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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벌써 데뷔 25년을 맞는다는 하루키의 신작소설이다.
오후 11시 56분부터 다음날 오전 6시 52분까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소설의 내용. 그리고 그 형식은 다분히 영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독자는 영화의 관객과 같은 입장이 되어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소설 속 인물들을 따라다닌다. 소설을 읽고 있는건지, 영화 시나리오를 읽고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영상문법에 의지한 부분이 많은 글이다. 시나리오를 써서 밥을 먹겠다는 내 입장에선 다소 불쾌 내지는 불안을 느낄 수 있는. 그래서 맘에 안드는. ㅋㅋ
3년 전 배낭여행에서 만난 일본 친구가 침이 마르도록 하루키 얘길 하기에 돌아와서 <상실의 시대>, <빵가게 재습격>, <먼 북소리> 장편, 단편, 에세이 각각 한 편씩을 읽었다. 말을 다루는 재주가 아주 탁월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받았지만 지나치게 도회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감동까지 받았던 여행기 <먼 북소리>는 아마 내가 여행한 곳에 대한 추억이 덧붙어 그런것이려니 하고 그의 글에 대해서는 이유없이 그저 시큰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제 오늘 <어둠의 저편>을 읽고나선, 하루키에 대한 내 생각이 상당히 바뀌었다. 그는 대단하다. 실로 굉.장.한.작.가.임에 틀림없다. 한 우물을 25년 파는 걸로만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만 하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하루키는, 모든 대가들이 그렇듯 자기 작업을 통해 신의 영역으로 다가가려는 장인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한때 이 땅의 젊은 작가들이 동경과 흠모를 담아 아류로 쏟아내던 쿨하고 키취한,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장에 고급하고 난삽한 취향을 제멋대로 늘어놓고 자뻑하는, 반짝하다 곧 사라져버릴 불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제서야 알아봤다.
<어둠의 저편>은 중년을 지나 이제는 생물학적인 노년에 접어들고 있는 하루키가 바라본 현대 사회의 이면이다. 물질과 소비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현대인에 대한 애달픈 연민이며, 자그마한 위로다. 어쩌면 에리처럼, 어쩌면 시라가와처럼, 우리는 자신의 몸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수용하느라 지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있는 마리나 다카하시를 왕따시키고, 외롭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관찰과 묘사보다 대단한 하루키의 통찰은, 욕망의 주체인 마리나 욕망의 객체인 에리의 삶이 결코 따로 유리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의 '緣'이나 힌두의 'indranet'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전혀 별개처럼 보이는 이들의 삶도 결국은 깊은 곳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가지'라고나 할까.
이건 사족같은 말이지만 하루키, 하면 언제나 청바지에 셔츠 차림의 젊고 쿨한 젊은이일 것만 같았는데 오늘 보니 우리 아버지랑 동갑이었다! 하루키와 아버지라... 욕망의 객체가 된다는 건, 그 객체를 욕망하는 이들로부터 약간의 실망과 놀라움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를 포함한다. 이미 내게는 욕망의 객체가 되어버린, 하루키 그 자신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