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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개정판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16년 9월
평점 :
무지한 스승
손으로 익히는 일이든 글자를 익히는 일이든, 진정한 공부는 본인의 열망에서 비롯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무지한 스승>에 보면 서로의 말을 알지 못하는 프랑스의 교사 자코토와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의 학생들이 만난다. 학생들은 결국 대역판을 놓고 스스로 프랑스어를 깨우쳐 간다. 이 책을 보면서 <더 리더>를 사전을 놓고 읽어가던 내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저런 과정이 가능할까, 에는 회의가 들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하는 동기가 없는 것이다.
딸 아이 이야기를 하자. 6학년 때부터 날라리 경계선에서 자그마치 4, 5년을 놀기만 하다가 급기야 고2 봄, 자퇴를 할까까지 고민을 하던 아이가 여름방학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대학을 꼭 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는 강남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쌓아 올린 과정을 따라잡기 위해 맨땅에 헤딩을 했다. 전자사전에서 영어발음을 찾아듣는 과정은 느리고 답답했다. 저렇게 공부를 하다간 재수하기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가 왜곡되었든 어쨌든, 저렇게 머릿속에 넣는 지식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든 어떻든. 그리고 아이는 자기 몸으로 스스로 깨치고 나온 알껍질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여,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을 때 그렇게 부딪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자랑스럽다.
다시 <무지한 스승>으로 가면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고 서로 측은히 여기는 평등한 능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곧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역량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쾌락 중 가장 달콤하여 무리의 모든 욕구 중 가장 절박한 것이다.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전제되고, 거기서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닌 머리와 글로 하는 공부만을 성공의 열쇠로 삼는 세상에서는 진정한 공부가 가능하지 않다.
너무나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 중에 인디언의 공부방식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 겨우 편입이 된 체로키 족 아이들이, 시험을 본다 하니 자기들끼리 책상을 붙여 앉더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라’ 할 때는 항상 ‘함께 힘을 합쳐’ 해왔다는 것이다. 평가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국어 수행평가는 대개 뭔가를 해내야 하는 것인데 그때 능력보다는 해내는 과정, 과정에서의 성취, 그리고 성실성을 본다. 그러니 수행평가 아닌가? 이미 많은 것을 습득한 아이들은 그 수행평가도 대체로 잘하긴 한다. 그러나 의외의 능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있어 이 수행평가는 의미가 있다. 독해능력은 떨어지지만 토론을 잘 하는 아이, 토론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중재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 지필고사 점수는 낮지만 글은 잘 쓰는 아이, 책자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일을 잘하는 아이...
그러나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모둠활동을 싫어한다. 특히 수행평가를 두레로 하면 많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모둠이 공동 점수를 받으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가 누구냐에 따라 점수 편차가 심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폭탄인 아이가 자기 모둠에 들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경우도 많다. 그 아이들에게 먼저 이 과정 자체가 진정한 공부임을 설득시키는 일에 주력한다. 공동으로 행하는 수행의 과정이 능력 있는 아이들에게 고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리더십을 고양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진정 이 사회의 리더가 될 만한 아이들이라면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친구, 능력이 부치는 친구를 만나더라도 그들에게 맞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진정한 능력은 뭔가를 잘 만들고 발표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는 능력일 것이다.
고속도로 하이패스가 도입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반면 독일에서는 일부러 지하철 등에 매표창구를 자동화하지 않는다고 한단다. 일정 수준 인간이 일을 해야 할 자리를 남겨두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한단다. 일자리 창출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랑시에르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하냐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쩌면‘ 덕분에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끊임없이 위와 같은 문제제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채널의 <공부 못하는 나라> 독일은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묻는다. 학업성적이 높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럼 잘 사는 나라를 왜 만들어야 하는가? 행복하려고? 그래서 대학진학률이 높고 아이들 학업성적이 높은 우리나라는 행복한가? 아니, 잘 살기는 하는가 말이다. 결국은 몇몇 소수의 잘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우리 모두 놀아나는 것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 공부 잘하는 아이도, 중간인 아이도, 못하는 아이도 모두 불행한 나라. 여기서 대입시를 위해 매진하라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엄마들이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이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막아줘야 하고, 적어도 엄마가 스스로 아이가 지치도록 채찍질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 좋은 세상이라면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만 잘 갈무리하면 사회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막 돌아가고 있다면 내 자식만 잘 자라도록 바라는 모성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권력이나 힘이란 게 진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휘둘러지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권력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자들이 권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자’에 대한 두려움과 부러움을 가질 때, 즉 환상 속에서 극대화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말하자면 교육과 권력의 상관관계가 그런 환상 속의 두려움으로 극대화되고 있는 사회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열패감은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근원에는 가진 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퍼트린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있고 그 공포에 우리 모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성은 힘이 세다고 하지만,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진정 수퍼맨의 파워를 발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모성이라면 그 힘을, 자기 자식을 채찍질하고 다른 자식들을 밀어내는 데 써서는 안 된다. 우리 머리 위를 뒤덮은 거짓 이데롤로기를 걷어내는 데에 그 모성파워를 써야 할 것이다. 평등의 공동체, 나눔으로써 배우는 세상, 무지해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식을 잘못 써먹어서 부끄러운 세상을 인식하는 그런 올바른 배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써야 그것이 진정한 모성애인 것이다.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 이성적 피조물로서의 자기에 대한 즉자적 무시의 늪에서 말이다. 문제는 해방된 인간들과 해방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