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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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실패를 비관한 젊은이의 자살 소식이 사회면을 연이어 장식하고 있을 만큼 청년 실업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일자리 창출과 같은 사회적 대책의 필요성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항상 덧붙여 젊은이들 역시 눈높이를 낮춰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얼마든지 직장을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청년들이 대기업과 같은 ‘번듯한 직장’에만 매몰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패배자라는 낙인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정당한가? 작년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임금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50.2%였다. 일시적 아르바이트 등과 같이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부분까지 고려한다면 이 비율은 60% 가까이 이를 것으로 추산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취업을 고려하고 있는 이가 눈높이를 낮추었을 때 보이는 일자리란 대부분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율이 46.8%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소식을 전하고 있는 뉴스기사의 제목(“남성정규직-여성비정규직 임금격차 월 198만원”, 미디어오늘)이 시사하듯, 이 격차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

결국 취업 준비자가 눈높이를 낮추었을 때 가능한 선택지의 대부분은 저임금을 받으면서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하면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눈높이를 낮추라는 주문의 삶의 질을 낮추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다. 학문적 열정보다는 스펙 쌓기에 목숨을 건 대학생들이 넘쳐나고 취업의 실패가 곧 인생의 실패인 듯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청춘들이 늘어가는 현실은 이러한 사회적 조건의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자기 계발 담론의 확산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이 책의 저자들은 ‘용기, 패기, 혈기, 호기, 끈기’, 즉 ‘젊음의 5기’를 들먹이며 ‘꿈꿔라 청춘아, 힘내라 청춘아, 너희의 큰 꿈을 활짝 펼쳐라!’라고 외치는 공익광고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청년들에게 ‘꿈을 펼쳐라’는 광고를 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꿈을 못 펼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젊음의 5기(즉, 개인의 의지)’를 말하는 것은 국가가 실업의 문제를 청년 개인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28)

이처럼 실업이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면, 즉 자신의 능력과 열정이 부족해서 취업을 못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시 되면 자연스레 자기 계발 담론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IMF 외환위기 이후, 무한 경쟁과 노동 유연화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유입됨과 동시에 각종 ‘~에 미쳐라’ 류의 책이나 성공의 비밀을 알려준다는 책이 꾸준히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착취는 어떻게 정당화 되는가

물론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계발한다는 ‘자기 계발 담론’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자기 계발의 명령은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된다. 즉 자기 계발이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끌어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 특히 자신을 고용할 고용주가 원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스스로를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기업가 정신’으로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고용주의 마인드를 내면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열정 노동’이 탄생한다.

“자본주의는 ‘열정’의 영역에서 새로운 시장과 노동력을 발견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는 말은 이전보다 더한 성실함과 근면함을 요구했다. 열악한 조건도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혹여 불만이라도 토로하는 사람은, 이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186)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에 어떠한 불합리도 감수해야 하며 남들보다 더한 성실함과 근면함을 내세우지 못하면 자신의 열정이 부족함을 반성해야 하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이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들이 말하는 ‘열정 노동’이란 노동자의 탈노동자화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노동력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끊임없이 고용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모습이 바로 저자들이 얘기하는 ‘열정 노동’의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선택 가능한 항목은 단지 두 가지이다. 착취당하거나, 그조차도 당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192)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저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불확실한 시대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사회적 불만의 증폭은 사회 혁명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파시즘과 같은 폭정을 불러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그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태를 자각해야 한다.”(246)

우리에게 주어진 사태를 직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직시의 산물이다. ‘열정 노동’의 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처한 삶의 조건과 문제들을 끄집어내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려는 시도인 것이다. 다소 거칠게 묘사되고 있긴 하지만 차근차근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에 대한,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성찰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열정이 제 길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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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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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아마 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

이는 2009년 1월, 영국 인도주의 협회가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등과 함께 시작한 무신론 캠페인의 버스 광고 문구다. 이후 캠페인은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캐나다 등지로 확산되어 큰 이슈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2월 반기련이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로 버스 광고를 시도했다가 기독교 단체의 항의로 4일 만에 실패한 적이 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종교가 가져온 갖가지 폐해들, 특히 종교적 갈등 때문에 이루어진 대량 학살과 같은 엄청난 역사적 참극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현대와 같은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여전히 종교나 미신과 같은 비이성적(?) 활동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열혈 이성주의자들의 정의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정의감의 발로이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은 350여 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간단하다.

1. 현존하는 인간은 인류의 진화가 폭발적으로 진행된 홍적세(약 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무렵)의 환경에 적합했던 몇 가지 습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2. 이러한 습성, 즉 과도한 인과성 탐지, 발견법, 패턴 인식 등과 같은 원시 논리는 인간을 종교나 초자연적인 현상과 같은 비합리적 설명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3. 진정 현대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선 원시 논리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이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초자연적인 현상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이 주로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명백히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종교들이다. 다시 말해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빅터 스탠저의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등과 궤를 같이 하는 무신론 캠페인의 진화심리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아니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종교와 같이 터무니없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거지?’

그러나 개인적으론 종교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시도가 그다지 의미 있는 전략이 되긴 어렵다고 본다. 왜 그런가? 먼저 단순하게 이러한 책들의 독자가 누구일지 생각해보자. 이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와 같은 부류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읽는다고 해도 이는 이러한 책들에 나타난 논리적 모순을 찾아내어 비판하기 위한 목적에서만 읽을 것이다. 즉 이미 경험적 현상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그것이 평범한 인간의 경험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경험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니 잘못된 믿음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종교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겐 어떨까? 물론 이러한 책들이 갈등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판단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와 같은 네거티브 전략은 선거와 같은 선택의 상황에서 종종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설적인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다. 즉 종교와 이성,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서로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도 창조론과 진화론을 수업시간에 공평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한 생물 교사의 말에 어이없어 하면서, 창조론은 이론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동등하게 다뤄질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미 ‘이건 이런 점에서 틀렸고 저건 저런 점에서 맞아’와 같은 설명 방식은 서로 다른 과학 이론을 비교하는 방식이고, 이를 종교와 이성의 비교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자신들이 부정하고 있는 종교의 존재론적 위상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종교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종교인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이로 인해 종교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열심히 종교를 퍼트리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모로 무신론 캠페인과 같은 전략은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종교는 인류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살아남은 인간 특유의 문화이다. 수전 블랙모어가 자신의 저서 <밈>(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2010)에서 지적했듯이 “종교적 밈은 다른 경쟁 밈들보다 생존과 번식 확률이 더 높다.”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종교란 인간이라는 종에 적합한 형질을 보유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멸종되지 않고 현재까지 꾸준히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종 자체가 새롭게 변화되지 않는 이상 종교가 사라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생존력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존재 자체를 긍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에게 명백한 해를 끼치는 어떤 바이러스가 있다면, 이를 박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인간에게 명백히 해악을 끼치는가? 이는 실증적으로 입증되기 어렵다. 무신론자들은 십자군 전쟁이나 9.11과 같은 사례를 들겠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하기에 이는 저자가 원시 논리에 기인한 현대인의 오류라고 지적하는 확증 편향(자신이 원하는 증거만 수집하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명백한 해악이 아니더라도 거부할 순 있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와 같은 문화를 생각해보자.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대단히 유용한 제도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로 인해 내전까지 벌인 나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가 형식적으로나마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가치에 대한 합의에 근거한다. 밈적으로 설명하자면, “인간 사이에 우열이 있다”는 밈과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밈이 서로 경쟁해서 후자가 승리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다시 말해 무신론 캠페인이 지금 그러하듯 종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믿음인지 설명하는데 열을 내기보다는, 그 에너지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얼마나 유익한지 설명하는데 쏟는 것이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더욱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랙모어의 말처럼 밈 진화의 속도는 인간 진화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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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제럴드 N. 캘러헌 지음, 강병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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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환경 관련 서적들에서 지구상 존재하는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간을 꼽는 경우가 있다. 이는 일종의 은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난 200년간 인간이 지구 가용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비해버렸다는 몇몇 과학자들의 주장은 인간이 지구라는 공동체에 가장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설명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결국 세균 이야기이다.”(13)라는 저자의 주장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평균적인 인간의 몸속에서 오직 10퍼센트의 세포만이 ‘인간 세포’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90퍼센트, 절대 다수의 세포는 세균이다. […] 인간은 기껏해야 10퍼센트만 인간”(23)이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인간의 몸속에는 1.1×10^14개에 달하는 세포가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인간 세포의 10배에 달하는 세균 세포도 함께 존재한다. 

세균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의 몸속에 들어온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속에, 어머니의 질을 통해 세상에 처음 나오는 순간, 엄마의 젖을 마시는 순간, 가족들과 대화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 순간 등등 지극히 평범하고 필수적인 일상생활의 와중에 수많은 세균들이 다양한 경로로 우리 몸속에 침투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물론 세균 감염의 결과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진화는 도처에 널려 있는 세균들과 효과적으로 공생하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지구 상에 번성했던 모든 존재는 감염을 피했기 때문이 아니라, 감염을 발판으로 삼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번성할 수 있었다.”(36) 실제로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무균 생쥐나 무균 토끼는 정상 상태의 개체보다 신진대사 효율이 떨어지고 각종 질병에 매우 취약하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지저분한 환경에서 자란 어린이일수록 천식과 알레르기가 적게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시 말해, 적당한 세균 감염은 장기가 적절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면역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공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흑사병, 천연두, 홍역, 말라리아처럼 현재 우리에게 크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인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끼쳤던 병들 뿐만 아니라, 에이즈, 사스(SARS), 구제역, 조류 독감, 신종 플루 등 최근 우리를 위협하는 전염병까지, 이 모든 것이 바로 세균 감염의 결과로 벌어진 일이다.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E. 풀러 토리/로버트 H. 욜켄 지음, 박종윤 옮김, 이음, 2010)가 동물원성 미생물들, 즉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의 발생 및 진화 과정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질병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실제의 혹은 가상의 구체적 사례들을 인용하며 그러한 질병의 치명적인 효과에 보다 주목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

저자가 다루는 여러 사례 중 한 가지만 소개해 보자. 역학자들이 ‘대학살자’라고 부르는 독감의 경우, “제트기도, 통근 열차도, 크루즈도 여객선도,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도 없던 시절”인 1918년에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을 감염시키면서 4천만 명을 살해했다. 독감의 치사율은 일반적으로 3퍼센트 정도지만 2003년 유행했던 홍콩 독감(H5N1 독감)과 같이 일부 치명적인 독감의 경우 치사율이 50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은 약 30억 명이다. 30억 명의 2.5퍼센트라면 7,500만 명이다. 50퍼센트라면 15억 명이다.”(303)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만약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의 문제이다. 독감의 특성상 또 다른 전 세계적 유행과 질병과 죽음이 일어날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하는 것이다.”(296~297)

2011년 새해가 밝은지 채 얼마 되지 않아, 우리나라 전역은 구제역과 조류 독감에 신종 플루까지 더해져 몸살을 앓고 있다. 새해부터 각종 바이러스가 우리의 생명과 환경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스나 홍콩 독감과 같이 엄청난 피해를 남길 수도 있다. 저자의 경고처럼 이는 단지 ‘언제’의 문제일 뿐이다.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협동하는 살아 있는 것들, 즉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의 활기찬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내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건강과 질병과 세계 정체 및 판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좋든 싫든 미생물은 우리의 존재를 규정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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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짐승이다 - 동물, 인간, 질병
E. 풀러 토리 & 로버트 H. 욜켄 지음, 박종윤 옮김 / 이음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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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29일 경북 안동에서 최초 발생한 구제역이 4개월 동안 거의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는 하나 전국적으로 400만 마리 이상의 소와 돼지가 생매장 되었다. 현재는 다소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가축이동제한은 풀리지 않고 있고, 또한 살처분 지역의 지하수 오염과 같은 추가 피해가 예상되고 있어 구제역 파동의 여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우리를 두렵게 했던 사스(SARS)나 신종 플루, 조류 독감에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염병이 생명체를 위협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에든버러 대학 연구진은 인체에서 질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1,415개 미생물의 목록을 작성했다. 그중 868개, 즉 61%가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것이라고 한다. […]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물이 사람에게 전파한 미생물을 모두 목록에 포함시킨다면 인체 감염의 3/4 이상이 동물원성 미생물에 의한 것이 된다. 나머지 1/4 역시 대부분 상속 감염으로서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하기 전에 동물이 초기 인류에게 전파했던 것들이다.(35)

최근 번역되어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책 <1만 년의 폭발>(헨리 하펜딩/그레고리 코크란 지음, 김명주 옮김, 글항아리, 2010)은 1만 년 전 인류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게 되면서 급속한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인류의 진화가 폭발적으로 가속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는 이러한 급격한 폭발이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목축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접촉 빈도가 증가하면서 각종 동물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던 미생물들이 다양한 변이를 일으켜 마침내 인간까지 자신의 숙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동물원성 미생물이 인간에게 침투하는 다양한 경로를 자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부모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되거나(2장), 사냥이나 목축을 통해 동물과의 접촉 빈도가 높아짐으로써 감염이 증가하게 된다(3, 4장). 또한 인간이 도시와 같이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병원균의 감염 경로를 단축시키기도 하고(5장), 무역을 통해 먼 지역에까지 전파하기도 한다(6장). 현대에는 애완동물을 기르거나(7장) 거대화된 육류 산업을 통해(8장) 동물원성 미생물에 감염되기도 하고, 현대적인 먹이사슬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미생물이 출현하기도 하며(9장), 인간의 성생활이나 기술 변화, 생태 변화 등으로 인해 새롭게 확산되는 전염병도 있다(10장).

이처럼 미생물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전파됨으로써 벌어진 피해의 목록도 다양하다. 매년 2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말라리아, 미국을 테러의 공포 몰아넣은 탄저병, 역시 전 세계에서 해마다 2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며 지난 100년 동안 1억 명 이상을 사망케 한 결핵,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거의 몰살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천연두와 홍역, 유럽 인구의 1/3~1/4 정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흑사병, 식중독을 유발하는 살모넬라, 그리고 최근에 등장한 사스(SARS), 조류 독감, 에이즈 등 그 목록은 끝이 없다. 더구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다양한 문명들의 몰락에 이와 같은 동물원성 미생물에 의해 야기된 역병이 크게 혹은 조금이라도 관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몇 분 안에, 원생동물은 며칠 이내에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새로운 세대를 구성하려면 20년이 필요하다. 인간과 미생물의 전쟁에서 진화와 적응의 속도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38)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은 미생물들의 침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저자들의 대답은 다소 비관적이다. “현재 박테리아는 30만~100만종 정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2억 5,000만 년 동안 암염 속에 잠들어 있다가 부활할 정도로 견고하다(19). 바이러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종류만 5000종이 넘으며 “이 모두가, 특히 RNA 타입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자신의 유전자 물질을 다른 세포 속으로 집어넣는다.”(21) 다시 말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들은 그 구성이 매우 단순하고 번식 주기가 대단히 짧기 때문에 다양한 돌연변이가 가능하다. 원래의 숙주뿐만 아니라 새로운 숙주에도 적응할 수 있는 변종, 또는 항체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는 변종 등이 얼마든지 쉽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환상에 가깝다.

문제는 전염병이 ‘나타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언제’ 그리고 ‘얼마나 자주’ 나타나느냐 이다.(269)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도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미생물의 종류뿐만 아니라 제약회사의 이권과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 동물 질병과 인간 질병에 대한 업무 분리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난관 또한 산재해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천연두를 완전히 박멸할 수 있었듯이, 인류가 동물원성 전염병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부단한 연구와 노력을 지속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전염성 질환을 관리하고 감시할 수 있는 전세계적 네트워크의 수립, 동물 전문가와 의료 전문가의 협력, 감염 예방을 위한 철저한 교육 등이 필요하다고 이 책은 역설한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건강한 상태의 인간의 몸에도 엄청난 수의 미생물이 존재한다. 모든 미생물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며, 어떤 미생물들은 오히려 유익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 하나의 변종 혹은 신종 바이러스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여러 동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그리고 구제역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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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사이클 필로소피 - 손으로 생각하기
매튜 크로포드 지음, 정희은 옮김 / 이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갖가지 전자 키트가 초중고생의 장난감으로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동네 문방구나 세운상가 등지를 뒤져 거짓말 탐지기나 도난 방지기, 라디오 키트 따위를 사서 설명서를 보며 부품 하나하나를 직접 납땜하며 조립하곤 했었다. 완성한 후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설명서와 다르게 연결된 부품이 있는지, 혹시 부품의 극성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거꾸로 연결하지는 않았는지 하나하나 따져보며 분해와 재조립을 몇 번씩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키트가 제대로 작동하면 마치 대단한 일을 이뤄낸 것처럼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매우 조잡하고 그다지 실용적 쓸모도 없었지만 이런 키트를 조립하는 일은 마치 TV나 냉장고 같은 복잡한 전자 제품의 원리를 깨달은 것 같은 기분, 그리고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기분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 책은 바로 이 두 가지 기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숙련된 육체노동을 통해 물질 세계와 체계적으로 만난다. 이 만남은 자연과학을 탄생시켰다.”(32)

다른 포유류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은 인간만이 온전히 두 발로 서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네 발 동물이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곧 나머지 두 발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워진 두 손을 통해 인간은 다양한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저자가 인용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망치를 쳐다봄으로써가 아니라 손에 쥐고 사용함으로써 알게 되듯이,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그것을 직접 다룰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획기적으로 자연을 변형하고 가공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이 자유로운 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을 인간이 진정으로 자연에 대한 탐구자이자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두 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뿐만 아니다.

“손을 쓰는 능력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낼 때 얻는 만족감은 사람을 차분하고 침착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만족감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말로 자기를 설명해야 한다는 절박한 느낌을 덜어준다.”(25)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한 가지,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손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형(有形)의 물건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완전한 은둔자>의 귀스타브와 같이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진리를 머릿속으로 깨닫고 있다 해도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한낱 개의 트림으로 허공에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고 싶어 할까? 그것은 인간이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거의 일 년에 달하는 긴 시간동안 부모가 공들여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의존적 존재이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와 같은 생활 조건 하에서 인간이 자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우리들 각자는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닌 세상에 의존한다.”(262)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는 일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 저자가 행위주체성(agency)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손노동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 인간의 근원적 욕구이자 행복의 원천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손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즉, 손기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어떻게 인간의 존재가 빛나게 되는지 깊이 고민하는 일이다.”(83)

그러나 현대 소비주의 사회는 행위주체성이 점점 소멸되어 가는 시대다. 여전히 의존적이긴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의존, 즉 서로의 쓸모를 교환하는 상호의존이 아닌 일방적 의존이 지배적 양식이 되고 있다.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그렇기 때문에 그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행위주체성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저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구입하기만 하면 되는 선택의 자유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간단한 고장이라도 직접 원인을 파악하여 고치려 하기 보다는 무조건 전문 기술자를 맡겨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버리고 새 것을 사려 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와 여기서 비롯된 손노동에 대한 경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 도구 사용자로서의 본성을 일깨워 행위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특정한 종류의 자립, 즉 자기 물건의 주인 되기”를 권한다. “이렇게 되려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소유한 것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즉, 그것들의 기원, 작동 원리, 수리 및 유지 방법 등 물질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나는 모든 방식들을 이해해야만 소유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259)

만일 어떤 물건이 고장 났을 경우, 우리가 직접 수리할 수 없을지라도 물건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수리 기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어디가 문제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등등. 이렇게 귀동냥으로 들은 지식은 다음에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스스로 고쳐볼 용기를 주는 유용한 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개인의 지식이 공동의 지식으로 확장되고 공동의 지식이 개인에게 유용하게 사용되는, 자립과 공존이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바로 저자의 바람인 듯하다.

이제 전자 키트 따위를 만지작대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시간에 학원에서 영어단어나 수학공식을 외우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고 근사한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삶이 행복하고 평안할까? 저자는 자신의 삶을 증거로 꺼내 보이며 그렇지 않다고 항변한다. 어느 한가로운 휴일, 낡은 공구들을 꺼내 저자가 권하듯 창고에 처박혀 있는 고장 난 물건들을 뚝딱대며 자립과 공존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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