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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평점 :
남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는 ‘남혐, 여혐’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있다. 여성인 내가 남학교 교사로 살아오면서 느낀, 직장에서의 여혐 혹은 비하의 피해, 일상 생활에서 느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모든 여성들이 그러하듯 나의 이야기만 모아도(상대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차별이 덜한 직장임에도)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과 더불어 젊은 남학생들을 가까이서 대하다 보니 그들이 느끼는 남녀역차별에 대한 불편한 마음에 대해서도 이해가 된다.
남자중학생들 사이의 여성혐오는 지금 도를 넘었다. 이 나이 때 학생들이 자기 외의 모든 대상에 대해 공격적인 면, 거기에 사회적 요인, 정치적 요인 등 모든 것들이 집약되어 그런 줄을 다 알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이해도 인정도 하지 않는 가해자이자 그 자신 어리석은 피해자가 되고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에게 어떻게 혐오표현의 문제점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국어수업을 통해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차별의식, 열등의식과 연결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인권의 문제인지, 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어떻게 결국 스스로의 존중을 깎아먹는 것인지 가르치기 위해 토론도 하고 글쓰기도 하고 별별 방법을 다 쓴다. 당연히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지만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할까’라는 토론 이슈를 놓고 수업을 할 때 그들로부터 쏟아지는 독설을 듣는 것이 참 힘겨웠다.
남자가 오히려 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남학생들에게, 책 속의 이 구절을 활용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남혐과 개독도 폄오표현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런 문제의 핵심은 소수자 혐오의 경우처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가령 미국에서 백인들에게 ‘덩치 크고 미련한 백곰’이라고 외쳐도 그들이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거나 이미지를 고착시켜 백인 차별을 조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가 사장에게 ‘한국사람들은 사장님처럼 다 게으른 모양이네요.’ 라고 말한다고 한국인 차별이 될 수 없다. 이런 표현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혐오표현’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혐오표현은 소수자, 약자에게 향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접근을 위해 남중생들이 좋아하는 ‘힙합’을 예로 들었다. 힙합에는 ‘디스’라는 게 있다. 상대방 래퍼를 ‘까는’ 것이다. 디스와 혐오표현은 어떻게 다를까를 놓고 토론을 해보았다. 학생들 스스로 혐오표현이 약자를 향한 것임을 알아낸다. 강자에게 향하는 비판과 약자에게 향하는 비난의 차이도 토론을 통해 알아낸다.
이 글을 쓰기 방금 전,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복도에서 ‘씨*년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또’ 들린다, 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너무나 많이 들린다. 여학생도 없는 학교에서 저런 말이 들리는 이유가 뭘까? 남학생들끼리 ‘~년’ 욕을 하기 때문이다. 뒤돌아서 방금 그 말을 한 학생을 불렀는데, 평소 욕 좀 하고 말썽 좀 피우고 껄렁대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다. 그만큼 저 욕이 만연해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욕하는 청소년의 문제 원인은 사회적 요인과 어른들에서 찾아야 한다지만 정말 이럴 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싫어진다.
우리 학교는 일 년에 두 번 ‘교사상담연수’를 한다. 심리학이나 상담의 기술에 대한 연수도 하지만 학생들과의 대화법이나 올바른 훈육법에 대한 연수도 했다. 지난 학기에는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 모든 교사가 읽고 학생들의 언어생활 지도에 대한 토론을 해보았다. 연수는 늘 토의와 토론으로 그친다. 문제가 심각함을 인지하고 원인을 분석하지만 대안을 애매하고 실천은 전무하다. 대개의 교사연수가 그러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이어지는 행정적 실천 말고, 정말 교육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번엔 꼭 대안을 내자, 그리고 그것을 꼭 실천하자, 고 다짐했다. 모든 교사가 모든 프로그램의 작은 부분이라도 맡아서 준비하고 진행에 힘을 합쳤다. 좋은 말을 모아 캘리그래피로 써서 창문에 붙여도 보았고 말투가 거친 학생들은 따로 교장교감이 책을 한 권씩 선물하며 상담도 했다. 담임 선생님들은 아침 시간에 긍정적인 인사말로 하루를 시작하는 행사도 했다. 학생회의 캠페인도 있었고 듣고 싶은 좋은 말을 모아 나무에 거는 ‘예쁜말나무’ 행사도 했다. 바른 말을 사용하는 학생들에게 상도 주었다. 악플의 심각성에 대해 토론하고 좋은 댓글도 만들어 보았다. 그래서 정말 2학기 개학 후 한 달쯤은 학생들도 조심하는 듯 보였다.
물론 그런다고 뿌리가 뽑히진 않을 것이다. 우리 선생님들 가운데 나온 말 중 “교사들 스스로 우리의 말을 돌아보자. 학생들에게 ‘야~!’라고 부르지 말자. 교사가 학생에게 욕을 하거나 모욕감을 주는 말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들이 듣겠는가?” 하는 것이 있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공감하면서, 벌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어 깨닫게 하는 방식을 고심했다. 교사연수를 하면서 얻은 감동이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규제하고 벌줄까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좋은 말을 많이 듣게 하여 욕설과 혐오표현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나누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렇게 말한다. 물론 아래의 ‘근본원인 제거’가 결코 쉽지 않으며 그거는 그거대로 고민하더라도 학교와 가정에서는 뭐라도, 뭐 작은 일이라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지만 말이다.
혐오표현도 금지하고 규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혐오표현을 낳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사회의 내성을 키우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