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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입문 ㅣ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크리스토퍼 원 지음, 김요한 옮김 / 서광사 / 2011년 6월
평점 :
나이가 들면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는데, 이 정도 살아보니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은 인생의 이치가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산 날보다 남은 날이 적다 보니 죽음에 대해 자꾸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의 말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철학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요즘 철학을 궁금해하는 이유가 저런 이유와 맞닿아 있는지 어떤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그냥 겉으로만 설명하자면 철학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도 되는 걸까, 늘 걸렸던 마음을 이제 조금이나마 정신적 여유가 생겼을 때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피의 세계>에서 소피가 일갈했듯이 서양의 중년 남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그 ‘철학’이라는 세계에 반감이 느껴진다. 기득권의 가치를 반영한, 노동을 모르는 ‘사유’만의 세계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대체로 정치권력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민중이 삶과도 가깝지 않은 그 철학이라는 세계, 아니, ‘서양 철학’이라는 세계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아 공부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부채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어쨌거나 비판을 하든 수용을 하든 뭘 알아야 할 수 있을 것 같아 좀 읽어보려 애쓰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문화가 다르고 번역의 높은 담을 넘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사유가 사유를 낳다 보니 어려운 말들이 춤을 춘다. (어쩌면 철학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떠들어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이러저런 철학 개요서들을 읽을 때마다 늘 등장하는 이름, 아리스토텔레스. 그에게 맨 처음 매력을 느꼈던 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였다. 정작 제대로 된 연구가 있을까 싶을 만큼 방대한 저서를 남긴 사람이다 보니 ‘어딘가에 알려지지 않은 저서가 더 있지 않을까’ 상상의 여지가 있다. 거기서 비롯된 상상은 소설의 근간을 이루었다.
최근에도 철학서마다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의 보수성을 뛰어넘는,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철학을 펼쳤나 싶어 그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제일 처음 읽어보겠노라 덤빈 것이 바로 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그나마 연구서인 이 책을 권한 출판사를 원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인 줄 알고 집어든 나의 무지를 원망한다. 책의 많은 부분은 저자의 해석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추출의 방식’으로 읽었다. 연구자의 고뇌따윈 됐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말만 추려보는 방식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말들도 모호하고, 연구자들의 해석은 믿을 수가 없다. 연구자들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중번역에는 오류와 오해의 소지가 없으리란 법 없어서 하는 말이다. 물론 문화와 가치관이 달라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윤리적으로 옳다고 말한 그 ‘탁월성’이라는 것, 타고난 ‘최고 좋음’의 경지가 과연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가치일까 생각해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중용이니 관조니라고 번역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최고의 가치들은 격동의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가치일까.
물론 시대가 다르니 현대적 관점으로 그의 철학을 논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일단 지나간 모든 업적은 어차피 극복해야 하는 업적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자연과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걸림돌이 되었다고 주장한 유시민의 입을 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그림자가 크고 영향력이 커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당시의 시점에서 그의 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해 봄으로써 그의 진정한 가치를 가늠해 보련다. 당시로서는 (앞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비하여) 사유보다 실천, 귀족적이기보다 시민적인, 조금은 더 자연친화적인, 본성보다는 관계성을 중시한 꽤나 진보적인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탁월성이 품성의 탁월성들과 사유의 탁월성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탁월성을 ‘중간 상태(중용)’라고 정의하며 중용이란 두 극단 사이에 위치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가장 완전한 목적은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며 결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추구되지 않는다.’고 했단다. 칸트가 연상된다.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이성과 일치한다. 그는 행위에 관한 원리나 규칙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탁월성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이 즐거워야(적어도 고통스럽지 않아야)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고귀한 것이 어떤 고통을 감내하는 일을 포함할지라도 그 사람은 즐겁게 그 일을 할 것이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을 갖춘 품성 상태가 ‘중용’ 상태라 주장한다.
잘 만들어진 작품은 더 이상 빼거나 보탤 수 없다. 욕망이나 감정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과 목적, 사람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이 중간이자 최선이고 이것이야말로 탁월한 것이란다. 즉 탁월성은 두 대립적 극단 상태의 중간 상태(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이다.
중용에 대해 가장 납득할 만한 설명은 이것이었다. ‘용감함과 경솔함은 모두 위험에 직면했을 때 공통적으로 대담무쌍함과 확고함을 가지고 있지만 용감한 사람이 오직 확고함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때에만 그렇게 하는 데 비해 경솔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확고함을 갖는다’ 진정한 용기는 만용이 아니며 두려움 없는 상태도 아니라는 것. 두려움과 확고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중용이 바로 진정한 용기라는 것이다. 흔히 오독하듯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상태를 중용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용기는 단지 두려움을 통제하게 만들어 주는 품성이 아니고 고귀한 것을 위해서 두려움을 통제하게 만들어 주는 품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