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 필로소피 - 손으로 생각하기
매튜 크로포드 지음, 정희은 옮김 / 이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갖가지 전자 키트가 초중고생의 장난감으로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동네 문방구나 세운상가 등지를 뒤져 거짓말 탐지기나 도난 방지기, 라디오 키트 따위를 사서 설명서를 보며 부품 하나하나를 직접 납땜하며 조립하곤 했었다. 완성한 후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설명서와 다르게 연결된 부품이 있는지, 혹시 부품의 극성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거꾸로 연결하지는 않았는지 하나하나 따져보며 분해와 재조립을 몇 번씩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키트가 제대로 작동하면 마치 대단한 일을 이뤄낸 것처럼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매우 조잡하고 그다지 실용적 쓸모도 없었지만 이런 키트를 조립하는 일은 마치 TV나 냉장고 같은 복잡한 전자 제품의 원리를 깨달은 것 같은 기분, 그리고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기분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 책은 바로 이 두 가지 기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숙련된 육체노동을 통해 물질 세계와 체계적으로 만난다. 이 만남은 자연과학을 탄생시켰다.”(32)

다른 포유류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은 인간만이 온전히 두 발로 서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네 발 동물이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곧 나머지 두 발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워진 두 손을 통해 인간은 다양한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저자가 인용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망치를 쳐다봄으로써가 아니라 손에 쥐고 사용함으로써 알게 되듯이,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그것을 직접 다룰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획기적으로 자연을 변형하고 가공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이 자유로운 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을 인간이 진정으로 자연에 대한 탐구자이자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두 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뿐만 아니다.

“손을 쓰는 능력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낼 때 얻는 만족감은 사람을 차분하고 침착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만족감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말로 자기를 설명해야 한다는 절박한 느낌을 덜어준다.”(25)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한 가지,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손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형(有形)의 물건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완전한 은둔자>의 귀스타브와 같이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진리를 머릿속으로 깨닫고 있다 해도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한낱 개의 트림으로 허공에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고 싶어 할까? 그것은 인간이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거의 일 년에 달하는 긴 시간동안 부모가 공들여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의존적 존재이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와 같은 생활 조건 하에서 인간이 자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우리들 각자는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닌 세상에 의존한다.”(262)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는 일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 저자가 행위주체성(agency)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손노동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 인간의 근원적 욕구이자 행복의 원천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손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즉, 손기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어떻게 인간의 존재가 빛나게 되는지 깊이 고민하는 일이다.”(83)

그러나 현대 소비주의 사회는 행위주체성이 점점 소멸되어 가는 시대다. 여전히 의존적이긴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의존, 즉 서로의 쓸모를 교환하는 상호의존이 아닌 일방적 의존이 지배적 양식이 되고 있다.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그렇기 때문에 그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행위주체성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저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구입하기만 하면 되는 선택의 자유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간단한 고장이라도 직접 원인을 파악하여 고치려 하기 보다는 무조건 전문 기술자를 맡겨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버리고 새 것을 사려 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와 여기서 비롯된 손노동에 대한 경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 도구 사용자로서의 본성을 일깨워 행위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특정한 종류의 자립, 즉 자기 물건의 주인 되기”를 권한다. “이렇게 되려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소유한 것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즉, 그것들의 기원, 작동 원리, 수리 및 유지 방법 등 물질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나는 모든 방식들을 이해해야만 소유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259)

만일 어떤 물건이 고장 났을 경우, 우리가 직접 수리할 수 없을지라도 물건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수리 기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어디가 문제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등등. 이렇게 귀동냥으로 들은 지식은 다음에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스스로 고쳐볼 용기를 주는 유용한 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개인의 지식이 공동의 지식으로 확장되고 공동의 지식이 개인에게 유용하게 사용되는, 자립과 공존이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바로 저자의 바람인 듯하다.

이제 전자 키트 따위를 만지작대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시간에 학원에서 영어단어나 수학공식을 외우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고 근사한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삶이 행복하고 평안할까? 저자는 자신의 삶을 증거로 꺼내 보이며 그렇지 않다고 항변한다. 어느 한가로운 휴일, 낡은 공구들을 꺼내 저자가 권하듯 창고에 처박혀 있는 고장 난 물건들을 뚝딱대며 자립과 공존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