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공감으로 감동으로 비통함으로 함께 눈물흘렸던, 쓰는 이도 쓰면서 한번쯤 눈뮬 흘렸을 법한, 심장 속에 사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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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신부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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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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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지음 / 해냄 / 1997년 7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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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9,900원 → 8,91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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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박경수.박상준 글, 이우일 그림 / 뜨인돌 / 1999년 7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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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8,800원 → 7,920원(10%할인) / 마일리지 44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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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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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약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교육의 바탕임을 눈물로 가르친다.
몽실 언니- 반양장
권정생 / 창비 / 2000년 4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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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때는 저 북녘 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책, 요즘 아이들에게 고결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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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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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어쩌다가 몇 편을 본 적이 있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가 언급되던, 그리고 나는 오늘 꽃을 받았습니다 등. 이건 뭐지 싶었었다. 그리고 잊었다. 워낙 TV를 안 보기에 볼 기회도 거의 없었다.

제자가 권해서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어 있는 제자가 이 프로그램을 꼭 보라고 여러 번 권했다. 그러고도 미루고 있었는데 북하우스에서 책을 보내온다. 하루 밤 사이 책 한권을 다 읽고 나는 또 머리 속 지구가 시속 수천 마일의 속도로 도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당장 다음 날부터 수업에 활용한다.

첫수업- 어버이 날 전 우리 학교는 부모님께 '사랑의 편지'를 쓰게 한다. 어버이닐 드리고 답을 받아와 내면 우수작품을 시상하기도 한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를 먼저 보여주었다. 말이 필요할까. 아이들 뒤에서 빔 프로젝터로 확대되어 흐릿한 영상을 함께 본다. 나야 이미 본 부분인데, 그래도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난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40개 가까운 어깨는 미동도 않는다. 저 표정을 안다. 집중, 감동, 서늘한, 충격... 그럴 때의 표정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님의 미래와 자신의 다짐을 생각하며 편지를 쓴다. 어느 해보다 길게...

두 번째 - 국어 교과서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실렸다. 그래서 '부끄러운 기록'을 보았다. 이 책의 200쇄는 문학사적 성취가 아니라  불평등 대한민국의, 아직도 진행중인 철거와 노동자 농민 억압과 불평등의 현실을 반영한 부끄러운 기록이라는, 그런데 이 모든 메시지가 다큐멘터리 같은 자료화면으로 이어진 - 조세희 씨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귀하기도 한 - 영상자료이다.

세 번째 - 양성평등 글짓기를 하면서 '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보고 시작했다. 가정폭력은 좀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양성불평등의 논제이지만 '이갈리아의 딸들'과 여러가지 남녀평등사의 기록들과 함께 아이들의 글쓰기를 촉발하는 데 매우 적절했다.

네 번째 - 이육사의 평전을 공부하는 수업 시간 제일 마지막,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의 삶과 시세계를 비교하여 조사하는 수업을 마치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2부'를 본다. 아이들은 세 사람의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서시''별헤는 밤''참회록' 따위의 시들을 더러더러 만났다. 그것을 (승화된) 영상으로 만나면서 '독립운동'과 무관한 듯 보이는데도 왜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 부르는지 100% 공감한다.

지식채널e에는 떠오르는 몇 개의 키워드가 있다. 지성, 감성, 자막과 음악의 미학, 그리고 죽음.

객관적인 자료화면과 통계수치들이라는 아주 '지적인'  재료들을 감성적으로 버무리는 데에 자막 - 말을 아끼는 간결함, 적절한 문장, 핵심어 먼저 띄우기, 마치 내레이션을 하듯, 말하는 호흡과 같은 속도로 등장하거나 명멸하는 자막의 호흡, 그리고 그림자까지 - 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 같다는 것. 그리고 음악 선정이 뛰어나다는 것. 같은 노래라도 반주 없이, 음향 없이 또 장면에 딱 맞는 노래의 바로 그 구절을 넣어주는 솜씨가 대단하다.

그리고 죽음이 있다. 모두 다는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 쓸데없이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라 여운을 남기는 영화처럼 서늘하게 명료화된 죽음이 있어서 겉으로는 참으로 건조하면서 안으로 습기가 차오르는 감동이 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만의 색깔이 보인다.

책으로도 참 잘 만들었다. 영상이 주는 충격과 감동이 책으로는 채워지지 않을까봐 설명을 덧붙인 부분은 논술자료로 매우 훌륭하다. 처음엔  출판사의 선물로 (되돌려진 것을 다시 보내주는 배려까지) 받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한 제자들을 위해 여러 권을 한꺼번에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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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s678 2007-05-27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꽃선생님은 참 훌륭한, 그리고 좋은 선생님이신 것 같네요. 선생님의 제자들이 부럽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있는 수업을 되돌아보게 되네요.

수아빠 2008-06-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e>에 관한 설문조사로 도움을 받고 싶은데요
http://blog.naver.com/image2two 에 오셔서
내용을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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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이 그립다.

문학의 상업성을 생각한다. 문학은 가난하고 겸손하기만 해야 하는 거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마케팅 잘 해서 정말 좋은 작품이 잘 팔리게 해야지 문학(책)은 늘 점잖은 척 팔짱을 끼고는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품위 있는 독자라면 와서 읽든지 말든지 뭐... 이런 태도는 이제 버려야 하는 거니까 어차피 자본의 세상에서 그나마 사람들의 ‘인간성’을 지키는데 문학이 해야할 몫이란 게 있는 거니까, 문학의 상업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화적 교양이 자본적 교양(?) 앞에서 고사되어 가는 요즘에는 더...

그렇다. 그렇긴 하지만 역시 문학이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어 (좋은 작품인데도 안 팔리는 안타까움을 넘어) 진정한 값어치보다 과대포장되는 건 역시 좋은 일이 아니다.

은희경의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읽고 나니 그토록 선전할 만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알라딘 홈피 상단의 배너가 불편하다.

창비 출판사를 아직 좋아한다. 옛애인 같은 느낌이다. 지금껏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련히 남아있는 그리움,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그 면모를 나이 들어서도 아직 간직하고 있기는 바라는, 젊은 날에 대한 경의로서의 추억... 창비에게 80년대의 창비 정신이 아직 남아있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은 출판사’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때 애인이었으니까’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은희경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나쁘진 않은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가 있지도 않았고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공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이전 것들이 나름 쿨하면서도 낡은 한옥의 어두운 퇴마루를 비추는 노란 가로등불같은 정서가 있었다면) 매우 진보했다. 현대적이란 느낌이랄까. 그런데 다 읽고 나서, 그래서? 그게 뭐? 이런 느낌이 자꾸 드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자랄 때 구세대에 비해 많이 자유로워진 사고를 지니고 컸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의미있게 살기’에 대한 깊은 책임감의 세대이기도 하다. 그저 재미있는 것, 그저 참신한 것, 우리에게 그런 것에 점수를 줄만한 정신적 여유는 없는 것이다. 가끔 서구의 독특한 예술가들이 ‘왜 이런 시도를 하셨습니까?’ 하고 질문하면 “재밌잖아요”라고 대답할 때, 와, 멋지다, 라고 생각은 할지언정 우리라면 그저 ‘재미있어서’ 어떤 일을 구상하고 실천하긴 어렵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가?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만한? 거기에 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에 재미가 더해질 때 높이높이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의 선물이 그립다.

은희경의 새 작품들은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 내용에 비해 헐거운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릴케의 시를 제목으로 삼고 싶었다는데 그 내용이 바로 그 느낌이라고 생각했나? 주인공은 도대체 왜 살이 빼고 싶었다는 것인가? 아버지를 이유로 대고 있지만 오래 헤어졌던 아버지에게 좋은(나쁜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를 남기고 싶어 살을 빼려한다는 데에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감정을 잘 절제해서라고? 그래, 이 단편집의 등장인물들은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슬프다’라고 말해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어느 독립영화의 화면에서 내레이션은 동수는 그 일로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라고 문어체로 읽지만 영화배우는 그냥 무심하고 뚱한 얼굴로 달동네 계단을 걸어올라 가고 있는 장면을 보듯이, 내면과 대사는(설명일 수도 있고)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

삶의 때를 묻힐 대로 묻힌 주인공은 15년 전 기억으로 되돌아가 잊었던 순수 따위를 다시 기억하는가? 버린 줄 알았던 존재감 희미한 원고와 정체 불분명한 이메일을 통해? 구질구질한 일상을 그린 듯 보일 수도 있는 홍상수 감독 같은 소설에 ‘유리가가린의 푸른 별’이란 장선우 감독 같은 제목이 왜 붙었을까, 아직도 별은 순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일까...

은희경 작품에서는 성별이 보이질 않는다. 그가 작품 속에서 늘어놓는 (때론 작품과 별 무관하거나 과잉된, 박학다식을 자랑하는 듯한) 지식과 정보들은 중성적이거나 남성취향적인 것들이 많고 동화 이야기가 열거되는 ‘날씨와 생활’도 화자인 ‘소녀’에게서 여성성이 탈색되어 인형을 보는 느낌이 든다. (수금원은 매트릭스의 스미스 같은, 무성적이고 탈인간적인 느낌마저 든다) ‘고독의 발견’에 나오는 난쟁이 여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 거리감을 둔 사람의 정서분리-역시 인형을 보는 듯한- 가 느껴진다.

아, 그러고 보니 내 것과 닮진 않았지만 마치 꿈속의 장면인 듯 편집된 영화의 장면인 듯, 현실과의 개연성에서 난감한 장면들이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 있다. 그렇다고 현대인은 고독하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진 않다. 열심히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고발도 주장도 아니다. 소설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시도라 할 만큼 낯설지는 않다. 그럼 뭔가?

해설을 쓴 신형철의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표현, ‘은희경은 장르다’. 남다르다, 특이하다는 면에서? 그래도 나는 ‘새의 선물’이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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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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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편견이 허상을 만들어 나를 가둔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일은 참 어렵다. 공지영 소설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데, 게다가 90년대 뜬 작가들의 특성 자의식 과잉, 쿨한 척하기를 넘어 거의 시니컬한 시선(자기의 타자화? 그러면 고통도 덜하긴 하더라만)도 덜하고(덜하다기보다 공지영 소설은 작가의 나이에 비해 매우 80년대적 정서가 강하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아니야아니야, 공지영은 진짜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걸까.

출판사들이 공지영이나 최영미나, 미모가 되는 작가들의 사진을 크게 띠우면서 광고 작전을 폈던 것도 그들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드는데 엄청나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그들 작품의 무게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괜찮은 출판사나 힘있는 평론가들을 만나지 못해 묻혀버리고 마는가 말이다. 실없는 생각이지만 더 예뻤다면, 창비를 만났다면 떴을 소설가나 시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다. 어쩌면 공지영은 그가 젊은 시절 혐오했던 바로 그 '자본의 논리'의 덕을 본 건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나로 하여금 자꾸만 공지영을 멀리 하게 했다. 한편 그것은 매력 있는 여자를 여자들이 싫어하는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피식 웃기도 한다. 그녀가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었고 여성지가 좋아할만한 삶의 이력을 가진 여자가 아니고 일찌기 주목을 받은 여류작가가 아니고 좀 못생긴 작가였으면 나는 그녀를 좋아했을까?

아니 따져 보니 '봉순이 언니'를 제외하고 나는 거의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 아주 재밌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사실은 매우매우 공감하면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안 읽는다고 버티다가 아니지, 의무적으로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손에 쥐었다. 역시나 재미있고, 또 감동적이다.

영화화되면서, 사형제 폐지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주장'을 하고자 이 소설을 썼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다. 만약 그런 주장이라면 윤수처럼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사람말고 정말 죄질이 나쁜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어야 했다. 잘 생기지도 않았고 동생을 위해 헌신하지도 않았던 말하자면 윤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15년형만 받고 도망가 버린 '그놈' 같은 사람을 설정해서, 이렇게 밑바닥밑바닥 인간이지만 그래도 그가 그토록 인간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의, 학교의 부모의 책임임을 강조하고, 사형 직전 그 짐승같은 이가 회복해낸 인간성을 이보란 듯이 증거물로 들이밀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 치열한 인간탐구, 제대로 사형제 폐지론을 담은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형수와 상처받은 상담자는 또한 자본의 논리에 매우 잘 부합하는 상차림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엄마'에 대해 생각했다. 윤정은 강간을 당했기 때문에 상처받은 게 아니라 엄마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위무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윤수 또한 그러했다. 네살 아이를 때려죽인 열살난 여자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온 그 엄마의 태연함은 아이의 영혼을 유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엄마라는 존재는 참 힘들고 무겁다. 소설적 설정으로 필요했기에 그토론 그악하게 그려졌지만 윤정의 엄마는 딸을 사랑하지 않은 거였을까 과연?  집안의 체면과 허영 때문에 딸의 상처를 덮어버릴 수 있는 엄마로 그려졌지만 꼭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엄마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거나 상처를 준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학교에 오는 엄마들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기적이기도 하고 무지하기도 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특수한 경우 잘못된 운명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보다 자기자신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삶의 질곡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 아니 거의 없다.

다만, 잘못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은 잘못된다. 그리고 그 모두가 엄마의 잘못만은 아니다. 엄마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족한 엄마를 만나도 자기만의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극복한다. 그리고, 엄마가 힘겨워할 때 아빠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둘이 같이 잘 해나가라고 어린 남녀는 '결혼'이란 걸 해서 서로 시행착오도 겪고 쩔쩔매기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 아닌가. 가끔, 전쟁통에 살았다면, 내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었다면, 남편이 없거나 무능했다면, 나는 몸을 팔아서라도 아이들 입에 들어갈 것을 구해오지 않았을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을 해보면서, 내 엄마의 헌신을 생각하면서 엄마란 참으로 근원적인 어떤 존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엄마들이 행복하고 똑똑하면 아이들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상처받는 엄마들이 줄어들면, 상처받는 아이들도 줄어들지 않을까...

또, 나는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많은 '상처받은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족한 엄마, 아픈 엄마, 이기적인 엄마들이 그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주지 않아서, 아니, 오히려 상처를 줘서 프게 된 이 아이들을 나는 교사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 윤수가, 비록 엄마도 그랬고 아버지도 그랬지만 모니카 수녀같은 사람을 학교에서나 보육원에서 만났다면 달랐지 않았을까. 나의 학교 아이들에게 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는 제 2의 부모이다. 잘 자라고 있는 행복한 아이들에게도 그러해야 하지만 집에서 상처받고, 그나마 학교에 와서 친구들이랑 뒹구는 게 그나마 위안인 아이들에게 교사는 부모가 되어 주어야 한다. '최후의'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을 지켜주는 '보루'가 되어 주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무거운 일인데 '아이'들을 사랑하며 키우는 일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받은 과제이다. 이 무거움, 자의식의 늪에서 혼자 종알거리는 소설들보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과 고함과 부들부들 떨림으로 가득찼던 이소설이, 아직은 뭔가 그야말로 2프로 부족한 듯한, 버리지 못한 허위의식이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소설이 그래도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후기에 등장한, 여자 죄수들 중 '공지영 싫어요' 했다가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아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했다는 그이, 어쩐지 나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웃었다. 작가가 어떤 비난 받을 만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대도 이만큼 재능있는 사람이 이만큼 고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고 고맙다. 공지영씨, 열심히 삽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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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18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 소설을 엄마 혹은 진정으로 따뜻한 모성으로 부재로 본 시각에 공감해요.
역시 예리하십니다. 전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은 누가 선물해 줘서 나중에 읽었지요.

프레이야 2007-06-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maroo 2007-06-0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공감합니다. 저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었는데..

rancet 2007-06-10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부족하다는 공지영 작품론에 대해 지지합니다. 교사가 제2의 부모 역할을 해야한다니, 님은 이미 좋은 선생님 같네요.

2007-06-1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woomuse 2007-06-1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 다만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 정말 공감하고 저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잘못된 사랑을 한것에 뒤늦게 나마 후회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해 하기도 합니다. 제가 사서로 있는지역도 매우 환경이 열악한 곳인데 정말 가정에서 첫 단추가 잘 못 끼워져 심신이 힘들고 지친 아이들이라는것을 실감합니다. 앞으로는 학교 시스템에 심리상담이라는 과정에 넣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친구 아들이 다니는 한 중학교에서는 한 학기동안 벌써 두 명이나 자살을 했다는 군요. 벽지지역이나 도시지역이나 모성의 부재. 또는 잘못된 부모의 사랑에 가슴 멍드는 영혼을 위해 처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