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3월
평점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을 때 매료되는 지점들이 몇 있었다. 우주와 천체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문화인류학적인 이야기들이 좋았다. 뭔가 낯선 곳을 향해 가고 싶게 만드는 벅찬 문투도 좋았다. 특히나 칼 세이건이 집필할 때, 하얀 사슴이 마당에 앉아 있는 칼의 어깨 너머 원고를 보고 있더라는 이야기는, 조금은 과장이 되었을지언정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글은 칼의 것이 아니라 앤 드루얀이 쓴 서문이었던가. 과학자가 글을 잘 쓰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짝꿍 모두가 그러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이 두 과학자는 지성뿐 아니라 감성도 차고 넘쳤던 모양이다. 그러니 서로를 알아보고 열렬히 사랑했겠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은 감동의 여파가 너무 강렬해서 이런 책을 더 읽고 싶었다. <창백한 푸른 점>을 영어 원서와 우리말 책으로 사 놓고 천천히 읽기 시작한 시점에 만난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는 마치 금맥을 발견한 기쁨을 주었다. 여기 알라딘 서평 중에는 칼 세이건의 책에 못 미쳐 실망이라는 내용이 있던데, 두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이며 책의 접근도 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칼의 코스모스와 달리 아니, 그보다 더 폭넓게 과학사를 다룬다. 인문학적으로는 더 훌륭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학생들에게 좀 더 쉽게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감동 서사가 많아 수업에 활용하기 좋은 글도 많았다.
과학과 인문학이 만난 과학사 이야기
앤 드루얀은 서문에서 ‘그래도 어쨌든 시대는 나를 앞으로 떼민다.’라고 말한다. 그래,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재능이 있다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런 소명 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작은 그릇으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자기 주변이나 공동체를 위해 책임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것을 일관되게 삶의 지표로 살아가는 이도 많다. 하지만 ‘시대’라니!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처럼 인류의 미래가 담긴 프로젝트에 함께 한 이들은 시대의 소명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할 것이다. 흔히 과학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정치와 역사와 인류의 이익과 무관한 과학의 발전이란 없었다. 오히려 과학의 객관성, 중립성을 외친 이들이 본의든 아니든 과학을 정치와 이익과 자본과 권력에 갖다 바친 예들이 더 많다. 이 책은 과학이 지구라는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철학을 일관되게, 매우 긍정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서술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책이 과학책인지 인문학책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댈지도 모른다. 인문학도인 나는, 아니, 인문학적 바탕 없는 과학이 위험하다고 믿는 나는 앤 드루얀을 응원하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깨어날 수 있을까? 기후변화와 핵 재앙이 인류 문명과 수많은 다른 종들을 돌이킬 수 없게끔 파괴하는 미래로 몽유환자처럼 걸어 들어가는 일을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과학은 사랑처럼 그런 초월을 가능케하는 수단이다... 과학을 오용하는 것이 인류 문명을 위협하기는 해도, 과학은 구원의 힘도 가지고 있다.
미래를 위한 과학, 모두를 위한 과학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집단에 충성심을 느끼고 공감의 반경을 넓힐 줄 아는 것, 신념 체제에 집착하는 것, 미래를 상상할 줄 아는 것, 세상을 바꿀 줄 알고 답을 찾아 우주를 탐색할 줄 아는 것...그것이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사람)이라 불리는 이유’라고. 그리고 ‘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탐욕, 교만,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으로 살아온 지난 50만 년 동안 ‘조화와 협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원을 공평하게 쓰고 양성이 평등한 방향으로...’ 하긴, 유발 하라리, 재레드 다이아몬드 등의 학자들 역시 입을 모아 ‘인간은 혼자 살기에 약한 존재라 서로에게 의존해 왔고, 그래서 언어가 발달했다, 공감과 대화는 인간의 생존의 절대적 무기이다, 약자에게도 고르게 힘을 나누어주는 삶이 아니었으면 인류와 지구는 공멸했을 것’이라 말하지 않는가.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바빌로프 이야기였다. 1940년대, 러시아가 전쟁과 대기근을 겪는 와중에 그 제자들과 동료 연구원들까지 모두 종자들을 눈앞에 두고 굶어 죽은 바빌로프의 식량종자연구소 이야기. 그 이후 2008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정부가 만든 스발바르 국제 종자 은행에 영감을 준 바빌로프의 식량종자연구소 이야기.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이런 ‘씨앗보관창고’는 이상하게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먼 미래를 보는 사람들을 우리처럼 남은 수십 년의 생애나 걱정하는 범인들이 이해할까. 그러나 그들처럼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없었더라면 문명이든 지구환경이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꼭 들려줄 것이다. 과학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인간의 초자아를 생각하게 하고 철학이 있는 삶, 원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삶이 가능함을 아이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과학에 경의를 표함
그리고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 땅속 네트워크 이야기이다. 이것 역시 공생과 공존, 존중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 나의 학생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숲의 버섯 균사체는 다른 생물들에게 영양소와 숲의 메시지, 공감을 주고받는 중요한 네트워크란다. 균사체 덕분에 숲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숲에서 나무 한 그루가 베이면 다른 나무들이 뿌리 끝을 통해서 베인 나무에게 생명 유지 물질을 보내준다. 그래서 잘린 그루터기는 그 이후 몇백 년도 살아갈 수 있단다.
‘어린 나무들은 얼른 자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자라면 몸통 세포들에 공기가 너무 많아져 돌풍 등에 취약해질 수 있다. 어미 소나무는 자기 가지로 자녀 소나무를 가려서 어린 나무가 너무 햇빛을 지나치게 탐닉하여 스스로에게 해로울 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꿀벌 이야기는 뭐랄까, 그 존재 자체가 숭고한 느낌마저 준다. 자연이 우리에게 신성을 보여준다면, 함께 살아가야 할 가치를 가르치려 든다면 벌을 통해서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꿀벌의 몸짓 언어 연구자인 카를 폰 프리슈에 의하면 벌의 1초 동안의 씰룩거림은 1킬로의 거리를 의미한단다(과학적이다!). 벌이 위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을 향해 날아라’는 뜻이라. 어느 대륙의 벌이든 같은 춤을 주는데 벌은 비행할 때 쓸 방정식을 계산하고 소통할 줄 안다. 오직 꿀벌과 인간만이 물리 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수학 등 기호언어, 과학을 발명해 낸다.
꿀벌의 세계에 부패는 없다. 모두 제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리고 특수한 공간에서 자란 여왕벌을 키울 때 일벌들은 호되게 운동을 시켜 몸무게를 줄이도록 여왕벌을 둘러싸고 밀고 당기고 쿡쿡 찌른다.
새집을 찾을 때 정찰 벌은 자신이 찾은 장소를 알리려고 열심히 춤을 추는데 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갖고 있어 결국 지 지받는 소수의 경쟁자만 남는다. 그리고 새 위치를 직접 보러 간다. 보고 온 벌은 그 장소의 장점을 춤으로 동료들에게 알린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만도 폭력도 거래도 없다. 소수의 경쟁자들은 설득되어 다른 경쟁자를 지지한다.
과학의 발전이 어떤 위대한 사람으로 인해 한 순간에 터져 나올 때가 있지만 사실 그 이전 무수한 이들의 연구가 누적되어 집약되지 않는가? 아마도 학문을 하는 이들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원대한 진리의 세계에서 자신보다 앞서 진리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알아내고 싶어 열심히 헤엄쳤던 이들의 노고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유리 콘드라듀크(본명 알렉산드르 샤르게이, 1897년 당시 러시아 제국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 과학자)의 연구는 이후 주로 미국이 이룬 우주 여행의 이론적 기반이었다. 그의 저서에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아폴로 11호는 이 사람의 방법을 좇아서 비행에 성공했고 닐 암스트롱은 달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해, 우크라이나의 콘드라튜크의 오두막을 찾아가 흙을 조금 떠내와 간직했다 한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그 나라 지도자들에게 그를 기려달라고 부탁하였다 한다.
과학의 윤리
인간이 지구 전체를 지구 생명 모두의 것이라고 일찌감치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살았다면 인류의 역사를 달라졌을까. 이제 우주 탐사, 혹은 개발을 앞두고 과학자들은 이런 윤리성을 고민하는 것 같다. 그래봤자 결과적으로는 강대국과 부자들의 욕심에 우주 개발이 이용될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형식적일지라도 지키려 애써야 하는 어떤 ‘우주 탐사 윤리’에 대해 경외를 표하고 싶다.
2017년 4월 토성을 탐사하던 카시니 호의 연료가 다 떨어져 감. 그냥 두면 생명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어느 위성과 충돌할 수도 있고 우주선 안에 지구생명체가 잠복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주선은 우주법으로 정해진 나사의 ‘행성 보호를 위한 생명체 격리 규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 자폭함(카시니 호는 토성의 위성 수십 개를 발견했고 위성 엔켈라두스에 액체 물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고, 토성의 자기장과 중력장을 지도화함.),
과학에는 인류를 위한 공헌에 대한 감사만 있는 게 아니라 인류와 지구 자연을 파멸로 몰아갈지 모르는 위험하고 무책임한 몰입과 집착에 대한 우려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1963년 대기권 핵무기 시험으로 모유까지 오염되자 시위를 벌인 ‘어머니들’ 때문에 대기권 핵무기 시험을 금지하는 조약이 체결된 사례와 1980년대에 전 세계 소비자들이 기업에 염화불화탄소 제조를 그만두라고 요구한 덕분에 회복해갈 수 있게 된 오존층 이야기를 통해 ‘과학적으로’, 그리고 ‘집단지성에 기대어’ 미래를 낙관한다, 더불어 지뢰가 있는 곳에만 피는 빨간 애기장대나 발암성 용매인 트라이클로로에틸렌을 평범한 염소 이온(소금)으로 바꿀 수 있는 포플러, 산과 감마선, 독성 중금속 등을 없앨 수 있는 효모균을 언급하며 과학에서 대안들을 찾는다. 잠시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떠올렸다. 결국 지구와 인류의 미래는 과학 대 비과학, 정치 대 반 정치의 대결이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식으로는 ‘지배적 이성’ 혹은 심리학적 용어를 빌면 ‘슈퍼 이고’, 혹은 그 무엇이든 인간에게는 상황을 지혜롭고 극복해나가려는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앤 드류안 같은 과학자가 우리에게는 늘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