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별로는 힘들더라도 분기별로는 인상깊었던 책들에 대해 단평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지레짐작을 했었지만, 웬걸. 4월이 다 지나서야 1/4분기에 대한 글을 쓴다. 4월 초에 읽었던 황홀한 걸작 <유다의 창>에 대한 이야기는 2/4분기 편에서나 쓸텐데, 과연 2/4분기편이 작성 될지도 미지수이다.
 
 <로마서브로사1 - 로마인의 피>
스티븐 세일러의 로마서브로사 시리즈 첫 권.
로마시대의 사립탐정 고르디아누스는 현대의 하드보일드 탐정과 유사하다. 공화정의 로마는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경찰제도를 포기한 사회였다. 밤의 로마는 살풍경한 무법지대로 변신한다. 고르디아누스가 뒤쫓아간 사건의 정황은 참혹한 일면을 드러내며 탐정을 고뇌하게 만들고, 키케로는 화려한 변론으로 소설의 말미를 수 놓는다. 로마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함에 그치지 않고, 실존인물, 가상인물을 가리지 않고 각각의 등장인물에 숨결을 불어넣은 작가의 필력은 훌륭하다. 책의 만듦새도 좋고, 번역도 그다지 걸리는 부분없이 잘 읽힌다. 시리즈의 흥행이 성공하길 기원한다.

 <안녕 내사랑>
필립 말로를 처음으로 만났던 작품. 10여년만에 북하우스판으로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던 때보다 훨씬 좋았다. 곱씹을수록 챈들러는 빼어난 작가이며, 말로는 매력적인 탐정이다.
게다가 필립 말로 시리즈 장편들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1, 2위를 다투는 작품이 아닌가.
시간이 흐른 후 또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 그리고, 읽을 때 마다 새로운 장면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독자는 행복할 따름이다. 대를 이어 읽을 만한 소설. 이제 막 한글을 깨친 큰 아이를 보면서, 훗날 세월이 좀 더 흘러 필립 말로에 대해, 루 아처에 대해, 샘 스페이드에 대해 내 자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행복한 상상을 해 본다.

 <실종-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
가독성 최고의 작가 마이클 코넬리.
평범한 주인공이 휘말리는 서스펜스의 긴장감을 이토록 현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주인공에 대한 린치 장면 등은 영화,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잘생기고, 영리하며, 주먹질까지 잘하는 주인공들이 환타지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 될 지 미처 예상할 틈도 없이 숨가쁘게 결말까지 질주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찬탄을 자아낼 만한 걸작은 아니지만 범작이 이 정도라면, 보증수표도 이런 보증수표가 없는 셈이다.

 <파일로 밴스의 고뇌>
15년 쯤 되었나, 굉장히 오랜만에 다시 읽은 <주교 살인 사건>은 초독의 재미에 미치지 못하였다. 미스터리에 본격적으로 탐닉하기 전인 순진한 독자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경찰 수사의 터무니없는 허술함이 가장 신경에 거슬렸고, 사건 발생 정황상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별다른 심문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밴스의 속셈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미덕도 있다. 지금에서야 흔하디 흔한 플롯이지만 마더 구즈를 차용한 동요 살인을 다룬것은 이 작품이 거의 최초가 아닐까. <주교 살인 사건>은 크리스티의 저 위대한 걸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중요 플롯을 제시한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교 살인 사건이 10년 먼저 씌어졌다.)
국내 초역된 <그레이시 앨런 살인사건>은 반 다인의 밴스 시리즈라는 것을 제외하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특히 작중 밴스의 호감을 사는 매력적인 아가씨로 등장하는 그레이시 앨런의 묘사는 시대상을 반영하더라도 감내하기 힘든 수준이다. 아무리 봐도 그레이시 앨런은 지능이 부족한 사람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반 다인은 발랄하고 활달한 것과 어리석고 철 없는 것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다인의 전 작품이 소개되고, 읽혀진다는 것은 이런저런 실망을 충분히 감내할 만한 일이다. 북스피어의 반 다인 시리즈는 고전 미스터리의 애호가라면 당연히 소장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다.

 <죽은 자는 알고 있다>
수많은 미스터리 문학상을 수상하였지만, 이제서야 국내에 최초로 소개된 로라 립먼의 작품이다.
볼티모어 경찰 시리즈 중 한 권이라고 하는데, 작가의 대표 시리즈 물은 또 따로 있다고 한다. (전직 기자 아마츄어 탐정 테스 모나한 시리즈)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는 자극적이지 않은 내용으로도 충분히 독자에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과거의 사건에 얽매여 있는 현재라는 점에서 낸시 피커드의 <스몰플레인스의 성녀>와도 유사성이 있다. 두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해 가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아쉬운 점은 시리즈 물임에도 불구하고 한 편만 소개되었기 때문에 경찰들의 캐릭터에 익숙해 질 시간이 없다는 것. 세 명의 주요 캐릭터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 뭔가 허전하게 느껴져 아쉽다.
최근에는 좀 주춤하고 있지만, 일본 미스터리의 범람과 검증된 유명 작가의 작품들만이 근근히 주목을 받는 출판시장에서 다양한 작가들의 최신 수작들을 접할 수 있는 블랙캣 시리즈는 나같은 독자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리스트이다. 시장의 차가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책을 내는 속도도 조금 빨라진 것 같은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수도원의 죽음>
그리스 로마 시대와 더불어 역사 미스터리 배경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곳은 역시 중세, 그중에서도 수도원이 아닐까.
꼽추 탐정 샤들레이크 시리즈는 수도원만을 배경으로 하지는 않지만 시리즈 첫권을 장식하는 <수도원의 죽음>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고 영국의 종교개혁을 단행할 즈음, 가톨릭 수도원들은 왕권에 밀려 쇠퇴와 해체의 길을 걷는다.
중세 시대 서민들의 비참한 삶과 헨리 8세의 철권 통치하에 억눌려 있는 지배층의 분위기, 타락한 가톨릭 수도사들과 그들의 위기감등이 잘 그려진다. 최근 시리즈 2작인 <어둠의 불>이 출간되었다. 입소문에 의하면 전작보다 더욱 빼어난 작품이라고 하니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네 번째 문>
불가능하기 짝이 없는 밀실 살인, 마술사, 강신술. 미스터리 독자라면 누구를 떠올릴까. 폴 알테르의 <네 번째 문>은 현세에 재림한 딕슨 카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 프랑스 출신 작가지만 영국을 배경으로 한 것도 딕슨 카에 대한 흠모가 아닐지. 지금까지 작가가 발표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1930년 대 고전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띄고 있다고 한다. 1987년 작품이므로 이 소설도 어느덧 발표 후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일본의 '신본격'류와 비교해 가면서 읽는 것도 또 다른 재미거리.

 <밤산책>
여름마다 돌아오던 사나이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례적으로 겨울에도 출현했다.
일본 독자와 평단 사이에서도 찬반 양론을 일으켰다는 논쟁의 작품. 그러나 역시 가독성 하나만은 명불허전이다.
고전 추리소설의 수많은 클리셰들이 등장하고, 이를 적절히 엮어 기괴한 분위기와 그로테스크함을 연출하는 것은 작가의 뛰어난 재주이다.

 <악의>
10여편을 읽고 굳이 새로운 작품을 찾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멀어진 후 근 3년 만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였지만, 내가 읽은 게이고의 작품 중 탑을 다툴만하다.
단도직입적인 작가는 제목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만, 독자들이 그 저의를 깨닫기 까지는 조근조근 세세하게 사건의 뿌리를 캐는 가가 형사의 발걸음을 따라 한참을 쫓아간 후가 될 것이다. 사건의 동기를 파헤치는 이른바 "Why done it?"류에서 이만한 최상급의 미스터리를 완성한 작가에게 박수를.

 <잘린머리에게 물어봐>
신본격 작가군을 언급하면 항상 빼놓지 않고 들어가는 이름 '노리즈키 린타로'의 장편 국내 초역이자 그의 대표작.
잘 설계되어 튼튼히 지어올린 콘크리트 건물을 연상케 하는 본작을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바로 '원조'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군에 가장 큰 영향과 영감을 준 작가는 틀림없이 엘러리 퀸일 것이다. 캐릭터, 플롯, 추리 방식, 페어 플레이를 표방한 독자에의 도전 등 퀸의 그림자가 그들의 작품 도처에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퀸의 등장 이후 50여년이 넘게 흐른 20세기 후반 그의 고국도 아닌 일본에서 그의 후계자들을 자처했던 작가군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엘러리 퀸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다.
나의 추리소설 역사에서도 엘러리 퀸은 도일, 크리스티에 이은 세 번째 사랑이었지만, 미스터리팬으로서의 자각을 시점으로 한다면 오롯이 첫사랑이다. 장르에 대한 애정을 돈독히 하게 된것도 역시 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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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0-04-2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어서 추리소설만 읽고 계시는군요. 잘 지내시죠? ^^

oldhand 2010-04-29 17:12   좋아요 0 | URL
아하하, 뭐 다른 책들도 가끔 읽긴 합니다만 평을 올릴 깜냥은 없는 지라 미스터리 관련 책들만 올렸어요. 잘 지냅니다. 야클님도 잘 지내시죠? 애기도 많이 컸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