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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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때 스스로 작은 개척교회에 걸어들어 가 자발적 기독교 신자가 된 적이 있다. 사춘기를 맞으면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신앙을 접었지만 말이다. 또 초등학교 5학년 때 천주교 신자였던 담임 선생님 덕분에 수녀원 등에 체험활동처럼 반 아이들과 함께 가본 경험도 있다. 그런 경험들 때문에 지금도 신앙은 없지만 천주교적 정서에 친근감을 느낀다. 솔직히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성당을 다닐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주적인, 영적인, 신비한, 절대적인 어떤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존재에 대해 막연하나마 경외의 마음이 있기에 언젠가 신념이 생겨 그 품에 안겼으면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서는 그러하되 이성이 따르지 않는다는 거다.

종교적인 경험과 상관없이도 성소가 주는 특별한 감성이 있다. 나 역시 이 책 <묵상> 속에 승효상이 언급한 <위대한 침묵>과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서 도심의 성당에 찾아가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기도의 대상을 특정하지는 못한다. 그냥 못난 나를 엎드리게 할 뿐). 그런 내게 이 두툼한 책이 얼마나 매혹적이었겠는가. 특히 승효상이라니, 원래 건축학 에세이를 좋아해 이 책 저 책 읽어대는 내게 특유의 글솜씨로 우리를 매혹시킨 그 승효상이라니.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책은 좀 실망스러웠다. 긴 글은 그렇더라도 사진이라도 좀 들여다보면서 마치 내가 수도원을 다닌 양 위안을 받고 싶었는데 사진이 너무 어둡다. 긴 글들은, 승효상의 건축학 에세이라기보다 여행기에 가깝다. 여행기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여행기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특정한 문화적 권력의 반열에 오른 이들끼리의 카르텔 같은 게 느껴지는 그 공부 무리며 여행의 조직이 이상하게 위화감이 느껴진다. 여행 중간에 늘 와인 파티를 벌이는 그들, 와인 레벨을 가지고 이탈리아의 웨이터들의 대접을 바꾸었다는 에피소드 등이 즐겁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이 책은 이 가지고 있는 공익적 요소보다는 개인의 기록, 동아리들의 추억 공유를 위한 존재 이유가 더 크다. 마치 처음에 여행을 가기 전에 누군가가 짜주었다는 여행 프로그램 책처럼 말이다. 그걸 스스로가 아니라 누군가가 짜준단 말이지. 보기 좋게, 편리하게 매뉴얼 북으로 쓰라고. 그건 권력 아닌가?

그게 뭐 대수라고 불편하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좀 진보적이다 라고 말하려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수고나 불편을 딛고 행복을 느끼는 일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생활은 그럴 수밖에 없을지라도, 적어도 글로 자기를 한번쯤 검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은 감출 줄도 알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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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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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는 남혐, 여혐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있다. 여성인 내가 남학교 교사로 살아오면서 느낀, 직장에서의 여혐 혹은 비하의 피해, 일상 생활에서 느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모든 여성들이 그러하듯 나의 이야기만 모아도(상대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차별이 덜한 직장임에도)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과 더불어 젊은 남학생들을 가까이서 대하다 보니 그들이 느끼는 남녀역차별에 대한 불편한 마음에 대해서도 이해가 된다.

남자중학생들 사이의 여성혐오는 지금 도를 넘었다. 이 나이 때 학생들이 자기 외의 모든 대상에 대해 공격적인 면, 거기에 사회적 요인, 정치적 요인 등 모든 것들이 집약되어 그런 줄을 다 알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이해도 인정도 하지 않는 가해자이자 그 자신 어리석은 피해자가 되고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에게 어떻게 혐오표현의 문제점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국어수업을 통해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차별의식, 열등의식과 연결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인권의 문제인지, 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어떻게 결국 스스로의 존중을 깎아먹는 것인지 가르치기 위해 토론도 하고 글쓰기도 하고 별별 방법을 다 쓴다. 당연히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지만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할까라는 토론 이슈를 놓고 수업을 할 때 그들로부터 쏟아지는 독설을 듣는 것이 참 힘겨웠다.

남자가 오히려 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남학생들에게, 책 속의 이 구절을 활용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남혐과 개독도 폄오표현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런 문제의 핵심은 소수자 혐오의 경우처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가령 미국에서 백인들에게 덩치 크고 미련한 백곰이라고 외쳐도 그들이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거나 이미지를 고착시켜 백인 차별을 조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가 사장에게 한국사람들은 사장님처럼 다 게으른 모양이네요.’ 라고 말한다고 한국인 차별이 될 수 없다. 이런 표현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혐오표현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혐오표현은 소수자, 약자에게 향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접근을 위해 남중생들이 좋아하는 힙합을 예로 들었다. 힙합에는 디스라는 게 있다. 상대방 래퍼를 까는것이다. 디스와 혐오표현은 어떻게 다를까를 놓고 토론을 해보았다. 학생들 스스로 혐오표현이 약자를 향한 것임을 알아낸다. 강자에게 향하는 비판과 약자에게 향하는 비난의 차이도 토론을 통해 알아낸다.

 

이 글을 쓰기 방금 전,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복도에서 *년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들린다, 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너무나 많이 들린다. 여학생도 없는 학교에서 저런 말이 들리는 이유가 뭘까? 남학생들끼리 ‘~욕을 하기 때문이다. 뒤돌아서 방금 그 말을 한 학생을 불렀는데, 평소 욕 좀 하고 말썽 좀 피우고 껄렁대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다. 그만큼 저 욕이 만연해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욕하는 청소년의 문제 원인은 사회적 요인과 어른들에서 찾아야 한다지만 정말 이럴 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싫어진다.

 

 

우리 학교는 일 년에 두 번 교사상담연수를 한다. 심리학이나 상담의 기술에 대한 연수도 하지만 학생들과의 대화법이나 올바른 훈육법에 대한 연수도 했다. 지난 학기에는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 모든 교사가 읽고 학생들의 언어생활 지도에 대한 토론을 해보았다. 연수는 늘 토의와 토론으로 그친다. 문제가 심각함을 인지하고 원인을 분석하지만 대안을 애매하고 실천은 전무하다. 대개의 교사연수가 그러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이어지는 행정적 실천 말고, 정말 교육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번엔 꼭 대안을 내자, 그리고 그것을 꼭 실천하자, 고 다짐했다. 모든 교사가 모든 프로그램의 작은 부분이라도 맡아서 준비하고 진행에 힘을 합쳤다. 좋은 말을 모아 캘리그래피로 써서 창문에 붙여도 보았고 말투가 거친 학생들은 따로 교장교감이 책을 한 권씩 선물하며 상담도 했다. 담임 선생님들은 아침 시간에 긍정적인 인사말로 하루를 시작하는 행사도 했다. 학생회의 캠페인도 있었고 듣고 싶은 좋은 말을 모아 나무에 거는 예쁜말나무행사도 했다. 바른 말을 사용하는 학생들에게 상도 주었다. 악플의 심각성에 대해 토론하고 좋은 댓글도 만들어 보았다. 그래서 정말 2학기 개학 후 한 달쯤은 학생들도 조심하는 듯 보였다.

물론 그런다고 뿌리가 뽑히진 않을 것이다. 우리 선생님들 가운데 나온 말 중 교사들 스스로 우리의 말을 돌아보자. 학생들에게 ~!’라고 부르지 말자. 교사가 학생에게 욕을 하거나 모욕감을 주는 말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들이 듣겠는가?” 하는 것이 있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공감하면서, 벌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어 깨닫게 하는 방식을 고심했다. 교사연수를 하면서 얻은 감동이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규제하고 벌줄까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좋은 말을 많이 듣게 하여 욕설과 혐오표현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나누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렇게 말한다. 물론 아래의 근본원인 제거가 결코 쉽지 않으며 그거는 그거대로 고민하더라도 학교와 가정에서는 뭐라도, 뭐 작은 일이라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지만 말이다.

 

혐오표현도 금지하고 규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혐오표현을 낳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사회의 내성을 키우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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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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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개인의 것일 수 없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발화와 문장은 개인의 입과 손을 통해 나오니 말이나 문장에는 개인의 목소리가 들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교정교열을 거치다 보면(정상적인 문장이 되기 위한 기준을 통과하다 보면) 그런 개인의 목소리는 들어있지 않게 되는 것 아닐까...

아주 뛰어난 문필가의 경우라면 비문일지라도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고스란히 살려줄지도 모르고, 그런 문장조차 칭송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보통 작가들은 비문혹은 정상적이지 않은 문장이라는 이유로 자기 문장에 대한 수정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나마 뛰어난 교정교열작가를 만나면, 자기만의 개성이 사라져 버린 아까운 마음과 더불어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은 것 같아 기분은 썩 좋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기라도 할 것이다. 물론 교정교열자와 논쟁이 붙거나 수정된 문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그 이의 수필을 나오는 족족 읽는다. 문장이 좋다기보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리고 취재력이 돋보이는 생동하는 글을 쓴다. 그런데 어떤 여행기를 읽다가 경악했다. 그이의 글 같지 않았다. 지나치게 짧은 문장도 어색했지만 비문이 너무 많았고 쓸데없는 쉼표가 많다. 그렇다면 여태껏 좋은 교정자를 만났다는 것인가? 이 책은 너무 급히 나왔던 걸까? 어쩌면 이번 글은 원래 유난히 비문이 너무 많아 도저히 손을 못 댄 걸까. 혹은 교정자나 데스크가 글이란 게 원래 글쓴이의 개성을 살려야 좋은 글이라는 철학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나는 편집자의 힘을 믿는다. 책을 너댓 권 냈지만 늘 편집자와 이야기를 많이 나눌수록, 편집의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칠수록 내 글이 더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마치 도자기를 빚듯이 공이 들어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자기 글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편집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나온 책은 마치 정성을 다하여 키운 좋은 부모 밑에서 잘 성장한 아이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아무리 교정교열을 거처도 원 저자의 향기는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경험을 하는, 편집자를 믿는 작가들도 그래도 내가 쓴 원글에 대한 집착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은 사람이 내놓은 역작, 창조물, 작품 들 중 가장 영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작곡이나 그림은 남의 손에서 교정교열되는 과정이 없건만 책은 왜 그러한가, 잠시 의문이 들긴 하네...

저자인 전문 편집인 김점선 씨의 이 말을 인용하며 위 질문과 아쉬움에 대한 답을 대신하련다.

 

자기 글에서 이상한 부분을 빠짐없이 짚어낼 만큼 완벽하게 객관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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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공항에서
최갑수 지음 / 보다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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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외롭고

배를 띄운 밤바다같이 달을 내건 밤하늘같이

별빛 하나로도 생을 건너가는 사람이 있답니다

지금 사랑해야지, 우린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까

모든 꽃들이 시들고 모든 풍경이 사라져도

우리는 사랑했고 더 깊은 눈동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작위로 예쁜 제목만 뽑았는데 마치 한 편의 시 같다?)

 

시인이라더니, 제목만으로도(차라리 제목이 더) 여운이 남는다.

사실 책의 제목 때문에 읽고 싶어지기도 했다. <밤의 공항에서>라니..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공항이라는 말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안다. 게다가 밤의공항이라니.

 

나는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은 없지만 밤의 공항이 어떤 느낌인지는 좀 안다. 늦은 밤 공항에 도착해본 적도 있고 이 글 속 이야기처럼 공항에서 밤을 새본 적도 있다. 쿠바여행 갈 때 벤쿠버를 경유해야 했다. 새벽에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어딘가에서 묵기에는 너무 애매한 시간이었다. 숙소에 묵어도 또 새벽에 나와 공항으로 이동을 해야 하니... 차라리 공항 라운지에 짐을 맡기고 오후와 저녁의 벤쿠버를 좀 즐기고는 다시 공항에 돌아와 밤을 새자, 이랬던 거다. 자그마치 스무 살 난 딸과 50대의 남편을 데리고 말이다. 우리의 인천공항을 생각하고 공항은 쾌적할 거라고 생각했다. 웬걸, 새벽엔 추웠고 의자는 모자랐고 의자마다 손걸이가 있어 눕기도 어려웠다. 겨우 누울 만한 의자를 찾아도 딸이나 나는 그나마 웅크릴 수라도 있었지만 키가 180에 육박하는 남편은 누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항에는 왜 이리 노숙하는 사람이 많은지. 여행객이 아니라 대부분은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이방인 노동자들 같아 보였다.

게다가, 새벽의 공항은 시끄럽고 냄새난다. 그렇지, 공항이 그리도 깨끗한 것은 사람 없을 때 청소를 열심히 하기 때문이란 걸 왜 생각 못했을까. 화장실마다 청소하느라 들어갈 수가 없지, 화학약품 냄새는 지독하지, 무슨 기계로 이동하고 청소를 하느라 기계 돌아가는 소음은 엄청나지...

누군가에게는 그게 낭만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특히 여자 여행객에게는 공항노숙은 공포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당장 그 새벽, 와이파이가 될 때(쿠바는 인터넷 연결이 어렵다고 해서 남편이 서둘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하루 벤쿠버를 경유할 때를 대비해 아예 호텔 하나를 예약했다. 숙소 사정이 좋지 않았던 쿠바 여행에서 지친 몸을 조촐하지만 깨끗한 캐나다 호텔에서 누일 때 얼마나 좋던지. 여행은 낭만도 좋지만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는 좋은 잠자리가 필수라는...... 낭만과는 좀 거리가 먼 깨달음을 새삼스럽게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행기가 좋은 거다. 여행기에는 낭만만 남는다. 고된 일도 낯선 냄새도 두려움도 모두 사라진, 여행의 좋은 것만 남은 게 여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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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페미니즘 - 청소년인권×여성주의 청소년 벗
호야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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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자중학교에 근무하는 여교사이다. 30년을 근무했다. 학교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아이들이 자주 싸워서, 거칠어서가 아니다. 이제는 나이든 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어린 학생들로부터 남성적 시선을 받을 때 불편하다. 암시적이긴 하지만 성적 농담도 자주 하고(남교사들은 같이 대화를 나누는 차원에서 그 농담을 즐기기도 하던데 여교사들은 꼭 내가 대상이 아니어도 몹시 불편하고 불쾌하다.) 또 하나, 여성을 지칭하는 욕(같은 남학생끼리 씨발년아라고 욕한다.), 그리고 패드립(엄마, 라는 단어만 나와도 키득거린다)... 이런 게 못 견디게 싫다.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는 제초 작업처럼, 아무리 불러서 야단치고 설득하고 수업에 녹여내고 별 짓을 다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중학생들에게도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이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지만 30년이 지나도 이 문제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걸 페미니즘>은 청소년들이 쓴 페미니즘 책이다. 여자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넘치도록 많은 사례를 담고 있지만 남자청소년들이 학교나 또래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더 충격적이다. 이맘때의 남자청소년들은 성적인 농담이나 경험담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권력렙이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요즘 여권이 신장되어 젊은 남자들이 주눅 들어 산다고? 30년 전 교단에서 본 남학생들과 요즘 남중생들은 전혀 다르지 않다. “너 그런 얘기하면 잡혀가.” 이런 멘트가 추가된 게 좀 달라진 것뿐? 가령 야동 이야기가 나와도 , 야동이 아니라 디지털 성범죄얌마...” 라고 말하긴 하는데 그게 또 농담, 즉 조롱거리이다. 정말 진지하게 자신들의 성의식을 돌아보거나 범죄로서 조심해야 한다는 차원도 아닌 거다. 아직도 멀고 멀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발끈한다.

 

다만, 지난 25년간 여성문제를 대하던 세상의 태도의 변화 속도와 지난 5년간을 비교해 본다면 최근 들어 속도가 빨라졌다는 점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런 싸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성들이 상처받아야 하는가,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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