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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있을때면 어린양이 무척 심해지는 민군. 오늘도 괜한걸로 울상이다. 동생이 어떻게 얼르고 얼러 이 녀석을 식탁에까지 앉혔는데 수저는 커녕 밥에 눈길도 안 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갈치도 있는데. 괜히 고집피우는게 보여서 난 엄하게 '그럴거면 밥 먹지 말라'고 했다. 민이 나 무섭다고 자기 고집 꺾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윽박지르고선 밥을 다 먹고 거실에 앉아 옥찌랑 '쥐 색칠'을 하고 있었다. 부엌에서 아빠랑 민 소리가 들렸다.

- 와, 갈치 정말 맛있겠다. 지민이 먹어볼래? 응?

 우리 아빠 맞아? 언젠가는 생선을 신나게 손으로 발라먹는다고 지민일 호되게 혼내던 그 아빠 맞아? 지민인 금세 풀어져서 하부지, 하부지 하면서 애교민으로 돌아왔다. 지민인 다시금 기분이 좋은지 누나 옆으로 가서 한자 쓰는걸 참견하고, 할아버지께 일러바칠게 있으면 제깍제깍 보고하고 있다. 이젠 나한테도 제법 살갑게 '똥을 닦아달라'던지, '이모 방에서 책쌓기 해도 돼?'라고 말을 건넨다. 아빤 지금 절대로 딸을 믿을 수 없어 설겆이를 하고 계신다. 헹굼을 무려 세번이나 한다. 마지막 한번은 정수기 물로!
 아빠는 장난할게 있으면 아주 신랄하게 콕콕 꼬집어 아이들을 당황하게 하고, 나 역시 장난과 진심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운했던적이 많았는데, 배워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이 다르다는걸 아빠를 보면서 자꾸 느낀다.

*
 어제, 나랑 민이 병원에 가는 바람에 평화 대행진에 참가하지 못했다. 서재에다 뱉어놓은 말은 지키는 편인데 병원도 병원이었지만 귀찮은 맘이 더 컸던 것 같다. 두 아이 양 옆에 끼고 다니는거야 하루 이틀 하는게 아니지만 햇살은 쨍쨍한데 바람이 찬, 옷을 챙겨입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다시 나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챙기고, 다시 챙기는게 번잡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들 말고 혼자 갈 수 있었으면 갔겠냐는 것에도 의문이지만. 늙어서야~(뭐래)
 
 어제 옥찌들이랑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갔다. 두 녀석을 뒤에 태우고 낑낑대며 왕복 자전거 구르기를 하자, 집에 다시 돌아올때쯤은 완전히 힘이 다 빠져 도저히 집까지 갈 수 없는거다. 혈압이 상승해서 뒷골 쪽에서 쿵쾅쿵쾅.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내려놓고 같이 걷기 시작하는데 지희가,
- 이모, 좀 쉬었다 가자.
라고 하는거다. 힘든건 난데 뭘 쉬냐고, 가만히 앉아 있는 너희들이 알겠냐고 궁시렁 궁시렁대자 지희가 말했다.
- 이모 힘드니까 쉬었다 가자고.
 에휴, 가끔 난 정말 맹추 같다.

*
 텔레비전 안 보는 아빠는 뭔가 요상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멍하게 가만히 계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때의 아빠를 한번씩 찔러보곤 한다.
- 아빠 한나라당을 어떻게 생각해.
- (초반엔 늘 그렇듯이 시큰둥하게) 뭘 어떻게 생각해.
- 그럼 좋아해?
- 당은 좋고 싫고가 없는데 사람들이.
- 민주당은 괜찮아?
- 전엔 괜찮았는데 지금은 많이 베려먹었지.
- 경제는? 아직 마흔도 안 된 누구누구 말에 의하면 이명박 혼자 경제를 짊어지느라 애쓴다고,...하.
- 그건 아냐. 그 사람은 기업하듯이 정치를 하는 사람이지. 눈가리고 아웅도 아니고.
- 복지 예산 다 삭감해놓고 친서민은.
- 4대강 살리기 그거 죄다 웃기는 소린데(우리 아빤 건설쪽 일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건설 수준을 일본처럼 한다고 하지만 일본에서 기공이 임금 받는거 보면 절대 그런 소리 못할걸. 일하는 사람들만 쥐어짜는거 아냐.
- (아, 아빠)
- 그 사람 어머니가 고생해 가지고 자식들 키우고 해서 서민들 마음 조금이라도 알아줄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전혀야.
 내가 아는 사실과 판단들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혹은 겉멋들인 것 같기도 하고.
 얘기 하시던 중에 약간 흥분하다가 장관이 평생 연금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더니 국민 세금으로 그런다고, 그런다고 굉장히 흥분을 하시는거다. 하루 일했는데 평생 연금을?
 그래서 찾아봤더니 공무원 생활을 쭉 해서 장관까지 되는 경우가 아니면 (근속 년수 20년) 장관도 직장 가입자로 보험 가입이 되었다가 퇴직 후 일시불로 수령이 된다고 한다. 아빠께 다시 말했더니, 국회의원 얘기를 꺼내시면서 다 국민 세금이라고 반박을 하셨다.
 그래서 또 찾아봤다. http://ilsanist.com/2008/11/29/1660/
이 사람들 퇴직 후에 한달에 백만원씩 받는다. 재임 기간 중에도 무시할 수 없는 월급을 받고. 그것도 모자랄만큼 열심히 일하는 반면에 정말 놀고 먹는 양반도 있겠고.

* 정기적인 수입이 생긴지 며칠이나 됐다고 금세 권태롭네 어쩌네란 소리가 슬금슬금 기어나온다. 권태와 고통은 반비례라고 큰 돈은 아니지만 당장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딴 생각이 든다고 할까. 벌려놓고, 하고 있는 일은 많은데 가끔씩 터걱터걱 몸울대에 뭔가 걸려있는 것만 같다.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고 보류시켰던 시간을 이렇게 간편하게 '밥벌이'는 해야한다는 당위로 결론을 지어도 될런지, 역시 제대로 해보고나 생각할 일이지만 벌써 이런다.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재능이 아니라면 끈기라도 있어야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단발적이고 나에게만 반짝이는 일들만 있는데 계속 이렇게 가도 될런지, 아니라면 뭘 또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쩌면, 아직도 '뭔가 좀 괜찮아보이는'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지도. 그런 것쯤 전혀 자신을 모르고 떠벌리는 새파랗게 젊었을 때의 치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이 들어서도 그러면 어쩌란 말인지.

 전에 나는 대체 어떻게 살면 되는지 모르겠어서 자꾸 누구한텐가 물어보고 다녔을 때 어떤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 자기도 잘 몰랐다고, 막연하게 갖고 있는 꿈은 있었는데 그걸 정말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다고. 우연히 지금 다니는  직장에 들어와 일하고, 사람들 만나다보니까 그때보다 좀 더 선명하게 내 꿈이나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그런 과정이겠지? 확실했다면 아마 내가 지낸 시간들은 더 재미없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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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9-13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갑게 '똥을 닦아달라'던지, '이모 방에서 책쌓기 해도 돼?' 라니.. 확 똥으로 닦아버릴까보다. 옥가 녀석에게 전해주세요. "야, 책방에서 너 쌓기 해도 되냐?"

Arch 2009-09-13 23:24   좋아요 0 | URL
뭐야~ 무자비한 미잘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