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 악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5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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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만난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인간 의자>였다. 7-8년 전 한길사에서 출간했던 세계 걸작 미스테리라는 단편 앤솔로지에 수록되어 있던 이 충격의 단편은 내게 란포에 대한 강렬한 각인을 남겼다.
사실 그 이전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짝퉁 에드가 앨런 포인가? 하여간 일본애들은 모방하는거 좋아한단 말이야"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 후 그가 영, 미에 버금가는 토양을 갖고 있는 일본 미스테리 소설계의 대부격이 되는 작가이고 '진품' 에드가 앨런 포에 못지않은 기괴하고 음습하며 비틀린 인간군상을 탁월하게 그려낸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 접한 란포의 <인간 의자>는 나의 이런 기대에 대한 훌륭한 확답이었던 것이다.

포는 뒤팽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편의 단편 미스테리에서만은 적어도 완전한 '본격 미스테리'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란포의 추리소설은 '본격 미스테리'보다는 포가 <검은 고양이>등 추리소설 이외의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과 어두운 그늘을 거침없이 묘사한다. <음울한 짐승>은 그의 이러한 특장점이 잘 드러난 명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작품경향을 일명 '변격 미스테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변격'이라는 어휘가 란포처럼 잘 어울리는 작가도 없을 것 같다.

<외딴섬 악마>는 란포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인 1925년 ~ 1926년을 지나서 작품 경향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 시작하는 시점인 1929년의 작품이다. 1920년대 초중반 란포는 비교적 '본격'에 가까운 작품들을 썼다. <심리 시험>이나 <D언덕의 살인>등 그의 시리즈 탐정인 아케치 고고로가 등장하는 단편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란포의 작품들인 <흡혈귀>, <황금가면>, <지옥풍경>, <괴인 20면상> 등은 제목만 훑어 보아도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기담이나 모험 소설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시기의 작품들은 현실과의 타협에 의한 통속 대중 소설들과 소년물들이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작품 경향의 변화지점에 <외딴섬 악마>가 위치하며 그래서 이 작품은 추리 소설과 괴기 모험 소설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주인공의 회고로 진행된다. 입구가 모두 잠긴 집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과 수많은 인파 속에서 벌어진 광장 살인, 불가사의한 두 개의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탐정역을 맡았던 인물이 살해된 가운데 주인공의 선배가 새로운 탐정 역할을 맡아 사건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데 성공하지만 두 사람은 사건의 배후에 깔려있는 어두운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끔찍하고도 기이한 모험을 시작한다.

다소 무리해 보이는 플롯임에도 불구하고 초반부의 딕슨 카를 연상시키는 불가능 범죄 연속 살인사건과 그에 대한 해명, 그리고 포의 <어셔가의 붕괴>나 <큰 소용돌이>, 조지 웰즈의 <모로 박사의 섬> 등을 뭉뚱그려 놓은 듯한 후반부의 이야기 구조가 서로 무리없이 잘 연결되어 있어 미스테리와 어드벤쳐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외딴섬 악마>는 <음울한 짐승>에 실렸던 중, 단편들에 비하면 다소 미스테리적 요소도 부족하며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란포의 매력과 그가 추구했던 작품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주요한 작품으로 꼽힐 만 하다. <음울한 짐승>에 만족하였다면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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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2004-12-14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어떻게 작가의 지난 작품과 역사를 모조리 꿰고 계신단 말씀입니까. 정말 대단하세요. 저도 oldhand님같은 열정이 있다면 좋겠는데..음울한 짐승, 외딴섬 악마. 꼭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oldhand 2004-12-14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일이 좀 바빠서 일주일간 서재를 거의 들어오지 못했었는데 오늘 잠깐 들러보니 사과님이 또 이렇게 댓글을 달아 주셨네요. 작가의 지난 작품과 역사를 어찌 꿰고 있겠습니까... 여기 저기 들은게 있어서 리뷰 쓸때 자료를 참고 한 것이랍니다. 열정은.. 제가 사과님 만큼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주 널널한 사람인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