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시학 동문선 문예신서 183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동문선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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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온 이 책의 역자는 오역을 경계하며 번역에 매진했노라 고백하는 후기를 책 뒤에 실었다. 그 진중함에 웃음이 나왔던 것은, 내가 책을 읽는 내내 이 아름다운 책의 절반을 이해하지 못하고 날려버리는 것을 번역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래, 언어의 차이,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하자. 유난히도 프랑스 저서는 이해가 어려웠던 경험들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하자. 물론, 곽광수 교수의 글 자체가 본문의 문투와 많이 다르지 않을 걸 보면 그분만의 독특한 언어 세계가 있고, 그것이 번역에 그대로 반영된 것도 있을 것 같다. 가령, ‘새롭히다와 같은, 우리 말에 없는 표현 같은 것, ‘살다라고 쓰고 꼭 () 안에 體驗이라고 쓰는 것, ... 역자는 프랑스어와 한국말 사이의 간극을 메울 표현을 찾으려 고심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먹히고 어떤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시를 읽는다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시는 원래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아름답기만 해도 되는 것이 시라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를 시집이라 부르겠다. 다락방, 지하실, 조개껍질 안, 좁고 넓은 공간, 상상의 공간, 현실의 공간, 우주의 공간, 그리고 원, 심지어 차원을 넘어서는 변증법적 공간까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상념과 감각과 상상, 그리고 몽상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학문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 시집을 읽듯이 만나야 한다. 이 책은 곧 절판에 이를 것이고,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시는 세월이 가도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 책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데, ‘난해하다는 혐의로 사라져 버릴까봐, 너무나 아깝다. 바슐라르의 표현에 무릎을 치며 잠 이루기 전까지 이 책을 읽은 날이 많고 많지만 특히 공기에 속하는 것과 대지에 속하는 것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그 탁월함에 잠을 깼다. 이미 많은 이들이 땅과 하늘, 현실과 몽상, 몸과 영혼의 세계를 고찰했겠지만 하필이면 그것을 공기와 대지에 비유하다니. 체 게바라의 꿈과 리얼리스트를 만났을 때처럼 그 시적이고도 적확한 표현에 놀란다. 시인들은 몸의 뿌리를 대지에 내리고도 공기의 삶을 사는 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직 현실만을 살며 몽상의 세계, 시의 아름다움, 또 다른 차원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한 이들을 일컬어 2층밖에 없는 인간이라 표현한다. 지하실이나 지붕 밑, 다락과 같은 공간의 몽상적 의미, 심연, 심리학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심연과 그림자, 자기만의 꿈과 몽상을 지니지 않은 이의 영혼은 얼마나 핍진할까.

 

이 책과 거의 동시에 강맑실의 <막내의 뜰>를 읽고 그 직후 공선옥의 <춥고 더운 우리집>을 읽었다. 두 작가들의 깊은 상념처럼 나 역시 집 꿈을 자주 꾸고 결코 삶에서 연관성이 있을 리 없는 건축 관련 책들을 뒤진다. 사람들은 왜 '집'에 집착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삶의 기반이라서 그러하다는 현실적 이유 말고, 집은 몸 다음으로 영혼을 담는 그릇인 것이다. 그것을 바슐라르는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 하나의 우주라고 표현했다. 이 책 속의 우리들 각자에게는 꿈의 집이, 사실의 과거 너머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추억 꿈의 집이 하나씩 있다라는 표현을 혹시 강맑실이나 공선옥도 읽은 건 아닐까. 좋은 추억만은 아니더라도 과거의, 특히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는 일은 묘하게 참된 자신을 만나는 것과 닿아 있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 대한 사유가 표현되는 것이 바로 시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시학(詩學)’이 붙은 것이다. ‘시는 그 위대한 기능으로 우리들에게 꿈의 상황을 되돌려 준다.’ 그리고 시는 존재 차원의 거소. 존재의 집인 것이다.

 

융은 집의 공포를 지붕 밑 곳간과 지하로 나눠서 설명한다. ‘집주인(의식)이 지붕 밑 곳간에 들어가면 생쥐와 쥐들의 소란이 조용해진다. 이곳에서는 낮의 경험이 밤의 공포를 지워 버릴 수 있지만 지하실의 어둠은 밤낮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문명은 더 이상 촛대를 들고 지하실에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은 개화되지 않는 법. 무의식은 여전히 지하실에 내려가기 위해 촛대를 든다. 지하실의 벽은 땅속에 묻힌 벽, 이쪽 벽면밖에 없는 벽. 땅 속에 묻힌 광기, 벽 안에 갇힌 드라마....’라고 바슐라르는 융의 심리학에 기대 몽상의 의식 세계를 집에 비유해 분석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장 라로슈의 아름다운 시들을 인용한다.

 

내 마음에 세워진 집

내 침묵의 성당

매일 아침 꿈속에서 되찾았다가

매일 저녁 버리네

새벽으로 덮여 있는 집

내 젊은 시절의 바람()이 열려 있는 집 장 라로슈

    

이 작약은 어렴풋한 집

거기서 누구나 밤을 되찾네

...

모든 꽃받침은 집이다 장 라로슈

 

바슐라르는 아름다운 말에는 아름다운 사물이 대응되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윤동주가 바슐라르를 읽었을 리 없지만 그 역시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라고 썼다. 말은 때로 허위로 사람을 현혹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세상을 예술로 채워주는 존재이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머니는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의 시인 정재학은 나의 직장 동료이다. 그의 시 세계가 오묘하고 뛰어날 뿐 아니라, 현실의 건실하고 다정하고 신사다운 그의 모습과 시속의 세계가 너무 달라 농담 삼아 융 심리학의 관점에서 정 시인의 시 세계를 분석해 보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콤플렉스와 그림자, 무의식과 심연의 세계가 따로 있겠으나 어떤 이는 평생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을 자양분 삼아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다음 구절은 정재학 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시란 언제나 꿈을 몽상으로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시적 몽상이란 기본적인 이야기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콤플렉스의 응어리 위에서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은 깨어 있는 몽상을 사는 것이며 특히 그의 몽상은 세계 속에서 세계의 대상들 앞에서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 주위에, 하나의 대상 속에 우주를 모은다.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많은 작가와 시인을 만나고 그들의 글과 시를 떠올리다니. 그리고 그가 이끄는 미지의 세계를 몽상할 수 있다니. 이 책을 아껴 읽은 시간은 고작 몇 달이지만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깊은 꿈의 아홉 단계를 넘나들다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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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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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적당히 지루했고 적당히 아름다웠으며 적당히 위로가 되었다. 읽어야 할 철학서 목록에 넣어둔, 숙제 같은 책이었지만 어떤 말들은 필사를 하고 싶었고 어떤 말들은 외우고 싶었다. 마음이 힘든 날은 이 책을 읽으며 잠들기도 했다. 드넓은 우주에 작디작은 존재로서 나를 인식하면 마음이 편해지는데 전혀 다른 접점이지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느낀 광활한 세계에 대한 이끌림과 더불어 느끼는 무한히 하찮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안도, 그리고 허무하기에 사는 동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성을 <명상록>에서 만났다.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않으며 그의 스토아 철학적 자세에 공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왕이면서 스스로를 벼리기 위해 쓴 책처럼 보이는 이 <명상록>을 읽으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느꼈다. 여기서 에게 하는 말은 모두 그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왕으로서 느끼는 교만의 유혹, 권능에의 욕구 따위 앞에 혹독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 인간세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지만 자기 위에 신과 우주를 염두에 두어 오만해지지 않으려 애쓴 한 왕, 고뇌가 깊어 그는 결국 철학자의 명성을 얻는다. 모든 고뇌는 깊어지면 명상이 되고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왕관의 무게를 느끼는 이들은 모두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역사 속에 멋진 왕, 철학자였던 이, 종교에 신실했던 이들이 없지 않으나 그들 중 가장 상징적인 이 사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지금까지도 모든 지도자들이 귀감으로 여겨야 한다. 제발, 매일 일기를 써라. 당신의 언행이 누군가의 목숨에 비수가 되지는 않았는지, 당신의 오만이 인간들의 삶을 휘저어 우주에 업보를 쌓지는 않는지, 당신의 어리석음이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세상을 핍박하지는 않는지.... , 미치도록 좋은 지도자, 생각할 줄 아는 지도자가 그리운 시절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너 자신이라는 작은 영역으로 은신할 생각을 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빗나가거나 긴장하지 말고 자유인이 되어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죽게 마련인 동물로서 사물들을 보라. 사물들은 네 혼을 장악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혼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불안은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의견에서 기인한다.

 

네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한순간에 변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너 자신이 이미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경험했는지 항상 명심하라. 온 우주는 변화이고 인생은 의견이다.

 

너는 곧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단순하지 못하고, 담담하지도 못하고, 외부로부터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지 못하다. 지혜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너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잊지 말고 다음의 원칙을 적용하라. “이것은 불운이 아니다, 이것을 용감하게 참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행운이다.”


매번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매사를 올바른 원칙에 따라 행하는데 싫증 내거나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실패하면 다시 그 원칙으로 돌아가고, 네 행동이 대체로 인간 본성에 맞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네가 무엇을 지향하든 그것을 사랑하라.

 

이 세상을 떠나서는 이러저러하게 살아야지하고 소망하는 대로 이 세상에서도 살 수 있다.

 

우주의 지성은 공동체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월한 것들을 위해 열등한 것들을 만들어냈고, 우월한 것들은 협조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우주는 종속시키고, 결합시키고,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주었으며, 탁월한 것들은 서로 화목하게 해놓았다.

 

운 좋은 사람이란 스스로에게 좋은 운을 가져다준 사람이고, 좋은 운이란 혼의 좋은 성향, 좋은 충동, 좋은 행동이다.

 

맛 좋은 요리나 음식을 보고는 이것은 물고기의 사체이고 이것은 새나 돼지의 사체라고 생각하라...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보라.

 

인생에서 아직 육신이 굴복하지 않고 있는데 혼이 먼저 굴복하는 것은 치욕이다.

 

 

각자의 가치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가치와 일치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만물은 서로 얽혀 있고 그 유대는 신성하다. 서로 낯선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똑바로 서라, 아니면 똑바로 세워져야만 할 테니까.

 

육신은 단단해야 하고 움직일 때나 정지해 있을 때 일그러져서는 안 된다. 마음이 현명하고 점잖은 표정을 유지함으로써 얼굴 표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을 우리는 육신 전체를 위해서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식 없이 행해져야 한다.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되 흥분하지도 나태하지도 위선자가 되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말할 때 적절하고 명료하게 말하라. 건전한 표현을 사용하라.

 

슬픔이 나약함의 표시이듯, 분노도 나약함의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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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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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의 <글자 풍경>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적 있다. 이렇게 지적이고 감성적이면서 글도 맛깔나게 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독자로서 아주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글은 읽은 적 없어도 이름만 들어도 너무나 잘 아는 이처럼 느껴지는 물리학자 김상욱. 이렇게 두 사람이 쓴 책을 집어들게 만든 것은 유지원 덕분이지만 <뉴턴의 아틀리에>를 통해 김상욱을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을 마치고 바로 김상욱의 책을 주문했으니까. 학문의 세계는 고독하고 핍진할 터인데 언제 이렇게 사유와 감성의 꽃들을 피웠나, 이들은. 게다가 그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친절하게 미학의 세계를 알려 주는 솜씨까지 지녔으니, 고마운 일이다. 김상욱은 물리학자의 눈으로 미술의 세계를, 유지원은 자신의 영역인 글씨와 미학을 언급하는 중간중간 물리와 과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나는 독서를 하며 기억할 만한 문장들을 노트북에 다시 모아두는데 두 분이 모두 미학과 물리학을 함께 언급하는 바람에 누구의 글인지 헷갈려서 일부러 두 개의 파일로 따로 정리했다.

 

우선 김상욱부터. 그의 전공인 양자물리학을 주로 언급하는데 이건 도무지 이해가 가는 영역이 아니다. 이해하려 들지 않으련다. 그냥 놀라운 건, 그 과학의 세계가 인간사와, 미술의 세계와 접목이 된다는 것. 가령, 양자역학은 '중첩'이란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상태가 공존하는 것. 한 사람이 동시에 두 도시에 있는다든지 등. 이렇게 말하면 과학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대표적인 예로 르네 마그리트 그림을 들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엔트로피 증가(다 흐트러지니까)의 치명적 귀결은 죽음이라고 말할 때 김상욱은 물리학으로 철학을 말한다. 칸트의 주관적 보편성을 근거로 미술작품을 보는 이들마다의 다른 견해를 수렴하기도 한다.

 

그는 1610년 갈릴레오가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을 발견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혁명은 자세히 볼 수 있게 될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학과 미학과 역사는 이렇게 통섭된다. 나처럼 과학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근본적으로 인문학도인 사람들이 김상욱이나 최재천, 정재승을 좋아하는 이유이리라.

 

그리고 다음은 그의 말 중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은 부분이다. 소통을 위한 언어와 수학(과학),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왜 수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설명해준다. 우주는 수학과 물리학의 방식으로 기술된다, 인간은 수학과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것을 예술로 표현한다. 그래서 예술은 언어로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분석할 수도 없다. (위그너가 지적했듯이) 우주가 수학으로 잘 기술된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지만 인간이 언어로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예술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진짜 놀랄 일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이 정도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이응노 화백이 옥고를 치른 일, 그리고 그가 이후에1980년 광주를 <군상>으로 그린 일을 언급하면서 그가 말한 이름의 의미를 살펴보자. 학생들에게 여럿이 함께의 의미에 대해서 알려줘야 한다면 다음 문장을 읽힐 것이다.

이름이 존재를 보장하지 못한다. 더구나 이름은 자의적이다. 하지만 이름은 존재에 의미를 준다. 동양에서 형상은 문자가 되고 문자는 의미가 된다. 하나하나의 이름 없는 의미들이 모인 군상들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춤이 될 때, 그 춤은 또다시 하나의 형상이 되고 문자가 되고 의미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이름을 쟁취한다.

 

함께 힘을 모으는 일의 중요함을 자연에 빗대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면,

정찰벌이 이주 장소를 찾다가 좋은 장소를 발견하면 춤을 춘다. 그걸 본 다른 정찰벌은 그리로 이끌린다. 이렇게 몇몇 후보지들이 경쟁을 시작하여 많은 벌들이 선택한 곳이 이주장소로 정해진다. 집단지성을 이용하는 것.

 

그 외에도 이 책에는 김상욱의 어록이라 말할 만한 구절이 꽤 많다.

 

-시민사회의 성립이 개인의 자유에 많은 가치를 부여함.

-현대물리학은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어 보는 것에서 시작됨.

-눈에 보이지 않는 극미의 세상을 다루는 양자역학에서는 하나의 물체가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있고 보는 행위가 대상의 상태에 영향을 준다.

-그리스 문명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파르테논이라는 건축물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

-복종을 얻으려면 무력뿐 아니라 권위도 필요하다.


그리고 유지원이란 사람(물론 글로만 만났지만), 이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이다. 공부하는 사람,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 글 잘 쓰는 사람, 그리고 사진 속에서 본 그녀는 멋지기까지 했다. 내가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가졌다. 게다가 글은 연구자들 중 자주 보이는 연구자 특유의 편협함이 없다. 공부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활동을 하는 사람이며 다양성에 대해 열린 태도가 더욱 멋지다. 그는 독일 작센에서 만난 친구들에게서 당위에 저항하고 편견에 질문하고 다양성을 각별하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았다 한다. 공부가 말 그대로 삶의 공부가 되는 그런 삶을 사나 보다, 이 사람은.

 

유지원의 <글자 풍경>이 오롯이 자기 자신의 전공분야를 미학적으로 풀어냈다면 김상욱과 함께 쓴 이 책은 미학과 과학의 접점을 보여준다. 때로 나는 이게 누구의 글인가 헷갈리기도 했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미학을 말하는 것은 취미의 영역인가 싶으면서도 유지원이 물리학을 논하면 어, 이 사람 이런 영역까지 언급하나? 놀라기도 했다. 나의 감정이입 탓이리라 생각한다.

유지원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에 대해 일단 알게 된다는 것은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알기 전과는 나의 의식이 비가역적으로 달라진다.’라고 말한다. 공감. 공부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문장이다. 책을 읽고 뭔가를 알아가는 일이 주는 희열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탐구형 인간.

 

그리고 그가 유머에 대해 한 말 유머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도 여유를 갖고 주위를 넓게 둘러보며 균형을 잡는 힘. 한 발 물러서면 시야가 넓어진다.’에도 격하게 공감했다. 주변에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 혹은 별 것 아닌 누군가의 유머에 따스하게 반응해 주는 이들은 한결같이 균형 있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늙으면서 유머가 좋아지고 그런 사람들이 좋아지는 것도 그런 삶을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왜 미학이 아니란 말인가?

 

요즘 스페인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서인지 유럽 언어들에서 알파벳 철자들이 단어로 응집되어 의미를 형성했다면, 동아시아 언어들에서는 하나의 소리 덩어리가 하나의 의미 단위를 이루며 인식되었다(동아시아 글자들이 네모 안에 들어간 이유)’ 라는 대목이 마음에 짚혔다. 우리 말 은 그 모양이 빛 같다면서 한글은 소리의 느낌과 글자의 모양이 체계적으로 일치하는 글자라고, 게다가 음성상징 (소리에 포함된 이미지- 하긴 <>이라고 발음하는 순간의 빛남이 느껴지지 않나)이란 것도 있다면서. 물론 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 언어라고 없을 리 없다. 언어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때 발견되는 것이리라.

 

다음은 유지원의 글 속에서 얻은 반짝이는 말이나 지식들이다. 모두 무언가 삶의 태도와 철학을 반영하는 듯한 말들, 그리고 무엇보다 시적인 표현들이다.

-자시니 축시니 하는 시각은 특정 지점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 구간

-유럽 언어의 무지개(+아치) 물성을 담아 표현한 것이지만 우리말은 +지게()’, 물이 만든 둥근 형상이라는 뜻

-독일어에서는 책 읽는 일과 포도 수확하는 일을 모두 레젠(lesen)’이란 단어로 씀.

-영어에는 가산/불가산 명사가 있지만 일본어에는 없음. - 태도가 언어에 반영됨.

-오늘날의 우리 문서는 왜 수직/수평으로만 작성될까? 옛문서에는 그에 자유로웠던 것들이 있었음.

조선의 필사본이나 그림에는 거꾸로 선 사람이나 건물도 있고 방사선으로 쓴 글씨도 있음(불교 등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에도 있음)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차피 효율의 독서가 아니다,

-우주에 완전한 침묵이란 없다. 모든 것은 노래한다.

 

마지막으로, 유지원의 글 중에는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극장이 공간의 음 전달이 탁월하다는 내용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읽은 유시민의 여행기에도 젬퍼 오페라 극장 이야기가 나온다. 극장 자체가 드레스덴에 등장한 네오콘들에 반대하면서 반인종주의 시위를 했다던가... 이래저래 언젠가 꼭 여행해 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이렇게 책은 자꾸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싶게 해준다. 다른 말로 바꾸면, 자꾸만 살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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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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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내 청춘 시절에 지겹도록 들었던 대한민국 빨갱이 역사가 이렇게 다시 쓰여지는구나 싶었다. 이 책을 감동으로 집어 드는 이들은 모두 나처럼 반쪽난 이념의 대한민국이 통탄스러운 구세대들일까? 이루지 못한 꿈, 혹은 몰락한 이상주의자들에 대한 연민이 이 책을 돌아보게 만드는 걸까? 젊은이들도 즐겨 읽는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다. 물론 나는, 존경심과 회한의 마음으로, 즉 사감을 가지고 감동적으로 읽었지만 이념이나 경험에서 다른 길에 서 있는 이들도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다.

 

(실패한)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며칠 동안의 이야기만으로도 이토록 소설이 재미있을 수 있는 것은 소소하게 박힌 사건들이 가지고 있는 드라마틱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관된 아버지의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삶의 철학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철학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 00주의자라 불리려면 꼬질꼬질한 생활 하나하나와 작은 동물을 대하는 태도까지도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어떤 이는 정치적으로 진보라지만 이성을 대할 때 몹시도 보수적이기도 하고 자유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자신이 근본주의자인 줄도 모르고 살기도 하니까. 진보를 자처하지만 생활에서 한없이 자본주의적으로 사는 사람도 많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그런 면모는 없을지 돌아보았다. 그리고 돌아본 지점 하나 더. 소설 속 빨치산 출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엄숙근엄진지하기만 하지 않았다는 것. 작가의 필치 덕이기도 하겠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여유와 유머와 품 넓음을 보며 나는 나의 세계관 밖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가 돌아보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 본다. 나의 장례식에 누구는 오고 누구는 오지 않을 것인가 헤아려 보기도 한다. 나 역시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과학적 믿음을 갖고 있지만 만에 하나 내가 모르는 질서가 작동하는 세계관이 있다면, 그래서 여러 사람이 말하는 대로 죽은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혼으로 지킨다면 나는 어쩌면 내 장례식에 온 이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추억에 잠김으로써 이승의 생을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의 죽음을 잠시나마 애통해해줄까 하는 상상은 지금의 내 삶을 벼리게 만들기도 한다.

 

아버지의 오지랖은 넓었다. 장례식장에 다녀간 사람들은 아버지의 그늘에 어떤 식으로든 덕을 보았던 이들이다. 빨치산을 마감한 후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아프고 힘들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 옆에서 같이 담배를 피는, 시신을 수습하는, 술을 같이 기울이는, 그런 방식. 한 사람의 일생에 한 나라의 역사가 담겼을 뿐 아니라 한 마을의 희로애락이 같이 걸어갔던 것이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아버지, 실패한 빨치산의 소소한 생이 존경스럽다는 거다.

 

얼마나 많은 활동가, 운동가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을까. 그들을 진정으로 애도하고 기억하는 것이 남은 이들의 일일 것이기에 이런 기록은 감사하다. 정지아는 자신의 부모 이야기라서 썼다 하고, 마침 그이는 소설가이기도 했기에 이렇게 기억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고 고맙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다른, 잊혀져 간, 이미 잊혀진 어떤 이들의 삶을 찾아 되살려보자. 연구도 하고 글로도 쓰고, 자꾸 언급하고 하다못해 그들의 자리에 작은 돌 하나라도 새겨보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해 보자. 큰 자리에 앉은 이들은 자신의 권한을 다해 그리 하고 우리처럼 작은 삶을 사는 이들은 자신의 역량을 모아 기억하고 추억하고 기리고 흉내내며 모여서 이룬 역사를 잊지 않으려 애써 보자. 돈도 없고 권력도 없더라도 우리는 이런 작은 힘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것들을 믿는 사람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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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2023-05-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임승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쓴 인문에세이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출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지만 딱히 홍보할 방법이 없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저자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 여러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승객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요). 갑작스러운 댓글에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여러 일로 바쁘시겠지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문득 제 신간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21세기 실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면서 생긴 독특한 인간관계와 에피소드가 있듯이, 두 딸의 아빠이자 반백살의 남성인 저도 30년째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삶을 견지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인생이라는 여행의 경로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다 보니 갈림길에서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글치였던 공대생 출신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선거 날 투표할 때면 지지율이 1%도 안 되는 후보에게 거침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뜬금없이 와인에 홀딱 빠져서는 대한민국 검사뿐만 아니라 노동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 경로는 명승지 투어 같이 잘 차려진 패키지 여행과는 결이 달라서, 오지 탐험에서나 맞닥뜨릴 돌발 장면들이 순간순간 펼쳐졌습니다.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여행 경로를 선택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경로를 선택했을 때만 접할 수 있는 풍경, 경험할 수 있는 사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이 여행이 제법 맘에 들어서 설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리라 기대한다면 과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지 탐험 여행서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리라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읽으셨다면 제 책도 ‘실사판’으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권의 여행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아래에는 출판사의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서 옮깁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인터넷서점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9181643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어있다. 일례로 전 세계가 주목한 코로나19 감염병 대처 방식도 지극히 사회주의식이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공공 재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감염병에 대처했으며 코로나 진단 검사와 치료를 누구나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건 의료 정책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공립학교, 국공립어린이집, 무상 급식, 공공 임대 주택, 부자 증세 등등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및 재분배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복지를 확대하길 원하면서도 왜 사회주의에는 유독 반감을 가질까?

저자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본격적으로 해소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대세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30년 차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또한 자본주의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해설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태생과 최후를 통찰한다.

사회주의로의 강요는 없다. 다만 질문이 시작될 뿐이다. 최악의 빈부 격차, 극심한 이윤 지상주의, 유례없는 환경 파괴,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나갈 것인지. 증오와 배척, 불평등와 불공정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삶의 지표에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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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을 때 매료되는 지점들이 몇 있었다. 우주와 천체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문화인류학적인 이야기들이 좋았다. 뭔가 낯선 곳을 향해 가고 싶게 만드는 벅찬 문투도 좋았다. 특히나 칼 세이건이 집필할 때, 하얀 사슴이 마당에 앉아 있는 칼의 어깨 너머 원고를 보고 있더라는 이야기는, 조금은 과장이 되었을지언정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글은 칼의 것이 아니라 앤  드루얀이 쓴 서문이었던가. 과학자가 글을 잘 쓰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짝꿍 모두가 그러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이 두 과학자는 지성뿐 아니라 감성도 차고 넘쳤던 모양이다. 그러니 서로를 알아보고 열렬히 사랑했겠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은 감동의 여파가 너무 강렬해서 이런 책을 더 읽고 싶었다. <창백한 푸른 점>을 영어 원서와 우리말 책으로 사 놓고 천천히 읽기 시작한 시점에 만난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는 마치 금맥을 발견한 기쁨을 주었다. 여기 알라딘 서평 중에는 칼 세이건의 책에 못 미쳐 실망이라는 내용이 있던데, 두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이며 책의 접근도 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칼의 코스모스와 달리 아니, 그보다 더 폭넓게 과학사를 다룬다. 인문학적으로는 더 훌륭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학생들에게 좀 더 쉽게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감동 서사가 많아 수업에 활용하기 좋은 글도 많았다.

 

과학과 인문학이 만난 과학사 이야기

앤  드루얀은 서문에서 그래도 어쨌든 시대는 나를 앞으로 떼민다.’라고 말한다. 그래,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재능이 있다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런 소명 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작은 그릇으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자기 주변이나 공동체를 위해 책임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것을 일관되게 삶의 지표로 살아가는 이도 많다. 하지만 시대라니!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처럼 인류의 미래가 담긴 프로젝트에 함께 한 이들은 시대의 소명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할 것이다. 흔히 과학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정치와 역사와 인류의 이익과 무관한 과학의 발전이란 없었다. 오히려 과학의 객관성, 중립성을 외친 이들이 본의든 아니든 과학을 정치와 이익과 자본과 권력에 갖다 바친 예들이 더 많다. 이 책은 과학이 지구라는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철학을 일관되게, 매우 긍정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서술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책이 과학책인지 인문학책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댈지도 모른다. 인문학도인 나는, 아니, 인문학적 바탕 없는 과학이 위험하다고 믿는 나는 앤  드루얀을 응원하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깨어날 수 있을까? 기후변화와 핵 재앙이 인류 문명과 수많은 다른 종들을 돌이킬 수 없게끔 파괴하는 미래로 몽유환자처럼 걸어 들어가는 일을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과학은 사랑처럼 그런 초월을 가능케하는 수단이다... 과학을 오용하는 것이 인류 문명을 위협하기는 해도, 과학은 구원의 힘도 가지고 있다.

 

미래를 위한 과학, 모두를 위한 과학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집단에 충성심을 느끼고 공감의 반경을 넓힐 줄 아는 것, 신념 체제에 집착하는 것, 미래를 상상할 줄 아는 것, 세상을 바꿀 줄 알고 답을 찾아 우주를 탐색할 줄 아는 것...그것이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사람)이라 불리는 이유라고. 그리고 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탐욕, 교만,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으로 살아온 지난 50만 년 동안 조화와 협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원을 공평하게 쓰고 양성이 평등한 방향으로...’ 하긴, 유발 하라리, 재레드 다이아몬드 등의 학자들 역시 입을 모아 인간은 혼자 살기에 약한 존재라 서로에게 의존해 왔고, 그래서 언어가 발달했다, 공감과 대화는 인간의 생존의 절대적 무기이다, 약자에게도 고르게 힘을 나누어주는 삶이 아니었으면 인류와 지구는 공멸했을 것이라 말하지 않는가.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바빌로프 이야기였다. 1940년대, 러시아가 전쟁과 대기근을 겪는 와중에 그 제자들과 동료 연구원들까지 모두 종자들을 눈앞에 두고 굶어 죽은 바빌로프의 식량종자연구소 이야기. 그 이후 2008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정부가 만든 스발바르 국제 종자 은행에 영감을 준 바빌로프의 식량종자연구소 이야기.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이런 씨앗보관창고는 이상하게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먼 미래를 보는 사람들을 우리처럼 남은 수십 년의 생애나 걱정하는 범인들이 이해할까. 그러나 그들처럼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없었더라면 문명이든 지구환경이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꼭 들려줄 것이다. 과학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인간의 초자아를 생각하게 하고 철학이 있는 삶, 원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삶이 가능함을 아이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과학에 경의를 표함

그리고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 땅속 네트워크 이야기이다. 이것 역시 공생과 공존, 존중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 나의 학생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숲의 버섯 균사체는 다른 생물들에게 영양소와 숲의 메시지, 공감을 주고받는 중요한 네트워크란다. 균사체 덕분에 숲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숲에서 나무 한 그루가 베이면 다른 나무들이 뿌리 끝을 통해서 베인 나무에게 생명 유지 물질을 보내준다. 그래서 잘린 그루터기는 그 이후 몇백 년도 살아갈 수 있단다.

어린 나무들은 얼른 자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자라면 몸통 세포들에 공기가 너무 많아져 돌풍 등에 취약해질 수 있다. 어미 소나무는 자기 가지로 자녀 소나무를 가려서 어린 나무가 너무 햇빛을 지나치게 탐닉하여 스스로에게 해로울 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꿀벌 이야기는 뭐랄까, 그 존재 자체가 숭고한 느낌마저 준다. 자연이 우리에게 신성을 보여준다면, 함께 살아가야 할 가치를 가르치려 든다면 벌을 통해서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꿀벌의 몸짓 언어 연구자인 카를 폰 프리슈에 의하면 벌의 1초 동안의 씰룩거림은 1킬로의 거리를 의미한단다(과학적이다!). 벌이 위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을 향해 날아라는 뜻이라. 어느 대륙의 벌이든 같은 춤을 주는데 벌은 비행할 때 쓸 방정식을 계산하고 소통할 줄 안다. 오직 꿀벌과 인간만이 물리 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수학 등 기호언어, 과학을 발명해 낸다.

꿀벌의 세계에 부패는 없다. 모두 제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리고 특수한 공간에서 자란 여왕벌을 키울 때 일벌들은 호되게 운동을 시켜 몸무게를 줄이도록 여왕벌을 둘러싸고 밀고 당기고 쿡쿡 찌른다.

새집을 찾을 때 정찰 벌은 자신이 찾은 장소를 알리려고 열심히 춤을 추는데 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갖고 있어 결국 지 지받는 소수의 경쟁자만 남는다. 그리고 새 위치를 직접 보러 간다. 보고 온 벌은 그 장소의 장점을 춤으로 동료들에게 알린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만도 폭력도 거래도 없다. 소수의 경쟁자들은 설득되어 다른 경쟁자를 지지한다.

 

과학의 발전이 어떤 위대한 사람으로 인해 한 순간에 터져 나올 때가 있지만 사실 그 이전 무수한 이들의 연구가 누적되어 집약되지 않는가? 아마도 학문을 하는 이들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원대한 진리의 세계에서 자신보다 앞서 진리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알아내고 싶어 열심히 헤엄쳤던 이들의 노고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유리 콘드라듀크(본명 알렉산드르 샤르게이, 1897년 당시 러시아 제국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 과학자)의 연구는 이후 주로 미국이 이룬 우주 여행의 이론적 기반이었다. 그의 저서에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아폴로 11호는 이 사람의 방법을 좇아서 비행에 성공했고 닐 암스트롱은 달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해, 우크라이나의 콘드라튜크의 오두막을 찾아가 흙을 조금 떠내와 간직했다 한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그 나라 지도자들에게 그를 기려달라고 부탁하였다 한다.

 

과학의 윤리

인간이 지구 전체를 지구 생명 모두의 것이라고 일찌감치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살았다면 인류의 역사를 달라졌을까. 이제 우주 탐사, 혹은 개발을 앞두고 과학자들은 이런 윤리성을 고민하는 것 같다. 그래봤자 결과적으로는 강대국과 부자들의 욕심에 우주 개발이 이용될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형식적일지라도 지키려 애써야 하는 어떤 우주 탐사 윤리에 대해 경외를 표하고 싶다.

 

20174월 토성을 탐사하던 카시니 호의 연료가 다 떨어져 감. 그냥 두면 생명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어느 위성과 충돌할 수도 있고 우주선 안에 지구생명체가 잠복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주선은 우주법으로 정해진 나사의 행성 보호를 위한 생명체 격리 규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 자폭함(카시니 호는 토성의 위성 수십 개를 발견했고 위성 엔켈라두스에 액체 물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고, 토성의 자기장과 중력장을 지도화함.),

 

과학에는 인류를 위한 공헌에 대한 감사만 있는 게 아니라 인류와 지구 자연을 파멸로 몰아갈지 모르는 위험하고 무책임한 몰입과 집착에 대한 우려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1963년 대기권 핵무기 시험으로 모유까지 오염되자 시위를 벌인 어머니들때문에 대기권 핵무기 시험을 금지하는 조약이 체결된 사례와 1980년대에 전 세계 소비자들이 기업에 염화불화탄소 제조를 그만두라고 요구한 덕분에 회복해갈 수 있게 된 오존층 이야기를 통해 과학적으로’, 그리고 집단지성에 기대어미래를 낙관한다, 더불어 지뢰가 있는 곳에만 피는 빨간 애기장대나 발암성 용매인 트라이클로로에틸렌을 평범한 염소 이온(소금)으로 바꿀 수 있는 포플러, 산과 감마선, 독성 중금속 등을 없앨 수 있는 효모균을 언급하며 과학에서 대안들을 찾는다. 잠시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떠올렸다. 결국 지구와 인류의 미래는 과학 대 비과학, 정치 대 반 정치의 대결이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식으로는 지배적 이성혹은 심리학적 용어를 빌면 ‘슈퍼 이고’, 혹은 그 무엇이든 인간에게는 상황을 지혜롭고 극복해나가려는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앤 드류안 같은 과학자가 우리에게는 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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