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수업 -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만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
오종우 지음 / 어크로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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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우리 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의 주제로 수업 개선과 관련한 책을 읽고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선생님이 이 책을 선택했다. 흥미로웠지만 다른 책을 읽느라 제쳐두었던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한 젊은 동료 교사가 자율 휴직을 신청해서 올해 학교에 안 나온단다. 손에 꼽을 만큼 의미있는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정년퇴직까지의 시간 중 그와 함께 일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에 대해 아쉽다고 말했다. 그처럼 똑똑하고 성실한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 환멸을 느끼고 대학으로 갈 생각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서 불안하기도 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경제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어느 삶의 현장에서나 비슷한 일들이 있겠지만 특히 학교는 유능한 교사를 품기엔 그릇이 너무 작다. 물론 그에에 이런 걱정을 비칠 수는 없다. 그저, 당신같이 괜찮은 교사가 현장을 꼭 지켜주길 바란다는 속절없는 바람을 전할 수밖에. 속절 없는 이유는 내가 선배교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설사 교장이나 교감이었더라도 딱히 할 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휴직을 떠나기 전에 뭐라도 줄 게 없을까 생각했다. 무슨 선물처럼 말고 그냥 무심하게. 그래서 보던 책 중 그의 수업과 연관이 있는 것들 몇 권을 고른다. 그가 신임교사였을 때 배움의 도><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프레이리 교육론> 등의 책을 주었던 기억은 난다. 이번에는 토론에 관한 책과 이 <예술 수업>을 주면 어떨까 싶다. 좋은 수업의 영감을 줄 수 있는 책일 것 같아 보여 후딱 읽어보고 주려 했다.

나의 감은 틀렸다. ‘후딱 읽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생각할 것도 메모할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었다. 정말 좋은 책이 홀대받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 책이 성균관대 교양 수업을 책으로 옮긴 것이란 걸 확인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대학생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고 오종우 선생의 수업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 책이 수업 현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면, 수업을 위해 그가 준비한 자료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하며 그 노고에 감탄했다. 게다가 그것을 글로(혹은 말로) 표현할 때 그 표현력과 그 안에 담긴 성찰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책도 참 좋지만 책 속 장면을 대학 강단에서 벌어지는 수업이라고 상상해 보니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을까 싶어 찬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참 행복했을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교수님에 언급한 책과 영화, 음악, 그리고 그림들을 검색하고 도서관에 가서 찾아 보고, 읽어 보고 들어 보려 애썼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뇌와 가슴의 변화는 얼마나 신선했을까.

 

다만 저자가 예로 드는 것 중 특히 문학작품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것들인데 요즘 학생들은 톨스토이나 체홉, 도스토옙스키(그러고 보니 오종우 선생도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가 보다)를 즐겨 읽지 않는다. 그들의 문해력과 지력은 활자나 책을 읽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종우 선생이 예로 드는 텍스트들, 요즘 젊은 대학생들이 얼마나 고개를 끄덕일지 걱정이 된다. 수업을 듣고 나서라도 그 책을 찾아 읽고 싶어질까. 막상 손에 들면 재미있게 읽겠지만 안톤 체홉을 읽고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찾아 볼 대학생이 몇이나 되려나.

그렇다고 해서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대로 영상 콘덴츠만을 텍스트로 하여 수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학교에도 대여라고는 하지만 모든 중2, 1 학생들에게 태블릿을 안겨주고 그것으로 미디어 수업을 해왔지만 실익보다는 부작용이 많아 보인다. 수업 중 억지로 종이책으로 된 읽기 자료를 읽도록 구성을 한다.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과 긴 시간 책 한 권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일부러라도, 학교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할 판인데 칼라 사진과 영상이 가득한 전자매체를 활용해 수업을 하란다. 이 학생들이 학교에서 그것을 운용하는 방식을 배우지 않아 미래사회에 도태될 일은 없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기 머리와 자기 가슴으로 습득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일이다. 그래서 오종우 선생의 고전적인 텍스트들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학생들의 감각에 맞춰서도 안 되지만 이제는 사라져갈 자료들로 수업을 할 수도 없는 모순 앞에서. 그래, 세월이 가면 어떤 것은 버려지고 극소수의 것들만 살아남겠지. 늙어가는 이들은 모여서 어렸을 때 읽은 책 이야기나 음악 이야기를 할지 몰라도 젊은이들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겠지. 이 좋은 책을 덮으며 그런 씁쓸한 생각을 해본다. 물론, 휴직하는 그 40대 초반의 교사는 돌아와서 고전이로되 결코 낡지 않은, 선별된 좋은 자료들로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수업 토론하는 수업을 펼쳐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 있는 고민을 하는 선생들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제 마음 놓고 교단을 떠나도 될 것이다.

 

철저하게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안타까울 때도 없다... 용모는 뛰어나되 표정은 풍부하지 못하다. 그럴듯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써먹을 줄 모른다. 지성은 있되 본인의 사상은 없다. 가슴은 있되 관용이 없다... - 도스토옙스키 <백치> (책 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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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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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발상이다, 경제학과 요리 이야기를 연결하다니. 위트 있는 필체도 좋은데 영어로 쓴 책이라니! 아마도 미식가일 것이 분명한 장하준 선생이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경제학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는 신고전학파 (자본주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자본주의자, ‘보호무역이라 폄하하지 말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정책적으로 무역과 경제에 개입해 약(한 나라)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이다. 이 책은 그런 관점을 요리 이야기와 다양한 사례, 그리고 비유로 쉽게 들려준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흔한 경제학자들의 경제학 이론을 연대기적으로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다 읽고 경제학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갈증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를 권한다. 경제학 흐름이 궁금하다면 <지대넓얕>류의 재미난 책도 많다. 물론 나처럼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는 지식을 취하는 독서에 약한 사람들이라면 역시 이 책 <경제학 레시피>가 딱 좋을 것이다. 양 많고 칼로리 높고 호불호 갈리는 유럽의 식당보다 이것저것 조금씩 먹어보며 맥주 한잔하는 스페인식 타파스 문화가 더 마음에 드는 입 짧은 미식가라면 더더욱.

 

경제학을 잘 몰라서 이런 의문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경제학은 공부하면 할수록 자본주의 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일까? 주변에서 자본주의 경제학 말고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경제학자들을 본 적이 없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장하준도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약자와 빈자를 위해 공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얼마든지 자본주의하에서도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정책의 중요성을 자주 이야기한다. 인정. 문화를 바꾸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혹은 느리다. 역사의 흐름은 보통 정치적 변화에서 온다. 그는 전쟁 같은 혁명과 개혁이 불가할 때 정치적인 정책 변화로 얼마든지 세상이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다. 물론 의문이 안 드는 건 아니다. 대개는 부자였던, 나중에 권력을 잡아 부자가 된 이들이 약자를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할 수 있으려면 어떤 동력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라서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경제적 변혁은 정치 변혁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정치적 변화의 동력은 대개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말이다.

 

장하준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세계를 주름잡으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강자와 약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시장에 맡기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국가가 적절히 개입해 정책으로써 거대자본과 강자에 맞설 수 있기를 저자는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학은 삶에 엄청나게 크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세금 복지 지출, 이자율, 노동시장규제 등의 정부 정책, 일자리, 노동 환경, 임금, 주담대와 학자금 대출 상환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심지어 그는 당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경제학 이론은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경제는 당연히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아니, 적어도 대한민국만 보면 경제학 이론은 몰라도 주류를 점하고 있는 경제학적 가치관이 사람들의 가치관의 중심이 되는 것만은 맞는 것 같다. 돈은 언제나 중요했지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는 더 이상 부정의가 아니지만 지금처럼 능력껏 벌어서 잘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시대도 없었다.

 

다만 장하준이 신고전경제학파를 반대하면서 국가의 적절한 정책적 개입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강자의 입장을 대변해서 그리 말하는 게 아니다. 미국은 레이건 이후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장하준이 말하는 국가의 개입은 약자를 보호하고 중소국들이 강대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침탈당하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말하는 것이다.

 

자유시장주의자였던 밀턴 프리드먼(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언급했던 경제학자)은 칠레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단다. 그러니 경제적 주장이 독재자의 정치에 맞닿아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프리드먼이 완벽한 자유 무역이 행해진 75이라고 묘사한 기간은 엄밀히 말하면 강대국의 자유무역을 말하는 것이다.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경제 영역의 자유로, 기업이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런 자유 개념을 가져와 마치 보편적인 자유인 듯 외치면 안 된다. 프리드먼과 윤석열이 말하는 자유와 프랑스 혁명의 기치였던 자유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큰가. 물론 사람들은 이미 대선을 치르기 전 프리드먼을 언급한 후보에게서 그런 낌새를 맡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경제를 모른다고 책 한 권만 읽을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폄하하였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 일관되게 자신의 경제학적 가치관을 정치와 정책에 반영하고 있음을 주시해 봐야 한다. 그걸 사람들이 이미 간파했다 해서 막을 수 있었을까 싶긴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역사적 정치적 테크놀로지적 문제 때문이고 그는 그들이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말, 공감한다. 이제는 누구도 이 명제를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장하준은 적극적인 개입과 자국 보호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 예로 우리나라 현대차를 든다. 현대그룹은 다른 부문에서 만든 돈을 현대자동차에 쏟아부어 초기에 적자만 내던 회사를 지탱하게 했다. 또한 수십 년 동안 한국 소비자들은 품질 떨어지는 국산 차를 견뎌야 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호받지 못했으면 한국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라 말한다. 정부도 손을 보탰다. 1990년 초까지 한국 정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현대차 등 하이테크 기업들, 특히 수출 지향적 기업들이 특별 저리를 융자받을 수 있게 보장해 주었다. 현대차를 살리느라 국민들은 손해를 봤다고 아우성이지만 국가 경제가 국민 경제에 직결됨을 생각하면 의미가 없다 말할 수 없다면서.

독일의 예도 든다. ‘철과 호밀의 결혼이라 부르는 비스마르크 주도로 기존 부자들(융커)과 신흥 중공업 자본가들 사이에 맺은 정치적 동맹(호밀 생산자들과 철 생산자들 사이의 연합) 말이다. 이 덕분에 독일은 경제가 성장하여 당시 1위였던 영국을 따라잡았단다.

 

보호무역이 필요하다, 정부가 저극적으로 정책개입을 해야 한다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 미국이 주장하고 이명박이 표방했던 신자유주의도 그런 주장을 했으니까. 강자가 말하면 우리 마음대로 할 테다, 이고 약자의 입장에서 주장하면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를 달라, 라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장하준은 후자의 입장이고.

 

심지어 장하준은 부자나라에서도 혼합경제 시대보다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기간 성장률이 더 둔화하고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며 금융위기도 더 자주 발생했다고 말한다. 물론 개발도상국들에 운용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재앙에 가까웠고. 결국 부자나라에도 별 도움 안 되고 가난한 나라들에게는 피해만 입힌 정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경제 정책에 큰 힘을 발휘하는 이들은 주로 이 부류의 학자와 관료들이다. 덜 보수적인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그나마 나은데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영락없이 미국의 입장에 선 경제 정책들이 나온다. 아무리 그런 정책이 자신들 개인의 영달과 가치관(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학자들이 주류이므로)에서 나온다지만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반하는 정책을 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복지에 대한 장하준의 생각을 살펴보자.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한 개인의 불안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잘 설계된 복지국가는 새로운 기술과 노동 관행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을 줄여서 자본주의 경제를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장하준은 주장한다.

그런 역설은 비스마르크의 예에서 알 수 있다(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비스마르크는 복지 국가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이란다. 노동자를 산업재해로부터 보호하는 세계 최초의 공공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로 경도되어 사회주의가 확산하지 않도록 하려고 그랬다는 것.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중도우파 성향의 정당들마저 복지 국가의 필요성을 많이 받아들인 이유가 정치 안정을 위해서라니 우리나라 보수정권들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복지는 결코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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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로널드 B.토비아스 지음, 김석만 옮김 / 풀빛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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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경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교육 관련 글들을 쓰고 책 몇 권을 냈다. 원래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어쩌다 보니 겪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 남기게 된 것이지 소명의식 같은 것도 타고난 재능도 내것은 아니라 생각해 왔다. 가끔은 시도 쓰고 동화책도 출판했고 힘들 때 일기 삼아 이런 저런 글들을 쓰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안에 무언가 고여 나도 모르게 써나가야 하는 일들이, 교육 에세이니 칼럼이나 하는 잡문이 아닌 진짜 문학, 시나 소설로 솟아나는 일이, 내게도 생긴다면 어떨까.

 

이 책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글을 쓰기 위해읽은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을 하며 서사개념을 가르치고 자유학기제 수업에서 드라마 대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스스로 공부를 하려 본 책 중 하나였다. 다양한 플롯의 종류를 대입해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구조화시켜 보기도 했다. 여태 봐온 다양한 드라마들이 이 플롯의 이론속에서 만들어졌겠다 싶어 거기 맞춰 해석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플롯 이론은 머릿속에 정리하면서 또 책 속에 언급된 수많은 책과 이야기들에 빠져들었다. 내가 아는 이야기, 들어보기만 한 이야기, 그리고 전혀 모르는 이야기까지. 그 적절한 예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재미있었다. 글쓰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란 뜻이다.

 

내가 만약 나만의 소설을 쓴다면 그것은 스무 가지 플롯 중 어디에 속할까. 공식에 맞춰 해석을 하다 보면 채워 넣어야 할 장면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수업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수업 과정을 해보듯 학생들과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하기 위한 전 과정으로 나만의 서사를 쓰면서 탁월한 교재로 활용했던 이 책은... 어쩌면 먼 훗날 내가 어떤 소설을 쓰고는 서문에 감사의 인사를 남겨야 할 책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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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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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교과서에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미술>의 저자 이명옥 관장이 데이비드 호크니와 김호석의 그림에 대해 쓴 글이 나온다. 주제는 공감각적으로 그림 보기, 시각 매체인 그림을 청각적으로 접하는 감각에 대한 설명문이다. 학습목표는 설명문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 단원의 장점을 살려 다양한 미술작품 감상도, 그림과 음악을 함께 감상하는 시간도 모두 시도한다. 맨 첫 수업은 백지를 한 장씩 나눠주고 그림그리기부터.

학생들에게 종이를 세 면으로 나눈 후 물고기, , 집을 그려보라 한다. 물고기를 그리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옆으로 누워있는 물고기를 그린다. 사람을 그리라 하면 대부분 정면을 그리면서 물고기는 옆모습을 그릴까? 대개의 인간에게 물고기는 식재료이거나 먹거리인 어떤 사물로 인식되기에 그런 것이다. 우리가 바닷속에 사는 생선이라면 친구의 정면 얼굴을 바라보면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상상은 물고기의 생태나 행동학과는 무관한 것이다. 내가 하려는 말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 아이들은 대개 그런 관점의 폭을 넓히는 활동에 눈을 반짝인다.

 

룰루 밀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끝부분에 가서이지만) 내 수업과의 연관성이 떠올랐다. 소위 물고기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하여. 왜 제목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원저의 의문형 제목을 살짝 비틀어 탁월하게 번역했다. 이 책은(책에도 운명이 있다 하는데) 좋은 내용에 마케팅, 멋진 번역(제목!!)까지 좋은 운명을 두루 안고 태어났다

제목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다. 요약하자면 포유류니 양서류니 하는 종의 구분 방식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고 자의적인가, 특히나 소위 어류라는 분류는 잘못된 것이다, 라는 거다. 도대체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증거를 대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낸다. 다만 생긴 모습만 가지고 어류라고 묶어버리기에는 물속 생물들의 생물학적 구조나 생활이 너무나 폭이 넓다는 이야기 정도가 나온다. 이것은 과학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국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 담은 그런 전복적 사고는 단지 종의 분류에 관한 문제제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저자가 어렸을 때부터 추앙하다시피 추적하고 연구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유명한 과학자에 대한 긴 세월의 존숭이 뒤집어지는 반전, 그것은 사람들이 어류’ - 멍청하고 감각도 거의 없고 먹기에 딱 좋은 어떤 존재에 대한 전복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더불어 의식의 대반전을 요구한다. 당신이 옳다고 믿었던 어떤 존재를 깡그리 부정해야 하는 어떤 순간이 올 수 있다. 존경하는 학자가 알고 보니 우생학을 주장하고 돌아다닌 위장 평화주의자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나 그를 통해 세상에 대한 허무와 삶의 우울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크나큰 존재였다면. 그러니까 이 책은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면서 지은이가 자신의 지난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자아의 대각성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이 대각성은 데이비드가 큰 업적을 세운 물고기 연구에 있어서도 일어난다. 세상에 어류라는 존재란 없다는 대각성. 과학은 참 묘하게도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닫게 하고 대우주와 대자연 앞에서 삶의 허무를 깨닫게 한다. 그 엄청난 허무감이 오히려 우리를 살아가게도 한다. 그런데 그런 과학에 대한 신뢰와 의지가 이렇게 배신을 때리기도 한다면! 작가는 오히려 그 과정을 대오각성의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 주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는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잃을 때마다 그리하여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냉정하게 삶을 대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나는 20대 때 <숫타니파타>를 읽으며 그런 경험을 했다. 거대한 종교적 허무든 우주 물리학적 깨달음이든, 인간에게 받은 배신 때문에든, 엄청나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대함 앞에서 내 존재의 하찮음과 부질없음을 깨달을 때, 오히려 생에 충실해져야 한다.

 

이 책은 처음에 자신의 우울을 과학자의 생을 추적하며 극복해 나간 지적 여정을 보여주는 듯했지만 우생학을 고발하는 단계로, 그리고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오만을 돌아보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선택받은 것은 아름다운 문체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서사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커다란 성찰에 닿았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좌절과 극복, 성찰과 사고의 전복,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독자들 역시 자기 삶을 대입해 보고 돌아보고 함께 성장한다. 그런 책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 책이 칭송받는 이유는 그런 데 있다.

 

좋은 책은 다른 책을 부른다. 아주 천천히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있는데 룰루 밀러도 마침 다윈이 우생론자들에 의해 왜곡되는 점을 지적한다. <종의 기원> 자체는 지루할 정도로 꼼꼼한 보고서이지만 그 안에 담긴 다윈의 철학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룰루 밀러는 그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다윈은 유전자의 변이에 간섭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했다고,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리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니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다.

그리고 나는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어류라는 분류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한 책,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을 구입했다. 제목의 의문을 좀더 풍부하게 입증할 증거를 보고 싶어서. ‘어류라는 분류가 없다는 명제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이 책이 아니라 나탈리 엔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를 읽다가 발견했다. 겉모습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종들이 많다는 이 책의 진화생물학챕터에서. 이렇게 책 한 권은 다른 책 읽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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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합본)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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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 권의 책으로 거듭났지만 내가 읽은 구판 <소피의 세계>는 소위 벽돌책이었다. 청소년들에게 철학을 쉽게 알려주는 놀라운 소설이라는 화려한 명성 때문에 집어들었지만 이 두께 때문에 아이들이 압도되지 않을까 걱정했더랬다. 그리고 물론 나의 동시다발이책저책뷔페초밥골라먹기식독서 습관 탓이기도 하지만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어른도 단숨에 쉽게, 재미나게 읽을 책은 아니란 것이다. 중간쯤 읽을 때, 슬슬 책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할 무렵, 지인의 중학생 아들에게 이 책(물론 세 권짜리 새 판본이지만)을 선물한 나를 좀 반성하는 바이다.

어렵고 방대하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다니 조금은 쉬운 용어들로 갈무리를 했을 거라고 기대해 보지만, 구판에서는 어려운 용어들, 예스러운 표현들도 많다. 아무리 쉽게 풀어쓴다 한들 철학이, 그것도 서양 철학사를 망라하는 내용이 결코 쉬울 리 없다. 이 책은 반드시 어른이 먼저 읽고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눠보시라 권한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일단 어른이 되었지만 제대로 철학을 공부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읽으면 정말 좋을 만큼 서양 철학사가 잘 정리되었다. 최근에 넓고 얇게 지식을 정리해 준다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이보다 깔끔하게, 그러면서도 왠지 요약본을 읽는 것 같은 씁쓸함을 느끼지 않도록 정리된 책을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단지 지식만 나열하는 철학 강의가 아니라 어떤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세상과 철학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일관되게 이끌어 가면서 철학사를 정리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 철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단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올바른 철학적 탐구 자세, 삶을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될 철학적 탐구 자세를 간직할 수 있도록 철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얼마나 막중하고 귀한 일인가. 요슈타인 가아더는 그 자신 고등학교 철학교사로서 평생 이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의 교사이자 철학자로서의 고민의 집대성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성공했다.

 

이 책을 찬양하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특히 소설로서의 성취이다. 어쩌면 소설은 장치일 뿐 정착 철학을 전하고 싶었을 터이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함에도 어찌나 철학적인지, 새벽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나도 모르게 명상의 자세를 하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는....(과장 아님).

 

이 소설은 액자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하 소설의 스포가 있으므로 아직 전반부를 읽고 계신 분이라면 내 글은 여기까지만 읽으시고 책을 다 읽은 후 나와 공감의 끄덕임을 나누길 바란다) 주인공 소피는 사실 유엔군 소령이 자신의 딸 힐데에게 철학을 알려주려고 쓴 소설 속 주인공이다. 문제는, 소피는 자신이 그저 현실 속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청소년에게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재미있는 구조적 장치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한다. 종교적 신이든 자연 그 자체이든, 우주의 물리적 질서이든, 나를 있게 하고 살게 하고 결국은 죽게 할 어떤 존재, 우리 스스로의 의지를 뛰어넘는 거대한 어떤 존재에 대한 궁금함은 모든 인간과 생명의 근원적 질문 아닐까? 소피와 소설의 작가는 마치 인간과 신(자연)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때로 인생은 누군가의 조종과 농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거대한 매트릭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어린 아이들이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해보는 상상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영화로 승화된 상상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은 그런 고민 자체를 종교적으로 구조화했지만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세계와그 세계 속 등장인물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결국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작가는, ‘내가 지금 나라고 느끼는 나는 진짜 나인가, 아니면 누군가 만든 존재인가? 나의 행동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떤 거대한 존재의 조종에 의한 것인가?’라는 철학적 고민을 자기 작품 속에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그 사실은 책의 말미 무렵에나 밝혀진다. 그전까지 그저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철학사를 열심히 설파한 크눅스 선생과 요슈타인 가아더의 노력에 경탄했지만 이런 구조를 알게 된 후에는 작가의 천재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인 소피와 크룩스 선생내가 소설 속 인물이라니! 내가 실존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종당하는 존재라니!’ 하는 존재론적 깨달음과 괴로움은 결국 그들을 만든 작가, 즉 힐데의 아버지인 크낙 소령의 몫이기도 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 역시 역시 요슈타인 가아더가 창작한 인물에 불과하니까. 이 질문은 끝이 없다. 요슈타인 가아더도 역시 누군가의 창조물일지도 모른다이 책을 읽은 나도, 당신도...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서구의 시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 배경이 없어도 나의 근본을 사유할 때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영화 <매트릭스>는 기독교적 색채를 니체적으로 전복시키고도 같은 질문을 완전히 새롭게 구현해 현대인들의 실존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나.

이제 곧 열릴 인공지능의 세계에는 이보다 좀 더 치밀하고 좀더 공허한 존재론이 난무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한때는 께서 그걸 말해주실 수 있으리라 믿었고 인간의 시대, 계몽의 시대에는 철학자들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보자했으나 이제 곧 AI사실은 내가 니 애비다라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

 

크녹스의 말 : 전혀 다른 작가가 어딘가에서, 딸에게 줄 책을 쓰고 있는 유엔군 소령 알베르트 크낙에 관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니?

 

 

묻는 자는 가장 위험한 인물

어쨌든 소설은 크눅스 선생이 드문드문 소피를 만나(처음에는 편지로) 철학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선생은 소피에게 철학적 질문의 출발은 너는 누구니?’,‘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지?’에서 시작된다면서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위 질문을 포함하여 어떻게 세계가 창조되었는가. 사건의 이면의 의도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는가? 이런 해답은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 소피에게 던져진 질문은 나 역시 나의 학생들에게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다. 국어 수업 중에 가끔 토론을 하지만 저런 철학적인 질문을 풍부하게 이끌기에는 수업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가끔 언론의 진실성에 대해 사실이면 곧 진실인가?’ 혹은 사춘기의 특성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저자 셀리 케이건이 던진 질문들 육신이 없어도 ’‘나는 존재하는가? ‘라고 부를 때 그 존재는 육신인가, 뇌인가, 영혼인가, 기억인가?’ 등의 질문을 던져 토론을 유도해 보기도 하지만 매우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토론수업이 꼭 필요하지만 쉽지 않아서 몇 해 전에는 바칼로레아 논술토론반동아리를 운영해 본 적이 있다. 기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주제 중 중학생에게 적합한 주제들을 골라 토론을 해보았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서는 도덕과 사회 시간에 토론 수업을 이끄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토론수업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이 경쟁과 성취 중심의 대한민국 청소년들도 철학적인 청년들로 자라나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 중 원자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존재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은 묘하게 인간사의 고뇌를 불식시켜 준다. 어차피 원자로 돌아갈 것을, 그리고 는 사라져도 나를 구성했던 원자는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을..... 허무할 것도 없고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인생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누만. 이 책과 동시에 읽고 있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좀 다른 접근이긴 하지만 허무하므로 인생은 치열하다.’ ‘내가 저 먼 우주의 한 줌 먼지로 사라지더라도 아쉬워하지 말라말한다. 한 사람은 유물론자이고 한 사람은 절대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이긴 하지만 거대한 원칙 앞에 한없이 작고 작은 인간 존재를 깨닫게 해 준 철학자들로 인해 우리는 유한한 인생의 고뇌를 조금은 놓을 수 있다.

 

다른 철학책과 달리 마음에 남은 부분이 있다면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유사성을 말하는 장면이다. 둘 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문답법의 거장이었고 권력자들에 대항한 비폭력주의자였다는 것, 그리고 부당한 재판과 사형을 당했지만 사면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소크라테스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지역과 시대를 넘나들며 진정으로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은 또한 이 질척거리는 삶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작가는 소크라테스를 확신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고 무관심하지도 않았다.’고 표현한다. 아우렐리우스도 그러했고 예수 역시 죽음 앞에서 인간적이었다. 진정 큰 사람들은 함부로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오만방자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방대한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다루는 철학이라 말하는 것은 결국 서양철학이라는 것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은 서양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제자라곤 함께 사냥길에 나선 어린 마을 청년 몇이 다인 소박한 문명의 마을 지도자들 중에서 아우렐리우스 못지 않은 우주적 존재론을 말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소피는 나와 비슷한 듯 조금은 결이 다른 불편함을 말한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등장한 여성철학자 시몬 베이유를 공부할 때 소피는 남자 철학자들은 모두 그들 고유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 관심은 실제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인간은 모두 중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서. 나 역시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서 노동과 땀냄새가 없는 귀족 남자들의 윤리를 지금 시대에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를 고민했다. 소피는 삶은 임신과 출산으로 시작되는데, 지금까지는 그들의 철학 세계 속에는 아기 기저귀와 빽빽거리는 울음 소리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역시 소피는 자신의 이름답게 지혜롭다. 소위 철학사들은 늘 서양, 강자, 남자 중심으로 펼쳐졌다. 남아 전해지는 게 없는데 무엇을 어찌 다룰 수 있겠냐고 항변할 수는 있지만 철학사를 고찰할 때 늘 왜 약자와 노동자의 관점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옳을 것이다.

 

책이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로 끝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 실존주의는 결국 이 세계가 어떻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되돌아갈 그런 영원한 본성은 없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또 자기가 언젠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리고 삶에 대해 아무 의미도 인식할 수 없을 때에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사르트르는 그 불안 때문에 더더욱 삶이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거대한 실체 앞에 작디작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떠오른다. 2십억 광년의 고독을 느꼈던 다니카와 순타로 시인과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고뇌했던 박정만의 시세계가 떠오른다. 그렇게 이 책은 철학에서 시작해 우주 이야기로 끝난다. 신이든, 자연신이든 우주물리학이든 인간의 존재는 하염없이 작고 작위적이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철학하는 책, 소피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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