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탁자에 앉아있는 J씨
- 회의하게요?
- 아니, 내 책상이 지저분해서.

- 사장 좀 어디 보냈으면 좋겠네.  
- 그러게요. 앉아서 히스테리만 부리고.
- 가짜 전화 어때? 
- 응?
- 관공서 같은데서 오라고 했다고 가짜로 전화하는거야. 친척이나 동생들 시켜서. 그런데 막상 가보면 그쪽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 애기들이랑은 어떻게 놀아줘요?
- 난 우리 애기가 책 읽어달라고 할때가 제일 싫어.
- 난 좋던데. 옥찌들은 내가 목소리 변조 잘 한다고 칭찬해줘요.
- 난 영화 봐야는데.
- 응? 영화?
- 영화 보고 있으면 옆에 와서 동화책을 펼쳐놓고 읽어달라고 하는거야.
- 그래서요?
- 영화 자막 읽어줘.
(아...)
- 책 읽어주라고 하는 것 다음으로 별로인게 아이가 다른걸로 놀아주라는건데 그래도 내가 미용실 놀이는 좋아해. 머리 만져주는걸 좋아하거든.
- 뭐야~ 놀아주는게 아니잖아요.
- 머리 손질 끝나면 어깨랑 등이랑 주물주물 해달라고해. 미용실에서 다 그렇게 한다고.
- 그거 아동 노동 착취 이런거 아니에요? 신고해버릴까보다.

 내가 왜 J씨를 좋아하고, 그가 하는 말을 기억하면서 적고 앉아 있는지 생각해봤다. 그는 나한테 없는 면을 갖고 있다. 그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굳이 멋진 말을 골라서 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단순하다. 무엇보다 '내 남자'가 아닌 남자가 부리는 한없는 착함이 난 좋다. 그는 특별하게 챙겨주거나 의도해서 하는 말이 아닌데도 적절하게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고, 직장 동료로써 자꾸 잘하고 싶은 맘이 생기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내게서 가장 부족한 유연함과 유머 때문인지도. 난 착하지 않다. 난 약아 빠지고, 닳고 닳았다. 그런데 그게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어 답답했다.

 어느 화창한 날, 밖에 나와 쉬고 있는 J씨를 건들려고 살랑거리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데 그가 말했다.
- 어어,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어.
 순전히 해를 등지면 생기는 이점이지만 난 이 사람이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도 하는구나라며 혼자서 어리버리하게 굴었다. 그래도 금세 눈치채고선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경미한 자뻑과 순간 순간 나를 긍정할 수 있는 힘, 내 안에 끌어올릴게 없다면 남들도 괜찮지 않겠냐며 유심히 쑤셔보고 다니는 호기심. 그건 모두 내 얘기다. 하지만 그 모든게 다  나로부터 나온건 아니다.

 J씨도 그렇고 내겐 정말 고맙고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조금 다른걸 재미있게 받아들여주는 주변 사람들, 하루종일 집에 같이 있으면서 즐거운 말보다 '조용히 해'라던지, '내가 몇번 말했어'란 소리를 귀에 딱지 앉도록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 곁으로 강아지처럼 파고 들어오는 옥찌들, 보험 얘기 하다가 아주 쿨하게 '너네 나중에 부담 안 되게 보람 상조에 가입할까'라고 말하는 아빠-맘이 좀 짠해졌다.- 와 그게 뭐냐고 묻는 엄마, '그러니까'로 대화를 톡톡 끊어가며 했던 말을 자주 반복하지만 가끔씩 터무니없이 명랑하게 느껴지는 우리 엄마. 자기 몸보다 술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계절 변하듯이 조금씩 변하는 우리 B양.

 아치의 서재에서 조금 따뜻했다는 누구씨와 그 얘길 전해주며 '한 사람이라도 당신 글 보고 싶으면 쓰는거야!'라고 힘줘서 말해준 누구씨. 슬며시 유령처럼 들어왔다가 추천만 남기고 가는 몇몇 분들(한번에 몇개의 추천을 누를 수 있다는걸 알고 있긴 하지만), 흔적을 남기진 않아도 서재에 들어와 '얘는 뭘까'란 생각 한번쯤 했을지 모를 알라디너들.

  이렇게 낯간지러운 소리는 너무 해바라기 같은데 말야. 앞으로 난 J씨랑 더 잘 지낼거고, 공부도 열심히 할거고, 옥찌들이랑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놀지 궁리할거다. 스타일은 조금씩 변한다. 일년 전의 아치와 조금은 다른 아치가 되고 싶다. 좀 더 나아지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Arch's style이라니! 그 안에 역사(거창하니까 시간의 흐름 정도)가 생기고 이야기가 들어있다는건 꽤 고무적인 일이 될 것 같다. 아마도 변화의 중심엔 서재가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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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9-14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아침부터 읽으니까, 어쩐지 저도 좀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고, 어쩐지 저도 좀 변해야 할 것 같고 그래요. 그래봤자 저는 어차피 의지박약이라 한 3초간 마음 먹고 말지만, Arch님은 지금 그 결심 그대로 일년 전의 아치와는 조금 다른 아치가 되세요. 물론 다른 아치가 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좋아할테지만!

Arch 2009-09-14 08:49   좋아요 0 | URL
의지박약의 코드로 저도 막강한데요 뭘~ 달라진거 눈치 못챘어요? 주접량이 좀 감소됐다거나 뭐 이런.
역시 다락방님은 반전쟁이에요. 기분좋은 반전쟁이!

무해한모리군 2009-09-1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읽고 추천도 달아.
그리고 대단해 어쩜 일기를 이렇게 길게 쓸 수가 있는지!!
난 세줄도 쓰기 힘들어 --;;

Arch 2009-09-15 16:27   좋아요 0 | URL
추천 안 늘었는데? ^^ 추천수 체크하고 앉았는 아치~
일기 아닌데, 페이퍼라고!

왔구나, 왔어. 치통을 딛고 우리 휘모리님이 왔구나!!