그 건물 회의실에서 논문작업을 하곤 했었다. 이 아래 사진에 있는 통은 청소하는 내내 밀고 다녔던 통이다. 사무실 쓰레기 수거를 위한. 지금도 학교에서 이런 도구로 청소를 하는 아줌마 아저씨한테 유독 친근감을 갖는 이유가 아무도 이런 내 경험때문일게다.   

 


(아주 요긴한 청소도구통 사진: 청소에 필요한 도구들은 다 저 노란주머니에 들어있었고 난 저 통을 밀고 다니며 청소를 했던)

  

 

 

 

 

 

 

 

 

 

 

 

 

 

 

 

 

 

 

 

 

 

 

특히 텅빈 건물을 열쇠로 열고 들어섰을 때 하루의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난 흔적만들 남아있는 그 건물에 혼자 남아있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첫날 Dave 아저씨는 이 건물을 보여주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냐고. 무섭지 않겠냐고. 특히 자판기들이 놓여있던 컴컴한 지하에 내려갈 때는 불을 어디서 키고 끄고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 전화를 하라며 맘을 써줬었다. 큰 건물을 담당한 다른 친구들은 한 두명씩 짝이 있어서 일 끝나고 나면 수다를 푸는데 혼자서 심심해 할 내가 걱정되는게다. 해서 돈 워리...안심시켜주면서 단..나 혼자 있는 이 건물에 니가 들어오면 큰 소리로 왔다고 알려달라고 했다. 만일 니가 인기척도 안 내고 갑자기 나타나면 그게 바로 날 무섭게 하는거라고. 했더니 우리 Dave 아저씨는 이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내 이름을 부르며 자기가 왔노라 알리곤 하다...며칠 지나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은 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 일을 하면서 내가 즐겼던 놀이 중에 하나가 사무실이나 책상 상태만으로 그 쥔장의 성격을 짐작하는 거였다. 한결같이 치울게 유난히 많은 사람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뭘 해도 흘리는지 게다가 쓰레기는 왜 그리 차고 넘치는지... 그에 비해 어떤 책상은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어 손댈 것이 별로 없고 주변에 떨어진 종이조각조차 없다. 어떤 이는 여기 저기에 뭔 포스잇을 그리 많이 붙여놨는지.. 많은 이들이 가족들 사진들을 책상위에 올려놓았고..어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담았음직한 글귀나 만화등을 붙여놓기도 하는데..그런 다양한 얼굴의 책상들을 지나치면서 그 쥔장의 이미지를 상상해보는 놀이였다.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늘 서류를 책상가득 벌려놓은 채로 퇴근을 하곤 했던. 그리곤 늘 그 책상위에다 이런 문구가 새겨진 (적은게 아니라 아예 플라스틱에다 새긴 걸 보니 생활화되어있는 사람인 듯 했다) 플라스틱 카드를 올려놓곤 했다. 말인즉은 "자기가 둔 채로 놔둬달라" ("Please don't screw my world"). 나 역시 내 책상정리를 잘 못하는 같은 과(type)라 그 맘을 아는지라 그 상태 그대로 손하나 대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은 일을 하러 갔더니 그 책상의 쥔장이 퇴근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책상위보다 훨씬 깔끔(!)해 보이는 내 또래의 백인 남자였는데..난 그 사람의 Hi 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나도 무지 크게 하이로 맞받아치며 외쳤었다. 물론 그 사람은 모르지. 왜 저 본적도 없는 쪼그만 동양아줌마가 자기의 습관적인 인사를 그렇게 해맑게(?) 받았는지. 헌데 그렇게 가끔 늘 비워져있던 자리의 다른 쥔장들을 만날 때마다 반가운 건 매번 마찬가지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일을 참 즐겼던 것 같다. 본적도 없는 그네들이 퍽이나 친숙하게 여겨져 괜시리 마주치는 얼굴마다 하이톤의 하이를 연발해댔으니까. 남들보다 안면근육 발달이 덜 된 내가 평소엔 처음 보는 이들한테 하이 인사를 할 때도 별로 표정이 없어 가끔 뭔일 있냐는 얘기를 들을 만큼 여기 얘들한테 웃는데 후하지 않은 내가 그때는 말 그대로 웃음과 인사를 남발(!)하고 다녔다. 그랬던 적이 그때 말고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물론 그네들이 알턱이 있을리 없지...그 이유를.

다행스럽게도 Dave 아저씨는 내 청소에 대만족이라고 했다. 그 아저씨왈, 나 같은 한국학생들을 조장아저씨들이 선호하는 이유가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해서란다. 내가 얼마나 탁월한(?) 청소부였으면 그 조장 아저씨가 담당 건물이 다른 단대로 옮길 때도 날 같이 데리고 갔겠는가. 남편말대로 '의외의 선전'이었다. 졸업하면서 이 일을 끝내야 할 때 Dave 아저씨는 내 일에 대해 평가를 체크하는 모든 항목에다 "아주 우수하다(very excellent)"라고 체크하면서 그랬다. 다음에 또 청소일을 하게 되면 자기가 써준 이 평가서가 아주 요긴할거라며 혹시 모르는 일이니 평가서를 10부정도 복사해 주겠다는 친절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물론 그것들을 쓸 일은 아직까지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챙겨주는 Dave아저씨의 그 맘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 시절 제일 좋았던 시간은? 물론 청소를 빨리 끝내고 나서 회의실에 혼자 앉아서 논문작업을 하던 시간이였다. 아래 사진은 그때 한방 박아둔 그림이다. 아늑한 회의실에 앉아서. 지금도 난 그 건물 여기 저기를 청소하던 그림들을 자주 떠올린다. 특히 지금 공부하는 학교에서 아침 이른 시간에 만나게 되는 청소하는 분들을 만나면 괜한 친근감에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게 되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같은 일을 해본 이들한테 갖게 되는 일종의 공감대(?)탓인지도 모른다. 허나 여기선 그분들 대부분이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아줌마 아저씨들이고 역시 100% 흑인들이다. 이전 학교처럼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한테 청소일을 주지 않는 듯 하다. 그래서 난 지금쓰는 조교 사무실에서 가급적이면 쓰레기를 남기지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바닥이 깨끗하면 무거운 청소기를 매일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허나 못 고쳐지는 건 책상위 상태만은 여전히 정리가 잘 안된다. 늘 깔끔하지 못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나올 때가 한두번이 아닌고로. 아마도 청소하시는 누군가도 내가 했던 것 처럼 이 산만한 책상을 보면서 내 성격을 짐작하는 그런 놀이를 하는 지도 모른다.  
 


(내 첫번째 노트북 사진. 지금도 쓰고 있는)
 

 

 

 

 

 

 

 

 

 

 

 

 

그때 그렇게 번 돈으로 요 랩탑을 장만했다. 두주에 한번씩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에서 할부로 대금을 치루면서. 이자가 비싸긴 했지만 어쩌랴..한번에 낼 형편은 안되지만 논문 때문에 장만했다. 얼마였더라. 몇달을 그렇게 냈는지는 기억이 안 나니. 요즘처럼 가볍고 작아지는 모델들에 비해 이제 5년이 넘어가는 저 랩탑은 누구말대로 그냥 도서관에다 펼쳐놔도 아무도 안 갖고 갈거라고 할만큼 구식이다. 농삼아 탱크수준이라고 불릴만큼 무겁고 나일 먹어서 점점 느려지고 겨우 워드작업만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점차 맛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쓰고 있다. 자잘한 탈이 날 때마다 남편의 무료 에이에스를 버티면서. 묵은 걸 좋아하는 내 성격탓에 이 랩탑을 보면 그때 일하던 때의 그림들이 떠올리는게 좋기 때문일게다.

지금도 남편과 난 맥주 한잔을 기울일 때마다 우리 얘기의 단골 메뉴로 일했던 그 시절 얘기들을 되새김질한다. 이른 저녁을 5시경에 먹고 6시에 시작하는 청소를 하러 집을 나왔다가 아들이 잠자리에 드는 9시를 훌쩍 넘긴 10시 정도에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들을 재운 남편이 청소하는 건물앞으로 데리로 오곤 하던. 우리의 사랑스럽게 요란스러웠던 똥차를 끌고. 일을 끝내고 그 건물의 열쇠뭉치를 조장아저씨한테 건네주고 이제 청소끝나고 돌아간다는 싸인을 하고 나오면 건물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수고했어...하던 그 날들을.  집에 돌아와..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소소한 것까지 나누면서 하루를 마감하던 그때 그 시절 얘기들을 안주삼아 소들이 하는 양..또 하고 또 하고 되새김질을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돌이켜보면 힘들었을텐데도 그때 참 재밌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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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돈도 없이 유학은 왜 왔데?"

누구는 그렇게 얘기했었다. 우리가 아는 누군가가 돈 없어서 고생한다는 식의 뒷담화가 오가다 보면 으례 누군가의 입에서 툭 하니 던져지는 저 말을 들으면 우리가 바로 그 돈도 없으면서 더군다나 장학금받을만큼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유학이런 걸 온 주제들이라서 그런가..입맛이 쓰다. 허나..현실적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돈도 없는데 누가 억지로 공부하라고 등떠밀어서 온 유학이 아닌바에야 그만한 고생할 각오는 하고 와야 하는거니까. 우리도 그랬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어서 왔으니까 그 정도의 고생은 감내해야지..그렇게 고생할 지 예상 못했냐는 식의 그런 말들의 이면엔 유학이란건 주머니가 넉넉한 자들만이 꿈꿀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다는 식 편견이 보인다. 적어도 내눈엔. 허나 그렇다고 가진 돈도 없고 장학금을 받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은 우리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유학이란 걸 꿈꿔보지도..시도해보지도 못한다는 건가..하는 맘이 불끈한다. 기실 그런 편견을 깨주는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유학생활을 버쳐나가는 청춘들이 주변에 많다. 가진 것 없고 학교에서 돈 받아서 올 만큼은 안 되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다는 그 맘 하나만 갖고 버티는. 그 맘이 진짜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건 간에 일단 안되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저지를 수 있는 용기..그리고 무엇보다 저지르고는 감당못해 우왕좌왕하거나 공부하고 싶은 맘보다 바람이 더 많다보니 결국은 공부를 접고 불법체류자 신세로 사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꾸준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결국은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잡거나 공부를 계속하는 이들이 적쟎다. 물론 워낙 없이 저지른 일들이니까 초반 고생은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어느 정도 힘든 시간을 겪고 나면 다 길은 있게 마련이다. "다 길은 있다"...남들은 똥배짱이라고 부르지만 밖에서는 안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서면 길이 있고 방법은 다 있다는게 내 세상사는 믿음들 중에 하나다. 실제로 처음엔 자기돈으로 학비를 대야 했지만 나중에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거나 학교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조금씩 나은 조건에서 공부할 수 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그래도 내돈 들이지 않고 부모님한테 더 이상 손 벌리지 않고..남의 나라 돈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예들이 우리주변에 많으니 혹 형편이 안되서 유학을 접는 누군가가 있다면 난 꼭 그 얘길 해주고 싶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허나 현실적으로 그런 이들이 많진 않다. 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하는 얘기다. 중서부 한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생활하고 겪은...그리고 이 남부로 내려와서 아직도 공부라는 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어찌보면 지극히 제한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우리 주변엔 그렇게 고생스럽게 공부를 하는 한인유학생들 보다 여유있는 학생들이 더 많았으니까. 그런 이들의 눈엔 학비를 벌기위해 여름방학동안 뉴욕에서 웨이터를 하고 동네 야채가게에서 점원일을 하고 졸업할 때까지 학교 조교일을 하고 근로학생(student worker)으로 학교에서 청소일(janitor)을 하고 가죽옷 가게에서 아르바이를 했던 우리 부부의 유학생활이 유난스러워 보였는지...어떤 이는 우리한테 '수기'를 쓰라고 권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혹은 이미 갖고 있는 돈으로 넉넉하게 혹은 불편하지 않을 만큼 남의 나라에서 공부를 하는 그네들 눈엔 우리의 유학생활이 퍽이나 남달라 보였던게다. 허나 그렇게 살았던건..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해서도 있었지만.. 이 나이에..연로하신 부모님들한테 용돈도 보태드리지 못하는 데..우리가 자급자족해야 해야 한다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물론 장담할 수는 없다. 시댁이나 친정이 넉넉하셨다면..정말 힘들었을 때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을테지만 어느 정도 다 지나온 요즘에 와서는 힘들긴 했지만 그렇게 도움받지 않고 우리끼리 해낼 수 있었던 게 더 값진 경험이었다는데 남편도 나도 공감한다.  

허긴 유학생들 대부분이 상당히..좀..그럭 저럭 '있는 집' 자손들인 건 분명했다. 특히 장학금없이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다 부모님들의 원조에 의존했던 학부생들 대부분은 다들 여유있어보였다. 그래도 우리랑 가까이 지냈던 젊은 친구들중엔 그런 부모님들이 보내주신 돈을 헛되게 쓰지 않으려고 낭비하지 않고 알뜰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있지만 많은 친구들은 그런 여유를 즐기면서 지낸다. 새차를 뽑고 방학마다 미국 여기 저기 놀러다니고 때론 가까운 카지노에 가서 게임을 즐기면서. 누군가 그랬다. 학교 타운에서 차장사(car dealer)하는 이들사이엔 학기초가 되면 새로 정착하는 한국사람들이 최고의 고객으로 친단다. 이유인즉은 방금 시장에 나온 새모델을 그것도 신용카드가 아닌 뭉텅이 현금을 내고 구입하는 대부분이 외지에 자녀들만 두고 가는 한국부모님들이라니 그네들한테야 봉이나 다름없는게다.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나라에와서 자기 돈으로 그렇게 누리고 산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건 가타부타 할 얘기는 전혀 아니다. 허나 그런 여유로운 경제적 뒷받침이 자식의 유학생활에 그리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 같진 않다. 그건 공부보다는 놀꺼리..술문화나 밤문화 혹은 도박문화랑 더 친근한 유학생활을 보내게 하는 원동력(?)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금전적인 여유로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큰 자식이니 이제 혼자 힘으로 해보라고 절제된 생활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멋진 부모님들도 계시다.  

물론 그런 부럽쟎은 환경속에서도 세상경험을 한다는 차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제법 철이 든 젊은이들도 있다. 한 처자는 집 형편이 그렇게 힘들지도 않건만 자기힘으로 해보고 싶다며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다. 물론 우수한 성적과 함께. 허나 남의 나라에서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해내려면 그것도 한두달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내려면 왠만한 절박함갖고는 쉽지 않다. 남편이 여름방학 3개월동안 뉴욕에서 웨이터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는 말에 관광도 할겸 경험삼아 자기들도 한번 해보겠다며 남편의 조언을 받고 뉴욕을 떠났던 청춘들중 실제로 일해서 학비를 벌었던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돌아오는 그네들 손엔 뉴욕 명품가게에서 구입했음직한 물건들이랑 그곳에서의 여행했던 뒷얘기들뿐이었다. 남편말대로 절박하지 않은 이들이 버티기엔 쉽지 않은게 유학생활중의 아르바이트일게다. 더군다나 그런 놀거리가 많은 대도시에서는 더더욱.

이에 비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갖고 있는 대학원생들은 생활력이 강하다. 거의 대개가 입학할 때부터 학비를 면제받고 일주일 20시간씩 조교일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적게는 한달에 800불에서부터 많게는 이천불넘게까지 받는 그 조교월급으로 생활을 한다. 남편이 학생이었던 시절 우린 한달에 평균 천오백정도 되는 돈으로 한달을 살았다. 한국돈으로 백오십만원정도되는 돈으로. 그 금액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탠 삼백불정도의 돈이 포함되었다. 그 돈에서 생활비랑 공과금을 빼고 나면 남는 돈은 한 사오백불정도.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오십만원남짓한 돈으로 한달 생활비를 해야 하니 식비빼고 나면 남는 돈으로 한달을 살기란 참으로 빠듯함에도 한국집에서 보조없이 우리처럼 자력으로 살아야하는 유학생들은 특히 그 안사람들은 그런 빠듯한 가계를 꾸려가느라 알뜰하기 그지없다. 같이 모여앉아 얘기하다보면 어디서 세일을 싸게 하고 어느 가게가 물건을 더 싸게 파는지를 알려주는 알뜰주부들이 늘 있었으니까. 아마도 대부분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의 대부분은 다들 비슷한 형편들이었을게다. 

그런가 하면 혼자 몸도 아닌 온 가족을 데리고 온 대학원생인데도 조교자리없이도 한국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하며 여유있게 살다가 졸업하는 있는 집 이들도 많았다. 그런 집들은 경제적인 여유로 인해 한국에서 처럼 온갖 과외를 다 가르친다. 재즈댄스에다 바이올린 피아노 등등 해서 많게는 여덟까지 종목(?)까지 과외를 시킨다는 집도 있었으니까. 특히 그런 집에선 자기 아이들한테는 세일하는 옷은 절대 안 사입고 방학때 되면 여기 저기 놀러다니는. 해서 주변 다른 가족들이 참으로 많이 부러워했었다. 물론 그네들도 그 나이에 더군다나 혼잣몸도 아닌 온 가족들이 지내기 위한 생활비에다 한학기 생활비를 다 보조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속내도 나름 안 편했을게다. 그렇게 시부모님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살던 한 친구의 속앓이를 들어본 적이 있던터라 어찌보면 한국 부모나 형제한테 손 안 벌리고 자력으로 살아내는게 몸은 고되더라도 맘은 편하겠다 싶었으니까.

그렇게 여유로운 유학생활이 아니라 고생을 할 각오로 오는 누군가 있다면 고생할 맘의 각오 말고 반드시 필요한 마음 가짐이 있다. '절대로 딴길로 새지말기. 잠시 샛길로 새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기.' 그런 다짐이 필요한 건 공부를 하겠다고 남의 나라를 밟은 적쟎은 젊은이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샛길로 새서는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데 있다. 아니 한번 새면 돌아오지 못한다는게 더 맞는 말일게다 . 그 한 예로 뉴욕에서 아르바이를 했던 남편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대도시인 그 곳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인 젊은이들 많다고 한다. 대부분이 한국가게에 사업체에서 일하는데 불업취업인 셈이다. 원래 그들이 미국땅을 밟은 목적은 공부다. 영어공부를 포함해서. 헌데 그들의 하루 일과 대부분은 공부대신 아르바이트에 쓰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아예 공부를 접은 채로. 특히 그렇게 하루 일하고 나서 손에 현금 쥐는 맛을 들린 청춘들은 일이 끝나면 돈을 쓰러 나간단다. 놀거리가 많으니 유혹이 그만큼 많은게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온 남편...주변 청춘들한테 그런다. 차라리 도시보다 이런 공부밖에 할게 없는 시골에서 하는 유학생활이 더 낫다고. 그건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왜 자기가 여기에 왔는지 원래 이유를 잊어버리고 하루살이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불법체류신세를 감당하면서말이다.

허니 유학을 막연하게 꿈꾸고 있는 누군가에게...기꺼이 고생할 맘이 있다면..딴길로 새지 않을 각오만 있다면.. 더군다가 젋다면 저질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일장일단은 있다. 벌어서 해야 하므로 돌아가다 보면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고..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 수도 있다. 여기까지 와서 배운 영어가 남의 나라 땅 하나도 밟아보지 않고도 훨씬 잘 하는 이들에 밀릴 수도 있다. 그렇게 힘든 과정에서 얻는 경험이라는게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각자 판단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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