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 북유럽 사회가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
아누 파르타넨 지음, 노태복 옮김 / 원더박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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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식 삶의 형태를 베끼다시피 살고 있다. “왜 꼭 미국식이어야 해? 만약 베끼고 닮으려 애쓸 수밖에 없다면 다른 대안은 없는 거야?”라며 서유럽식 혹은 북유럽식을 들먹이면 기존의 미국식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유럽, 특히 북유럽식을 일종의 사회주의취급한다. 저자는 노르딕 국가들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힘써 증명하려 한다. ‘20세기에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와 맞서 목숨을 바쳤던 핀란드인의 수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죽은 미국인의 수와 얼추 같다.(핀란드 인구는 미국의 1/60)’ 라든가 오늘날 노르딕 시스템은 현대 생활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시민에게 최대한 많은 물질적 경제적 독립을 제공하게끔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면서 노르딕 사회는 최대한의 자율을 제공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르딕 사회가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재작년 여행으로 다녀온 여름의 북유럽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유럽 여행 때마다 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유럽에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오이다. 그래도 북유럽의 복지 제도와 사람들의 삶의 철학 일부는 빌려다가 우리나라에 적용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요즘 정책에 북유럽식 정책과 제도들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정치인, 행정가들이 꽤 있는 것 같다.

 

특히 저자처럼 핀란드인으로 태어나고 자라 미국에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북유럽의 장점들은 더더욱 도드라지게 보일 것 같다. 지구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두 선진국, 미국 북유럽, 말로만의 비교가 아니라 살아본 사람의 경험에 직업적(저자는 저널리스트이다) 특성을 살린 취재, 즉 결이 다르지만 하여간 두 지점에서 접근한 팩트에 근거했으니 이보다 설득력 있는 비교보고서가 또 있을까 싶다. 이 책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너무나 다른 두 선진국의 대비된 모습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경제력은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미국을 닮은 경제, 교육, 문화 형태를 지닌 우리나라이기에 더더욱 남 이야기 같지 않은 것이다.

 

 

출산과 육아, 보육과 교육에서 노르딕은 국가의 공적 책임이 강조되는, 마음껏 아이를 휴가를 받아 육아에 전념할 수 있으면서 치우치지 않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인생 목표 2/3, 즉 자신의 성장과 교육, 자식의 성장과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니 삶의 무게가 한껏 가벼워진다. 반면 미국은(한국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에 놓인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제도적 장치와 경쟁과 성취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가치관은 당연히 함께 가는 세트이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보육과 교육 현장마저 내내 경쟁가도를 달려야 하는 것이 미국과 한국의 현실이다.

 

핀란드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기 상자를 보내준다. 전국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보편교육의 복지는 확대되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수월성 제고라는 이름으로 영어 유치원, 초등 사립학교, 자사고나 특목고 등으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육적 출발선 자체를 달리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있다. 겉으로는 보편교육을 말하지만 미국과 비슷하게 자유주의, 엄밀히 말하면 자본주의적 철학에 기반한, ‘사적 소유 존중하고 자유롭게 교육적 선택을 하라는 주의다. 자유를 존중하면 경쟁을 당연시하는데 근본적 불평등에 대한 개선의지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니 미국과 우리는 참 많이 닮았다. 어린이집부터 차별은 시작된다. 적어도 중학교까지만이라도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하긴, 작년 사립유치원 보조금 전횡 파동이 있을 때, 절반 가까운 국민들은 사립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의 공립화을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 인정의 논리 때문이었고 많은 댓글이 우리나라가 공산주의냐, 모든 유치원교육과정을 공립화하게?’라는 논조를 유지했다.

 

나는 최근에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미드를 열심히 보고 있다. <프렌즈>를 넘어 <모던 패밀리>를 거의 다 보았는데 영어가 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많은 상념의 골목에 접어들게 된 것은 사실이다. 미국 중산층 가족 이야기인 <모던 패밀리>에는 취업과 해고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쉽지 않은 해고가 미국의 작은 규모 사업장에서 쉽게 거론되는 게 의아했다. 이 책에 의하면 미국은 고용도 해고도 비교적 유연한 것 같다. 여러 가지 면에서 못 가진 자들에게 불리한 사회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민중의 분노따위가 별로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미국 교육이 엉망이네 어쩌네 해도 racism에 대한 경계는 제법 뚜렷해 보이는데 합리적 교육이 행해지는 사회에서 노동인권이나 보편복지에 대해 어찌 그리 무지한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노르딕에서는 당연한 유급 출산 휴가나 휴직, 아빠 육아 등이 미국에서는 힘겨운 일이란다. 의료보장은 민간기업에 의존해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작 혜택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단다. 그런 시스템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혜택을 받을 당사자들이 국가 의료보장의 필요에 대해 냉담하다는 것이다. 당연한 권리를 선택의 문제, 자유의 문제로 오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핀란드를 비롯한 노르딕 국가의 학생 학력 수준이 높고 그것은 교육복지가 뛰어난 점과 보편교육을 중시하는 교육철학이 원인일 것임은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다. 미국은 교육비가 많이 들고 그 모든 과정이 개인의 선택과 능력에 달려 있다. 취업과 경제적 부에 연관이 되니 당연히 좋은 대학 교육에 대한 선망이 높다. 재능의 차이에 환호하고 100%의 재능 차이가 낳은 10000%의 소득 격차를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고 멋지다, 당연하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환호한다. 그런 사회문화 때문에 사람들은 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똑똑한 수억의 사람들, 특히 학자들, 언론인이나 지성인들이 왜 그런 미국 제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걸까, 참 궁금하고 궁금하다.

 

핀란드도 1940년대 소련과의 전쟁 직후 미국 못지않은 교육불평등의 시대를 지나왔다. 대대적인 학교개혁으로 그것을 극복했단다. 사회적 혁명만큼 돌풍적이었을 것 같다. 우리 사회도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분단입시야말로 사회를 관통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 고리가 아닌가 싶은데 그 두 분야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분야의 소소한, 제도적인, 부분적인 개혁은 많은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핀란드처럼 모든 교육을 공립화할 수는 없을까? 적어도 교육비만큼은 보편복지를 실행할 수는 없을까? 교사교육의 수준을 높이고 그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면 안 될까? 하긴, 교육만 그리 하고 다른 분야를 자본주의의 자유로운(과연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손길에 놓아둔다면 경쟁과 성취의 욕구 때문에 교육의 균등성을 그대로 둘 리 없는 부자, 가진 자, 기득권자들이 힘을 행사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어서 가히 혁명적일 정도의 개혁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어 내려면(게다가 분단의 문제(국방)까지- 삼파전이로다) 거의 건국을 해야 할 수준일 것이다.

 

미국 학교는 공적으로 예산 투입을 많이 하지도 않고 격차가 심하다. 게다가 자유경쟁이라는 기치 아래 시험을 치러 학교평가를 하고 그에 따라 예산을 차등지급한다. 시험에 들이는 비용이 매년 17억 달러란다. 차라리 그 돈을 가난한 학교에 투입하면 청소년 범죄 문제 및 국가적 학력저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은 그대로 교사에 대한 평가이자 학교에 대한 평가가 된다. 이 제도가 좋다고 본떠서 전국 학업성취도평가라는 것을 도입한 대통령도 있었다. 하지만 핀란드 등이 입증한 바, 학생과 학교를 경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결코 학력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정책 결정자와 학자들은 몰라서 그리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그들도 그 공과 과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다만 기득권자들에 유리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놓고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는 것이다. 네가 좋은 대학 못 가고 잘살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너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고 네가 경쟁에서 도태된 탓이다, 는 논리. 왜 노르딕처럼 탁월함이 아니 고르고 공평한 교육을 위해 천천히 함께 가기를 추구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핀란드 속담 중에 아이의 일은 노는 것이다.’ 라는 것이 있단다. 날씨가 참 좋았던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거리에서 많은 노인들이 배낭을 메고 등산이나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 맑은 공기를 쐬며 일 년에 몇 안 되는 쾌적한 가을을 즐겨야 하는 사람은 어린이들, 청소년들 아닌가. 그런데 같은 시각 그들은 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학원을 향하고 있었다. 슬픈 자화상이다..

 

한때는 우리나라 학교가 낙후되고 교육이 후진국적인 이유 중 하나를 국방비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래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학교 예산이 풍부한 지금도 여전히 교육적인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걸 보면 당연히 예산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핀란드의 교육개혁이 시작되었을 1860~70년대는 경제적으로도 힘겨운 시기였다단다. 교장도 수업을 하고 행정비용을 줄이고 표준화된 전국단위 시험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등 지혜로운 교육 행정 으로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다시, 문제는 철학인 것이다.

 

저자는 두 나라의 장점을 결합한 교육을 상상한다. 핀란드의 저렴하고 느슨한 탁아, 잘 훈련된 교사, 집에서 가까운 우수하고 균질한 학교, 무상 교육에 미국의 다양한 학생 구성, 학생들의 개성과 자주성 인정 교육, 체계적이고 고무적인 교육방식, 연극수업 및 과학 프로젝트 수업 및 토론 동아리 등등을 결합한.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식 교육을 70년 이상 해보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므로. 노르딕 방식을 도입하는 신선한 경험을 하기에도 우리는 근대적 관점에서 아직 신생국가에 가까우므로.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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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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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은 말 그대로 걷기에 대한 통찰의 문학작품이었다면 이 책은 소소한 일상과 책, 상념들을 담고 있다. 특히 왜 쓰는가라는, 작가들 누구나 스스로에게 무수히 던져보았을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들이 담겨 있다. 어머니 집에 돌봐줄 이가 없게 된 살구나무 열매들을 거두며, 그것을 잼으로 담그는 과정에 소소히 작가가 읽고 겪은 일들이 담긴다. <걷기의 인문학> 먼저 읽어 나에게는 위대하게만 느껴졌던 작가가 어머니 때문에 애면글면하고 독박부양에 억울해 하는 모습이 친근하다. 그 와중에도 정신적 중심을 잃지 않는 고고함(사실은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비슷한 모습을 정희진이나 은유에게서 본 적 있다. 작가라 하면 꽤나 우아할 것 같지만 생활은 누구에게나 누추하고 주름진 것, 게다가 이들처럼 최선을 다해 사는 이들은 먼지와 밥차리기를 벗어날 수 없었던 일상, 그럼에도 그 위에 피어나는 정신승리의 결과가 글쓰기였다. 나는 그들과 연대의 연장 선상에 나를 놓아본다. 이름을 얻고 아니고를 떠나 우리는 모두 치열하게 살아왔다.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책만 읽고 글만 쓴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글은 더욱 빛났나 보다. 그래서 더욱 나는 그들의 글에 마음이 꽂혔나 보다. 리베카 솔닛은 버릴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살구잼을 담그면서 깨닫는다. 내 앞에 놓인 두 개의 유리병은 받아 적은 이야기 같다. 두 유리병에는 그렇게 보관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 담겨 있다. 어떤 이야기는 사라지게 두는 편이 나았겠지만, 무언가를 적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이야기를 그 모습 그대로, 설탕물에 담근 살구처럼 고정시키는 일이다. 일상은 곧 글의 필연과 닿는 비유가 된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을 인용하면서 그이는 글쓰기가 왜 필요한지 설파한다.

글쓰기에 관하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할 이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살아가기 위해. 폭력이나 무감각으로 누군가의 삶을 앗아가는 것을 정당화하고 삶의 실패를 변명하기 위해, 라고 말하고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기대로 가득한 고치처럼 술탄을 감싸고, 결국 그 안에서 그는 조금은 덜 잔혹한 사람이 되어 나옴으로써 문학의 사명을 다한다. 그러면서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문학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도 언급한다. 즉 문학은, 이야기는, 서사는 인간사 안팎으로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임을 말한다. 내가 평생을 걸쳐 스스로에게 묻는 것, 왜 아이들에게 실용 이상의 문학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일까, 글쓰기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문학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거냐고 묻는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에 대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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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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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정말 잘 쓴다고 감탄하게 만드는 사람이 몇 있다. 리베카 솔닛, 정희진, 은유. 유발 하라리, 유시민...

그 중 정희진은 박학다식함과 적확함으로 감동적인 글을 쓴다. 그런 정희진이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으로 꼽은 이가 있다. 놀라웠다. 고수가 인정하는 고수라니.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라니. 그가 바로 김혜리다. 그래서 당장 그의 책을 샀다.

읽으면서 놀랐고 매혹되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제자에게 선물했다.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그리로 초야에 묻혀 있었구나.(물론 그는 지금도 활발히 저작활동을 하는 기자이다. 초야에 묻혀있다는 것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아쉽게 생각해 한 말일 뿐이다)

 

그가 다루는 영역이 영화와 미술이라 대중에게 엄청 다정하지는 않다. 그러나 근래 이토록 아름답고도 섬세한 글을 쓰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정치사회적 의미 있는 글을 읽어야만 좋은 독서를 했다고 흐뭇해 하는 나인데도 그런 색채가 쏙 빠진 글을 읽고 감탄한다. 한때 신경숙이 풍미했던 90년대, 오직 그 문체만으로도 신경숙을 찾아 읽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 문장의 미학만으로도 김혜리의 글을 더 찾아 읽고 싶어진다.

 

글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아주 오래된,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을 새삼 한다. 역할과 기능이 빠진 글 자체라는 게 존재 가능하느냐는 질문, 그런 글이 필요하냐는 질문, 해묵은 논쟁. 그런데 김혜리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스스로 다시 질문하게 된다. 그는 소위 말하는 순수문학을 한 이도 아닌데 말이다. 정말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면, 안 팔려도, 영향력이 없어도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런 욕망, 아주 근본적인.... 욕망.

 

술은 행복과 불행, 섹시함과 분노를 모두 부풀리기에, 아주 잠시나마 삶이 꽉 차 있는 듯한 감각을 준다.

 

취기가 오를 때면 차오르는,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된 듯한 안온함이 여기 있다.

 

이런 문장들을 보면 김혜리는 혼자, 취했을 때, 생각에 잠겼을 때, 미지의 것으로 충만한, 그런 것들을 잘 아는 사람 같다. 나는 그의 문장 몇몇에 작은 깃발을 붙여 놓고 성우처럼 읽기 연습을 해본다.

 

우리는 사랑할 때 상대를 나로, 인간을 신으로, 기도를 율법으로 착각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매끄럽고 딱딱하게 경직돼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렇게나 혐오했던 군중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내 집에 손님으로 초대 받은 기분이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하염없이 기다리다 문득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최윤정 <노스탤지어> 연작에 부쳐)

 

죽음의 냄새와 질감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한 화가였다(카라바조를 일컬으며)

 

심한 통증이 엄습하면 우리는 갑자기 몸을 하나의 공간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자궁은 동굴이 되고 내장은 협곡이 된다. 격심한 감정은 혈관을 달리며 전신에 메아리친다. 영혼과 의식이 거주하는 우리 안의 차원 없는 공간이 불현듯 실루엣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욕망은 언제나 사랑을 참칭하며 상대를 나의 일부로 만들고자 한다. 은둔에 가까운 둘만의 생활 속에서 화가는 끝없이 통합의 환상과 분리의 고통을 오갔으리라.

 

개는 인간도 아니면서 이미 짐승답지 않게 됐다. 고양이가 은근한 거리를 둔 우정의 마스코트라면 개는 자아를 팽개친 애정의 표상이다. 고양이가 예술의 포즈를 가졌다면, 개는 때로는 비굴하게 매달려야 간신히 지탱되는 삶의 얼굴이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모두도 한 번쯤은 이 개처럼 연약하고 맹목적이었다. 고야의 <>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깊은 우물에 빠져 허덕였던 인생의 연약했던 한 철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의 뜻과 그 종착점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걷고 있는 이 길의 풍경을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

그날 밤 야마시타는 정녕 혼자였을 수도 있고, 깊이 고독했던 나머지 혹은 불꽃의 흥취가 도저히 남과 나눌 수 없을 만큼 충만해 사람 무리를 짐짓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야마시타 기요시 <불꽃놀이>에 부쳐.18세에 방랑을 시작해 밥을 얻어먹고 마을을 떠날 때면 작품을 남기곤 했다는 일본의 화가 야마시타에 대한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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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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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기란 무엇인가. 글쓰기의 유의미함에 대해서 은유, 정여울, 리베카 솔닛, 정희진 등이 이야기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버지니아 울프도. 누군가 나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세 번째 책이 나왔을 때. 바쁜 와중에 책을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물었지만 그 질문은 내게 나는 왜 글을 썼으며, 쓰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으로 환원되었던 기억이 있다. 나의 답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였다. 살아있음의 증명을 글이 대신해 준 것이었다. 어려서는 글이란 다른 예술적 재능들과 마찬가지로 타고나는 것이지, 범인들이 함부로 집적거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학을 공부하겠노라고 선택했지만 그냥 읽는 게 좋았고 나아가서는 가르치며 아이들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을 뿐이지 쓰는 게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천상의 문장은 타고나야 쓰지 갈고닦아 쓸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내가 제자들에게 문학이 곧 삶이 되는그런 삶을 가르쳐왔듯 나도 삶 속에 녹아 있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 것뿐이다. 소소하고 시시하고 사사롭지만 글로 담아내며 내 삶을 다독이고 조금이라고 괜찮은 사람이 되려 애쓰기, 힘든 일을 글쓰기로 위로받기,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세울 때 글쓰기로 주변을 다스리기, 등등

 

고미숙이 말하는 글쓰기의 의미는 나의 것보다는 좀 더 학구적이기는 하다. 일단 우리의 몸이 걷고 움직이며 살아가듯 우리의 정신은 글쓰기로 그런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변과 교감하기 위해서(독설적 글쓰기를 버렸다 한다), 아기가 직립을 위해 고개 들기를 하듯이 튼실한 일상과 거룩한 비전을 세우기 위해서,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주도하기 위해서,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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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동어미전
박정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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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댁은 화기가 뻗쳐오를 때면 늘 하던 대로 두어 번 숨을 고르고는 골내댁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이 사람아 성내지 마고 저 사람 심정을 살피게. 젊으나젊은 기 시집이라꼬 와가 허구한 날, 남의 빨래품에 방아품 팔아 늙은 시어마이하고 병든 서방을 봉양할라만 그 속이 얼매나 썩었을로. 저도 오죽 답답꼬 속상하만.... ’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이사람아 성내지 마고... 하고 자기자신에게 이야기를 나눈다. 융이 말한 자기화에 성공한 성숙한 인격이다.

그리고는 두어 걸음 물러서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골내댁의 손을 잡았다.

골내 새사람, 내 하나 물어봄세. 그래, 골내서 살 적에 남들 다 가는 화전 놀음, 자네 혼자 안 가이 그 속이 시원턴가?” 질문하며 설득하기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청풍댁이 골내댁의 언 손을 연신 주무르며 말한다. 청풍댁은 속으로는 골내댁의 골질하는 작태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해의 마음을 내오는 것이다. 어른은 이런 거다.

 

책에는 너무 많은 여성서사가 들어있다. 처음에는 골내댁이나 청풍댁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봄이 이야기를 하는가도 싶었다. 한참을 읽다가 왜 제목이 덴동어미전인가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는 덴동어미를 그저 엿장수로 동네 이야기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 정도라 생각했으니.. 알고 보니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되 끝끝내 강퍅해지지 않고 세상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인 덴동어미가 화전놀이에 가서 좌중을 이끌어가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그는 온갖 세상사를 짊머졌을 뿐 아니라 그것을 나름대로 극복한 해탈적 존재이며, 혼자 고난을 극복하여 영웅이 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아우르는 사회자이며 지도자 역할을 한다. 그런 인물 현실 세계에서도 남자들 서사에서도 흔치 않다. 더 놀라운 게 있다

 

덴동어머를 천하다 기구하다 배제하지 않고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멍석을 깔아주는 이가 동네 여성 지도자 역할을 하는 안동댁이다. 반상이 어우러지고 있는 자, 가난한 자가 함께 노는 대동의 세상, 비록 단 하루지만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해탈과 해원의 시간이 펼쳐진다. 고집 세고 권위주의적인 양반 남자들과 봄이를 탐하는 악한 의붓오라비도 나오지만 덴동어미가 겪은 남정네들이 모두 기구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단순히 남녀 대결구도를 만들지 않는 지혜로움도 엿보인다.

단 하루의 화전 놀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펼치는 신세한탄에서 사람들은 덴동어미의 기구함을 통해 오히려 힘을 얻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저리도 기구하건만 끝끝내 살아내는 그 힘, 그 모든 기구함을 노래와 각설로 풀어내는 긍정의 힘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녀들은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인간다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들 역시 청풍댁처럼 덴동어미처럼 너그러운 이해와 연대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친정 어머니가 읽을 책을 빌려달란다. 공부는 많이 못했지만 젊은 시절 서점할 때 책깨나 읽었던 양반이다. 총기가 좋아 젊은 시절 읽은 책이며 팔았던 책의 내용과 저자를 다 기억한다. 지금도 소일거리로 한자를 쓴다. 그런 어머니에게 좋은 머리를 물려받고도 동생들은 식구들이 모여 술 마시는 자리에서 어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대기업에 다니며 억대 연봉을 받는다고 자기들 하는 일의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면 어머니가 하나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대화의 중심을 고루 돌리며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줄은 왜 모르는 걸까. 그나마 엄마는 요즘 무슨 드라마 보셔?” 하고 질문을 던져 겨우 노인네가 말문을 열려 하는데 화제를 가로채서 회사 이야기를 하는 동생이 얄밉다. 엄마는 다 알아듣는다. 엄마가 너보다 책도 더 많이 읽는다, 이 헛똑똑이야....

 

어머니는 최근에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과 도올의 강의록을 읽었다. 그리고는 책을 빌려달란다. 나는 이금이의 <소희의 방>과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그리고 이 책 <덴동어미전>을 챙긴다. 이 험난한 여자들의 이야기에 안 그래도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76세 노모는 우울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10년 병수발 후에 2014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고, 혼자 쓸쓸해서 늘 너넨 짝꿍이 있지, 난 없다!’를 외치는 이 양반은 덴동어미의 기구한 삶에 반사적으로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으려나.... 내일은 엄마랑 족발이라도 시켜먹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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