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모순된 면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순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앎과 삶의 불일치, 앎과 앎의 불일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텔리들이 특목고 비판하지만 자기 아이가 특목고 들어가면 좋아들 해요. 아이가 여상이라도 가 봐요.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어요.”(p.34)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경우는 앎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신념과 평소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가령 “시장주의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한테는 시장 경쟁력을 알뜰하게 챙겨주는 그런 모습”(p.64)을 보이거나 “껍질이 주는 기득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만날 지배계급들을 욕하는”(p.305) 경우, 그의 앎과 삶은 모순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우리는 보통 ‘위선’이라고 부르죠.

또한 앎과 앎의 불일치도 있습니다. 이는 한 영역의 앎과 다른 영역의 앎이 서로 상충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하는 분들이 집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p.121)이거나 “평소엔 좌파연 하다가 선거 때만 되면 고심 끝에 비판적 지지”(p.198)를 한다면, 그는 사회 진보와 가정 진보, 바람직한 정치 전략과 현실적 정치 전략 사이의 상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보통 ‘지적 불성실’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러한 모순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가진 모순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모순을 인식했을 때 나오는 반응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모순을 교정하거나 아니면 회피하거나.

“변한 건 자신인데 세상이 변했다고 말하면서 변화한 세상에서 자신은 여전히 가장 현실적인 진보다, 이런 주장들을 한단 말이에요.”(p.151)

자신의 모순을 교정하려는 노력, 즉 문제가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나하나 되짚어 고치려는 시도를 우리는 ‘자기 성찰’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자신의 모순을 이러저러한 외적 조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회피해 버릴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를 ‘자기 합리화’라고 부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쉽게 자기 합리화에 빠져듭니다. 성찰보다는 합리화가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이죠. 성찰은 앎이든 삶이든 혹은 둘 모두든 무언가를 바꾸어야 하는데, 앎과 삶 모두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돼 온 것이기에 이를 바꾸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합리화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서도, 다시 말해 아무런 괴로움 없이도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 것처럼 느껴지죠.

김규항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그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은 우리들이 가진 위선과 지적 불성실을 지적하며,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터뷰어인 지승호의 지적처럼, 많은 이들이 그에게 “만날 그 얘기 지겹지 않아? 뒤에서 힘 빼는 거야, 뭐야? 자기 혼자 1등급 한우마냥 명품 진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p.9) 등등의 불평을 터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 역시 겸연쩍음을 모면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한 방식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오늘은 없어요. 만날 미래만 있죠. 보다 나은 내년, 보다 풍요로운 3년 후, 보다 안정적인 5년 후, 그리고 또 내 아이의 10년 후, 늘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입니다. 그게 평생 동안이에요.”(p.302)

아테네의 등에 역할을 자처했던 소크라테스처럼, 김규항은 '돈'과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해져 버린, 또한 그렇게 자기합리화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유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잘사는 게 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에만 주변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즉 바로 '지금 여기'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주었던 아테네인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주는 불편함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