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 소통의 기술, 세상을 향해 나를 여는 방법
유정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을 조금 의도적으로 샀다.  처세론적이고 실용적인 책을 잘 사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 책을 읽으면 말을 조금이라도 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갖고 샀다는 말이다. 그런 욕심으로 산 책들이 욕심을 채웠던 적은 없었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의도

그런데 나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이 책이 꽤 묵직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마이크를 잡았을 때 떨리지 않는 방법, 발성법, 호흡법, 발음을 정확히 하는 방법, 적절한 비유나 유머를 구사하는 법 같은 내용이 다루어질 것을 기대했다. 한편, 그런 것을 가르치려고 대학에서 강좌를 개설했나, 그 안을 들여다 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고 말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심정은, 한편 그렇게 세속적으로 생각하고 봐서 조금은 미안한 기분? 한편 내가 원하는 정보들은 아니었기에 책을 덮고 나서도 말하기 실전에 접근할 딱부러지는 무언가는 없다는 실망?(그런데도 여기 올라온 서평들은 이 한권으로 당신의 말하기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이니 영문을 모르겠다.) 처세론적인 책이 아니라 좀 다른 의미에서 가치있는 책을 발견한 기쁨? 뭐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다. 

유정아 씨는, 말을 잘하는 비법을 한 마디로 '진심으로 말하기'라고 한다. 그이의 강의록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깊은 내면과 글쓰기로 다듬어진 정갈함에 바탕을 두고 충실한 강의준비로 내실을 갖추고 있으며 올바른 사회의식으로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강의는 말하기 방법이 아니라 말하기 태도를 갖추는 데 핵심이 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공부의 기본은 태도일 것이다.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으로 듣기 수업을

중학교 생활국어에서도 말하기와 듣기에 대한 단원이 다루어진다. 교과서 분량이 적지 않다보니 많은 교사들이 교과서 내용을 전부 가르칠 수 없을 때 말하기 듣기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면 발표하기나 토론, 듣기까지 꼭 수업을 하려고 노력한다. 중등 6년의 국어시간 중 나와의 국어 수업이 거의 유일하게 토론, 듣기 수업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그 중 꼭 하는 듣기 수업이 있다.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 그림책을 가지고 한 분단이 함께 듣기를 한다. 교실에 남겨진 아이들에게는 친구소개하기 글을 쓰게 시켜놓고 각 분단의 첫째 아이들을 복도로 불러낸다. 거기서 그림책의 내용을 짤막하게  들려준다. 그 아이들은 자기 분단의 둘째 아이를 불러내 복도 여기 저기, 화장실, 계단 같은 데서 소곤소곤 내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한다. 둘째 아이는 셋째 아이에게, 또 그 다음 아이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들어온 아이는 빨리 자기가 앞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활동지에 옮겨적어야 한다. 이 종이는 나중에 중요한 증거자료가 되니까. 그렇게 끝까지 이야기를 전달하고 마지막 아이가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다 적어서 교단에 나오면 발표가 시작된다. 발표시간은 아이들이 배꼽을 잡는 시간이다. 여섯 분단의 이야기는 다 다르고 그 내용은 심하게 왜곡된다. 그중 가장 빨리, 가장 정확하게 이야기를 잘 전달한 분단에게 사탕선물을 나누어주고 나는 원래의 이야기를 그림책을 보여주면서 다시 들려준다. 프랑스의 어느 고고학자가 신비한 거인의 나라를 찾아간다는 이야기, 하지만 인간들의 욕심으로 거인의 나라는 멸망하고 마지막 남은 아름다운 거인의 잘린 머리는 이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한 고고학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보인다."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나는 이 수업에서 교과서에 나온 대로 듣기의 유의사항 같은 것을 가르치기보다 올바른 듣는자세에 대해 가르친다. 그림책 속의 거인의 마지막 말은 말을 함부로 뱉는 인간들에 대한 슬픈 경고라는 것, 너희들도 고작 여섯 명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고 이야기가 왜곡되는지를 경험했듯이, 말이라는 것은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남의 말에 진심을 다해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갖고 있는 진심을 다해 듣는 힘의 진정한 파워에 대해서도.  그래서 내 국어시간에 아이들이 자기 활동을 하다가 집중을 해야 할 때 내가 하는 말은 '듣는 자세!'이다. 이 말이 차려!나 여기 봐! 보다 훨씬 짧게 아이들과 내 눈동자를 맞추게 한다는 것은 나나 아이들이나 모두 신기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싸워 이기는 토론이 아니라 마음을 얻는 토론

다시 유정아 씨의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지만 '마음' 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유정아 씨의 '진심으로 말하라, 잘 들어야 잘 말한다.'는 정말 감사하고 기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서울대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세상을 좌지우지할 인재들이 세상을 지도(지배?)하는 오만한 리더쉽과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존경을 강요하는 방법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귀를 여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8장의 '토론'에서는 대학생 토론대회에 제자들을 데리고 나갔던 이야기가 나온다. 말을 잘하고 논거자료를 많이 준비하여 승승장구한 팀이 아니라 상대방을 궁지에 몰지 않고 청중의 마음을 얻은 팀이 결국 토론에서 승리하는 경험,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이다. 토론은 흔히 '말싸움'이라서 끝까지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5공청문회에 증인 출석한 이들처럼 발혀내야 할 많은 죄들을 감추고 있는 간악무도한 자들이 아니라면 '싸움'인 토론조차도 윈윈게임은 가능한 것이다. 열렬히 토론하고도 마음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토론문화는 민주주의의 기본이기도 하다. 

대화와 소통에 대한 관점도 매우 좋고 약자를 배려한 여성주의적 말하기 부분은 신비할 정도로 매력적인 글쓰기 솜씨를 살짝 엿보게 하여 저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사람 참 멋진 사람이다. 겉으로는 의연하고 안으로 맑은 사람 같아 보인다. 

20년차 국어교사의 말하기 공부

다시, 이 책을 다 읽는다고 해서 말하기의 기술을 전수받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다른 책을 사거나 화술 화법 강의 같은 것을 등록해 들어야 할 것이다. 아, 국어교사인 당신은 말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왜 그런 강의에 관심을 갖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할말이 있다. 나는 20년 동안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아이들에게 온갖 말들을 하며 살아왔다. 나는 유머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진지한 교사이다. 그렇기에 더욱 진심을 다한 말이 듣는 이를 감동시킨다는 것을 잘 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내가 아이들을 졸지 않게 하려면 아이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나는 약간의 당의를 입히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화법이라면 때로는 유머라면 사투리나 연극적 몸짓으로라도 아이들을 더 즐겁게 수업에 임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20년을 살아오면서 혹여 나는 말로 이골이 난 사람이라고, 자기 몸에 이끼가 낀 줄도 모르고 구태의연하게 앉아 있는 것이나 아닌지 두려워져서 자리에서 좀 일어나 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알라딘 장바구니에 연극의 기술을 다룬 책들, 발성과 발음을 가르치는 책들을 담았다. 이 책들이 정말 '실용적이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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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2009-08-05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로서 일일신하려는 님의 자세에 박수를 보냅니다.
발성과 발음, 연극의 기술을 다룬 책 등을 읽고 사고하며 발전하는 교사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님께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부럽네요... ^^~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콤 글로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제가 그 책을 읽고 쓴 마이리뷰(오늘날짜로 썼어요.)도 참고해 주시구요.

숲사랑 2009-08-1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교사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초등학교 교사를하다 보면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는 활발하게 잘하나 남의 이야기를 듣는 자세는 정착되지 못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2학기에는 경청하고 집중해서 듣는 자세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해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