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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철학자 강신주, 책을 통해 인연이 닿은 동갑내기 친구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철학자다. ‘철학’이라면 좀 어렵게 느꼈던(왜 죽고 없는 철학자들만-철학자의 사상이나 말보다!- 내게 매력적이었던 걸까, 철학은 아직 살아있는데) 나는 차분히 강신주와 친근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처음은 여러 명사들이 공동으로 지은 책에서 우연찮게 시작되었다. 과학을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글이었던 것 같은데 느낌이 생각만큼 강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잊었다, 강신주의 매력을 알기엔 글이 짧았다. 시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다른 저작물들도 보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도 철학도 모두 어려운 장르였으므로 너무 일찍 지쳐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익숙한 소설들을 두고 철학자가 바라보는 감정에 대해 풀어쓴 책이다. 소설의 옷을 입고 있기에 이해가 쉽고 그 안에 드러난 감정들은 철학자의 이론을 끌어오기에 적절한 예인 것 같다. 때문에 즐겁게 읽힌다.
가령 내가 스피노자가 정의내린 감정 중에 하나-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p.79)라고 말하는 철학서를 읽었다고 치자.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이라는 딱딱한 글투를 읽으면서 ‘아, 역시 스피노자가 말해주는 철학이 진짜지’하고 감탄하고 그 글귀를 몇 번이고 곱씹을까? 아니. ‘이 양반, 사과나 심느라 바빴나 말을 왜 이렇게 딱딱하고 짧게 썼데?’하고 불평하지 않을까. 죽은 자의 입에서 나온 말과 살아있는 내가 겪는 현실의 간극을 ‘지금’을 사는 철학자’ 강신주가 직접 메워주고 있다. 그가 적절한 소설을 챙겨 이야기를 풀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줄거리에만 치우쳐 ‘철학적인 접근’을 놓아버리지도 않는다. 소설의 형식과 철학의 알맹이가 잘 어울려 빚어진 책이다. 사이사이 들어간 미술작품이나 (소설)작가에 대한 짧은 정보도 유익한 편이라 책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 제법 흐뭇하기까지 하다.
앞서 예를 든 사랑의 감정은 연민이나 박애 혹은 동경, 호의, 끌림과는 다르게 분류되어 있다. 다른 것과의 차이는 무얼까, 왜 사랑에 빠질까, 스피노자가 말한 ‘외부의 원인’은 사랑의 상대인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은 그리움이란 말인가. 그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기쁨을 누릴 때, 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p.79)고 명쾌하게 해석되어 있다.(‘명쾌하게’라는 말은 강신주의 뒤를 밟으며(?) 만난 팟캐스트를 통해 그의 목소리와 웃음, 강연의 태도를 통해 느낌 감정이다.^^전부를 들은 건 아니지만, 그는 꽤 호탕하게 강연을 하는 듯 했다.) 이어 따라오는 펄벅의 소설 『동풍 서풍』 일부에서 드러나는 주인공 궤이란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을 인용한 부분을 읽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것도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수강 만족도(?)가 높은 이유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후회’라는 감정은 미처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문제를 만나는 경험이기도 했다. 후회가 많은 사람은 결국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 후회 속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걸 조절할 수 있었을 것이란 착각이 숨어있다는 것. ‘후회’라는 단어는 알았어도 그 단어의 밀도는 하나도 모르고 썼던 건 아닌지, 내가 가졌던 후회라는 건 혹시 다른 감정을 잘못 이른 말은 아니었는지 한참을 생각했어야 했다.
‘후회’에 대한 스파노자의 정의에서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우리는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불운을 자기가 초래한 것이라고 믿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은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모든 불행을 객관적으로 보기 보다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런 사람은 후회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다. 결국 후회는 신과 같은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p.393~p.395)
책을 읽기에 앞서 잠시라도 강신주의 목소리와 강연을 이끄는 태도를 알아본 것은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때때로 ‘너무’ 명료하고 ‘너무’ 강단있게 소설을 해석하는 그를 만나면서 그의 목소리를 먼저 알지 못했더라면 그 ‘힘’에 지쳐서 책을 쉽게 넘기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므로. 한편으로는 그 명료한 시선과 태도는 어쩌면 철학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숨어있는 것들 속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거나 부여하거나 명명하는 것, 그것이 본디 철학의 일이므로. (철학은 배움 자체를 밝히는 것이라고, 학창시절 어느 교수는 철학 첫 시간에 그렇게 운을 뗐었다.)
책을 덮으면서 미처 읽지 못한 고전소설들과, 진득하게 만나지 못한 철학서들을 떠올렸다. 그 둘 모두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면 이것은 ‘끌림’이 옳을까.
끌림(propensio)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p.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