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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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들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감정도 양가적이다. ‘뭔가 뛰어난 점이 있으니 베스트셀러가 되었겠지’, 하는, ‘너 인정의 평가가 하나. 또 하나는 돈으로 마케팅하고 광고했나? 품질에 못 미치는 허명 덩어리’, 하는 흥칫뿡의 마음. 후자에 해당하는 책을 워낙 많이 봐온 게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베스트셀러를 쓱 훑어보는 편이다. 역차별 받는 보석을 놓칠까봐서.

이 책도 대통령의 언급 덕인지 무척이나 많이 팔렸나 보다. 읽기 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한 세대를 함부로 분석한다는 것인가(소위 386세대로서, 세대론, 비판론에 상처를 많이 받아봤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읽어는 보고 싶었다. 일단 내 아들과 딸이 92년생, 97년생이다. 저자가 제대로 보긴 했는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물론 가까이서 본 자녀의 모습과 사회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은 다를 것이며 특히 군집으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그들 모습은 또 다를 것이지만 말이다).

일단, 저자가 굉장히 많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한 공이 돋보인다. 책을 읽다가 다시 날개로 돌아가 저자 소개 글을 보았을 정도다. 이 사람 연구자인가? 하고 말이다. 의외로 학자도 아니고 이 분야 전문가도 아니었다. 게다가 비교적 객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 시선도 나쁘지 않다. 이 세대 때문에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오히려 본인들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세대라고 자조하는 데 비해) 한심한 눈길로 보거나 미래세대라고 무작정 찬양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90년대 생들의 특성을 언급하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정직성이다.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교단에서 90년대 생 남자아이들을 가르쳤고 아들딸을 키웠지만 이들이 이전 세대나 이후 세대보다 더 정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나의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면 나는, 요즘 젊은이들은 대체로 개인의 이익과 자본주의적 잣대에서 부정직하고 불공평한 것을 못 참는 것 같다, 고 인정은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 중 꽤 많은 젊은이들이 소위 조국 사태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왜 거악은 그냥 두면서 그보다 작은 일에만 분노하느냐고 묻는다면, 이 책에서 예로 제시한 부도덕한 기업이나 상품에 대한 조용한 그들의 거부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것은 나쁜 현상인가?

거시적 담론에 약한 90년 생들은 80년대에 민주화의 물결과 함께 청춘을 보내온 5,60대들이 볼 때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김수영의 시를 조금 비틀어 늬들은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 라고 묻고 싶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거꾸로 기성세대들이여, 그대들은 세상을 바꾼 역사의식을 지닌 것처럼 잘난 척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안위,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입으로는 민주화를 외치면서 사교육시장을 키우고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혈안이 되어 지내느라 대한민국의 교육의 공정성을 내팽개치고 경제적 격차를 키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라,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식은 없지만 생활 속의 부당함을 하나 하나, 작은 목소리라도 내어 고쳐나가도 싶다. 적어도 불공정, 부정의에 대해 거부라고 하련다, 라고 그들이 말하면 우리는 무어라 답할 것인가?

 

나는 침대 머리맡에 7~8종의 책을 쌓아놓고 읽는다. 이 책처럼 지하철을 타면서 빨리 보는 책이 절반, 몇 달을 묵히면서 천천히 공부하듯 읽는 책이 절반이다. 빨리 읽을 수 있다고 책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책은 논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 생각할 것이 많은 책, 특히 어쨌거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도 그 반열에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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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김치냉장고에 넣었다 - 꿈, 무의식, 그리고 정신분석 이야기
윤설 지음 / 새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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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추리소설 제목 참 선정적으로 뽑았다, 하고. 표지를 보고 청소년 소설인가 싶어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알라딘 메인에 계속 떠있길래 호기심에 자세히 살펴보니.... 요즘 내가 관심 깊게 보고 있는 꿈 분석서적 아닌가! 그럼 저 제목은 누군가의 꿈이란 건데...? 그렇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융의 꿈 분석도 너무나 많은 사례들 중에 내 꿈을 해석해줄 것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고혜경의 책도 그랬다. 나는 그저 나의 꿈이 궁금했을 뿐인데... 답은 없었다. 그래도 이런 책들을 읽으면 얻은 결론 하나는 꿈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의 무의식이 어떤 옷을 입고 등장하여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귀기울여라.’ 하는 것.

윤설의 책도 결론은 비슷하다. 심도 깊은 심리학적 연구나 분석은 아니다. 특이한 것은 다른 상담자들의 심리학 책이 자신이 만난 내담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는 데 비해 이 책은 저자 자신의 꿈과 어린 시절 성장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내 연구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빨리 읽히고 공감하기도 쉽다. 특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며 억울하고 수줍게 살아온 이 땅의 많은 40대 이상의 여성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나처럼 좀 더 거창한 분석의 사례나 이론을 찾고 싶었던 이들이라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책의 방향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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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로자 - 만화로 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케이트 에번스 지음, 폴 불 엮음, 박경선 옮김, 장석준 해제 / 산처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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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는 언젠가 읽으리라고 꽂혀 있는 오래된 책들이 있다. 루카치 미학이나 박상륭의 잡설품, 끝끝내 안 읽고 되팔아 버린 최인호의 소설 등등... 그 중 30년은 넘은 것이 <로자 룩셈부루그의 사상>이다. 아마도 이 책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만화 <붉은 로자>를 샀나 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내내 씁쓸하다. 늘 바쁘게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고 있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념이 이걸 해서 뭐에 쓰나?”이다. 책을 읽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그 쓸모를 생각했을 때 밀려오는 허무감이 있으면 흥미가 떨어진다. 한참 좋아하던 건축학 이야기도 그랬고 그림그리기도 그랬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영어공부도 나이가 들수록 이걸 어디에 써먹으려나 싶으면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다. 심리학 책을 열심히 읽고 있지만 퇴직을 10년 정도 남기고 있는 지금, 언제까지 상담업무를 맡을지 모르는데 심리학 공부를 더 하면 어디에 써먹을까싶다. 그러고 보면 나는 효용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인가 보다. 사실 인생 별거 없는데, 인생이란 거 자체가 쓸모가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아무 소용없는 즐거운 일에 매진해도 되는데..

그런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럼에도, <레드 로자>는 참 쓸모없는 책 같아 보인다. 특히 이 만화는, 로자가 활약했던 당시의 시대와 사회적 정황을 시시콜콜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논하는 게 의미도 없는 19세기 자본주의의 맹점을 되짚는다. 나는 열심히 살았던 활동가들의 삶 이야기를 즐겨 읽고 감정이입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시대로 돌아가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우리가 되짚고 싶은 것은 그들의 삶의 태도와 열정이지 그 당시의 이념적 오류를 짚으려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라면 80년대 운동권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길을 모색할 것이지만 21세기에 19세기 유럽의 공산주의 운동의 논리와 오류를 짚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로자는 지식인 활동가이다. 전형적이다. 공부한 자들은 글로 선전선동하고 조직을 규합한다. 희생에 비해 성과는 별로 없다. 남은 것은 조직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이론과 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회주의자들도 그랬다. 이론조차 남기지 못한 20세기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들도 있다(그들 대부분은 정치권에 편입되었으나 일부의 성과 정권을 창출한 이들이 분명 있으니 를 제외하면 정치권 언저리에서 녹아 사라지고 있고 아직도 한국만의 특별한 정치이론으로 정립되지는 못한 것 같다). 로자도 지금은 사라져 버린 듯 보이는 유렵 공산주의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을 뿐이다.

물론, 자본주의 형태를 띄고 있으나 노동자들의 민주주의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에는 맑시즘과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기여한 바 크다. 자본주의라고는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강한 나라들도 많고 그런 유럽의 문화에는 로자 같은 이가 기여한 바가 크다. 그게 아니라는 게 아니라 이 책이 짚고 있는 시시콜콜한 로자의 이론들과 행적들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가끔 대학 때 부르던 운동가요를 부를 때가 있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노래, 혁명을 노래하는 것. 피의 저항과 가진 자들에 대한 저주와 다짐들, 당시에는 전두환에 대한 적개심과 자본가들에 대한 경각을 드러내는 데 유효했으나 이제는 낡은 방식이 되었다. 그런 노래를 울컥하며 부른다는 게 허무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고작, 대학 동문들과 술자리에서 추억을 소환하는 데에는 유효하겠지.

 

작가는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접근하는 걸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가끔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사라져 다시는 그이를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도모하던 모든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라는 점이 더 허무한 일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나 역시 내가 꿈꾸던 일, 하려던 일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히려 남은 이들에게 내가 계획하던 일들이 짐스러울 것이다. 물론 로자의 죽음은 그렇게 무가치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1919년 이후에도 그의 삶은 수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은 아니다.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는 더더욱. 로자 룩셈부르그에 대해 더 연구해 보아야 할 필요조차 못 느끼게 만드는 나쁜 방식이다. 이제는 새롭게 그 사람에 대해 다가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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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말 -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수언어에 대하여
요시오카 노보루 지음, 니시 슈쿠 그림, 문방울 옮김 / 시드페이퍼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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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한글날 즈음 우리 학교는 우리말 사랑을 주제로 백일장을 했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허구인 영화이지만, 어쩌면 사라져버릴 뻔한 우리 말 이야기 <말모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오래 사라지지 않을 자기 말을 가졌다는 것은 다행, 그 언어가 권력을 지닌 언어에 콧대에 눌리고 있다는 것은 수치.... 묘하게 어긋나는 나의 말에 대한 양가감정이 있다. 매일매일 영어 권력에 대해 생각하고 산다. 나의 모국어가 최고의 권력을 가진 말이기를 바라는 욕심을 벗어야 한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다른 언어에 대한 열등감도 없을 것이다. 이국의 언어는 그저 신비롭고 아름다울 뿐, 부럽고 무서운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말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곧 사라져버릴 아름다운 말들도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운 말들이다.

베바라사나 - 서로 존경한다는 의미의 헤레로어(아프리카 보츠와나 공화국 사용)

볼트가이 있는 그대로 두어라(앉장을 얹지 않은,이라는 의미의 형용사. 말에게 안장을 얹는 것은 말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생각함). 몽골어

스카마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계절

비진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100명이 사용하는 울차어- 러시아 소수민족)

헌치 환생 하이다어(북미의 섬, 100명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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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 - 이명옥 관장과 함께하는 창의적 미술 읽기
이명옥 지음 / 시공아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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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랑 같이 국어를 공부하는 2학년 학생 여러분~, 국어 교과서에 공감각에 대한 글이 실렸던 거 기억하지? 솔직히 선생님은 이 교과서를 처음 보고 좀 당황했단다. 시에서 공감각적 표현은 많이 가르쳐 보았지만 예술작품에서 공감각(共感覺)이라니?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에서 수영하는 사람의 풍덩소리를 느껴 보란다. 당황스럽고도 재미있더구나. 우리는 교과서에 나온 그림 외에도 데이비드 호크니의 다른 그림에서 공감각 찾기도 해보았고 또 다른 김호득의 그림처럼 포스트잇에 냄새가 나는 내 이름, 소리가 들리는 내 이름, 촉감이 느껴지는 내 이름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활동도 해 보았잖니. 그리고 칸딘스키 그림을 보면서 바흐의 음악도 들어 보았고. 칸딘스키뿐이겠니, 거꾸로 엘렌 그리모라는 프랑스의 피아니스트도 바흐의 음악을 연습하고 있는데 옅은 오렌지색, 검은색, 푸른색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는구나(이 책 91). 예술가들은 이렇게 감각이 예민한가 보다, 그치?

 

이 글은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 관장이 쓴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이란 책에 실려 있는 글이었다. 그림에 대해 쉽게 풀어쓴 책들이 워낙 많아 어렸을 때부터 이루지 못했던 미술계통의 꿈을 책읽기로 겨우겨우 달래던 나마저도 요즘은 그런 책들에 질리는데, 한 마디로 이 책은 매우 매우 다른 책이다. 정말 우리 중학생들 눈높이에 딱 맞는 재미난 미술 이야기가 한 가득인 거야.

보통 미술 에세이가 연대별로, 혹은 미술사조 별로, 또는 화가에 얽힌 이야기 중심으로 펼쳐지는 데 반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굉장히 창의적인 접근을 하고 있어. (케테 콜비츠의 <죽음의 부름>이라는 그림에서 저승사자의 손과 살고자 하는 이의 손을 비교해 보라)이나 입모양, 발모양에 이야기가 담긴 그림 이야기를 주제별로 펼치거나 생각을 눈에 보이게 만들기’, ‘그림 속의 리듬처럼 공감각에 대해서는 아예 아홉 편의 글을 모아 쓰기도 했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3장의 첫 편, 르네 마그리트를 필두로 상상화를 다룬다. 영화 <아바타>의 모티프가 된 하늘에 가대한 성채가 둥둥 떠다니는 그림 같은 것 말이야. 우리, 학기 초에 표절과 패러디, 오마주의 차이를 공부할 때 영화 <아바타>랑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를 비교했던 거 기억하지? , 그리고 이 책에서 거울 그림만 다룬 창작의 중요한 도구, 거울도 재미있다.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그림 이야기가 나온단 말이야.

 

진정한 공부는 쉬는 시간 혹은 학교 밖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공교육 교사인 나로서는 참 섭섭한 소리이지만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학교는 생각하고 상상하는 최소한의 지식을 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친구를 주고, 그리고 급식을 주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주지나 말아야 할 텐데.... 적어도 우리 학교라도 그랬으면 좋겠다마는......) 쉬는 시간에 너희가 혼자 끼적거리는 그림들, 국어 시간 아닌 때 지어낸 이야기들, 어렸을 때 일기장에 그리던 말도 안 되는 졸라맨 만화, 그리고 유튜브를 보고 지어본 랩 가사들...... 그렇게나마 너희들이 자신의 상상력과 풍성한 감성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얘들아, 그런 너희 작품들 나한테도 가끔씩 살짝 보여주면 더 좋고~.

 

이 책 181쪽에 나오는 <해리 포터>의 지은이 조앤K 롤링이 했다는 말이 너무 멋져서 나도 다시 한 번 인용하련다. “세상을 바꾸는 데 마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은 이미 이보다 나은 상상력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재미난 상상의 끈을 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럼 또 아니, 너희의 상상력의 씨앗이 조금 씩 조금 씩 싹 트고 자라다 보면 너희가 어른이 된 후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고 멋진 곳으로 변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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