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살던 중부에서 살면서 오년 넘게 일주일에 삼일을 교회에서 만난 가까이 지내던 집사님 내외가 운영하시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죽 제품을 팔면서 구두와 가죽옷등을 수선하는 가게였다. 학교다니던 시절, 가정 가사 시간이랑 그리도 안 친했건만, 가정 가사가 오죽이나 하기 싫었으면 대입때 가정 가사 대신 제2 외국어 일본어를 선택했을 정도로 싫어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했던 몸이 어쩌다 보니 남의 나라에서 재봉틀을 돌리고 단추를 다는 수선 아르바이를 하게 된게다. 그런 거랑 거리가 먼 이몸을 당신들 가게에서 일하게 해주신 건 우리의 얇은 주머니 사정을 익히 아신 집사님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래도 집사님 두분이 교통사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런 수선일은 내몫이 아니었다. 그런 거에 별로 소질이 없는 걸 잘 아시는터라 내 할일은 가죽 제품을 팔고 수선이 된 물건을 찾으로 온 손님한테 돈을 받고 내어주는 게 다였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두분이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난 후 그분들 딸이 가게를 운영하게 되면서 부터 이전엔 두분이서 하시던 수선일을 혼자 도 맡아야 하는 그 친구한테 도움이 되어야겠다 싶어 야금 야금 수선에 손을 대다 보니 어느새 가죽 재봉틀에 앉아 틀을 밟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단추달기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손님들은 두 부류였다. 스피드를 즐기는 거칠지만 낭만적인 바이커 족 일명 폭주족과 새것을 사기보다 있는 것을 고쳐서 쓰는 알뜰 수선족.  

폭주족들이 주 단골 손님이었던 까닭은 그 가게에서 팔던 가죽제품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바이크(Bike)를 타는 이들을 타켓으로 한 제품들이었기 때문이다. 늘 가게 앞은 차 한대 값보다 더 비싸다는 유명 브랜드의 폼나는 오토바이(여기선 바이크라고 부른다)들이 자동차 대신 즐비하게 주차해있었고 그 바이크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가죽 점퍼에서부터 챞(Chap)이라고 부르는 바지위에 덧입는 가죽 바지, 손목까지 덮는 장갑에 벽돌무게같이 묵직한 부츠랑 모자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죽을 두르고 싶어한다. 그 가게가 작은 규모임에도 그런대로 실하게 운영될 수 있었던 까닭은 폭주족이라면 누구나 사고 싶어하는 허나 너무 비싸서 못사는 바이커들 제품의 최고 유명 브래드인 할리 데이빗슨 (Harley Davidson) 제품 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대비 품질도 그리 나쁘지 않아 경제적인 가격에 나름 멋진 폭주족 세트를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에 특별히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바이크 매니아들이 주 고객층이었다.

폭주족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문제의 청소년이나 거리의 무법자들인 젊은 친구들이 아닌 내가 만난 폭주족들은 대부분이 연세가 제법 지긋하신 분들이 더 많았다. 걔중엔 스피드를 즐기기엔 너무나 연로해 보이는 분들도 있었고, 너무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 아줌마들도 있다. 대개 그런 분들은 평상시엔 직장에서 일하고 주말에 오토바이를 끌고 멋지고 달리는 취미를 즐기시는 분들이고. 또 다른 한 부류는 한눈에도 가히 범상찮음을 알아 볼 만큼 험한 차림을 한 일명 전문(?) 폭주족들로 많은 분들이 몸 여기 저기에 그림을 그려넣으신 우락 부락한 인상들을 하신 까닥에 처음엔 가까이 하기에 상당히 저어했던 이들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단골 손님들중 한 아저씨는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맨살에 가죽조끼 하나만 걸치고 등과 팔 여기 저기 한 문신들을 뽐내면서 검은 썬그라스까지 쓰고 나타나시곤 했는데 건축업을 하신다는 그 분의 연세는 60. 도저히 그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근육질의 몸이었고 여자친구도 올 때마다 바뀌곤 하던 그 아저씨가 어느날 평일에 정장차림을 하고 나타났을 때는 모두 놀랐었다. 근육질과 문신이 안 보인다고 해서 저리도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게 놀라워서. 암튼 그분은 올 때마다 한보따리씩 사가는 단골중에 단골이었다. 

한 배짱한다는 나도 처음엔 그런 험한 하드웨어의 분들이 가게에 들어오면 말 붙이기도 조심스러웠다. 허나 얼마 안 되어 알게 되었다. 집사님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거칠어 보이는 폭주족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가 의외로 신경쓸일이 별로 없다는 걸. 그건 거친 외모와는 달리 일단 친해지면 친절하고 특히 물건을 살 때도 가타부타 군말없이 말 그대로 화끈하게 한무더기의 물건을 사가는 이들이 많은 탓이다. 이것 저것 꼼꼼하게 체크 해보고 이것 저것 다 입어보고 나서도 그냥 빈손으로 나가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해서 집사님들이 그러셨다. 그래서 나같이 무뚝뚝한 성격으로도 물건을 팔 수 있는 가게라고. 맞는 말씀이었다. 손님이 들어왔다고 해서 뭘 사갈거냐 이것 저것 골라주는 대신 난 물건 구경하다 뭐 필요한 것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고 내 하던 일을 그냥 하곤 했으니까. 어찌보면 불친절한 점원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그네들은 별말없이 그것도 오래 걸리지도 않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고 나가곤 했으니 나한테는 더없이 제격인 손님들이었던게다. 

그렇다고 손님들한테 불친절한 것은 아니었다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별말없이 있다가 도와달라고 하던가 자기가 입은 게 어때보이냐고 의견을 묻는 이들이 있으면 성의껏 대해줬으니까. 해서 어떤 손님은 내가 해주는 몇마디 충고에 혹해서 안 살 물건도 더 샀다며 내 장사수완이 좋다는 남편조차 믿지 않았던 칭찬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건 옷을 다 입고 나온 손님들한테 무조건 잘 어울린다고 하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그건 너한테 별로 안 어울린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주고 다른 대안이 되는 물건이 있으면 권하고 그게 아니면 다른 제품의 카달로그를 보여주고 주문해줄 수 있다고 제안을 하곤 한다. 그런 내 방법이 이네들의 정서에 맞았던 건지 몰라도 대부분이 내 말대로 갈아입어보거나 다른 걸 주문해서 구입하고는 잘 한 선택이었다고 평하는 이들이 많긴 했다. 어느 날은 가죽점퍼가 너무 사고 싶은데 수중에 있는 현찰이 이게 다라면서 지갑 안에 있는 현금을 다 보여주는 손님이 있었다. 계산을 해보니 모자라는 금액이 세금 (여기선 세금이 9.6%) 액수길래 세금을 안 붙이고 그 가격에 물건을 파는 대신 앞으로 필요한 모든 바이크제품은 여기서 사가라는 장담못할 약속을 받고 물건을 판 적이 있었다. 물론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이후로 그 아저씨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듯이 수시로 드나들며 크고 작은 물건을 사가기도 하고 자기의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서 물건을 팔아주는 단골이 되었다. 친구들한테 날 소개하기를 스윗 비지니스워먼(sweet business woman)이란다. 그렇게 폭주족들한테 바이크제품을 파는 아르바이는 재밌었다.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을 만나는 듯 해서 그곳에서 일하는 해가 거듭될 수록 난 손님들하고 수다를 떠는 재미,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네들이 다녔다는 이곳 저곳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크고 작은 허드렛일이 많은 수선에 비하면.  
 
동창 중에 한국에서 세탁소를 하는 한 친구한테 농담삼아 미국와서 세탁소를 하라는 얘길 했었다. 가죽옷이긴 하지만 단추 하나 달아주고 1불을 받는다고 했더니 요즘 한국 세탁소에서는 단추는 서비스로 그냥 달아주는 거라고 하길래 농반진반으로 그랬었다. 물론 한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는 피해야한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주로 많이 하는 사업종들로 흑인들을 상대로 하는 뷰티 서플라이(가발을 비롯한 각종 소모품), 세탁소, 수선집, 식료품 등이 있는데 내 보기엔 재료비가 적게 드는 수선의 경우 인건비만 안 든다면 수입이 괜찮은 업종인 듯 싶다. 그건 우리나라처럼 여기 사람들은 바느질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가정 가사 시간에 놀았던(?) 나도 단추 달 줄을 알건만  여기 사람들은 단추 한 개에 일불씩 내고 달아 달라고 하니 되는 장사가 아닌가. 대신 한국 사람들이 많이 없는 동네에다 사업을 해야지 수익성이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 보면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으로 번져 동네에 한국사람들이 하는 세탁소가 두 세군데 된다는 한 친구는 셔츠 다림질에 1불도 안 한다고 하기에 하는 소리다. 허니 한국사람도 많이 없고 기존의 수선가게도 별로 없다면 재료비도 적게 드는 수선이 괜찮은 업종이겠다 싶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동네에선 뷰티서플라이는 한국사람들이 잡고 있는데 비해 수선은 베트남사람들이 잡고 있다. 동네마다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수인종들이 다르다고 하니 이 또한 미리 알아보고 결정해야 한다.  

수선집이 잘 되는 이유는 이네들의 알뜰함 때문이다. 가끔 대체 그 가격을 주고 고치느니 새것을 사는게 낫겠다 싶은 낡은 물건들을 갖고 와서 고쳐달라는 이들이 있다. 동네에서 소문난 부자도 유명인사도 수선이 필요한 물건들을 들고 들어온다. 유명한 상원의원 아저씨는 10년도 넘게 신었다는 구두들을 수시로 갖고 오신다. 닳은 굽을 갈아달라고. 색이 바래고 안감이 다 헤질 만큼 오래입은 가죽점퍼의 안감을 새로 달아달라고 갖고 오는 이들도 있다. 그 안감을 다는데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우리 가게에서 파는 가죽점퍼 하나 사는게 낫다고 농담삼아 이야기해도 그네들은 그 옷이 자기한테 왜 중요한 가를 한참 설명하고 나서 만만챦은 가격임에도 해달라고 맡기곤 한다. 그런 이들의 검소함은 오래동안 몸에 밴 듯 하다. 수선때문에 일이 많고 가게안도 깨끗하지 않긴 하다. 내가 여기로 이사 온 후 그 딸은 수선을 그만두고 싶어하지만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 하고 있다. 일이 많아 피곤하고 힘은 들지만 그런 수선으로 들어오는 푼돈이 꽤 큰 수입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덕에 반찬값을 해결 할 수 있어 우리의 얄팍한 가계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곳에 와서도 그곳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리면 입가에 슬쩍 웃음부터 말린다. 재봉틀을 처음 배워보겠다고 왠지 막해도 티가 안 날 것 같아 보이는 일감을 재봉틀로 들입다 박아대다 결국 잘못 박아 다시 뜯어내야 했던 일 (물론 그 실수 이후로 나의 재봉틀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내 자평), 값비싼 루비똥가방 안감을 원래 제품과 똑같은 감으로 해달라고 맡겼던 한 처자가 수선 된 물건을 보고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가방값을 100% 변상해달라고 떼쓴는 통에 변호사까지 오고 가야 했던 일, 특히 토요일 일을 끝내고 나면 온 가족이 그날 받은 주급으로 한국식료품 장을 보고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곤 하던 그림..몇해동안 변함없이 늘 똑같은 메뉴를 시킨 까닭에 어느순간부턴가 우리가 가면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음식을 내어주곤 하던 쥔장 아저씨..허긴 생각나는 그림들이 어디 한둘이랴.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지금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힘들었다고 해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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