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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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을 때 매료되는 지점들이 몇 있었다. 우주와 천체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문화인류학적인 이야기들이 좋았다. 뭔가 낯선 곳을 향해 가고 싶게 만드는 벅찬 문투도 좋았다. 특히나 칼 세이건이 집필할 때, 하얀 사슴이 마당에 앉아 있는 칼의 어깨 너머 원고를 보고 있더라는 이야기는, 조금은 과장이 되었을지언정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글은 칼의 것이 아니라 앤  드루얀이 쓴 서문이었던가. 과학자가 글을 잘 쓰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짝꿍 모두가 그러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이 두 과학자는 지성뿐 아니라 감성도 차고 넘쳤던 모양이다. 그러니 서로를 알아보고 열렬히 사랑했겠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은 감동의 여파가 너무 강렬해서 이런 책을 더 읽고 싶었다. <창백한 푸른 점>을 영어 원서와 우리말 책으로 사 놓고 천천히 읽기 시작한 시점에 만난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는 마치 금맥을 발견한 기쁨을 주었다. 여기 알라딘 서평 중에는 칼 세이건의 책에 못 미쳐 실망이라는 내용이 있던데, 두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이며 책의 접근도 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칼의 코스모스와 달리 아니, 그보다 더 폭넓게 과학사를 다룬다. 인문학적으로는 더 훌륭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학생들에게 좀 더 쉽게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감동 서사가 많아 수업에 활용하기 좋은 글도 많았다.

 

과학과 인문학이 만난 과학사 이야기

앤  드루얀은 서문에서 그래도 어쨌든 시대는 나를 앞으로 떼민다.’라고 말한다. 그래,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재능이 있다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런 소명 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작은 그릇으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자기 주변이나 공동체를 위해 책임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것을 일관되게 삶의 지표로 살아가는 이도 많다. 하지만 시대라니!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처럼 인류의 미래가 담긴 프로젝트에 함께 한 이들은 시대의 소명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할 것이다. 흔히 과학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정치와 역사와 인류의 이익과 무관한 과학의 발전이란 없었다. 오히려 과학의 객관성, 중립성을 외친 이들이 본의든 아니든 과학을 정치와 이익과 자본과 권력에 갖다 바친 예들이 더 많다. 이 책은 과학이 지구라는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철학을 일관되게, 매우 긍정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서술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책이 과학책인지 인문학책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댈지도 모른다. 인문학도인 나는, 아니, 인문학적 바탕 없는 과학이 위험하다고 믿는 나는 앤  드루얀을 응원하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깨어날 수 있을까? 기후변화와 핵 재앙이 인류 문명과 수많은 다른 종들을 돌이킬 수 없게끔 파괴하는 미래로 몽유환자처럼 걸어 들어가는 일을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과학은 사랑처럼 그런 초월을 가능케하는 수단이다... 과학을 오용하는 것이 인류 문명을 위협하기는 해도, 과학은 구원의 힘도 가지고 있다.

 

미래를 위한 과학, 모두를 위한 과학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집단에 충성심을 느끼고 공감의 반경을 넓힐 줄 아는 것, 신념 체제에 집착하는 것, 미래를 상상할 줄 아는 것, 세상을 바꿀 줄 알고 답을 찾아 우주를 탐색할 줄 아는 것...그것이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사람)이라 불리는 이유라고. 그리고 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탐욕, 교만,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으로 살아온 지난 50만 년 동안 조화와 협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원을 공평하게 쓰고 양성이 평등한 방향으로...’ 하긴, 유발 하라리, 재레드 다이아몬드 등의 학자들 역시 입을 모아 인간은 혼자 살기에 약한 존재라 서로에게 의존해 왔고, 그래서 언어가 발달했다, 공감과 대화는 인간의 생존의 절대적 무기이다, 약자에게도 고르게 힘을 나누어주는 삶이 아니었으면 인류와 지구는 공멸했을 것이라 말하지 않는가.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바빌로프 이야기였다. 1940년대, 러시아가 전쟁과 대기근을 겪는 와중에 그 제자들과 동료 연구원들까지 모두 종자들을 눈앞에 두고 굶어 죽은 바빌로프의 식량종자연구소 이야기. 그 이후 2008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정부가 만든 스발바르 국제 종자 은행에 영감을 준 바빌로프의 식량종자연구소 이야기.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이런 씨앗보관창고는 이상하게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먼 미래를 보는 사람들을 우리처럼 남은 수십 년의 생애나 걱정하는 범인들이 이해할까. 그러나 그들처럼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없었더라면 문명이든 지구환경이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꼭 들려줄 것이다. 과학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인간의 초자아를 생각하게 하고 철학이 있는 삶, 원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삶이 가능함을 아이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과학에 경의를 표함

그리고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 땅속 네트워크 이야기이다. 이것 역시 공생과 공존, 존중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 나의 학생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숲의 버섯 균사체는 다른 생물들에게 영양소와 숲의 메시지, 공감을 주고받는 중요한 네트워크란다. 균사체 덕분에 숲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숲에서 나무 한 그루가 베이면 다른 나무들이 뿌리 끝을 통해서 베인 나무에게 생명 유지 물질을 보내준다. 그래서 잘린 그루터기는 그 이후 몇백 년도 살아갈 수 있단다.

어린 나무들은 얼른 자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자라면 몸통 세포들에 공기가 너무 많아져 돌풍 등에 취약해질 수 있다. 어미 소나무는 자기 가지로 자녀 소나무를 가려서 어린 나무가 너무 햇빛을 지나치게 탐닉하여 스스로에게 해로울 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꿀벌 이야기는 뭐랄까, 그 존재 자체가 숭고한 느낌마저 준다. 자연이 우리에게 신성을 보여준다면, 함께 살아가야 할 가치를 가르치려 든다면 벌을 통해서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꿀벌의 몸짓 언어 연구자인 카를 폰 프리슈에 의하면 벌의 1초 동안의 씰룩거림은 1킬로의 거리를 의미한단다(과학적이다!). 벌이 위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을 향해 날아라는 뜻이라. 어느 대륙의 벌이든 같은 춤을 주는데 벌은 비행할 때 쓸 방정식을 계산하고 소통할 줄 안다. 오직 꿀벌과 인간만이 물리 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수학 등 기호언어, 과학을 발명해 낸다.

꿀벌의 세계에 부패는 없다. 모두 제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리고 특수한 공간에서 자란 여왕벌을 키울 때 일벌들은 호되게 운동을 시켜 몸무게를 줄이도록 여왕벌을 둘러싸고 밀고 당기고 쿡쿡 찌른다.

새집을 찾을 때 정찰 벌은 자신이 찾은 장소를 알리려고 열심히 춤을 추는데 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갖고 있어 결국 지 지받는 소수의 경쟁자만 남는다. 그리고 새 위치를 직접 보러 간다. 보고 온 벌은 그 장소의 장점을 춤으로 동료들에게 알린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만도 폭력도 거래도 없다. 소수의 경쟁자들은 설득되어 다른 경쟁자를 지지한다.

 

과학의 발전이 어떤 위대한 사람으로 인해 한 순간에 터져 나올 때가 있지만 사실 그 이전 무수한 이들의 연구가 누적되어 집약되지 않는가? 아마도 학문을 하는 이들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원대한 진리의 세계에서 자신보다 앞서 진리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알아내고 싶어 열심히 헤엄쳤던 이들의 노고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유리 콘드라듀크(본명 알렉산드르 샤르게이, 1897년 당시 러시아 제국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 과학자)의 연구는 이후 주로 미국이 이룬 우주 여행의 이론적 기반이었다. 그의 저서에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아폴로 11호는 이 사람의 방법을 좇아서 비행에 성공했고 닐 암스트롱은 달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해, 우크라이나의 콘드라튜크의 오두막을 찾아가 흙을 조금 떠내와 간직했다 한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그 나라 지도자들에게 그를 기려달라고 부탁하였다 한다.

 

과학의 윤리

인간이 지구 전체를 지구 생명 모두의 것이라고 일찌감치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살았다면 인류의 역사를 달라졌을까. 이제 우주 탐사, 혹은 개발을 앞두고 과학자들은 이런 윤리성을 고민하는 것 같다. 그래봤자 결과적으로는 강대국과 부자들의 욕심에 우주 개발이 이용될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형식적일지라도 지키려 애써야 하는 어떤 우주 탐사 윤리에 대해 경외를 표하고 싶다.

 

20174월 토성을 탐사하던 카시니 호의 연료가 다 떨어져 감. 그냥 두면 생명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어느 위성과 충돌할 수도 있고 우주선 안에 지구생명체가 잠복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주선은 우주법으로 정해진 나사의 행성 보호를 위한 생명체 격리 규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 자폭함(카시니 호는 토성의 위성 수십 개를 발견했고 위성 엔켈라두스에 액체 물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고, 토성의 자기장과 중력장을 지도화함.),

 

과학에는 인류를 위한 공헌에 대한 감사만 있는 게 아니라 인류와 지구 자연을 파멸로 몰아갈지 모르는 위험하고 무책임한 몰입과 집착에 대한 우려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1963년 대기권 핵무기 시험으로 모유까지 오염되자 시위를 벌인 어머니들때문에 대기권 핵무기 시험을 금지하는 조약이 체결된 사례와 1980년대에 전 세계 소비자들이 기업에 염화불화탄소 제조를 그만두라고 요구한 덕분에 회복해갈 수 있게 된 오존층 이야기를 통해 과학적으로’, 그리고 집단지성에 기대어미래를 낙관한다, 더불어 지뢰가 있는 곳에만 피는 빨간 애기장대나 발암성 용매인 트라이클로로에틸렌을 평범한 염소 이온(소금)으로 바꿀 수 있는 포플러, 산과 감마선, 독성 중금속 등을 없앨 수 있는 효모균을 언급하며 과학에서 대안들을 찾는다. 잠시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떠올렸다. 결국 지구와 인류의 미래는 과학 대 비과학, 정치 대 반 정치의 대결이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식으로는 지배적 이성혹은 심리학적 용어를 빌면 ‘슈퍼 이고’, 혹은 그 무엇이든 인간에게는 상황을 지혜롭고 극복해나가려는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앤 드류안 같은 과학자가 우리에게는 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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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사와 교사 되기 - 우리의 교사와 학생들이 세계의 BTS(The best teacher and student)가 되기를 꿈꾸며
이혁규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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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비롯하여 안정적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이 불안의 시대에 자신만이 구원 방주에 올라탔다는 특권 의식을 버려야 한다. 대신에 모두를 함께 태울 수 있는 크고 넉넉한 배를 건조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 - 책 중에서

 

교사는 전문직일까 아닐까? 전문직이라고 대답하려면 아무나 그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단다. 한국의 교사 수는 매우 많고 자격증을 갖거나 교사가 되는 일이 다른 전문직에 비해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변호사나 의사, 아나운서의 일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의 교사에 대한 인식은 전문직은 아니다에 머문다. 인정. 잘 해야 하는 자리인 것과 잘하는 사람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는 다르니까. 현장에서도 우리 스스로 전문가라 말하기엔 부끄러운 동료들이 많이 있으니까. 나 자신도 내가 전문가라 자부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 동안 부끄러웠으니까. 그래도 도덕 교과서 같은 답을 말해 본다면 교사는 전문가여야 하고, 그렇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사회가 발전한다.’ 진정 전문가다운 전문가로서 교사를 양성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를 담보해야 한다. 교사에 대한 처우, 교사 양성 과정의 치밀함. 둘 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한국의 교사는 전문가 조금 못 미친 언저리에서 어정쩡한 위상을 가질 것이다.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어도 지금처럼 미국교육을 좇는 행보를 수정하지 않는 한 더 오래 계속 그럴 것이다.

 

이혁규 청주교대 총장을 개인적으로 존경한다. 교사 출신 교수라 현장을 잘 아는 연구자일 뿐 아니라 평교수 출신 총장으로서 사도와 행정 둘 다 놓치지 않은 드문 분이다. 현실과 이상의 접점을 놓치지 않은 분이다. 학자로서의 이상과 교사들의 현실의 접점도 놓치지 않은 분이다. 그런 이들이 거의 없다 보니 현실에서는 뜬구름 잡는 교대, 사대 교수들과 현장 교사(예정자)들 간의 괴리가 늘 문제가 되어 왔다. 이혁규 선생은 그걸 극복하려는 노력에 매진한다.

교사들 가운데서도 잘 가르치는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교육정책을 바꾸는 데 기여하는 이’, ‘교육철학을 제시하는 이들이 한데 모이지를 못한다. 한 사람이 그 모두를 구현하는 경우도 드물고 저 중 어떤 요소를 가진 이와 다른 이가 손을 잡고 협력하는 일도 드물었다.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교사(쿠바), 교육개혁을 주도했던 교사(북유럽), 정치 투쟁에 앞장섰던 교사를 가져 개혁에 성공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위대한 교사를 갖진 못했다. 초창기 전교조 교사들의 기개와 의지는 드높고 열정적이었으나 교육 현장을 바꾸는 교육자로서의 모습이 부족했다면, 어떤 뛰어난 이들이 시인이나 문화예술가로 빛났을지언정 교사로서는 별로였다면, 수업을 너무나 잘했지만 그것을 개인의 영달에 써버린 많은 교사들이 있는가 하면 행정적 능력이 있어도 작은 학교나 교육지자체에서 조금 반짝하다 말았던 경우도 많다. 그들이 잘 모였다면,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나라 교육은 좀 달라졌을까.

 

그렇게 한숨을 쉬다가도 이혁규 선생의 책을 읽으면 여기저기서 희망의 사인을 본다. 어떤 대목은 내 생각을 뒤집어, 전에는 부정적으로 알고 있었던 점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교사의 전문성을 점점 강조하는 세계 교육계의 추세를 고려할 때 우수한 학생들을 유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교직의 강점 중 하나), 어떨 땐 고민하던 문제를 명료하게 표현해 고개를 끄덕이게도 하며(미국은 무능한 교사가 오랜 숙제라면 한국에서는 그런 교사는 찾기 어렵고 대신 무책임하거나 게으른 교사가 문제) 어떤 제안은 매우 합리적이고 실현가능하기에 가슴을 설레게도 한다(교사 양성과정을 5년제로 개편하자. 연장된 1년은 핀란드식으로 하되 현장과 유기적으로 결합한 실습 프로그램으로). 물론 이 제안은 최근 이주호 교육부장관이 제시한 교육전문대학원과 형태는 같이 하되 내용에서는 좀 다르다.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지만.

 

이혁규 선생은 교사들에게서 긍정적인 가능성을 본다(하긴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교사를 가르치는 이가 될 수 있을까?). 가령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정년을 맞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의 1정 교사 연수생들은 평교사로 정년을 맞고 싶다고 답한단다. 물론 연차가 오르면서 교사들의 욕구와 욕망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젊은 교사들은 순수한 교사로서의 자세를 갖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잘 가르치는 교사가 승진할 수 있는 승진 제도’, ‘승진하지 않아도 고경력 교사가 대우받을 수 있는 학교 문화 형성을 희망하고 있다.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연차가 쌓일수록 다른 길을 욕망하게 되거나 자포자기하게 함으로써 좋은 교사의 자부심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된다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승진 욕구와 교육혼은 양립하기 어렵다. 승진을 추구하는 교사는 분열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실은 좋은 교사가 좋은 교장이 되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승진의 길을 가려면 행정과 정치(?)에 치여 수업과 아이들 만남을 포기해야 하는 게 현실이므로.

 

이혁규는 교사의 정체성에 대해 학습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교사는 잘 가르치는 존재자가 아니라 배우기를 즐기는 존재자라는 정체성에 자신을 정초해야 한다.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또한 배울 것이다.

교사는 또한 스스로가 깨어 있는 시민이어야 한다. 나아가서 학생들이 학교와 교실에서 성숙한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다.

 

이혁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사상은 더불어 성장하는 성찰적 실천가이다. 이렇게 현대의 교사상은 과거의 사도로서의 사명감이 아닌 또다른 정체성을 갖게 된다. 동의하는 바이다. 흔히 전문가냐, 노동자냐, 스승이냐, 친구냐라는 담론으로 교사의 정체성을 고민했던 것은 이미 수십 년 전, 전교조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도 전교조 조합원이지만 우리의 고민과 연구와 지향은 이제 한 단계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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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더운 우리 집
공선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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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꿈을 자주 꾼다. 아무 쓸모도 없는 건축학 에세이에 폭 빠져 산 적도 있다. 이유가 무얼까 궁금했다. 어렸을 때 이사를 자주 다녀서 그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면서. 혹은 잠시나마 건축과를 가고 싶었던 학창 시절의 꿈 때문인가 싶어 하면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집은 의식의 세계를 상징한다는 지점에서 무릎을 쳤다. 꿈속의 집의 크기와 상태가 나의 의식의 세게를 뜻한다니, 왜 그리 늘 새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하는지, 왜 꿈속 집에는 잠기지 않은, 혹은 잠기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는 문이 그토록 많은 건지, 그 집의 수많은 방들의 정체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역시 너무 많은 나의 관심사, 불안을 저장한 무의식의 세계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이건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 심리학자들의 해석이니까 그리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 맞는 표현이리라.

요즘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아껴 읽고 있다. 시집을 읽는 기분으로 이해를 접고 감성만으로 읽어도 너무 좋다. , 혹은 집과 비슷한 공간에 대한 시적 상념에는 사람들의 공통된 부분이 있나 보다. 이정록 시인의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를 읽을 때 느꼈던 공감 비슷한. 그런데 최근에 강맑실과 공선옥에게서 비슷한 감성을 만난다. 내가 이 집들의 이야기에 끌린 것처럼 그들도 자기 집 이야기를 쓰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집은 추억과 감성과 감각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지금 나의 의식 세계를 구축하는 상징이자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공선옥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 조촐함이 좋다. 화려한 말빨(글빨)과 과장된 스토리가 없어도 슬픔과 더불어 삶이 있어서 좋다. 물론 현실에는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끔찍하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지만 대개의 삶이란 적당히 구질구질하면서도 적당히 인간성을 버리지 않은 소소하고 다사로운 것, 혹은 고달픈 것 아닌가. 공선옥은 그런 글들을 쓴다. 당연히, 좋아하는 작가의 사적인 삶은 궁금할 수밖에. 그가 들려주는 자기 집 이야기는 그런 방식의 듣고 싶은 이야기이리라. 만약 또 다른 공00 소설가나 요즘 거의 연예인급으로 잘나가 김00 소설가가 자기 어린시절 이야기나 집 이야기를 썼다 하면 호기심이 가면서도 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화려한 언변에 적절히 겸손한 척하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걸 아니까. 매력적이라 미운데도 묘하게 끌리던 학창 시절 잘나가는 예쁜 애를 보는 것 같은 불편함과 시기심. 하지만 공선옥은 친구로 치자면 생전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 그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하지만 대화를 나눠 보니 단 몇 마디만으로도 그의 지성과 인품의 깊이로 나를 감복시키는 그런 친구 같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지만 말을 걸어봐야 자기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늘어놓을 리 없는 그런 친구의 글이 교지에 실렸다면 설레는 마음으로 맨 처음 펼쳐 읽어볼 것이다. 그리고 또 역시 내 직관은 정확하구나, 나는 사람을 알아본 것이야, 라며 흐믓해했을 것이다. 이 책도 그랬다. 삶의 궤적이 나와 일치하지 않지만 나는 그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가 아무리 고생의 젊은 날을 지나왔더라도 삭신이 쑤시기 시작하는 늙기 시작하는 시점의 집들은 제발 따스하고 편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집이 너무 좋아서 밖에 나가기 싫더라도 할머니(그나 나나 곧 할머니가 될 터이니)들이 평안한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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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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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보면 나처럼 남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여교사가 이상하거나 안쓰럽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의 남중이 꼭 그렇게 거칠기만 하지 않은 것처럼 서현숙 선생이 만난 소년원도 그랬으리라 짐작해 본다.

내 제자들 중 몇몇도 소년원에 갔다. 거길 다녀와서 어른이 되어 나를 찾아온 아이도 있고 가르쳤던 아이가 나중에 소년원에 갔다는 소문이 들려온 경우도 있다. 아슬아슬했지만 보호관찰 중인 아이를 담임 맡아 무사히 졸업시킨 일도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지켜보았기에 그 아슬아슬함을 잘 안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원인이 있다. 잘못을 이해하라는 게 아니라 자라온 배경이나 시절이 그 아이들을 거기까지 내몰게 된 인과관계를 헤아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그들이 스스로 범죄를 저질렀다기보다 그렇게 잘 못 살도록 잘못 가르쳤거나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어른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만한 원인이 안으로 쌓여 있던 아이들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한순간이다. 운도 따른다. 나 역시 그럴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가르칠 땐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아이들 손을 꼭 잡고 떨며 한 해 한 해를 지나오곤 했다. 마치 이 얼음강을 건너지 않을 수는 없는데 얼음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살얼음을 밟고 건너가듯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속에서 서현숙 선생님이 만난 아이들 이야기에 매우 공감한다. 사실 책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만났던 그 소년들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뭐 이런 것들. 혹여 그런 것들을 만났더라도 선생님은 불쾌해하기보다 이해했을 것이다. 적어도 소년원에 오게 된 일이 그들의 잘못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 불안의 몸짓들을 달래고 책으로 마음을 만나갔을 것이다.

책을 주면서 절대 읽고 오지 마라고 하면 아이들은 더 열심히 읽어온다는 대목을 읽다가 지하철에서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그리고 서현숙 선생님이 책에 쓰신 ‘(소년원에서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한 교육을 받는데) 그 교육에 좋은 삶을 직접 경험하는 것을 포함시키면 어떨까라는 말씀에 격하게 공감한다. 저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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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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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행동하는 매혹적인 생명체를 목격했다. - 저자가 바닷가 갯벌에서 생명들의 움직임을 보며 한 말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우울증의 기분을. 아니, 대학 갓 입학한 무렵, 정말 세상이 회색빛으로 느껴진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가 우울증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기억한다. 시대의 아픔에 끌려가고 매 맞는 동기, 선배 들을 보며 내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울증이 부끄러워 어찌어찌 의지로 극복했던 것 같다. 그나마 다 돌아보니 그랬더라, 이지 그땐 우울증이라는 말을 흔히 입에 담지도 않았던 시절이니까.

요즘도 가끔 이유를 모를 우울이 덮칠 때가 있다. 설명할 수 없다. 무슨 일이 나의 우울 호르몬을 건드렸는지, 그게 그렇게까지 칙칙할 일인지, 논리적으로는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이 안 된다. 나 자신이 납득되지 않으므로 누군가에게 나 요즘 우울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땐 잠을 많이 자든지 일부러 맛있는 걸 마구 먹어대든지 아님 청소를 한다. 우울이 급습할 조짐이 보일 때 내가 먼저 선공격하는 거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런 경계에 있을 때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있거나 자신이 관리할 방법을 가진 사람은 그나마 다행인 경우임을 나도 잘 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것도 공감. 이 책의 지은이 에마 미첼은 마치 동아줄(정신줄)을 붙잡고 이 생의 하루하루 매 시간시간을 견뎌내는 심정으로 숲을 헤매고 글을 쓰고 어찌 됐든 살아내왔을 거다. 책에서는 우울증 증세를 마음 속에서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하지만 도무지 가라앉을 줄 모르는 압도적인 자기혐오와 비판이 폭발한다. “난 무가치한 인간이야.”라는 머릿속 요란한 소음이 들린다라고 표현한다. 내가 청소를 하며 우울감을 날려버리는 것처럼 에마 미첼은 자연을 사랑하는 이라 새를 보러, 새 풀을 만나서, 바람을 맞으러 나갈 힘이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우울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날은 정말, 아무것도 못할 텐데 말이다.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고 자원을 찾아나서면 도파민이라는 뇌 시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일시적인 흥분을 느끼게 한다(채집 황홀).

 

사실 나는 이 책 속 그림들, 내가 좋아하는 작은 풀싹들이나 새들의 흔적이 좋아 읽기 시작했지 우울함에 관한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도 책은 저자가 찾아 헤맨 숲과 들판과 바닷가 이야기를 담았다. 우울은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니 맘껏 읽으시라. 나도 아껴 읽었다. 같이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같이 반딧불이를 찾아 나갔다가 모기에 뜯기는 기분으로, 같이 숲 스케치를 나가는 기분으로, 같이, 마당에 새들을 부르려 모이를 늘어놓는 마음으로. 삶에 치여 숲에 갈 시간이 없는 나는 이 책으로 습기어린 숲 향기를 대신 체험한다. 고맙다. 나도 우울한 날 많아, 동의하는 이 기분, 그리고 나 대신 자연을 산책하는 그의 노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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