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해가 무척 좋다. 아침에 잠깐 안개가 끼고 춥더니 지금은 막 시작한 봄처럼 따뜻하고 포근하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보드라운 바람이 불어오면 봄바람이 옷 속 어디어디로 숨어들 때처럼 기분이 어딘가로 풍덩풍덩 빠진다. 몇 번째 이 노래를 듣는다. 그래, 핼시온이 둥지를 치는 날 같아!

 Indian Summer는 북아메리카에서 한가을과 늦가을 사이에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보통 맑게 갠 날씨이지만 연무(煙霧)가 낀 듯한 상태이며, 밤에는 기온이 꽤 내려간다. 이 기간이 되기 전에 눈에 띄게 서리가 내리는 저온 현상이 일어나면, 더욱 확실하게 인디언서머를 느낄 수 있다. 유럽에서는 '늙은 아낙네의 여름(old wives' summer)'이라거나 '물총새의 날(halcyon’s days)'이라고 하며, 영국에서는 성자(聖者)의 이름을 빌려서 '성(聖)마르틴의 여름(St.Martin's summer)' 또는 '성루크의 여름(St.Luke's summer)'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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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탁자에 앉아있는 J씨
- 회의하게요?
- 아니, 내 책상이 지저분해서.

- 사장 좀 어디 보냈으면 좋겠네.  
- 그러게요. 앉아서 히스테리만 부리고.
- 가짜 전화 어때? 
- 응?
- 관공서 같은데서 오라고 했다고 가짜로 전화하는거야. 친척이나 동생들 시켜서. 그런데 막상 가보면 그쪽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 애기들이랑은 어떻게 놀아줘요?
- 난 우리 애기가 책 읽어달라고 할때가 제일 싫어.
- 난 좋던데. 옥찌들은 내가 목소리 변조 잘 한다고 칭찬해줘요.
- 난 영화 봐야는데.
- 응? 영화?
- 영화 보고 있으면 옆에 와서 동화책을 펼쳐놓고 읽어달라고 하는거야.
- 그래서요?
- 영화 자막 읽어줘.
(아...)
- 책 읽어주라고 하는 것 다음으로 별로인게 아이가 다른걸로 놀아주라는건데 그래도 내가 미용실 놀이는 좋아해. 머리 만져주는걸 좋아하거든.
- 뭐야~ 놀아주는게 아니잖아요.
- 머리 손질 끝나면 어깨랑 등이랑 주물주물 해달라고해. 미용실에서 다 그렇게 한다고.
- 그거 아동 노동 착취 이런거 아니에요? 신고해버릴까보다.

 내가 왜 J씨를 좋아하고, 그가 하는 말을 기억하면서 적고 앉아 있는지 생각해봤다. 그는 나한테 없는 면을 갖고 있다. 그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굳이 멋진 말을 골라서 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단순하다. 무엇보다 '내 남자'가 아닌 남자가 부리는 한없는 착함이 난 좋다. 그는 특별하게 챙겨주거나 의도해서 하는 말이 아닌데도 적절하게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고, 직장 동료로써 자꾸 잘하고 싶은 맘이 생기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내게서 가장 부족한 유연함과 유머 때문인지도. 난 착하지 않다. 난 약아 빠지고, 닳고 닳았다. 그런데 그게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어 답답했다.

 어느 화창한 날, 밖에 나와 쉬고 있는 J씨를 건들려고 살랑거리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데 그가 말했다.
- 어어,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어.
 순전히 해를 등지면 생기는 이점이지만 난 이 사람이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도 하는구나라며 혼자서 어리버리하게 굴었다. 그래도 금세 눈치채고선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경미한 자뻑과 순간 순간 나를 긍정할 수 있는 힘, 내 안에 끌어올릴게 없다면 남들도 괜찮지 않겠냐며 유심히 쑤셔보고 다니는 호기심. 그건 모두 내 얘기다. 하지만 그 모든게 다  나로부터 나온건 아니다.

 J씨도 그렇고 내겐 정말 고맙고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조금 다른걸 재미있게 받아들여주는 주변 사람들, 하루종일 집에 같이 있으면서 즐거운 말보다 '조용히 해'라던지, '내가 몇번 말했어'란 소리를 귀에 딱지 앉도록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 곁으로 강아지처럼 파고 들어오는 옥찌들, 보험 얘기 하다가 아주 쿨하게 '너네 나중에 부담 안 되게 보람 상조에 가입할까'라고 말하는 아빠-맘이 좀 짠해졌다.- 와 그게 뭐냐고 묻는 엄마, '그러니까'로 대화를 톡톡 끊어가며 했던 말을 자주 반복하지만 가끔씩 터무니없이 명랑하게 느껴지는 우리 엄마. 자기 몸보다 술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계절 변하듯이 조금씩 변하는 우리 B양.

 아치의 서재에서 조금 따뜻했다는 누구씨와 그 얘길 전해주며 '한 사람이라도 당신 글 보고 싶으면 쓰는거야!'라고 힘줘서 말해준 누구씨. 슬며시 유령처럼 들어왔다가 추천만 남기고 가는 몇몇 분들(한번에 몇개의 추천을 누를 수 있다는걸 알고 있긴 하지만), 흔적을 남기진 않아도 서재에 들어와 '얘는 뭘까'란 생각 한번쯤 했을지 모를 알라디너들.

  이렇게 낯간지러운 소리는 너무 해바라기 같은데 말야. 앞으로 난 J씨랑 더 잘 지낼거고, 공부도 열심히 할거고, 옥찌들이랑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놀지 궁리할거다. 스타일은 조금씩 변한다. 일년 전의 아치와 조금은 다른 아치가 되고 싶다. 좀 더 나아지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Arch's style이라니! 그 안에 역사(거창하니까 시간의 흐름 정도)가 생기고 이야기가 들어있다는건 꽤 고무적인 일이 될 것 같다. 아마도 변화의 중심엔 서재가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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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9-14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아침부터 읽으니까, 어쩐지 저도 좀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고, 어쩐지 저도 좀 변해야 할 것 같고 그래요. 그래봤자 저는 어차피 의지박약이라 한 3초간 마음 먹고 말지만, Arch님은 지금 그 결심 그대로 일년 전의 아치와는 조금 다른 아치가 되세요. 물론 다른 아치가 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좋아할테지만!

Arch 2009-09-14 08:49   좋아요 0 | URL
의지박약의 코드로 저도 막강한데요 뭘~ 달라진거 눈치 못챘어요? 주접량이 좀 감소됐다거나 뭐 이런.
역시 다락방님은 반전쟁이에요. 기분좋은 반전쟁이!

무해한모리군 2009-09-1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읽고 추천도 달아.
그리고 대단해 어쩜 일기를 이렇게 길게 쓸 수가 있는지!!
난 세줄도 쓰기 힘들어 --;;

Arch 2009-09-15 16:27   좋아요 0 | URL
추천 안 늘었는데? ^^ 추천수 체크하고 앉았는 아치~
일기 아닌데, 페이퍼라고!

왔구나, 왔어. 치통을 딛고 우리 휘모리님이 왔구나!!
 

*
 엄마가 있을때면 어린양이 무척 심해지는 민군. 오늘도 괜한걸로 울상이다. 동생이 어떻게 얼르고 얼러 이 녀석을 식탁에까지 앉혔는데 수저는 커녕 밥에 눈길도 안 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갈치도 있는데. 괜히 고집피우는게 보여서 난 엄하게 '그럴거면 밥 먹지 말라'고 했다. 민이 나 무섭다고 자기 고집 꺾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윽박지르고선 밥을 다 먹고 거실에 앉아 옥찌랑 '쥐 색칠'을 하고 있었다. 부엌에서 아빠랑 민 소리가 들렸다.

- 와, 갈치 정말 맛있겠다. 지민이 먹어볼래? 응?

 우리 아빠 맞아? 언젠가는 생선을 신나게 손으로 발라먹는다고 지민일 호되게 혼내던 그 아빠 맞아? 지민인 금세 풀어져서 하부지, 하부지 하면서 애교민으로 돌아왔다. 지민인 다시금 기분이 좋은지 누나 옆으로 가서 한자 쓰는걸 참견하고, 할아버지께 일러바칠게 있으면 제깍제깍 보고하고 있다. 이젠 나한테도 제법 살갑게 '똥을 닦아달라'던지, '이모 방에서 책쌓기 해도 돼?'라고 말을 건넨다. 아빤 지금 절대로 딸을 믿을 수 없어 설겆이를 하고 계신다. 헹굼을 무려 세번이나 한다. 마지막 한번은 정수기 물로!
 아빠는 장난할게 있으면 아주 신랄하게 콕콕 꼬집어 아이들을 당황하게 하고, 나 역시 장난과 진심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운했던적이 많았는데, 배워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이 다르다는걸 아빠를 보면서 자꾸 느낀다.

*
 어제, 나랑 민이 병원에 가는 바람에 평화 대행진에 참가하지 못했다. 서재에다 뱉어놓은 말은 지키는 편인데 병원도 병원이었지만 귀찮은 맘이 더 컸던 것 같다. 두 아이 양 옆에 끼고 다니는거야 하루 이틀 하는게 아니지만 햇살은 쨍쨍한데 바람이 찬, 옷을 챙겨입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다시 나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챙기고, 다시 챙기는게 번잡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들 말고 혼자 갈 수 있었으면 갔겠냐는 것에도 의문이지만. 늙어서야~(뭐래)
 
 어제 옥찌들이랑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갔다. 두 녀석을 뒤에 태우고 낑낑대며 왕복 자전거 구르기를 하자, 집에 다시 돌아올때쯤은 완전히 힘이 다 빠져 도저히 집까지 갈 수 없는거다. 혈압이 상승해서 뒷골 쪽에서 쿵쾅쿵쾅.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내려놓고 같이 걷기 시작하는데 지희가,
- 이모, 좀 쉬었다 가자.
라고 하는거다. 힘든건 난데 뭘 쉬냐고, 가만히 앉아 있는 너희들이 알겠냐고 궁시렁 궁시렁대자 지희가 말했다.
- 이모 힘드니까 쉬었다 가자고.
 에휴, 가끔 난 정말 맹추 같다.

*
 텔레비전 안 보는 아빠는 뭔가 요상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멍하게 가만히 계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때의 아빠를 한번씩 찔러보곤 한다.
- 아빠 한나라당을 어떻게 생각해.
- (초반엔 늘 그렇듯이 시큰둥하게) 뭘 어떻게 생각해.
- 그럼 좋아해?
- 당은 좋고 싫고가 없는데 사람들이.
- 민주당은 괜찮아?
- 전엔 괜찮았는데 지금은 많이 베려먹었지.
- 경제는? 아직 마흔도 안 된 누구누구 말에 의하면 이명박 혼자 경제를 짊어지느라 애쓴다고,...하.
- 그건 아냐. 그 사람은 기업하듯이 정치를 하는 사람이지. 눈가리고 아웅도 아니고.
- 복지 예산 다 삭감해놓고 친서민은.
- 4대강 살리기 그거 죄다 웃기는 소린데(우리 아빤 건설쪽 일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건설 수준을 일본처럼 한다고 하지만 일본에서 기공이 임금 받는거 보면 절대 그런 소리 못할걸. 일하는 사람들만 쥐어짜는거 아냐.
- (아, 아빠)
- 그 사람 어머니가 고생해 가지고 자식들 키우고 해서 서민들 마음 조금이라도 알아줄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전혀야.
 내가 아는 사실과 판단들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혹은 겉멋들인 것 같기도 하고.
 얘기 하시던 중에 약간 흥분하다가 장관이 평생 연금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더니 국민 세금으로 그런다고, 그런다고 굉장히 흥분을 하시는거다. 하루 일했는데 평생 연금을?
 그래서 찾아봤더니 공무원 생활을 쭉 해서 장관까지 되는 경우가 아니면 (근속 년수 20년) 장관도 직장 가입자로 보험 가입이 되었다가 퇴직 후 일시불로 수령이 된다고 한다. 아빠께 다시 말했더니, 국회의원 얘기를 꺼내시면서 다 국민 세금이라고 반박을 하셨다.
 그래서 또 찾아봤다. http://ilsanist.com/2008/11/29/1660/
이 사람들 퇴직 후에 한달에 백만원씩 받는다. 재임 기간 중에도 무시할 수 없는 월급을 받고. 그것도 모자랄만큼 열심히 일하는 반면에 정말 놀고 먹는 양반도 있겠고.

* 정기적인 수입이 생긴지 며칠이나 됐다고 금세 권태롭네 어쩌네란 소리가 슬금슬금 기어나온다. 권태와 고통은 반비례라고 큰 돈은 아니지만 당장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딴 생각이 든다고 할까. 벌려놓고, 하고 있는 일은 많은데 가끔씩 터걱터걱 몸울대에 뭔가 걸려있는 것만 같다.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고 보류시켰던 시간을 이렇게 간편하게 '밥벌이'는 해야한다는 당위로 결론을 지어도 될런지, 역시 제대로 해보고나 생각할 일이지만 벌써 이런다.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재능이 아니라면 끈기라도 있어야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단발적이고 나에게만 반짝이는 일들만 있는데 계속 이렇게 가도 될런지, 아니라면 뭘 또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쩌면, 아직도 '뭔가 좀 괜찮아보이는'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지도. 그런 것쯤 전혀 자신을 모르고 떠벌리는 새파랗게 젊었을 때의 치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이 들어서도 그러면 어쩌란 말인지.

 전에 나는 대체 어떻게 살면 되는지 모르겠어서 자꾸 누구한텐가 물어보고 다녔을 때 어떤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 자기도 잘 몰랐다고, 막연하게 갖고 있는 꿈은 있었는데 그걸 정말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다고. 우연히 지금 다니는  직장에 들어와 일하고, 사람들 만나다보니까 그때보다 좀 더 선명하게 내 꿈이나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그런 과정이겠지? 확실했다면 아마 내가 지낸 시간들은 더 재미없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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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9-13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갑게 '똥을 닦아달라'던지, '이모 방에서 책쌓기 해도 돼?' 라니.. 확 똥으로 닦아버릴까보다. 옥가 녀석에게 전해주세요. "야, 책방에서 너 쌓기 해도 되냐?"

Arch 2009-09-13 23:24   좋아요 0 | URL
뭐야~ 무자비한 미잘 같으니!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 김현진의 B급 연애 탈출기
김현진 지음, 전지영 그림 / 레드박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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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고 싶어서 몸이 간질거릴 정도가 되어서야 서점에 갔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이 나오니까 예약 하라고 문자가 왔을 때부터 몸이 간지럽기 시작하더니 하이드님의 포토 리뷰를 보자 분명히 몇달 후에 보면 된다고, 아직 행복의 건축도 읽지 않았다고 나를 타일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딱 이번만이야!
신간 코너를 스쳐 가는 길에 김연수의 신작도 보이고, 김현진의 책도 보였지만 눈을 질끔 감고 주문을 외웠다. '너, 너 집에 있는 책 다 읽고 책 산다며, 도서관에서 빌려보라고, 책을 좋아하는거니, 사는걸 좋아하는거니.' 주문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보통 책은 찾지 못하고(아니 어떻게 없을 수가!) 아쉬운 마음에 두리번거리다 김연수 책을 훑어보면서 그래도 난 '달로 간 코미디언'은 읽었다며, 문학 잡지에서 나온 단편 하나도 있다며 자위(그 자위 아니다. 재미없긴)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등 뒤로 나를 쳐다보는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김현진이었다.
끌리 듯이 그녀에게로 갔다.
- 뭘 망설여, 어서 책을 집어들고 계산 하라고! 보통 책을 못샀으면 뭐라도 하나 건져야할거 아냐. 빈손으로 서점을 나갈 수 있겠어? 한밤중에 뛰쳐나오지 말고, 얼른 책을 집어!
- 아냐, 현진씨 글을 내가 좋아하고 알라딘에서 당신 얘기 나올때마다 귀신같이 찾아다니면서 읽지만 아냐, 당분간 책을 안 사기로 했단말야.
- 당분간은 개뿔.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랬어. 그런데 너 내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그녀의 꼬임에 정말 딱 한페이지만 보고 미친 듯이 서점 문을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비도 오는데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동네 어귀에서 어슬렁거리면 그게 나라고 할 정도로 제대로인 포즈로! 하지만 책을 펴는 순간, 짐작한대로 다시 제자리에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옆에서 '잇백을 가지는 방법'류의 시시껄렁한 잡화점 분위기 나는 코너에서 이 책을 구해야해! 서점에서 책을 사면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인세의 10%로는 기부금으로 나간대잖아. 사랑 중독증에 대해서 말하잖아. 책을 안 사고 빌려서 보기로 한 네 맘 잘 알아. 그렇지만 사야할 책은 따로 있는거다, 너! 너 책 안 사면 그 돈으로 뭐할래. 할것도 없잖아. 지금 안 산걸 몇시간 동안 후회했다가 아침 댓바람부터 서점에 나올래, 아니면 지금 살래.
아, 빌어먹을 합리화.
마치 처음부터 이 책을 고르려고 했던 것처럼 무심하게 책을 들고선 계산대로 갔다. 그래도 알량한 마지막 보루로 '저기, 띠지가 좀 뜯어졌는데 다른 책은 없나요.'라고 내뱉어줬다. 재고가 없을거란거 뻔히 알고, 띠지가 뒤집혀있든 갈기갈기 찢겨져 있든 살거면서. 아마 책이 불량이었어도 문제 없었을거다.

그렇게 현진씨 책을 만났다. 휴,

일러스트는 전지영씨가 맡았다. 예쁘고 재치 있으면 좋을 것을, 약간 투박하다.

발로 찍은 사진을 굳이 올리고, 리뷰까지 쓴건 Jude님이 일러스트 보고 싶단 얘기를 들어서이다. 일러스트는 흡족하지 않아요. 진짜는 김현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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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1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므낫 포토 리뷰를 올려쓰시다니! 발로 찍은 사진이라니요, 정말 발로 찍은 사진은 제 서재에 오시면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전 처음엔 전지영씨의 일러스트에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점점 좋아지지 뭡니까. 그래서 이 책은, 일러스트가 더 궁금했어요. 고마워요.

Arch 2009-09-13 09:11   좋아요 0 | URL
전 쥬드님 사진은 분명 손으로 찍었다는데 한표입니다. 이건 사진 크기도 줄이기 싫어서 막 내놓은 아이들이에요. 전 투박하다고 그랬는데 쥬드님은 전지영씨 글을 좋아하는구나~ 고맙긴요^^

머큐리 2009-09-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읽다가 "책을 좋아하는거니 사는걸 좋아하는 거니" 이 말이 가슴에 콱 박혀서...ㅠㅠ
20대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나는 왜 김현진이 좋은걸까요??? ^^;

Arch 2009-09-15 16:28   좋아요 0 | URL
^^ 저도 그런걸요.
아마도 치열하게 사는 삶, 그런 자세가 좋은게 아닐까요! 꼭 나이와 성별에 맞게 좋아하란 법은 없으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전 강준만 선생님이 좋은걸요~

순오기 2009-09-13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이주의 포토리뷰로 뽑히겠는데요~ 제가 점을 좀 칩니다.ㅋㅋ
김현진 이 아가씨 참 매력있어요~ 나도 살까? 우리딸 보라고~~~^^

Arch 2009-09-13 23:25   좋아요 0 | URL
그럼 황송하죠. 저희 엄마도 꿈으로 점치고 그래요. 주로 아빠가 광기(?)가 날 즈음에 꿈을 잘 꾸시죠.-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몰라, 해놓곤^^-
흠... 순오기님 그게 말이죠~ 리뷰를 써야하는데 현진씨를 위해 안 쓰려고 노력 중이에요.

순오기 2009-09-14 15:50   좋아요 0 | URL
포토리뷰는 이게 아니고 바리데기가 됐는뎁쇼~ ㅋㅋㅋ

Arch 2009-09-14 16:0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덕분에 알았어요! 오예~ ^^

무해한모리군 2009-09-1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정말 일러스트 별로네요.

Arch 2009-09-17 09:17   좋아요 0 | URL
그렇죠?

다락방 2009-09-1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거 다 읽었어요. 재미있게 읽었죠. 단숨에.
그렇지만 그다지 특별할건 없더군요. 신선한 표현들이 눈에 띄었지만. 이를테면 '새끼마초'같은 표현이랄까. 훗.


Arch 2009-09-17 09:18   좋아요 0 | URL
ㅋㅋ 리뷰를 쓸까말까 고민이에요. 책장이 잘 넘어가긴 하더만.
 

  옥찌가 요새 부쩍 귀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창의력은 바닥 수준이고, 옥찌는 이모 입만 바라보고. 하는 수 없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

 놀이터에서 옥찌들이 놀고 있었어. 그런데 눈이 아주 큰 빨강색 귀신이 스윽 다가오는거야. 빨강 귀신은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다 온몸이 빨강색이라 아이들은 귀신이 화가 난줄 알았지. 아이들은 빨간 귀신을 보고 엉엉 울기 시작했어. 몇몇 아이들은 모래를 던져서 빨간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어. 빨간 귀신은 아이들이 갑자기 우니까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했어. 그래서 발을 동동 굴리기 시작했어. 아이들은 이걸 보고 또 자기들을 겁주는거라고 생각해서 더 큰소리로 울었어. 빨간 귀신은 아이들을 달래려고 한 아이한테 다가갔어. 그게 바로 옥찌였어. 옥찌는 그네를 타다 말고 그제서야 빨간 귀신을 본거야. 옥찌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귀신을 알았다는 듯이 반갑게 인사했어.

- 안녕.
- 넌 온몸이 빨갛구나.
- 난 빨간 귀신이거든.
- 넌 눈이 굉장히 크구나. 발도 정말 크고.  
- 아이들이 나 때문에 울어.
- 넌 그냥 같이 놀고 싶은 것 뿐인데. 그렇지?

 쓰다보니 꼬였다. 본래 이야기는 위악 떠는 귀신 이야기였다. 같이 놀고 싶은데 말하기 쑥쓰럽고, 어떻게 말을 건네야할지 몰라서 눈을 부릅뜨고, 발을 쾅쾅 굴리면서 본의 아니게 아이들을 겁주는. 무슨 귀신 이야기가 안 무섭고 교훈을 집어넣으려는 수가 훤히 보인다고 말한다면 할말은 없다. 내가 이래서 교훈을 주려고 강요하는 동화책을 싫어한다. 

 이야기를 지어내다보니 나 역시 쑥쓰럽고, 겸연쩍어서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못한건 아닌가란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옥찌에겐 살짝 속삭여줬다. 친구가 되고 싶으면 먼저 손을 내밀어. 

 오늘 알라딘에서 택배가 왔다.
 
 

 내가 모르는 책이다. 다람쥐는 도서관에서 본 일이 있었지만, 다른건 처음 봤다. 처음 봤는데 한번 보자마자 맘에 쏙 들고 말았다. 바로, JS人님이 옥찌들 보라고 선택한 책이니까. 나라면 이렇게까지 멋있는 리스트를 고르지 못했을테니까. 특히 '아기 토끼의 시끄러운 하루'는 벌써부터 어떻게 읽어줘야할지, 무슨 소리를 낼까라고 물어볼 때 무척 궁금하게 하려는 몸짓은 어떻게 해야할지 머릿 속에서 휙휙 소리가 날 정도로 잘 떠올랐다. 그림이 그려질 정도로 무척 예쁜 동화책들이다.

  서재에서 책 선물 하고, 챙겨주고, 안부를 물어주는걸 왜 다른 누군가 먼저 해야한다고 생각했을까. 책 선물 뿐만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난 참 많은걸 받아왔다. 다른 사람이 주고 받는 것만 부러워했는데, 난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는걸 항상 한발짝 뒤에 깨닫는다.

 정말 고마워요. 잘 읽을게요. 내일 아침, 책을 보고 행복해할 옥찌들이 생각나요. 당신이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아시겠죠?

순오기님 담아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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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9-11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법사께서 멋진 선물을 하셨네요~ 옥찌들에게 축하를!
우리 컴이 시커멓게 나와서 잘 안보이니까 여기에 상품담기로 책 담아주세요.^^

Arch 2009-09-11 11:31   좋아요 0 | URL
흐흐^^

순오기 2009-09-13 22:18   좋아요 0 | URL
이젠 잘 보여요. 나도 저 책 찾아서 읽어보려고요~ 하나도 못 읽은 책이잖아요.ㅜㅜ

Arch 2009-09-13 23:22   좋아요 0 | URL
^^

2009-09-11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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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1 1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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