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 - 질문하고 토론하고 연대하는 ‘프랑스 아이’의 성장비결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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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의 성장과정을 책으로 지켜보는 기분이 든다. <뼛속까지 진보적이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에서 시작하여 젊고 아름다운 진보주의자가 세상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덧 그녀가 사춘기 소녀의 엄마가 되어 돌아왔다. 늘 그렇듯이 가 어떻게 느끼고 살아왔나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세상 이야기를 한다. 일관되게 진보적이고 일관되게 발랄하다.

세상은 점점 발랄하고 경쾌하며 세련된 진보를 요구한다. 2016년 겨울, 촛불혁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들은 80년대의 대학생들처럼 하나로 똘똘 뭉치지 않았다. 저마다 다 다르다. 드높은 거시적 목표를 올려다보며 비장미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소소하고 발랄하게 이런저런 주장을 펼치며 다같이, 불의한 지도자의 탄핵이라는 거대한 목표로 수렴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미투를 벌이고 노조를 모으고 갑질에 대항하고 학교를 바꾸고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아이를 함께 키우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동네 텃밭을 가꾸던 사람들, 아마추어들이 모여 오케스트라를 열고 뜨개질을 함께 하고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던 사람들이었다. 약한 것들과도 함께 어깨를 겯고자 하던 이들의 생활진보가 모이자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목수정의 생활터전은 프랑스 파리이지만 그의 젊은 날을 내내 변함없이 참으로 프랑스적이면서도 한국 진보의 나아갈 바, 벋어나가는 직선 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 위에 함께 서 있다. 우리에게 들려주는 프랑스 이야기는 참으로 도움이 된다. 만약 그냥 거기서 살기만 하는 이였다면 조금은 부럽고 조금은 시기어린 마음에 배척하고 싶어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프랑스 삶의 우아함과 선진적인 부분을 혼자 누리면서 자기과시용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제비처럼 거기서 겪은 이야기들을 물어다 나른다. 함께 나누자고 한다. 늘 누군가를 인터뷰하고 취재한 것들이다. 그냥 겪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들어간 고찰의 흔적이 있어 그의 글은 얕지 않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교육이다. 다른 모든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프랑스의 민주주의다움을 유지하는 유치원, 초등, 중등의 교육시스템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다. 파멜라 드러커맨의 <프랑스 아이처럼>에서 읽었던 육아의 장면과 유아교육의 장치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탐구와 토론으로 이루어지는 프랑스의 중등교육도. 여기라고 문제가 없겠나마는, 그리고 프랑스 교육이 한국교육이 미래적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마는 그래도 배울 점이 많다.

일단 출산에 있어 프랑스 의료는 산모가 탄탄한 균형과 복근 및 자궁 주변이 출산 전 상태로 회복되게 하는 재활훈련까지 프랑스 사회가 산모에게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드골의 임시정부 하에 새 나라를 건설하던 프랑스는 사회보장법을 탄생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란다.

프랑스 복지 정책의 원칙은 포괄적 복지이다. 정상성 범위를 그어놓고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게 하는 차별을 근본적으로 없앴다. 외국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단다. 부모가 불법체류자일지라도 산부인과 병원에서 무료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다.

 

그렇게 낳은 아기는 좀 엄격하게 키운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기가 잘 시간에 울어도 받아주지 않는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아이들에 대한 엄격한 교육과 부모의 시간도 존중하도록 키우는 (특히 식사예절)은 우리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아이가 고집을 부리면 프랑스 부모들은 설명하고 설득한다. 그리고 선택의 범위를 제시한다. 아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이니 맘대로 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면서 인내심을 갖게 한다.

프랑스 유치원은 교육부 소속이다. 유치원 교사는 초등교사 등과 마찬가지의 교육부 소속 공무원이고 유치원은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입학을 원하는 아이들을 모두 무료로 받아주어야 할 의무가 국가에 있단다.

 

초등 저학년 시민윤리 시간에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 중 하나가 인간의 존엄이고 교과목 중에는 깨어 있는 이성을 가진 시민 양성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프랑스 모든 공립학교의 교훈은 자유 평등 박애이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중학교 4학년 때 노조 문건 작성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세계인권선언(특히 제 23)과 프랑스 헌법 속 노동자들의 권리, 그 역사적 법적 근거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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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2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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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터지는 충청말 -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상작가 작품집 속 터지는 충청말 1
이명재 지음 / 작은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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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하고 아름답다. 국어수업용으로 쓸 자료가 많다. 그런데... 이제 젊은이들은 이런 말들을 모른다. 관심도 없다. 그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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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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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신념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 역시 그럴 것이다. 왜곡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저러지 않는지 돌아보지만 스스로의 편견을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나라나 문화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대학시절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판단은 역사적인 사실과 공부에 근거한 것이지만 정치적으로 그러하다고 해서 미국 문화와 미국 사람들에 대해 섬세하고 복합적으로 잘 알고 판단하지는 못한 것 같다. 미국, 일본 = 악 이런 식의 도식은 얼마나 단순하고 저렴한 판단인가 말이다. 미국에 대한 나의 지식은 매우 일천하다. 하워드 진을 통해 접한 몇몇 역사적 판단이 다이다. 그러다가 영어공부를 하려니 어쩔 수 없이 미국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프렌즈>도 보고 <모던 패밀리>도 본다. 역시나 하는 부분도 있고 의외인 부분도 있다. 인종차별, 이국인이나 동성애 차별이 있고 생각보다 점잖은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다가 모지스 할머니의 글을 읽게 되었다.

 

모지스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로 치면 구한말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성실하고 바지런하게 살았다. 그리고 아주 긍정적이다. 지금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우월감이나 자유분방함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청교도적인 소박함, 근면함, 낙천성이 고스란히 그의 삶과 그림에 묻어 있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젊은 시절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는 좋았지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게다가 농촌의 삶이라 대공황이라든가 도시노동자들의 애환 같은 그림자도 없다. 미국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면모를 본 것 같아서 신선했다.

 

놀라운 건 할머니가 70세가 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의 두 어머니(엄마와 시엄마)들게 70대가 된 걸 슬퍼하지 마시라는 뜻에서 이 책을 선물했다. 나중엔 그림을 따라 그려보고 싶어서 나 자신을 위한 책을 샀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딸은 백화점에 가서 모지스 할머니 그림으로 만든 도자기 접시를 내 생일 선물로 사왔다. 묘하게 할머니는 모녀 3대를 이어주고 있다. 돌아가셔서도 그 존재로써 사람들을 연대하게 하고 위로해 주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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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 행복지수 1위 덴마크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행복사회 시리즈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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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덴마크) 오연호

 

남의 떡은 다 커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소련의 노동자들이 공장 일을 끝내고 서점에서 철학책을 아주 싼 값에 사서 읽는다더라, 하는 말이 부러웠던 적 있었다. 한 때는 프랑스의 복지제도가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못 살 곳은 아닐 텐데도 가끔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교사로서 엄마로서 나는 적어도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는 세상, 아이들이 안전한 세상, 아이들이 서로를 헐뜯지는 않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깨끗한 대중교통, 깨끗한 물과 부족하지 않은 먹거리,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최소한의 교육의 기회, 대체로 괜찮은 주거환경, 나쁘지 않은 치안... 어디까지나 세계 보편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정도라면 아이를 키우면서 그럭저럭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불안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불안하고 불편해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을 정도다. 바깥세상에서는 한국이 전쟁 때문에 불안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우리는 전쟁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아이들을 행복하게 낳아 기를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고민과 모색이라면 우리를 이런 불안에서 탈출하게 해줄까? 적어도 그런 탈출에 기성세대로서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겠다는 초조감이 자꾸 든다. 나이든 교사가 되고 내 아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그런 시간이 다가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북유럽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북유럽을 공부하는 일이 과연 우리 세상을 바꿀까? 답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공부라도 하면 조금 덜 불안하다. 그래서 찾아 읽어본 북유럽 교육 이야기들. 저자가 과연 객관적 기준으로 취재하고 썼다고 100프로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만큼 오연호는 확신에 가득차서 덴마크를 지상의 낙원처럼 묘사한다. 그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그러나 냉철하게 글을 읽는 것은 내 몫임을 밝혀둔다.

 

덴마크 학교에서는 9년 간 담임이 똑같단다. 교사에 대한 신뢰가 높다고 한다.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교사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에는 교사들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다. 과거 교사들의 잘못으로 지금 젊은 교사들이 고초를 겪는 것에 미안함을 느낀다. 이제는 대안을 논해야 할 때다.

 

덴마크 교실에서 같은 학생이 9년을 공부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은 성적과 등수를 최우선으로 삼는 문화 없기 때문이란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어떤 환경에서라도 경쟁이 중심인 교실에서는 미움과 질시가 중심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겠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청소년의 스트레스, 거기에서 비롯되는 거친 언행, 교사에 대한 불신 등 모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덴마크 교실에서 뛰어난 학생이 있으면 교사는 네가 최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다른 친구를 좀 도와주렴.’ 이라고 말한단다. 이 역시 성적이 삶의 지표가 되지 않기에 가능한 문화일 것이다. 대한민국 교사와 부모들이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주범이라고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렇게 아이들을 추동하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기 어려운 것을 잘 알기에 빠지는 딜레마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덴마크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서 통한다.

이 말도 뼈아프다. 우리는 학교에서 종종 그거 배워서 어디에 써먹어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 교육과정을 짜는 이들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7차교육과정은 과감한 재구성을 허용하는데도 그러지 못하는 교사들도 문제다(물론 고등학교는 입시라는 장벽이 가장 문제다. 나는 중학교 교사라 교과서나 입시나 성적의 질곡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삶에 밀접한 문학과 문법과 글쓰기를 가르치려 애쓴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실생활에서 유용한 걸 많이 가르쳐주신다는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좋다. 우리 학교 기술 선생님들은 늘 실습을 하게 하고 아이들 스스로 전기를 다루게 하고 공구 사용법을 가르친다. 그래도 아직 노동법이나 계약서 쓰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못 봤다. 학교에 담론만 넘치고 실습은 모자라다. 담론조차 올바른 의식을 형성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 도대체 대한민국 학교에서는 무얼 공부하는 걸까? 회화가 되지 않는 영어와 시험 변별력을 위해 고난도 문제가 범람하는 수학, 그리고 너무나 분석적으로 읽어야 하는 문학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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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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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이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단지 글빨이고 말빨인 걸까. 내면의 옹골찬 어떤 힘일까.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그것이 없이 번드르르한 글을 쓰는 이들은 형용할 수는 없으나 어딘가 아쉬운 느낌이 남는다. 은유의 글을 읽으며 여러 번 감탄한다. 이 사람의 힘은 무엇일까. 삶의 궤적에서 최선을 다한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글을 참 잘 쓴다. 많이 읽고 생각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글 자체를 잘 쓴다.

글로 명성을 얻는 이들이 모두 진정성과 능력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학벌이나 인맥이나 마케팅으로 허명을 얻는 이들이 더 많다. 그런 세속에서 자기 힘만으로 시멘트를 밀어내고 싹을 틔우는 은유 같은 이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언젠가는 그도 (어쩌면 벌써) 일종의 문화권력이 될지도 모른다. 유명짜한 사람들과의 인맥을 자랑하며 그들만의 리그에서 찬사와 존경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헛된 짓으로 보이지 않고 은유라면 그런 걸 누려도 된다는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영예는 진정한 영예이기를 기원한다.

두보를 언급하며 은유는 이런 말을 한다.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두보를 보아도 그렇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대체로 그렇다. 젊어 정의를 부르짖다가 변절하는 이들이 꽤 있다. 다들 의아해 한다. 그런데 대학시절 그런 이들을 많이 보았다. 그 젊은 시절에도 그 부르짖음을 자기 허명의 훈장으로 삼으려 들던 이들. 그들은 영락없이 정치권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이들은 변절했다.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도 젊은 날의 성찰을 벼리지 않으면 나이 들어 이상한 꼰대가 되어간다. 그래서 젊은 날의 자유함’, 성찰함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글 중에 교사로서 내게 와 닿는 말이 있었다.

배울 때 기쁨을 느끼지 않는 자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

가르치는 이에게도 지옥이고 그에게 배우는 이들에게는 재난이다

   

 

그리고 킥킥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말.

날 괴롭히는 것들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살림하며 일을 해본 모든 여자들이 공감할 것이다. 대부분은 철이 들지만 어떤이는 망가져 버린다는 게 문제다(살림이 모든 여성을 정신적으로 업그레이드 시키지는 않는다. 그냥 생활의 고단함에 세속적으로 굴복해 버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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