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1~10 세트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주인공 '성찬'을 보면 내가 키우고 싶은 제자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흐믓하다. 혹은 내가 만나고 싶은 남자였을까? 세상이 흔히 '괜찮다'고 말하는 남자는 일단 대학을 나와야 하고 그럴 듯한 직장이 있어야 한다. 부모로부터 적당히 집 한 채라도 물려받아야 한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성찬은 별볼일 없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는 전문가로서 당당하다. 일간지 기자와 연애하면서 조금도 꿀리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쩔쩔매는 귀여운 남자일지라도 자신의 처지나 신분(21세기 대한민국은 돈으로 결정되는 새로운 신분사회니까) 때문에 쩔쩔매지는 않는다.

그의 매력은 그가 전문가라는 것이다. 요리도 잘 하지만 식재료에 대한 '상식'이 매우 풍부하다. 그러고 보니 전문적이긴 해도 사실은 '상식'인 것을 왜 대다수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직접 음식을 해 본 사람만이 재료가 가진 중요성을 이해하고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 대한민국 대다수 남자들은 그걸 모른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는 절대 가르치지 않으며 심지어 대한민국의 교육은 학교 성적 올리는 일 외의 다른 폼나지 않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을 어리석고 미친 짓으로 여기기 일쑤다. 그러니까 참으로 상식적인 일조차도 대부분의 대학나온 사람들이 모른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그렇다.

그는 사람이 귀한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음식이라는 매개물을 잘 활용한다. 그것은, 음식이란 것이 진정 사람을 '살리는' 귀한 것임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가 트럭에 식재료들을 싣고 다니고 팔면서 당당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박노해의 시가 생각난다. 너무나 가난해 먹을 것 없었지만 시장바닥에서 배추 다듬어주고 얻어온 이파리로 담근 어머니의 김치를 추억하며  '피'와 능(能)'의 사랑을 노래했던... 절절한 사랑과 최고봉으로 향하는 자기자신과의 싸움을 이야기할 매개체가 어디 음식 뿐이겠나만 음식이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성과, 마주 앉아 함께 나누는 사람과의 애정이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아주 소중한 '살림'의 요소이기 때문에 더욱 사람을 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던 여자가 죽어 슬픔에 잠겼어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간다고 애절하게 비통해하던 어떤 고시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무릇 작품이란 것은 복잡 미묘한 인생을 담아야 한다. 단 한가지 주제로는 다 못할 어떤 이야기들...

성찬이 살고 있는 가난한 아파트의 이웃들이 모여 자주 만찬을 벌이는 장면도 참 사랑스럽다. 일본 만화에는 대단한 미식가가 등장하여 최고의 식당에서 맛의 경쟁을 벌여도 그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워 쩔쩔매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성찬의 이웃들은 정과 정성을 최고의 양념으로 삼아 음식맛에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음식은 나눠 먹을 때 가장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찬은 경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경쟁의 자리에서 슬그머니 포기하고 나오는 그의 도량을 일본만화라면 담지 못할 것 같다. 은근히 '노자'가 느껴진다. 그래도 그는 비굴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스승 또한 노숙의 '즐거움'을 누린다. 허랑허랑 세상을 다니며(아무리 그것이 취재여행이더라도)  인생의 무상한 끄트머리를 자주 생각하며 이 생에 최선을 다하되 매일 것도 갈마쥘 것도 가지지 않으려는 여유있는 한국적 자족의 념이 허영만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허영만은 물론 대단한 작가이지만 그 외에도 우리에겐 자랑할 만한 만화가들이 많이 있다. 우리 현실이 좀더 만화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여유있어진다면 월간지, 주간지들이 '올 여름 읽을만한 좋은 만화'에 '맛의 달인''초밥왕''유리가면'' 같은 일본만화들로만 목록을 채우진 않을 것이다. 식객의 마지막 미덕은, 식객의 선전으로 한국의 많은 만화가들이 좋은 만화 만들기에 힘을 얻어 나아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대장 2005-11-0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봤습니다. 틀린부분 한 곳만 지적하고 갈렵니다. 성찬의 여자친구인 진수는 전문잡지 기자로 알고 있습니다. 일간지 기자는 아니죠.

풀꽃선생 2005-11-1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